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스톨 스카웃
'''브리스톨 스카웃(Bristol Scout)'''
초도비행 : 1914년 2월 23일
운용 시기 : 1914년~1916년
승무원 : 1명
전장 : 6.30 m / 전폭 : 7.49 m / 전고 : 2.59 m / 익면적 : 18.40 m2
중량 : 358 kg~542 kg
동력 : Le Rhône 9C 공랭식 9기통 로터리 엔진(80마력) 1기
최대속도 : 151 km/h
상승고도 : 4,900 m
상승률 : 3,048m까지 18분 30초
항속시간 : 2시간 30분
무장 : 루이스 경기관총 1정
설계 : 프랭크 반웰(Frank Barnwell)
생산수 : 374대
생산수는 그리 많지 않더라도 1차 대전 초반의 영국 전투기로 잘 알려진 '''브리스톨 스카웃'''은 원래 처음부터 전투기로 만들어진 기종은 아니었다. 그 설계는 전쟁 전에 인기를 끌기 시작한 에어 레이싱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경주용 레이서로 태어난 것으로, 작고 가벼운 기체에 로터리 엔진을 단발로 장비한 단좌 복엽기였다. 항공 여명기의 경량 스포츠기치고는 그 성능이 인상적이면서도 비행 성능도 안정적이었던 탓에 영국 해군과 육군 항공대에 의해 고속 정찰기(Scout)로 채택되었다. 초기 단좌기의 하나였던 브리스톨 스카웃은 약간의 개량을 거쳐 전투기로도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충분히 적기들에게 비해 성능 우위를 보였으나, 무장이 너무 빈약한데다 곧 프로펠러 동조 기관총이 나오기 시작하자 곧바로 구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운용이 시작된 시점에서만 하더라도 이 기체는 조종사들에게 사랑받던 기체였으며 그 영향으로 인해 영국 조종사들은 1920년대 초까지 한동안 단좌 전투기는 스카웃으로 부르고 있었다.
브리스톨 스카웃의 프로토타입은 1913년이 저물기 전에 프랭크 반웰과 해리 버스티드(Harry Busteed)가 서로 도와가며 설계를 완성시켰다. 처녀 비행은 1914년 2월 23일에 설계자 버스티드가 직접 조종해 성공했고, 3월에는 런던의 올림피아 전시센터에서 열린 에어쇼에서 일반에 공개되었다. 스카웃은 1913년에서 1914년 당시의 단좌 경량기에서 유행하던 레이서들과 같은 외형으로 빚어졌으며, 99 cm 너비의 랜딩기어와 겨우 1.5도의 상반각만 주어져 거의 수평 날개처럼 보이는 주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아래쪽을 냉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잘라낸 엔진 카울링 뒤로는 80마력짜리 7기통 로터리 엔진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직꼬리날개는 동체에 고정되는 부분이 없이 전체가 좌우로 움직여 방향타로 기능하는 방식이었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꼬리를 당대의 명전투기로 명성을 떨친 뉴포르, 모랑-소르니에나 독일제 포커 전투기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브리스톨 스카웃이 활약한 1914년에서 1916년은 전투기라는 신병기가 하나의 폼이 만들어지는 과도기였고, 이에 따라 스카웃에는 적기를 격추시키기 위한 무장을 장착하는 방법이나 운용법에 대하여 여러가지 다양하며 기발한, 때로는 엉뚱한 시도가 실제로 실험되었다.
처음에는 스카웃 B 2호기(RFC 번호 648)의 동체 아래에 2정의 소총을 달고, 하단 날개 좌우에도 각각 소총 1정씩이 프로펠러 회전면의 바깥쪽에 전방을 향해 장착되었지만, 아무도 이 상태로 적기를 격추한 조종사는 없었다.
영국 육군항공대(Royal Flying Corps : RFC) 제6스쿼드론 소속의 라노에 호커(Lanoe George Hawker : 1890~1916) 대위가 몰던 2대의 스카웃 C(기체번호 1609과 1611)에는 호커 대위가 직접 고안해 만들어낸 마운트에 의해 동체의 왼쪽에 루이스 경기관총이 장착되었다. 그것은 2대째 스카웃 B에 시도된 소총 장착 방법과 거의 동일한 위치였다. 라노에 호커는 1915년 7월 25일에 벨기에의 파스샹달(Passchendaele)과 질레베케(Zillebeke) 상공에서 스카웃 1611호기로 2대의 독일기들을 격추시키고 3대째는 전투 불능에 빠뜨려 물리치는 쾌거를 거두었다. 그 무공으로 호커 대위는 영국군 조종사로는 처음으로 공중전의 전과에 따른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처음에 제작된 24대의 영국 해군항공대(Royal Naval Air Service : RNAS) 소속 스카웃 C의 무장은 대부분이 루이스 기관총 1정을 프랑스제 전투기인 뉴포르 11처럼 상단 날개 위에 장착하는 대신 기수 상단에 올려놓는 잘못된 방식을 선택했다. 이 위치라면 기관총을 조준하기 좋았고 장전이나 탄창 교체 같은 조작을 하기 쉬운 배치였지만, 나중에 만들어진 동조기어가 없었던 탓에 종종 자신의 프로펠러를 맞춰 심각한 파손 사고를 일으키게 되어버렸다. 프랑스 조종사 롤랑 갸로(Roland Garros)가 모랑-소르니에 N 단엽기에 시도한 프로펠러 뒷쪽에 기관총탄을 튕겨내는 편향판을 그대로 흉내낸 1대의 스카웃 C(No.5303)에서 시험된 경우에는 큼지막한 스튜 냄비와 같은 프로펠러 스피너를 붙여야만 해서 장착된 로터리 엔진으로 유입되는 냉각공기를 방해하게 되어 자주 과열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총알로부터 프로펠러를 지키기 위한 편향 쐐기는 더 이상 시도되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는 독일의 체펠린 비행선을 격추하기 위해 영국 해군항공대의 스카웃 D에 란켄 다트(Ranken Dart)라고 불린 특수병기의 사용이 시도되었다. 체펠린 다트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그 무기는 탄두에 1파운드의 폭발물이 장전되고 공중에서 투하 가능한 화살형 폭탄이었는데, 말하자면 공대공 폭탄의 선조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챨스 프리맨(Charles Teverill Freeman) 중위가 몬 스카웃 D(No.8953)는 비행 갑판을 갖춘 증기선 빈덱스(HMS Vindex)호에서 날아오르는데 성공했고, 1916년 8월 2일에는 이 신무기로 독일 비행선 L 17의 격추를 시도했다. 이 공대공 무기는 스카웃 D 동체 내부, 즉 파일럿의 다리 뒤에 수직으로 놓인 2개의 파이프에 장전되었다가 투하되었다. 란켄 다트는 명중했지만 거대한 비행선의 외피에 구멍만 내고 부력을 제공해주는 내부 기낭에는 피해를 줄 수 없었을 뿐더러, 프리맨 중위는 빈덱스의 갑판에 착함할 수가 없어 바다 위에서 기체를 포기하고 뛰어내려야만 했다.
영국 육군항공대의 스카웃에도 동조기어가 딸린 기관총을 장착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중에 맥심 타입 빅커스 기관총과 동조기어를 조합시켜 큰 성공을 거둔 솝위드 펍 전투기와 비슷한 구상이 있었다. 먼저 1916년 3월에 스카웃 C의 후기 생산형 기체인 5313호기가 개조를 받게 된다. 그리고 또다른 스카웃 C 후기형과 스카웃 D 초기형을 합쳐 6대의 기체에도 5313호기와 같은 사양의 개조 작업이 가해졌지만, 이들 전투기에 장비된 빅커스-챌린저 동조장치는 기관총의 신뢰성이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 이 개조를 받은 스카웃이 테스트에서 사격한 모든 총알이 프로펠러 회전면을 통과해서 문제없이 발사된 것은 1916년 5월이었다.
1914년 5월에 처음 공개된 초기형은 원래 레이서였던 기체의 윙 박스를 교체하는 설계 변경을 통해 '''브리스톨 스카웃 A'''라고 불렸다. 방향타의 면적도 약간 넓히고 80 마력짜리 놈 람다(Gnome Lambda) 로터리 엔진은 앞이 막혀 있는 구형 카울링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그밖에도 수평 미익처럼 강도가 요구되는 부위는 금속 파이프로 프레임을 만들어 내구성을 높였다. 이 개조기가 1914년 5월 14일에 판보로 비행장에서 처음 떠올랐을 때 157 km/h라는 그 무렵 비행기로서는 매우 빠른 속력을 기록했다. 이 상태에서 시험이 어느 정도 진행된 기체는 여름에 2개의 에어 레이스에 참가했다. 프로토타입은 엔진을 빼고 아일랜드 귀족 카베리 경(Lord Carbery)에게 400파운드에 팔렸고, 남작은 이걸 사서 80마력 론 9C 로터리 엔진을 달고 에어 더비에 참가했다. 카베리 남작이 런던에서 파리까지 왕복하는 2번째 레이스에 참가했을 때, 가솔린이 떨어진 기체는 바다 위에서 엔진이 꺼져버렸고, 결국 벅(Buc) 비행장에 도착하기 전에 도버 해협에 불시착했다. 이 사고는 프랑스에 착륙했다가 이륙하기 직전에 연료를 절반만 급유한 실수 탓이었다.
브리스톨의 주임 엔지니어 프랭크 반웰은 229호와 230호기 2대의 스카웃 A에 놈-론 로터리 엔진을 달고 주날개 6번 리브 밑에 방향타를 보조하는 반원형 썰매를 붙여 안정성을 높이도록 고안했다. 큰 항력을 유발하고 엔진 냉각에도 도움되지 않던 카울링은 하단을 깊게 도려내졌다. 이 사양이 바로 1차 대전을 맞이한 스카웃이 군용으로 제작된 사양이었다. 영국군은 이 2대의 기체에 644, 648 넘버를 붙이고 1914년 9월 20일에 제식 정찰기로 채용하게 된다.
스카웃 B에서 별로 달라진 점이 없는 생산형인 타입 1은 영국 정부에서 1914년 11월 5일에 육군용으로 12대, 같은 해 12월 7일에 해군항공대에 공급하기 위해 24대의 발주를 넣었다. 이 형식은 스카웃 A와 같은 람다 엔진을 달고 있었다. 이 36대의 스카웃 C는 중심부가 뚫린 새로운 카울링을 덧씌우고 있었다. 초기형 스카웃은 연료탱크를 파일럿 어깨 바로 뒤에 두고 있었지만, C형에 와서는 좌석 뒤에는 높다란 페어링이 붙고 그 안에는 윤활유 탱크가 대신 자리잡게 되었다.
해군용 50대와 육군용 75대가 만들어진 스카웃 C의 후기형 사양은 설계에 조금 유연성이 더해져 람다 엔진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에는 놈-론 9C 엔진으로 바꿔 끼울 수 있게끔 처음부터 기수 구조에 반영되었다. 또한 중량 배분을 신중히 손보고 연료 탱크는 조종사의 앞쪽에 위치하게 파일럿 앞으로 옮겼다. 대체적으로 호평받은 C형이었으나, 일선 조종사들은 엔진 냉각 효과를 올리기 위해 카울링의 아래쪽을 잘라내버리는 제멋대로식 개조가 유행처럼 전해졌다.
마지막 형식이면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던 스카웃 D는 C형에서 개선할 부분에 관해 조종사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개량한 결과였다. 이 개량은 해군 조종사들의 요구로 먼저 시작되었는데, 해군이 처음 수령한 75대의 스카웃 중에서 17대를 골라 주날개의 상반각을 1.75도에서 3도로 더 치켜올리고, 방향타의 면적을 더 늘리며 보조 날개의 폭은 줄였다. 엔진 카울링은 아예 전면을 통해 실린더가 훤히 드러내어 냉각 공기의 유입이 더 수월해졌다. 이렇게 변경된 엔진 커버는 스카웃 B와 닮았지만 한 장의 철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개조는 출력이 100마력으로 향상된 놈 모노스파프(Gnome Monosoupape) 엔진을 장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개량된 D형은 해군이 80대를 주문하고 육군항공대는 130대를 발주해 스카웃 전투기를 대표하는 형식이 되었지만, 이때쯤 되면 브리스톨 스카웃이 가진 전투기로서의 생명은 끝나가고 있었다.
D형을 복좌 전투기로 개조한 브리스톨 S.2A도 2대가 만들어졌으나, 이것들은 후방에서 훈련기로만 쓰였을 뿐 실전에 동원되지는 않았다.
1916년 여름 시점에서는 육군과 해군항공대에 새로 만들어진 스카웃은 공급되지 않았으며 기존 기체들도 점차 물러나게 된다. 그 대신, 육군항공대에서는 프로펠러를 뒤에 달아 전방 사격이 자유로워진 에어코 DH.2 전투기가 스카웃을 교체하고 있었다. 최일선에서 물러난 몇 대의 기체는 이집트, 마케도니아,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같은 대영제국의 영향권에 놓인 지역으로 보내졌다.
군용으로 쓰인 마지막 스카웃은 영국 해군항공대에 속해 있던 스카웃 D 8978호기로, 영연방 국가인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 근교에 위치한 포인트 쿡 기지에서 1926년 10월까지 쓰였다. 브리스톨 스카웃은 전선에서 은퇴한 후에는 공식적으로는 훈련기로 분류되었더라도, 실제로는 거의 훈련 부대에 전달되지 않고 고위 장교의 개인 탑승기로 부대에 남아 있었다. 이는 스카웃의 매우 안정적이고 안락한 비행 특성 때문이었는데, 이처럼 조종사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있는 기종이었다.
1. 제원
초도비행 : 1914년 2월 23일
운용 시기 : 1914년~1916년
승무원 : 1명
전장 : 6.30 m / 전폭 : 7.49 m / 전고 : 2.59 m / 익면적 : 18.40 m2
중량 : 358 kg~542 kg
동력 : Le Rhône 9C 공랭식 9기통 로터리 엔진(80마력) 1기
최대속도 : 151 km/h
상승고도 : 4,900 m
상승률 : 3,048m까지 18분 30초
항속시간 : 2시간 30분
무장 : 루이스 경기관총 1정
설계 : 프랭크 반웰(Frank Barnwell)
생산수 : 374대
2. 배경
생산수는 그리 많지 않더라도 1차 대전 초반의 영국 전투기로 잘 알려진 '''브리스톨 스카웃'''은 원래 처음부터 전투기로 만들어진 기종은 아니었다. 그 설계는 전쟁 전에 인기를 끌기 시작한 에어 레이싱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경주용 레이서로 태어난 것으로, 작고 가벼운 기체에 로터리 엔진을 단발로 장비한 단좌 복엽기였다. 항공 여명기의 경량 스포츠기치고는 그 성능이 인상적이면서도 비행 성능도 안정적이었던 탓에 영국 해군과 육군 항공대에 의해 고속 정찰기(Scout)로 채택되었다. 초기 단좌기의 하나였던 브리스톨 스카웃은 약간의 개량을 거쳐 전투기로도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충분히 적기들에게 비해 성능 우위를 보였으나, 무장이 너무 빈약한데다 곧 프로펠러 동조 기관총이 나오기 시작하자 곧바로 구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운용이 시작된 시점에서만 하더라도 이 기체는 조종사들에게 사랑받던 기체였으며 그 영향으로 인해 영국 조종사들은 1920년대 초까지 한동안 단좌 전투기는 스카웃으로 부르고 있었다.
3. 개발
브리스톨 스카웃의 프로토타입은 1913년이 저물기 전에 프랭크 반웰과 해리 버스티드(Harry Busteed)가 서로 도와가며 설계를 완성시켰다. 처녀 비행은 1914년 2월 23일에 설계자 버스티드가 직접 조종해 성공했고, 3월에는 런던의 올림피아 전시센터에서 열린 에어쇼에서 일반에 공개되었다. 스카웃은 1913년에서 1914년 당시의 단좌 경량기에서 유행하던 레이서들과 같은 외형으로 빚어졌으며, 99 cm 너비의 랜딩기어와 겨우 1.5도의 상반각만 주어져 거의 수평 날개처럼 보이는 주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아래쪽을 냉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잘라낸 엔진 카울링 뒤로는 80마력짜리 7기통 로터리 엔진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직꼬리날개는 동체에 고정되는 부분이 없이 전체가 좌우로 움직여 방향타로 기능하는 방식이었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꼬리를 당대의 명전투기로 명성을 떨친 뉴포르, 모랑-소르니에나 독일제 포커 전투기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4. 전투기로 진화
브리스톨 스카웃이 활약한 1914년에서 1916년은 전투기라는 신병기가 하나의 폼이 만들어지는 과도기였고, 이에 따라 스카웃에는 적기를 격추시키기 위한 무장을 장착하는 방법이나 운용법에 대하여 여러가지 다양하며 기발한, 때로는 엉뚱한 시도가 실제로 실험되었다.
처음에는 스카웃 B 2호기(RFC 번호 648)의 동체 아래에 2정의 소총을 달고, 하단 날개 좌우에도 각각 소총 1정씩이 프로펠러 회전면의 바깥쪽에 전방을 향해 장착되었지만, 아무도 이 상태로 적기를 격추한 조종사는 없었다.
영국 육군항공대(Royal Flying Corps : RFC) 제6스쿼드론 소속의 라노에 호커(Lanoe George Hawker : 1890~1916) 대위가 몰던 2대의 스카웃 C(기체번호 1609과 1611)에는 호커 대위가 직접 고안해 만들어낸 마운트에 의해 동체의 왼쪽에 루이스 경기관총이 장착되었다. 그것은 2대째 스카웃 B에 시도된 소총 장착 방법과 거의 동일한 위치였다. 라노에 호커는 1915년 7월 25일에 벨기에의 파스샹달(Passchendaele)과 질레베케(Zillebeke) 상공에서 스카웃 1611호기로 2대의 독일기들을 격추시키고 3대째는 전투 불능에 빠뜨려 물리치는 쾌거를 거두었다. 그 무공으로 호커 대위는 영국군 조종사로는 처음으로 공중전의 전과에 따른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처음에 제작된 24대의 영국 해군항공대(Royal Naval Air Service : RNAS) 소속 스카웃 C의 무장은 대부분이 루이스 기관총 1정을 프랑스제 전투기인 뉴포르 11처럼 상단 날개 위에 장착하는 대신 기수 상단에 올려놓는 잘못된 방식을 선택했다. 이 위치라면 기관총을 조준하기 좋았고 장전이나 탄창 교체 같은 조작을 하기 쉬운 배치였지만, 나중에 만들어진 동조기어가 없었던 탓에 종종 자신의 프로펠러를 맞춰 심각한 파손 사고를 일으키게 되어버렸다. 프랑스 조종사 롤랑 갸로(Roland Garros)가 모랑-소르니에 N 단엽기에 시도한 프로펠러 뒷쪽에 기관총탄을 튕겨내는 편향판을 그대로 흉내낸 1대의 스카웃 C(No.5303)에서 시험된 경우에는 큼지막한 스튜 냄비와 같은 프로펠러 스피너를 붙여야만 해서 장착된 로터리 엔진으로 유입되는 냉각공기를 방해하게 되어 자주 과열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총알로부터 프로펠러를 지키기 위한 편향 쐐기는 더 이상 시도되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는 독일의 체펠린 비행선을 격추하기 위해 영국 해군항공대의 스카웃 D에 란켄 다트(Ranken Dart)라고 불린 특수병기의 사용이 시도되었다. 체펠린 다트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그 무기는 탄두에 1파운드의 폭발물이 장전되고 공중에서 투하 가능한 화살형 폭탄이었는데, 말하자면 공대공 폭탄의 선조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챨스 프리맨(Charles Teverill Freeman) 중위가 몬 스카웃 D(No.8953)는 비행 갑판을 갖춘 증기선 빈덱스(HMS Vindex)호에서 날아오르는데 성공했고, 1916년 8월 2일에는 이 신무기로 독일 비행선 L 17의 격추를 시도했다. 이 공대공 무기는 스카웃 D 동체 내부, 즉 파일럿의 다리 뒤에 수직으로 놓인 2개의 파이프에 장전되었다가 투하되었다. 란켄 다트는 명중했지만 거대한 비행선의 외피에 구멍만 내고 부력을 제공해주는 내부 기낭에는 피해를 줄 수 없었을 뿐더러, 프리맨 중위는 빈덱스의 갑판에 착함할 수가 없어 바다 위에서 기체를 포기하고 뛰어내려야만 했다.
영국 육군항공대의 스카웃에도 동조기어가 딸린 기관총을 장착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중에 맥심 타입 빅커스 기관총과 동조기어를 조합시켜 큰 성공을 거둔 솝위드 펍 전투기와 비슷한 구상이 있었다. 먼저 1916년 3월에 스카웃 C의 후기 생산형 기체인 5313호기가 개조를 받게 된다. 그리고 또다른 스카웃 C 후기형과 스카웃 D 초기형을 합쳐 6대의 기체에도 5313호기와 같은 사양의 개조 작업이 가해졌지만, 이들 전투기에 장비된 빅커스-챌린저 동조장치는 기관총의 신뢰성이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 이 개조를 받은 스카웃이 테스트에서 사격한 모든 총알이 프로펠러 회전면을 통과해서 문제없이 발사된 것은 1916년 5월이었다.
5. 스카웃 A
1914년 5월에 처음 공개된 초기형은 원래 레이서였던 기체의 윙 박스를 교체하는 설계 변경을 통해 '''브리스톨 스카웃 A'''라고 불렸다. 방향타의 면적도 약간 넓히고 80 마력짜리 놈 람다(Gnome Lambda) 로터리 엔진은 앞이 막혀 있는 구형 카울링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그밖에도 수평 미익처럼 강도가 요구되는 부위는 금속 파이프로 프레임을 만들어 내구성을 높였다. 이 개조기가 1914년 5월 14일에 판보로 비행장에서 처음 떠올랐을 때 157 km/h라는 그 무렵 비행기로서는 매우 빠른 속력을 기록했다. 이 상태에서 시험이 어느 정도 진행된 기체는 여름에 2개의 에어 레이스에 참가했다. 프로토타입은 엔진을 빼고 아일랜드 귀족 카베리 경(Lord Carbery)에게 400파운드에 팔렸고, 남작은 이걸 사서 80마력 론 9C 로터리 엔진을 달고 에어 더비에 참가했다. 카베리 남작이 런던에서 파리까지 왕복하는 2번째 레이스에 참가했을 때, 가솔린이 떨어진 기체는 바다 위에서 엔진이 꺼져버렸고, 결국 벅(Buc) 비행장에 도착하기 전에 도버 해협에 불시착했다. 이 사고는 프랑스에 착륙했다가 이륙하기 직전에 연료를 절반만 급유한 실수 탓이었다.
6. 스카웃 B
브리스톨의 주임 엔지니어 프랭크 반웰은 229호와 230호기 2대의 스카웃 A에 놈-론 로터리 엔진을 달고 주날개 6번 리브 밑에 방향타를 보조하는 반원형 썰매를 붙여 안정성을 높이도록 고안했다. 큰 항력을 유발하고 엔진 냉각에도 도움되지 않던 카울링은 하단을 깊게 도려내졌다. 이 사양이 바로 1차 대전을 맞이한 스카웃이 군용으로 제작된 사양이었다. 영국군은 이 2대의 기체에 644, 648 넘버를 붙이고 1914년 9월 20일에 제식 정찰기로 채용하게 된다.
7. 타입 1 스카웃 C(Type 1 Scout C)
스카웃 B에서 별로 달라진 점이 없는 생산형인 타입 1은 영국 정부에서 1914년 11월 5일에 육군용으로 12대, 같은 해 12월 7일에 해군항공대에 공급하기 위해 24대의 발주를 넣었다. 이 형식은 스카웃 A와 같은 람다 엔진을 달고 있었다. 이 36대의 스카웃 C는 중심부가 뚫린 새로운 카울링을 덧씌우고 있었다. 초기형 스카웃은 연료탱크를 파일럿 어깨 바로 뒤에 두고 있었지만, C형에 와서는 좌석 뒤에는 높다란 페어링이 붙고 그 안에는 윤활유 탱크가 대신 자리잡게 되었다.
해군용 50대와 육군용 75대가 만들어진 스카웃 C의 후기형 사양은 설계에 조금 유연성이 더해져 람다 엔진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에는 놈-론 9C 엔진으로 바꿔 끼울 수 있게끔 처음부터 기수 구조에 반영되었다. 또한 중량 배분을 신중히 손보고 연료 탱크는 조종사의 앞쪽에 위치하게 파일럿 앞으로 옮겼다. 대체적으로 호평받은 C형이었으나, 일선 조종사들은 엔진 냉각 효과를 올리기 위해 카울링의 아래쪽을 잘라내버리는 제멋대로식 개조가 유행처럼 전해졌다.
8. 스카웃 D
마지막 형식이면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던 스카웃 D는 C형에서 개선할 부분에 관해 조종사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개량한 결과였다. 이 개량은 해군 조종사들의 요구로 먼저 시작되었는데, 해군이 처음 수령한 75대의 스카웃 중에서 17대를 골라 주날개의 상반각을 1.75도에서 3도로 더 치켜올리고, 방향타의 면적을 더 늘리며 보조 날개의 폭은 줄였다. 엔진 카울링은 아예 전면을 통해 실린더가 훤히 드러내어 냉각 공기의 유입이 더 수월해졌다. 이렇게 변경된 엔진 커버는 스카웃 B와 닮았지만 한 장의 철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개조는 출력이 100마력으로 향상된 놈 모노스파프(Gnome Monosoupape) 엔진을 장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개량된 D형은 해군이 80대를 주문하고 육군항공대는 130대를 발주해 스카웃 전투기를 대표하는 형식이 되었지만, 이때쯤 되면 브리스톨 스카웃이 가진 전투기로서의 생명은 끝나가고 있었다.
D형을 복좌 전투기로 개조한 브리스톨 S.2A도 2대가 만들어졌으나, 이것들은 후방에서 훈련기로만 쓰였을 뿐 실전에 동원되지는 않았다.
9. 퇴역과 끈질긴 생명
1916년 여름 시점에서는 육군과 해군항공대에 새로 만들어진 스카웃은 공급되지 않았으며 기존 기체들도 점차 물러나게 된다. 그 대신, 육군항공대에서는 프로펠러를 뒤에 달아 전방 사격이 자유로워진 에어코 DH.2 전투기가 스카웃을 교체하고 있었다. 최일선에서 물러난 몇 대의 기체는 이집트, 마케도니아,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같은 대영제국의 영향권에 놓인 지역으로 보내졌다.
군용으로 쓰인 마지막 스카웃은 영국 해군항공대에 속해 있던 스카웃 D 8978호기로, 영연방 국가인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 근교에 위치한 포인트 쿡 기지에서 1926년 10월까지 쓰였다. 브리스톨 스카웃은 전선에서 은퇴한 후에는 공식적으로는 훈련기로 분류되었더라도, 실제로는 거의 훈련 부대에 전달되지 않고 고위 장교의 개인 탑승기로 부대에 남아 있었다. 이는 스카웃의 매우 안정적이고 안락한 비행 특성 때문이었는데, 이처럼 조종사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있는 기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