이춘재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연쇄살인범, 강간범.
1994년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 후에 살해하여 무기징역을 선고받은[3] 범죄자이며, 1980~90년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다. 그가 검거된 이후 이 사건은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이름이 바뀐다.
전세계적으로 '''한국판 조디악 킬러 혹은 한국판 가오청융, 저우커화'''로 불렸던 인물로, DNA 분석기술 발달에 힘입어 2019년에 용의자로 특정되었는데, 그동안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은 총 10차에 이르렀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졌으나 10차의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못했고, 8차 사건은 모방범으로 부정확하게 수사가 종결 나는 등 당시 대한민국 과학 수사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미제 사건으로 분류되었었다. 그러나 2019년 10월 1일 모방범으로 확정되었던 8차 사건을 포함해 화성 연쇄살인 사건 10차 모두 이춘재 본인이 저질렀다고 자백하였으며, 그 외 4건의 살인 사건을 자백. '''총 15건[4] 의 연쇄 살인과 30여 건의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경찰에 자백했다. 현재 이춘재가 자백한 범죄 사건들에 대해서는 진위를 확인 중이다.
현재 화성 연쇄살인 사건 10건 중 이춘재의 DNA가 발견된 사건은 5건(3차, 4차, 5차, 7차, 9차)이다. 그 외 검사했으나 발견되지 않은 사건은 2건(2차, 10차), 증거물 부족 등의 이유로 검사가 불가능한 사건은 2건(1차, 6차), 유일하게 유력한 용의자가 잡힌 사건으로 알려졌으나, 후에 본인이 자백하여 재심 중인 사건이 1건(8차)이다.
2020년 12월 28일 이춘재가 저지른 사건중 처벌받지 않은 살인 14건과 성범죄·강도 등 9건에 대한 혐의가 모두 인정되지만, 공소 시효가 지나 '공소권 없음'으로 처분했다.
2. 생애
2.1. 내력과 초기
이춘재는 1963년 1월 31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5] 에서 태어나 30년간을 근방에서 살았다.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착하고 조용한 아이'''로 기억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춘재를 착하고 대답도 잘하고 성품도 좋은 아이로 기억하고 있었다. 동창들 역시 이춘재를 매우 착한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으며, 싹싹하고 인사성도 밝은 아이였다고 기억했다. 부모와 남동생 역시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으며, 그런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가족들은 이춘재가 저지른 처제 살인사건도 '우발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국민학교 시절 동생이 물에 빠져 익사한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으며,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본인 주장에 따르면 어릴적 동네 누나에게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이런 성경험으로 인해 왜곡된 성욕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수원시 소재 S고등학교에 입학. 1983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6] 했다.1983년 중순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제1기갑여단에서 전차 조종수로 복무, 1986년 1월 23일 육군 병장 만기 전역했다.
2.2. 군 입대 시기
[image]
[image]
이춘재는 본디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군대에서 전차를 몰며 성취감을 얻으면서 성격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가 모는 전차가 선도하면서 뒤로 다른 전차와 보병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주체성, 삶의 주도권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됐다. 심지어 전차 정비 등 검열을 위해 '''휴가를 반납'''할 정도였다.# 전역 후에 단조로운 생활에 무료함을 느끼고 적응하지 못하면서 살인을 통해 짜릿함을 느끼려고 한 것이다.
2.3. 전역 이후
전역 후 화성군의 전기부품회사에 근무했다. 이후 행적 추적에 따르면 전역 직후 1986년 초부터 화성에서 무차별 강간 범죄를 시작했고 1986년 하반기에 처음으로 살인을 했다. 이후 화성 연쇄살인 사건 및 추가 범행들을 저지른다. 범행에 대해서는 아래 단락의 해당 문서들 참조.
1990년 초여름경에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본사를 두고 있는 모 건설주식회사(건설하도급업체)에 들어가 포크레인 기사를 따라다니다가 운전을 배워 면허 없이 포크레인 기사로 공사현장을 따라다녔다.[7]
1991년 전후로는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8] 의 한 골재회사에서 포크레인 기사로 일했으며, 그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던 아내를 만나 1992년 4월에 결혼했다. 결혼 후, 다니던 회사가 망하자 아내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책임졌다고 한다. 처제 살인 사건으로 조사 받을 때 경찰 조서에는 "1993년 3월말 경 청원군 부용면에 있는 부강농공단지현장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현재까지 놀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2.4. 처제 살인
이후 그는 처제를 성폭행한 후 살해했지만, 경찰이 각고의 노력 끝에 이춘재의 집 세탁기 받침대에서 혈흔을 발견, 당시 최신 기술이던 DNA 분석/대조 기술을 근거로 그것이 처제의 피임을 밝혀냈다. 이후 검거 후 혐의 부인, 사건의 잔인성을 근거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현재 수원구치소에 수감중이다. 이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청주 처제 살인사건 항목 참고.
2.5. 처가와의 관계
처가와도 평소 원만한 관계였으며, 처가가 있는 청주시로 버스를 타고 가 벼농사를 하는 장인어른의 일손을 거들고, 처제들이 이 씨의 집에 반찬을 들고 찾아가는 등, 친족 간의 교류도 원활했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기록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청주 처제 살인사건 당시 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는 2살배기 아들을 멍들 정도로 폭행하고, 아내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지고 아내가 하혈할 정도로 마구 폭행했다고 한다. 당시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이 씨에게 심한 성도착증도 있었으며, 아내를 강간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내가 훗날 울면서 이 사실을 형사에게 알렸을 정도였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내는 1993년 12월 집을 나갔으며, 이 씨는 아내에게 협박 전화를 걸고 동서에게 "아내와 이혼은 하겠지만 다른 남자와 재혼할수 없게 문신을 새기겠다.[9] "는 말도 했다고 한다. 처제 살인사건 당시 재판 판결을 보면, '한번 화나면 부모가 말리지 못할 정도로 포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점들은 가족들이나 지인들의 진술과는 정반대 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가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말썽 한번 안 부리고 모범수로 지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위계질서에 철저히 순응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자신보다 명백히 위이거나 동등한 지위인 가족들과 지인, 경찰, 교도관들 앞에서는 얌전히 지냈지만, 자신보다 명백히 아래로 규정된 사람에게는 폭력적이고 무자비하게 대했다는 것. 주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단순히 착한 사람이 화내면 무섭다 정도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경찰 관계자들이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지목한 점은, 이춘재는 범행 후에도 태연했으며, 잡힐 때마다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는 점이다. 처제의 시체를 유기한 다음 날 장인어른을 찾아가 "도와드릴 일 없냐"는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실종신고를 냈으며, 조사 과정에서도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다 혈액이 발견되고 범행을 자백했으나, 이후에 다시 "경찰관들이 고문해서 어쩔 수 없이 한 허위자백"이라고 말을 바꿔 재판을 3심까지 끌고 갔다. 강도 혐의로 체포됐을 당시에도 이춘재는 흉기와 목장갑을 들고 집안에 침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남자가 나를 갑자기 폭행했고 이 때문에 집에 우연히 들어갔지 강도질하려고 들어가지 않았다." 하고 억지스런 주장을 했다.[10]
2.6. 화성 연쇄살인 사건
2019년 9월 18일 경찰은 청주시에서 1994년에 처제를 강간 후 살해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라고 발표했다. 조사 결과 5차(1987년), 7차(1988년), 9차(1990년) 사건 증거물에서 나온 DNA가 이춘재의 것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구체적인 신상 공개를 하지 않았지만, 1994년 청주에서 위와 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1명뿐이라 언론을 통해 그 실명과 정보가 공개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1일 자백을 하면서, 무려 30년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밝혀졌다. 그가 자백을 했던 시점,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이춘재를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건이 밝혀지기 전에 이미 다른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에 처해졌으므로 사실상 가석방이 거부되어 교도소에서 일생을 마칠 것으로 보인다.[11]
2019년 10월 14일 기준 공소시효는 끝났지만, 경찰이 입건을 검토하여 향후 정식적으로 신상 공개를 검토 중에 있다.
자세한 것은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s-5 문서 참조.
2.7. 화성 연쇄살인 이외의 사건들
2.8. 근황
2020년 7월 2일, 경찰의 재수사가 종료되었고#, 이춘재는 7월 5일 수원구치소에서 부산교도소로 옮겨와 독거실에서 지내고 있다.[12]
부산교도소 측에 따르면 이춘재는 재수사 후 특별히 변화되거나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고 있으며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운동·취침 등 통상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의 일상은 주로 TV시청으로 하루를 보내는데 뉴스는 거의 보지않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주로 시청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다만 교도소측은 그의 심적 변화를 우려하여 재수사 결과가 발표되는 땐 운동 시간을 편성하는 식으로 TV시청을 제한하고 있다.관련기사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의 피해자의 오빠가 이춘재와의 접견을 신청했고 이춘재가 이를 수락해서 최초로 유족과의 접견이 이루어졌다. 이춘재는 의외로 유순하고 협조적인 태도였다고 한다. 피해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이유에 대해서는 자신도 잘 모르겠으며 그 날 자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어이없고 화가 나는 대답이지만, 이춘재로서는 솔직한 대답을 한 것으로 보인다.
2020년 11월 2일 8차 사건 재심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살인의 추억을 실제로 교도소에서 봤음을 처음으로 밝혔다. 보고 아무 느낌이 없었다고.# 또 자신을 대신해 누명을 쓰고 20년간 옥살이 후 출소한 윤모씨에게도 사과했다.
3. 사건 목록
4. 이춘재 행적과 비교해본 사건 시간표
[1]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된 건 2001년이며, 태안읍이 동으로 승격 및 분동된 건 2006년이다.[2] #[3] 원래 1,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이 과중하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파기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당연히 당시 대법원에서는 그가 연쇄살인범인지 알 수 없었고, 처제 1명을 살해한 살인범으로서 재판한 것이다. 당시 유가족들의 입장에서 이춘재의 형량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건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었겠지만, 그 감형 덕분에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확실히 밝혀낼 수 있었다. 1990년대는 실제로 사형 집행을 하던 시절이므로, 이때 이춘재가 죽고 없어졌다면 다른 여러 사건의 진범은 영원히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역설적이게도 화성 사건의 직접적 피해자들부터 유족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울분을 풀 수 있었던 것도 이춘재가 살아남은 덕이다.[4] 처제 살해까지 포함하면 15건이다.[5] 현 화성시 진안동. 대체로 '병점'이라고 부르는 지역이다.[6] 유급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본래 빠른 1963년생이면 1981년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한다.[7] 그것이 알고싶다 1185회에 등장한 이춘재의 경찰조서 내용[8]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9] 배우자나 연인에게 심한 폭력을 가하는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소유•지배욕을 채우려는 방식 중 하나이다. 이영학은 아내의 몸 전체에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문신으로 새겨넣으라고 하였다. 일본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마츠나가 후토시도 비슷했다.[10] 하지만 재판부는 당시 이 씨가 초범이었고 실제 피해자의 피해는 미미했다는 점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여, 이춘재를 집행유예로 석방시켰다. 성폭행 또는 성폭행 결합 살인 범행을 저질러왔던 이춘재에게 단순 강도는 이질적 범행이기에 이것도 원래는 성폭행 목적의 주거침입이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1] 사실 이춘재 본인의 입장에서 봐도 교도소 독방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낫다. 구타와 가혹한 처우가 횡행하던 예전 교도소라면 모를까, 2020년의 교도소는 아무리 무기수라도 사고 치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 어쨌건 모범수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밖에 나가면 범행에 분노한 시민에게 공격받을지도 모르고, 경찰도 이춘재 같은 흉악범을 굳이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도소 내에서는 어찌됐건 이춘재가 잘못되면 교도관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재소자가 살해될 경우 책임은 파면이 될 수도 있으므로 싫어도 지금처럼 보호해줄 수밖에 없다.[12] 이춘재 본인이 수사 마무리 시점에 원래 있었던 부산교도소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13] 다만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폭행 사실은 이춘재의 자백에만 근거한다.[14] 범죄 프로파일러인 펫 브라운 박사는 연쇄 강간 사건과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은 동일범이라며 "저에게 범인이 어디 사는지 지목하라고 한다면 처음 강간당한 여자가 사는 곳 근처라고 말하겠어요"라고 말함. 실제 이춘재는 사건 발생 장소인 태안읍 진안리에 살고 있었다.[15] 피해자는 정 아무개 씨. 당시 38세쯤. 발생 날짜가 11월 19일이라고도 한다. 이 이후 3차 사건부터 결박 + 재갈이 기본적으로 나온다는 걸 생각하면 당시 미수자가 도망간 후 그 다음부터 범행 대상자를 제압하기 위해서 결박 + 재갈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16] 만약 이춘재가 범인이라면 6차에서 시신에 결박이 안 된 것도 여기서 설명이 된다. 즉, 6차에서도 범행의 수법이 같으면 경찰들이 자신이 범인인 걸 확실시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수법으로 저질렀을 것.[17] 3, 4, 5차와 흡사하게 입엔 재갈이 물리고 손이 결박된 채로 발견되었기에 화성 사건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졌다. 물론 사건 범인은 다른 사람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형사도 있다. 관련 일요신문 기사 사실, 화서역은 연쇄살인이 벌어진 화성시 태안읍과 상당히 떨어져 있기에 이 형사의 증언도 타당성이 있지만, 이춘재가 수원시 소재 고교를 졸업했고, 수원에 빈번하게 갔음을 감안하면 이춘재의 범행일 가능성도 더러 있다.[18] 시신 발견 날짜는 88년 1월 4일. 부검 결과 피살자가 가출을 한 87년 12월 24일 밤부터 25일 새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19] 몽타주 참고[20] 모발에서 티타늄이 나왔다는 것이 증거였다. 하지만 처음 범행을 자백한 윤 씨는 나중에 교도소에서 "나는 범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후 이춘재는 2019년 10월 4일, 모방 범죄로 결론지어진 8차 사건 이춘재 본인이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조사 예정이라고 한다.[21]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강도예비 폭력 사건에 대한 분노 + 당시 등화관제로 목격자 부재 + 대상자가 20대 남성인 자신이 제압하기 쉬운 여중생이라는 3가지가 시너지를 일으켜서 제일 참혹한 비극이 되었다"고 추측했다.[22]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23] 1992년 4월 23일 오전 8시 20분쯤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옛 청원군) 학천교 경부고속도로 확장 공사장에서 20대 여성이 숨져 있었음. 40㎝ 깊이 땅속에서 발견된 여성은 알몸이었고, 양손에는 스타킹이 묶여 있었다. 경찰은 여성이 숨진 지 3~4개월 된 것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지만 피해자의 신원조차 파악하지 못했고, 결국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24] 가정주부 이모(28) 씨 피살사건. 경찰은 당시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사건 현장에서 나갔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해 피해자와 남편 등 주변인을 중심으로 수사했지만 끝내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다.[25] 당시 언론에서 "3개월 동안 살인사건 4건, 해결 기미 감감"이라는 기사가 나옴
5. 영화 살인의 추억이 범인을 맞혔다?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작중 용의자로 지목된 박현규(박해일 분)의 신상이 전부 상상에 기반했음에도 실제 이춘재와 비슷한 점이 많아 주목을 받았다. 닮은 점들은 다음과 같다.
- 작중 박현규의 주소는 진안1리. 실제 이춘재는 진안1리 출생.
- '군대를 막 제대한 20대 초반의 청년'이라는 설정이 일치한다. 극중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박현규에게 "네가 군대 제대하고 이 동네 공장으로 온 뒤부터 여기서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난 셈이란 말이야"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이춘재가 전역해 귀향한 직후 연쇄강간과 살인사건이 줄줄이 일어났다.
- 언덕 위에 사는 여자는 작중 범인이 본격적으로 살인을 시작하기 전 강간당했는데, 이춘재 역시 연쇄적으로 강간만 하다가 우발적으로 첫번째 살인[26] 을 한 뒤로 연쇄살인을 시작했다.
- 인근 공장에 다닌다. 이춘재는 화성 소재의 전기 부품 제조 회사에 다녔다. 작중 박현규는 레미콘 공장에 근무하는 걸로 보이는데, 이춘재 회사 바로 옆에 레미콘 공장이 있었다. 다만 사건 당시에는 레미콘이 아니라 섬유산업 쪽 공장이었다.
- 이춘재는 6차 사건 이후인 1987년 탐문과 행적조사 등을 통해 용의자로 지목되어 수사지휘부에 불려갔으나, 혈액형과 발자국이 달랐기 때문에 수사 선상에서 제외됐다고 한다. 박현규가 수사대상에 오르고 제외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에 의하면 '''박현규의 실제 모델이 된 사람은 이춘재가 아닌 다른 용의자였고, 1997년에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살인의 추억> 문서의 해당 단락 참조. 영화 내에서도, 박현규가 처음 수사를 받을 때 "당신들이 죄 없는 사람들 족치고 다니는 거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 난 절대로 그렇게 안 당해" 라고 하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용의 선상에 오른다는 것은, 추정되는 범인의 특징과 유사점이 있는 인물이므로 상당 부분 일치하는 내용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26] 몸싸움을 한 흔적 등 계획적으로 살의를 품고 한 행동이 아니라고 판단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