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틱스(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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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하드록, 프로그레시브, 소프트록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실험적 사운드의 아트 락밴드. 드럼과 베이스를 치던 파노조 (John Panozzo[1], Chuck Panozzo[2]) 형제와 피아노를 치는 데니스 드영 (Dennis Deyoung) 이 의기투합해 만들어진 밴드로 1964년 시카고의 로즈랜드에서 결성되었다. 그 후 1970년 대학동기인 기타리스트 제임스 "JY" 영 (James 'JY' Young), 존 크루엘스키 (John Curulewski)[3] 을 영입해 TW4[4]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다.
스틱스라는 이름은 별다른 어원 없이 데니스가 낸 여러 이름 중에 가장 반대표가 적었던 이름. Wooden nickel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하며 밴드 이름을 바꾸라고 요구받자, 데니스는 여러가지 후보들을 뽑아왔지만 구리다는 이유로 멤버들에게 반려당하고, 그나마 가장 덜 구린 이름인 styx가 채택되었다고 한다
메이저 레이블 계약 체결 이후 스틱스는 셀프 타이틀 앨범인 STYX로 데뷔하며 타이틀곡 Best thing을 6주동안 빌보드 Hot100에 올리며 탄탄대로를 달린다.[5]
그 후 A&M 레코드사로 이적하며 1975년 Lorelai를 차트 27위에 올리며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성적을 유지하나.. 기타를 맡고 있던 존 크루엘스키가 갑작스럽게 밴드를 떠나며 밴드는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맞이하게 되는데, 스틱스의 역사와 흥행판도를 뒤집어엎은 재능있는 기타리스트 토미 쇼(Tommy Shaw)다.[6][7]
토미의 팀 합류 이후 스틱스는 거대한 변화를 맞게 된다. 토미가 스틱스로선 처음 작곡한 앨범 Crystal ball의 인기에 힘입어 1977년, Grand Illusion 앨범이 첫 골든 레코드를 달성하며 300만장 넘게 팔리는 대히트를 터뜨린 것. Grand Illusion을 시작으로 pieces of Eight[8]도 연쇄히트 하며 스틱스는 데니스-JY 2인체제에서 데니스-JY-토미 3인체제로 굳는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1979년 Cornerstone[9]의 수록곡 Babe가 빌보드 1위[10]에 수주간 머물면서 스틱스의 최전성기로 이끌게 된다
그 후 81년 밴드의 첫 컨셉 앨범인 Paradise Theatre[11]까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만, 이 앨범을 시작으로 복덩인줄만 알았던 토미 쇼와 데니스 드영의 갈등이 시작된다.
하드 록 사운드를 지향했던 토미 쇼와 피아노가 주를 이루는 발라드 곡을 작곡했던 데니스 드영[12]은 음악적으로 사사건건 부딪히는데, 토미 쇼와 다른 밴드 멤버들은 Conerstone에 수록된 곡 First time의 싱글반매를 원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데니스와의 갈등을 지속하다 결국 79년 데니스를 해고하기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 해고는 오래가지 않았고, 바로 복귀해서 낸 음반이 paradise theatre. 이 앨범에 수록된 The Best of Times가 Babe와 맞먹는 히트를 터뜨렸다.[13]
그러나 그 갈등은 갈수록 심해져서, 1983년 Kilroy Was Here 앨범에서 폭발하게 된다. 컨셉앨범인 이 앨범은 유명한 Mr. Roboto[14]가 수록된 명반으로 지금까지 80년대 가장 위대한 앨범에 오르는 스틱스의 대표작. 하지만 그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토미 쇼는 스트레스를 받았고[15] 결국 83년 킬로이 투어를 마지막으로 스틱스를 탈퇴한다.[16]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93년, 댐 양키즈와 스틱스의 합동 투어에서 데니스가 토미를 설득해 스틱스로 돌아오게 한다. 돌아온 토미 쇼와 전곡을 재녹음해서 발매하고, 스틱스는 99년까지 원년멤버 체제를 유지한다. 그러던 중 데니스가 질병[17]에 걸려 더 이상 밴드를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 멤버들을 집에 불러놓고 밴드의 차후에 대해 의논할 때 토미쇼는 '드디어 그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데니스를 방출한 채 그대로 다른 멤버들과 투어를 강행해버린다.[18]
스틱스는 그 후 데니스의 후임으로 들어온 로렌스 고완(Lawrence Gowan)과 함께 최근까지 신보를 내며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데니스 드영 역시 Music of Styx를 결성하여 투어 중.[19] 아직도 데니스의 독재로 인해 다른 멤버들이 방출한 것인지 아니면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고 눌러 앉은건지 말이 많지만 확실한건 두 사람의 감정의 골이 지금도 굉장히 깊으며 데니스와 달리 토미와 JY 두 사람은 그와 재결합할 의지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20]
여담으로 Come Sail away는 사우스파크의 카트먼이 제일 좋아하는 곡이다.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제법 잘 부른다. Come Sail Away는 국내에서는 1980년대 들국화가 불러서[21] 친숙한 곡이기도 하다.

[1] 95년에 알콜 중독으로 사망했다.[2] 커밍아웃한 게이로 아직까지 현역에서 활동 중이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잦은 공연은 무리로 보인다.[3] 1988년에 죽었다[4] Trade Wind 4[5] 특히 1973년에 발매된 STYX II에 수록된 곡 'Lady'는 US차트 6위에 오를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데니스의 생긴거 답지 않게 청아하고 힘있는 목소리와 어울리는 멜로디 라인이 아름다운 곡. 참고로 Lady는 데니스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이다.[6] 165cm의 단신이다. 고교 졸업 후 포크락 밴드 Ms Funk등 여러 밴드를 전전하다 실패하고 고향에 돌아와 극장 공연을 하던 중, 극장 매니저의 제안으로 스틱스의 오디션을 보게 된다. 참고로 이 때가 데니스와 이어질 유구한 악연과의 첫 만남. Lady 악보를 보자마자 토미 쇼는 '스틱스도 별 거 아니네!' 라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 단 한 번의 리허설도 없이 일 주일 뒤 바로 투어에 성공적으로 참여했다. 데니스가 토미를 채용한 이유도 Lady의 가장 최고음 파트까지 자유자재로 부를 수 있었기 때문에.[7] 유명 기타리스트 Ted Nugent와 99년도부터 'Lynyrd Skynyrd'의 드럼을 맡게 된 Michael Cartellone, 'Night Ranger'의 베이시스트겸 보컬 Jack Blades를 설득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이 밴드가 'High enough'로 유명한 'DAMN YANKEES'[8] 토미 쇼가 작곡한 곡 중 가장 사랑받는 곡들인 Renegade, Blue Collar Man 이 수록되어있다. 토미 쇼가 당시 사회상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사회고발적인 노래를 많이 썼다.[9] Babe, Boat on the river, Lights 등 수록[10] 데니스 드영 작곡, 스틱스의 유일한 1위곡이다.[11] Too much time on my hands와 The Best of Times 수록. Too much time on my hands 는 지미 팰런 쇼에서도 뮤비가 리메이크 된 적 있다.[12] Come Sail away의 경우엔 피아노 반주만 2분을 넘어간다. 기타는 뒷후렴부에만 쓰였다.[13] 빌보드 2위[14] 한국에선 노래에 들어간 짧은 일본어 가사 한두마디 (도모 아리가또 미스따 로보또)때문에 한때 금지곡이었다.[15] 토미 쇼의 인터뷰를 보면 "우리는 락밴드다. 광대가 아니다. 대체 왜 우리가 그런 가면을 쓰고 춤을 춰야 한단 말이야?" 같이 분노가 여과없이 드러난다. 투어 직후에 사라진 토미 쇼의 행방을 묻자 정신과를 알아보고 있었다고 대답할 정도.[16] 그 후 3장의 솔로앨범을 내며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성적은 올리다 89년 슈퍼그룹 댐 양키즈를 결성하며 재기에 성공한다. 스틱스는 토미 쇼가 나간 후에도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공백기를 가지며 그들의 전성기는 사실상 거기서 끝나게 된다.[17] 결핵으로 추측[18] 여태 얼마나 칼을 갈고 있었는지 보이는 대목. 그 때 한 말도 무시무시하다. "더 그만두고 싶은 사람? 없으면 투어하자." [19] 데니스는 토미 쇼를 상대로 스틱스 상표권 소송을 걸었지만 보기좋게 패소하고 더이상 Styx의 이름도 쓸 수 없게 되었다. 본인이 결성해서 손수 스틱스라 이름 지어준 밴드에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20] 토미쇼와 데니스 드영은 10여년전 함께 공연을 가진 적은 있다. 하지만 여태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은 듯. 가장 최근의 빅인터뷰에서도 이 입장을 고수했다.[21] 라이브앨범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