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밴드)

 

[image]
'''들국화'''[1]
소속사
들국화컴퍼니
결성
1983년 10월
데뷔
1985년 09월 10일
활동시기
1985년 ~ 1987년
1995년[2]
2012년 ~ 2013년
장르

포크 락
멤버
포지션
이름
보컬
전인권
베이스
최성원
이전 멤버
기타
최구희
기타
조덕환[3]
기타
손진태
키보드
허성욱[4]
드럼
주찬권[5]
수상
년도
내역
2014년
제28회 골든디스크 어워즈
집행위원 특별상
1. 개요
2. 역사
2.1. 활동 당시
2.2. 2집 발표와 해산
2.3. 2012년 재결성 이후
3. 총평
4. 앨범
4.1. 정규 앨범
4.2. 비 정규 앨범
4.2.1. 전인권, 허성욱 컴필레이션 앨범 1979~1987 추억 들국화
5. 기타


1. 개요


'''"요즘 애들 수준 보니까 딱 까놓고 얘기하면, 앞으로 100년 안에 우리만큼 위대한 밴드는 이 땅에서 못 나올것 같아."'''

최성원[6]

1983년 보컬 전인권, 키보드 허성욱 듀오에 베이스 최성원이 합류하여 결성되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록밴드로 손꼽힌다.
1984년 경 최성원이 잠시 빠지고 기타 조덕환이 가입하였고, 얼마 안 가 다시 최성원이 합류하여 이 4명으로 1집 앨범을 냈다.[7] 이때 만든 1집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꼽힐 만큼 대성공을 거두었다.
1985년에는 1집에 이미 세션으로 참여하고 있던 '믿음 소망 사랑'의 멤버들인 드럼 주찬권과 기타 최구희도 정식 멤버로 가담하여 2집을 발매했다. 하지만 2집의 부진 후 해체하게 되었고, 1990년대 중반 전인권 외에 모든 멤버를 교체하여 들국화 3집을 냈지만, 평가도 좋지 않았고 주목도 받지 못했다. 이후 2012년 드디어 재결성을 했지만, 2013년 10월 들국화의 드러머 주찬권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해체 상태에 이르렀다. 2013년 12월 신보+리메이크 형식의 4집 '들국화'를 발매했다.

2. 역사



2.1. 활동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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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허성욱, 최성원, 전인권, 조덕환

원래 존 레논은 (전)인권이가 좋아했었고 나는 폴 매카트니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에요. 1집의 커버를 비틀즈의 Let It Be처럼 만든 것도 (전)인권이의 아이디어입니다.

최성원 인터뷰

앨범 발매 이전에 방송이 아닌 소극장이나 라이브 카페 같은 곳에서 라이브를 하면서 실력을 다지기 시작했으며, 1985년 1집 들국화를 발표하면서 엄청난 인기와 함께 한국 록의 전설이 되었다. 한국인의 정서를 외국의 록 형식에 잘 담아냈다고 평가받는다.
대한민국 락그룹의 원형격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멤버들은 원래 락커라기보다는 포크송 가수에 가까웠다. 밴드내 역할분담 역시 4명의 파트가 확실한 게 아니라 보컬과 연주를 번갈아가면서 했다는 점에서 밴드보다는 크루에 좀 더 가까웠다. 이것은 포크 음악가들 문화의 영향이기도 했다.
재미 있는 점은 서양에서도 이런 크루가 밴드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락음악이 현대 대중 음악으로 발전해왔다는 것. 한국의 경우 1980년대에 똑같은 모습이 들국화에서 보였고 그게 결국 한국 락의 직접 시조격이 되었다. 백두산김도균이 들국화를 평할 때 '락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 밴드'라고 했는데 이는 이러한 부분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1집 음반 안에 라이브 콘서트 할인권과 전국 순회 콘서트 일정표를 넣을 정도로 철저하게 라이브 활동을 고집하였다.
1집 음반 녹음이 끝날 무렵 조덕환이 탈퇴하였고, 드러머 주찬권은 정식멤버로 가입하였다.
1집 발매와 동시에 시작된 4명의 멤버에 세션 기타리스트를 포함한 5인조로 진행된 전국 순회 콘서트는 말 그대로 인기 폭발하였다.

2.2. 2집 발표와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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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손진태, 허성욱, 최성원, 주찬권, 전인권, 최구희
1집에 참여한 신중현과 뮤직파워,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괴짜들을 거친 당대 탑 클라스의 기타리스트 최구희 [8]와 드러머 주찬권[9] [10], 그리고 세컨드 기타리스트로 이미 라이브 앨범 레코딩에 세션으로 참여했고 허성욱의 친구이기도 한 손진태 이렇게 세명의 새로운 멤버와 함께 2집 녹음에 돌입했다. 새로 가입한 최구희가 두곡, 주찬권도 한곡을 크레딧에 올린 2집은, 전인권과 최성원의 음악적, 음악외적 견해차이가 불거지면서 1집과 비교하면 어정쩡한 결과물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재평가를 받긴 했지만, 1986년에 발매한 2집은 6인조라는 최강의 멤버구성에도 불구하고 아쉽지만 당시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어쨌든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전설적인 하드록 밴드의 기타리스트와 드러머의 영입, 또한 두 명의 기타리스트를 좌우로 포진시켰다는 것은 팬들로 하여금 들국화가 앞으로 본격적인 락밴드로 발전할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11]
'매일 그대와' 같은 어쿠스틱한 넘버들도 무시할수 없지만, 들국화의 진면목은 역시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 같은 강렬한 밴드 음악에 있었다. 실제 이 당시 라이브에서는 Led Zepplin, Styx 등의 록 넘버들을 앵콜 곡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2집은 이런 기대와 달리 포크락그룹을 연상시키던 1집보다도 훨씬 말랑말랑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1집 같은 경우는 참 오랫 동안 준비한 것이었죠. 반면 2집에서는 새로 영입한 멤버들과 모든 포커스를 맞출 시간도 충분치 않았어요. 공연을 줄이고 음반에 집중하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여건이 되지 않았어요. 2집을 녹음하면서 이미 멤버 간에 균열이 생겼어요.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2집 앨범을 좋아하는데…"

최성원

결국 들국화는 1987년 해산을 선언하고 전국 순회 고별 콘서트를 끝으로 모든 활동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 멤버로는 결국 다시 모이지 못했다.
해산 이후에 전인권은 허성욱과 함께 '추억 들국화' 음반을 발표하여 인기를 끌었다. 기타리스트 최구희는 '괴짜들'을 재결성하여 활동하고 한 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는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12]
손진태는 한 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였고 곧 이어 김현철, 함춘호, 조동익과 함께 '야사'라는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후 손진태는 1990년대 들어서 A급 기타 세션맨으로 맹활약했다.
다른 멤버들도 여러 가지로 음악계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최성원은 나중에 솔로로도 활동하여 '제주도의 푸른 밤'이라는 명곡을 남기기도 했다. 음반제작자 겸 프로듀서로도 유명한데, 최성원이 발굴한 가장 대표적 가수가 바로 이적과 김진표. 패닉 1, 2집이 최성원 제작이다. 드러머 주찬권은 이런 저런 드럼 세션에 한때는 신중현 밴드의 드러머로 뛰기도 했으며 무려 6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였다.

2.3. 2012년 재결성 이후


이후 꾸준하게 재결성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1990년대 중반 전인권 주도로 3집이 나왔다. 그 전 앨범들에 비해 전인권의 보컬이나 사운드 면에서도 락에 충실한 음반이었으나 최성원의 부재로 평가는 인색하였다. 이 와중에 1997년 허성욱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은둔중인 최구희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모여서 공연을 갖기도 하였다. 이러면서 2001년 후배 뮤지션들의 들국화Tribute 음반도 나왔다. 이후 10여년동안 재결성, 콘서트 등 온갖 소문만 무성하다가, 2012년 5월에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 세 사람이 모여서 재결성 한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이후 여러 방송이나 콘서트, 락페에 참여하여 녹슬지 않는 실력과 인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2013년 10월 20일 드러머 주찬권이 갑자기 쓰러져 사망하였다. 근 30년만에 재결합해 활동에 박차를 가할 찰나에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들국화 멤버들과 팬들은 통한을 감추지 못했다. 주찬권 회고 영상
2013년 12월 3일, 신곡인 '걷고, 걷고'가 공개되었고 같은달 9일 셀프타이틀 4집 정규앨범 '들국화'가 발매되었다. 드러머 주찬권은 생전에 드럼 트랙을 마친 상태였고 나머지 멤버는 하찌, 함춘호, 한상원, 정원영, 김광민등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멤버들로 구성되었다. 2CD로 구성되어 있으며 1CD에는 신곡들이 2CD에는 리메이크 곡들이 들어있다.
주찬권의 죽음 이후 들국화는 사실상 해체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전인권은 자신의 이름을 필두로한 '전인권밴드'를 만들어 음악 활동을 계속 하고 있고 최성원은 제주도에 거주하며 라디오 '제주도의 푸른밤 최성원입니다.'의 DJ를 맡고 있다.

3. 총평


현재의 한국 록 음악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영향이 크다. 신중현, 유재하, 조용필, 산울림, 서태지와 아이들 등과 함께 한국 대중 음악사를 엄청나게 뒤바꿔놓은 그룹. 그들의 음악세계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곡으로 ''''그것만이 내 세상''''과 ''''행진''''이 있다. 암울하고 어두웠던 지난 날들을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표현한 명곡들이라 할 수 있겠다.
여러모로 한국 록이 '무엇을'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지를 재정의한 그룹이다. 기존 한국 음악의 소위 '뽕삘'(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이라 불리던 것에서 벗어나, 해방 후 새로운 형식의 한국 감성으로 각광받던 포크 음악을 잘 계승하면서도 정형화된 록 음악의 형태를 도입했고, 민주화 운동 시기 빼놓을 수 없었던, 저항 정신도 갖춘 완전체라고 보면 된다.
물론 해외의 록 마니아나 요즘의 록 청자들이 들으면 당장 서구의 7080 로커들 같은 하드함이나 혁신성은 겉보기에는 약간 부족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들의 음악적 기반이 포크 음악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어서 그렇지, 당장 각 멤버들의 연주력이나 보컬 능력, 곡의 구조나 요소들을 보면 순수하게 '록 밴드'로서만 평가하여도 충분히 평균 이상이며, 거기에 '80년대 한국 음악가'라는 가치가 더해져 586세대에게 전설적인 밴드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사실 상당수의 '민족적' 뮤지션들은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평가가 상당히 미묘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당장 동아시아 삼국에서만 봐도 일본의 '핫피 엔도'나 중국의 '최건' 같은 뮤지션들 또한 현대의 젊은 록 청자들이 그 고평가에 대해 상당히 '''의구심'''을 갖고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록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그들이 자국의 음악 시장에 미친 영향과 그 역사를 본다면, 그들이 왜 전설이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꽃밭의 꽃은 평범해 보이지만 사막의 꽃은 유독 아름다운 법이다.
들국화의 경우에 대해서만 설명해보자면, 한국 음악 시장에서 록계에는 이미 이전부터 당대까지 신중현, 산울림, 송골매, 김현식 등의 걸출한 뮤지션이 있었고, 포크 계에도 세시봉 4인방, 한대수, 양병집, 김민기, 조동진, 이장희, 정태춘, 어떤날 등등 상당한 거장들(다른 장르까지 따져보면 훨씬 많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해방 후 새로이 태어나는 한국적인 음악 형질이 서서히 형성되었는데, 들국화는 그 '현대 한국의 대중음악'을 이루는 큰 줄기 중 하나인 록과 포크라는 양 줄기를 모두 포괄하여 등장하였고, 그 감성을 자연스럽게 완성했다.
비틀즈가 기존의 로큰롤에다가 포크음악의 감수성과 인도음악 등 제3세계 음악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퓨전시킴으로써 기존 록음악의 표현언어를 확장시키고, 비틀즈만의 색깔을 가진 음악세계를 창조해낸 것처럼, 그러한 장르적 융합을 통한 독특한 화학작용을 한국에서는 들국화가 이루어냈다. 들국화의 음악은 록이면서 동시에 포크이기도 했고, 심지어 연주력이나 선율도 훌륭했으며 시대적 상황까지 반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지만 어느 기원을 쫓아가도 결국에는 한국 자생적이라는 결론(해외 음악의 영향을 아예 받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두 합쳐져 해외에서는 찾기 힘든 독특한 형식이 되었다는 것)에 이르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에 마침내 완성된 '현대 한국의 감성'이 '완성된 록'의 형태로 등장한 최초의 사례가 들국화라는 것. 또한 당시의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대상 또한 확고해져 6070에서 포크 음악이 수행하던 '저항'의 역할이 세대교체를 거치며 록 음악으로 이전되었고 들국화는 시대의 요구까지 반영되어 있는 밴드로 태어났다.
젊은 청자들이 들국화를 들으며 흔히 생각하곤 하는 "이게 왜 '록'이지?"하는 궁금증은 여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들국화는 록 음악이 한국화된 결과물이라기보단, '한국 음악'이라는 존재가 록의 형태로 현현됐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며, 그렇기에 훨씬 부드럽고 대중친화적인 형태로 접근했을 뿐이다. 비틀즈가 뒤로 갈수록 정형화된 록의 형태를 벗어나 '탈 장르화된 총체적인 음악'에 접근했음에도 여전히 록 밴드로 취급받듯이, 들국화의 음악 또한 그러한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사실 최성원, 전인권, 허성욱 초기멤버 셋의 출발이 포크였을 뿐, 당대의 내로라하는 하드락밴드 출신의 드럼 주찬권과 기타 최구희가 합류하여 들려주는 사운드에 포커스를 둔다면 이게 왜 락이냐는 물음은 애초에 나올 수가 없다. (다만 들국화의 시대가 전 세계적으로 메탈 음악이 유행했던 때임을 감안해 보면 그런 부분에서는 상당히 유한 음악을 들려줬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해방 후 받아들여진 서구의 대중음악들이 서서히 한국화 되어가는 흐름 속에서 들국화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지며 '현대 한국의 대중음악'이라는 여러 장르 간의 공통된 실체가 발현되기 시작했고, 동시에 1980년대 격동의 시대상까지 저항적인 록 음악의 형태로 반영되었으며, 1980년대 한국인 감성의 상징이자 신시대 한국 음악의 시작을 고하는 아티스트로서 존재하게 된 것이 바로 들국화라고 말할 수 있다.

4. 앨범



4.1. 정규 앨범




4.2. 비 정규 앨범



4.2.1. 전인권, 허성욱 컴필레이션 앨범 1979~1987 추억 들국화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40위(2차)'''
'''68위(3차)'''
[image]
앨범
1979~1987 추억 들국화
발매
1987.07.20
기획
케이앤씨뮤직
배급
다날엔터테인먼트
장르

타이틀
사랑한 후에
세션 멤버
이름
포지션
전인권
보컬
기타
허성욱
보컬
키보드
최성원
베이스
최구희
기타
함춘호
기타
주찬권
드럼
트랙
제목
작사
작곡
#1
시작곡 - 북소리
전인권
전인권
#2
사랑한 후에
전인권
외국곡
#3
머리에 꽃을
전인권
전인권
#4
여자
전인권
전인권
#5
이유
전인권
전인권
#6
날이 갈수록
김상배
김상배
#7
어떤... (가을)
전인권
전인권
#8
사노라면[13]
김문응
길옥윤

5. 기타


이외에도 '매일 그대와, '내가 찾는 아이', '제발', '아침이 밝아 올때까지' 등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곡들. 행진은 전인권의 곡이고 나머지 곡들 대부분은 최성원의 손을 거쳤다.
실제로 이 밴드가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리더는 최성원이었고 심지어 조덕환은 연주 못하고 노래도 못한다고 쫓겨날뻔 한 적도 있을 정도. 그러나 들국화 1집 이후 히트곡은 행진이었고, 전인권의 카리스마적인 보컬에 의해 밴드의 균형이 바뀌면서 해체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비틀스와 매우 비슷한 길을 겪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들국화의 명곡들이 배경음악으로 나와서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콘서트 7080에서 전인권이 밝히길 '들국화'란 밴드 이름은 택시 타고 가다가 택시기사님께 의견 청취를 듣고 정했다고 하며 코스모스, 들장미 등을 제치고 기사님께서 들국화가 괜찮다고 하셨다고. 그 들국화란 이름도 마침 허성욱이 씹던 해태제과의 껌 이름이었다.

[1] 왼쪽부터 들국화의 멤버 최성원, 주찬권, 전인권[2] 다만 1995년의 활동은 들국화로서의 활동으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앨범) 문서 참조.[3] 2016년 11월 14일 새벽 4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십이지장암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4세.[4] 1997년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향년 36세.[5] 2013년 10월 20일 오후 5시경 갑자기 쓰러져 사망하였다. 향년 58세. 사인은 심장마비로 인한 돌연사이다.[6] 물론 농담으로 던진 말이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7] 당시 멤버들의 학력이 상당히 특이한데, 보컬 전인권은 고등학교 중퇴, 최성원과 조덕환은 고려대 졸업, 허성욱은 추계예술학교 졸업으로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8] 사실 1집의 화려한 애들립을 포함한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는 모두 최구희의 솜씨다. 최성원은 조덕환의 기타실력으로는 앨범을 레코딩하기엔 부족하여 1집에서 '축복합니다'의 간주 정도만 시켰다고 밝혔다 최성원 인터뷰 [9] 역시 1집의 드러머이며 믿음 소망 사랑 출신. 기타 드럼 키보드 등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멀티플레이어이며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서. 그는 한때 고교생 최구희의 기타 스승이기도 했다!) [10] 1집 레코딩 당시 이 두명은 리허설을 끝낸 후 본격적인 녹음에 들어가려 했는데, 당시 녹음을 맡았던 서울스튜디오 최세영 기사가 녹음 다 끝났으니 이제 나오라고 했다고 한다. 즉 1집의 일렉기타와 드럼 녹음은 리허설이 그대로 레코딩으로 나와버렸다!) [11] 이 당시는 전세계가 하드록, 헤비메탈의 전성기이기도 했고, 라이브에서 가끔 선보였던 최구희 와 손진태의 트윈기타 플레이는 경쟁력이 충분했다 [12] 10년에 한번 정도 세상에 나와 연주도 하고 레코딩도 하지만 대부분 비상업적인 활동이다. [13] 앨범 발매 당시에는 작자 미상으로 기재되었으나 2004년 9월 16일에 가요 평론가 박성서가 소장한 음반이 공개됨으로서 공식적으로 원작자가 밝혀졌다.당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