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익
archaic
1. 개요
그리스 초기의 미술을 일컫는다. 더 이전 시기의 그리스 예술로 미케네 문명의 예술이나, 기하학 양식 시대 예술을 구분하기도 한다. BC 8세기 중반 이후 오리엔트 지방과 교류하면서부터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다.
아르카익은 그리스어로 ‘시원(始源)‘, ‘태고(太古)’를 뜻하는 아르케(arche)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 말처럼 이시기 그리스 조각은 우리가 흔히 아는 사실적인 그리스 조각의 모습과는 달랐다. 굉장히 단순하고 졸작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시기 양식의 번역어가 고졸 양식이 되었다.[1]
2. 기원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아르카익기 미술의 제양상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이행되는 기원전 8세기 무렵에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를 역사 시대로 상정하는 이유는 776년이라는 절대 연대가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그리스인들은 이 연대를 올림피아 제단에서 열리는 올림픽 경기의 원년으로 삼았다. 이후 아티카 지방의 여러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이 연대는 그리스의 역사 시대와 선사 시대를 가르는 중요한 시기로서 이용되었다.
이 시기의 미술은 기하학적인 형태가 대부분을 이룬다는 것이 특징이다. 비록 남아있는 고고학적 유물이 도기와 일부 청동 기물로 제한되지만 대략적인 양상을 파악 하는 데 무리가 없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시기 그리스 미술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들이 매우 편중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일례로 도기화의 경우에는 여타 다른 미술 양식에 비해 많은 양이 출토되었고 또 그에 대한 양식 분석도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도기화를 제외한 다른 회화 양식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특히 목기의 경우 시기가 지날수록 부패한다는 재료의 특성으로 인하여 단 한 점의 예술품도 출토되지 않았기에 그 양상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당대의 예술가들 중 조각가보다는 화가가 더 유명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리스 미술의 양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큰 장애요소가 된다. 또한 이 시기 예술가들에 대한 기록은 이후 고졸기와 고전기의 그리스 예술가들의 기록보다 방대하지 않다. 이미 당대의 여러 저술가들에 의해서 예술가들에 대한 일화, 일생들이 소개된 바 있지만 아직까지 미술사라는 학문이 성립되지 않는 고대 그리스에서 미술에 대한 연구는 인물 열전 형식에 가까우며 그마저도 일부 예술가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이 시기 그리스 예술에 대한 확정적인 단정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존재하는 청동 기물과 도기들을 통해 이 시기의 예술이 어떠한 형태였는지 개략적으로 가늠할 수는 있다.
3. 전개
기원전 8세기 무렵 아르카익 미술이 등장할 무렵 그리스 미술은 몇 가지 특징이 존재하고 있었다. 첫째, 기하학적인 형태에 인물의 이미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의 미술 양상을 알려주는 도기화를 보면 기원전 8세기를 기점으로 추상적인 삼각형, 동심원 문양에 인간, 동물과 같은 구체적인 형상의 이미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양식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토기인 디필론(Dipylon) 묘지의 크라테르는 이러한 양식 변화를 보여주는 주요한 유물이다 아테네 도시 입구에 있었던 디필론 공동 묘지는 발굴 작업으로 많은 크라테르가 출토되어 이 시기 회화의 양상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일반적인 도기보다 크기가 거대하고 또 양식이 통일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으로 인해 ‘디필론 공방’ 이라는 동일한 공방에서 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이 도기에서 나타나는 회화는 일반적으로 장례 행위, 신화 속의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그려졌을 인물, 동물의 모습은 기하학적 양식의 영향으로 인하여 단순화 되어 있으며 이전 시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미술보다 뒤떨어진다. 인물의 형상은 역삼각형과 몇 개의 선으로 단순화 되어 처리되었으며 동물의 경우에는 선사 시대 동굴 벽화의 그림만큼이나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 어떤 도기화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힘들 정도로 표현력이 조악하다. 하지만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리스 미술에서 인물 표현이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정 부분 암흑기 이전의 문명이었던 미케네 문명의 미술적인 성과와도 연결이 된다. 비록 그 영향력에 있어서 미케네 미술은 이집트 미술보다는 그리스 미술의 성립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미케네 미술에서 보여주었던 세밀한 인물 표현과 자연주의적 양식은 초기 그리스 미술의 형성에 있어서 영향을 준 것은 틀림 없다.
다음으로 이 시기에 유입이 되는 이집트와 근동 지방의 영향이 그리스 미술에 드러난다. 이미 앞서 거대한 문명을 이룩했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그리스 문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미술 분야에서 이집트의 영향은 향후 초기 그리스 미술의 양식 대부분을 규정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초기 그리스 미술의 발전은 이후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의 개념적인 미술 양식을 버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 양식을 확립하는 긴 여정에 다름 아니며, 이러한 여정이 마무리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고전기 그리스 양식이 서구 문명의 주요한 문화적 뿌리로서 등장하게 된다. 이집트 미술은 그들의 자연 환경에서 기인한 영혼 불멸 사상에 큰 기반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이집트 미술은 대상을 보고 그리는 자연주의적인 미술과 다르게 미술 작품이 가지는 개념적인 요소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가령 이들은 인체를 묘사할 때 항상 정형화된 자세로 묘사를 했다. 얼굴의 경우 측면을 향해 전체적인 윤곽이 잘 드러나야 하며 몸통은 정면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발의 경우에도 측면의 모습이 드러나도록 그림을 그렸는데 이로 인해서 실제 해부학적으로는 나올 수 없는 자세가 이집트 미술을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인물들의 앉은 자세를 표현할 때 시선은 정면이 아닌 사선으로 비스듬히 올라가 있어 내세를 지향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 본래 크기에 상관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크게 그렸다.
폐쇄적인 자연 환경의 영향으로 이들의 미술은 거의 외부의 변화가 없었다. 딱 한번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4세 시기에 이집트 미술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 변화의 원인에는 크레타에서 온 일련의 미술작품들의 영향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이집트 미술은 다시 본래의 미술 양식으로 회귀하였으며 이후 양식의 변화는 세세한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한번도 없었다. 이러한 이집트 미술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는 초기에 이집트와 같은 경직성이 느껴졌다. 심지어 몇몇 도기화에서는 이집트 미술에서 보이는 특이한 자세를 그대로 차용하여 그린 흔적이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리스 인들의 심미안과 이집트인들의 심미안에는 차이가 있다. 이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자연 환경적인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전술했듯이 이집트 미술은 폐쇄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 남쪽으로는 울창한 밀림이 이어지며 서쪽은 사하라 사막, 북쪽은 지중해라는 큰 바다가 가로막고 있다. 유일한 통로인 동쪽의 좁은 지형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의 충돌이 있었던 때를 제외하면 외래 문화의 유입이 적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 특히 아티카 지방의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 대부분을 해안가에 건설했으며 자연스럽게 개방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들은 배를 통해서 다른 문명과 교류를 하고 나중에 가서는 식민시를 건설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여왔다. 또한 개념적인 미술을 중시했던 이집트인들과 달리 그리스인들은 자연의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표현하는 자연주의적인 미술을 중시했다. 이러한 차이는 기원전 8세기를 지나 7~6세기를 넘어서면서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초기 그리스 미술은 7세기와 6세기에 이르러 동방의 미술적인 양식과 관념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그리스 미술의 본질적인 양상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는 그리스 미술 본연의 특징을 확립하게 되는 초창기의 변화이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집트와 근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리스 미술의 ‘동방화’ 경향은 엄밀히 이야기하면 동방의 미술 요소들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으로 발전 시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존에 많이 사용되었던 기하학적인 문양들은 이 시기의 도기화에서 이제 장식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인물과 동물이 작품의 주요 주제로 등장하게 된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동방의 영향이 보이는데 싸우는 동물들의 모습이나 제의적인 행위를 그린 것이 동방의 영향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점을 제외하면 그리스 미술에서 내용적인 측면은 주로 신화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이것은 이미 기원전 8세기부터 나타나는 현상이었는데 마침 호메로스가 활동하던 시기와 때를 같이 한다. 하지만 이미 호메로스 이전부터 이러한 영웅들의 이야기나 신화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술가들은 일찍이 알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을 뿐이었다.
동방화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 미술은 이후 고졸기라 불리는 아르카익기로 넘어오면서 고유의 미술 양식이 완성된다. 이 시기 회화와 조각, 건축 전 분야에서 이집트 미술과 상반된 특징들이 나타난다. 요하임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 ~ 1768)이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라고 언급한 작품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며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언급하며 모방하고자 했던 그리스 작품들도 이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그리스 미술은 완벽하게 꽃을 피운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이집트 미술의 잔재가 남아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독자적인 미술 기법과 이집트 미술의 기법이 혼합되어 나타나 있는 경우가 있었다. 고졸기 후반에 가서 이러한 경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지만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에는 아직까지 그러한 영향이 남아 있었다.
도기화로 대표되는 회화는 미술의 기법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가장 특징적인 변화로는 흑색상 기법의 도자가 널리 유통된다는 점이었다. 흑색상 기법은 인물의 형태를 검은색으로 처리하여 윤곽을 뚜렷하게 표시하고 여기에 흰색과 자주색을 가미하는 기법이다. 기원전 2세기에 적색상 기법이 등장하기 전까지 도기화의 주류는 이런 기법으로 제작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그리스인들의 자연주의적인 미술관을 반영하는 여러 기법들이 등장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단축법이다. 단축법은 원근법이 초보적인 형식으로 수직으로 묘사된 대상을 실제 크기보다 짧게 그림으로서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자 한 기법이다. 특히 기존에 나타났던 발이나 몸통의 묘사에서 단축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후 단축법은 서구 미술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되며 단축법의 등장으로 그리스 미술은 인물 묘사에서 이집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 시기에 또 다른 변화로 도기화가들의 지위 상승을 들 수 있다. 그것은 도기화에 나타나는 작가 고유의 서명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현재까지 프시악스(Psiax)를 비롯한 소수의 몇몇 장인들의 이름만 알려져 있으나 이를 통해서 도기화가의 지위가 이전에 비해 상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작품에서 작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 만큼 작가의 지위가 높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이행되는 과도기에 몇몇 화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것처럼 고졸기의 도기화가들도 서명을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고자 한 것이다.
조각에 있어서도 몇 가지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 당시 대표적인 조각은 소녀상과 청년상으로 알려져 있는 코레와 쿠로스 조각이었다. 이 조각들은 여러면에서 이집트 조각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경직되어 있는 표정, 왼쪽 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정형화된 자세가 바로 그것들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의 코레와 쿠로스 조각은 완전한 입상이라는 점에서 이집트 조각과는 차이가 있다. 이집트의 장인들은 인물상을 만들 때 돌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형상을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엿다. 때문에 팔과 몸통, 다리와 다리 사이에 돌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이것이 이집트 조각이 지니고 있었던 한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스 미술에서는 이러한 부분까지 모두 제거해 빈 공간을 만들어냄으로써 재료의 구속을 받지 않은 완전한 입상(standing figure)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얼굴의 묘사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경직된 모습으로 표현하고는 했지만 이집트 미술과는 다르게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상을 제작하였다. 아르카익 스마일(archaic smile)이라 불리는 이 표정은 이집트의 경직성과는 다른 그리스인들만의 예술 감각을 말해주고 있으며 이는 점차 그리스 미술이 고유의 독자적인 미술 양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준 징조였다. 이 시기에는 또한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그리스 석조 건축물들이 건설된 때이기도 하다. 기원전 6세기를 기점으로 도시가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게 되자 신전과 같은 석조 건축물들이 등장하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건축 조각들도 등장하게 된다. 건축 조각은 주로 신전의 프리즈나 페디먼트 부분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그 내용은 신화에 기반한 것들이 많았다. 또한 이들의 건축 조각은 미케네의 부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졸기의 마지막 세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그리스 미술은 이집트 미술의 영향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자적인 양상을 띄게 된다. 아파이아 신전 동쪽의 페디먼트에서 보이는 〈죽어가는 전사〉는 이전의 이집트 미술에서 보이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자세와 양식을 보여줌으로서 그리스 미술의 완숙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에서는 역동적인 자세와 근육 표현을 통해서 자연주의적인 미술 특징이 드러나고 있다. 건축에 있어서도 도리스 양식을 기반으로 하는 신전 건축물들이 들어서면서 독자적인 양식으로 나아갔다. 다만 이 시기의 미술은 그리스 미술 전체의 흐름을 보았을때 과도기 적인 시기였음은 분명하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한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가령 〈죽어가는 전사〉에서는 정형화된 수염의 표현과 입의 표현이 전통적인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또한 〈원반 던지는 사람〉에서도 역동적인 동세를 표현하고 있지만 이집트의 인물화 특징인 정면을 향하는 몸통이 아직까지 잔존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아르카익 말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5세기에는 아직 콘트라포스토라는 그리스 미술의 대발견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동적인 자세를 표현하는데는 능했지만 정적인 자세를 표현할 때는 아직까지 이전 미술의 영향이 드러나고 있었다.
4. 참고자료
아르카익 양식
아르카익 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