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테더

 


'''아서 테더 (Arthur William Tedder : 1890년 7월 11일~1967년 6월 3일)'''
1. 약력
2. 초기 생애
3. 2차 대전에서


1. 약력


영국 공군의 원수를 역임한 군인으로, 제1대 테더 남작으로도 불린다.
왕립비행군단의 조종사이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복무했고, 전간기에는 영국 왕립 공군의 상급 장교로 복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영국 공군 중동 사령부의 공군 장교로써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의 공중 작전을 총괄했다. 여기에는 크레타 전투에서의 철수와 북아프리카에서의 크루세이더 작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폭격 전술은 테터 융단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전쟁 후기에 그는 지중해 항공 사령부의 사령관 직을 맡았고, 그 역할은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및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의 계획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프랑스 침공과 관련된 오버로드 작전이 계획단계에 있을 때 아서 테더는 연합군 해외원정군 최고 사령부 직의 부사령관으로 지명되어 아이젠하워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영국 공군 장교 고위직을 수행한 그는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부의 크기를 2배로 늘리고 1948년 베를린 봉쇄를 방해하는데 성공했다.

2. 초기 생애


테더는 아서 존 테더 경과 에밀리 샬롯 테더의 아들로 글렝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늙은 몸에 관세 회의의 담당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아버지의 직업은 어린 테더가 1895년부터 1898년까지 셰틀랜드 제도의 러윅에서, 그리고 1899년부터 1901년까지 엘긴에서 영국 제도의 다양한 부분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02년 가족은 서레이의 크로이든에서 이사하고, 테더는 그가 캠브리지 대학에 갈 때까지인 1909년까지 휘그피트 학교에 참석했다. 테더는 그의 대학교 생활을 1909년부터 1913년까지 마그다레네 학교에서 보냈으며 그는 여기서 역사를 공부했다. 그는 1912년 여름 동안 베를린에서 독일어를 공부하였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자 그는 마그다레네 학교로 돌아와 그 스스로 군인으로써의 경력을 쌓을 준비를 했다. 1913년 9월 2일, 테더는 도스세셔 여단의 소위의 직위를 부여 받았다. 대학에서 테더는 간부 후보생으로써 중령 수업에 참여했고, 피지의 행정부에서 일하기 위해 1914년 2월 영국을 떠났다. 그는 식민지 생활에서 그와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고,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일반적인 육군에 지원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보병 장교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에 부상을 입게 되었고, 군 생활을 그만둘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조종사를 지원해 중앙비행학교에서 조종 교육을 받은 뒤 제25스쿼드론(No. 25 Squadron RFC)에서 브리스톨 스카웃 정찰기를 몰게 된다.


3. 2차 대전에서


제1차 세계대전 뒤 영국 공군에 남아 극동지역 공군 사령관이 되었으며(1936~38), 그뒤 연구개발부 책임자가 되었다. 1941년 중동지역 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그는 나중에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연합국의 모든 공군 작전 지휘권을 행사했다. 1942년 기사작위가 수여되었다. 그는 다른 연합군과 협조해 적의 보급선을 폭격으로 차단하는 한편, 연합군 지상 부대를 전술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을 패퇴시키고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에 연합군이 성공적으로 진주(1943)할 수 있도록 했다. 1944년초 아이젠하워를 돕는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서유럽에서의 모든 연합군의 공군 작전을 통제했던 그는 노르망디 해변을 공중 봉쇄하고 연합국 교두보에 독일 증원부대가 도달하지 못하게 저지함으로써 초기의 성공을 재연해냈다. 독일 수송망을 폭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연합군의 진격 속도는 가속화되었다. 1946년 귀족의 지위에 올랐으며, 평화시 최초의 공군 참모총장과 공군 위원회의 선임위원으로 추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