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나미 소년 연쇄 상해사건

 


連続少年切り付け魔事件[1]
杉並少年通り魔事件[2]
1. 개요
2. 사건의 전개
3. 범행 동기
4. 사건 이후


1. 개요


1963년 3월에서 1964년 10월에 이르기까지 도쿄 북서부 지역에서 발생한 일련의 연쇄 상해사건. 피해자가 모두 6세에서 14세의 소년들이었고, 특히 피해자들의 성기가 절단된 사례까지 있어 큰 충격을 준 사건이다.

2. 사건의 전개


1963년 3월 14일, 스기나미구에서 자전거를 타던 당시 10세의 남아를 누군가 뒤에서 밀쳐 넘어뜨린 뒤 흉기로 얼굴에 상해를 입힌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4개월이 지난 7월 14일에는 곤충채집을 하던 11세 남아와 14세의 중학생이 폭행당해 상해를 입었고, 바로 다음 날 다른 11세의 남아가 결박된 상태로 하복부에 전치 2주의 상해를 입었다. 이후 한동안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조용히 지나가는가 싶었던 9월 21일, 이번에는 네리마구에서 11세와 12세 남아가 폭행당하고 한 쪽이 얼굴에 칼로 베이는 상해를 입었으며,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12월 26일에는 급기야 또다시 스기나미구에서 13세 남아의 성기가 절단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성기 절단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경찰측에서는 수사본부조차 설치하지 않았으며, 다른 피해자들도 경미한 피해였기 때문에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성기 절단 사건이 발생하자 부랴부랴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수사를 시작했으나, 범행 지역이 워낙 광범위했기 때문에 좀처럼 범인을 잡지 못하고 난항을 겪었다. 그 사이에도 범인은 유유히 범행을 계속, 이듬해인 1964년 8월에는 10세 소년의 얼굴에 상해를 입히는 한편, 사건 발생 후 2회에 걸쳐 피해자의 집에 '100만 엔을 가져와라, 만약 경찰에 신고하면 애를 죽여버리겠다', '다음에 경찰에 신고했다가는 가만 안 두겠다'는 내용의 협박장까지 보내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경찰과 언론에도 무려 13통에 달하는 도전장을 보냈으며 그 중에는 영문으로 쓰여진 것도 있었다.
이후 스기나미구와 네리마구를 비롯해 인근의 나카노구, 사이타마현 등지에서 유사 사건이 계속 발생하던 와중에 1964년 10월 10일 무사시노시에서 9세 남아가 하복부에 상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오기쿠보 키타구치 파출소 앞에 놓여 있던 노트가 발견되었다. 이 노트에는 그 동안 일어난 사건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고, 필적 감정 결과 고등학생 정도쯤 되는 소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노트는 스기나미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도난당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용의자가 이 초등학교의 졸업생 중 한 명으로 좁혀졌고, 조사 결과 17세의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 A가 범인으로 밝혀져 체포되었다.

3. 범행 동기


범인 A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 중학교 때까지는 우등생이었으나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부터 성적이 중하위권으로 떨어지고, 학업에 대한 의욕도 잃어갔다. 중학교 때도 다가가기 힘든 존재라는 이미지가 있었으나,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한층 더 겉도는 존재가 되었다. 떨어진 성적과 작은 키에 대한 컴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나름대로 노력은 했으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좌절을 겪었다고 한다.[3]
사건을 저지른 동기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는데, 한 잡지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칼부림을 했다는 이야기를 보고 그대로 초등학생에게 해 봤더니 "그 순간 개운해지는 듯한 쾌감을 얻어서" 범행을 반복했다고 한다.

4. 사건 이후


범행 당시 A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1966년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3년 이상 4년 이하의 부정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1969년에 가석방되었으나 불과 4개월 만에 20여 건이 넘는 방화 및 절도, 상해사건을 일으켰다. 결국 1970년에 다시 체포되어 1972년 징역 13년이 선고되었고 1985년에 만기 출소하였다.

[1] 정식 명칭.[2] 사건 발생 지역 자체는 도쿄 북서부와 사이타마현에 걸쳐 있지만 스기나미구에서 가장 많은 피해자가 나왔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3] 또한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고등학교 입학 직후부터 묻지마 범죄를 반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