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업
1. 개요
楊業
(923 ~ 986)
오대십국시대의 북한, 송나라의 장수.
2. 행적
2.1. 북한 시절
본래 이름은 양중귀(楊重貴)로 아버지 양신이 인주를 점거하고 자사를 칭하면서 북한에 귀부했으며, 하동절도사 유숭과 관계를 맺기 위해 양중귀는 태원에 볼모로 갔다. 유숭의 양손자가 되어 이름을 유계업(劉繼業)으로 바꿨으며, 용맹으로 이름을 날리고 보위지휘사, 건웅군절도사 등을 지냈고 뛰어난 전공으로 무적(無敵)이라 불렸다.
968년에 유계원이 즉위하고 송나라의 군사가 오면서 북한에서 요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유계업은 시위도우후로 있으면서 풍진가와 함께 단백곡으로 출진했다. 969년에 단백곡에서 주둔했다가 정탐을 보낸 진정산이 송군에게 항복하자 풍진가와 함께 달아나 진양으로 갔고 이로 인해 병권을 빼앗겼다.
송군이 태원성을 공격해 포위하자 곽무위가 성을 나가 공격하려고 하면서 곽수빈과 함께 도우려 했는데, 유계업은 말로 인해 발을 다치면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들어갔다. 곽수빈도 길을 잃고 유계업을 찾다가 돌아가고 곽무위도 홀로 갈 수 없어 돌아가면서 공격은 무산되었다.
5월 2일에 태원의 남쪽 성에서 물이 빠져 성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태원성을 지켜 송군이 물러났으며, 979년에 송군의 공격으로 유계원이 항복했음에도 유계업은 성을 점거하고 항전했다가 송나라에서 유계원을 시켜 부르자 항복했다.
2.2. 송나라 시절
성을 양씨로 회복하고 이름을 업으로 하면서 영군위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10일에는 정주방어사에 임명되었다가 17일에는 지대주 겸삼교주박병마부서에 임명되었다.
980년 2월 20일에는 요나라의 군사를 안문관에서 격파해 부마시중 소다라를 죽이고 도지휘사 이중회를 붙잡았으며, 이 전투로 인해 요나라의 군사들은 그를 두려워 해 멀리서 깃발을 바라보면 군사를 이끌고 떠났다. 12월 8일에는 영운주관찰사, 지대주사가 되었고 주장으로 변방에 주둔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질투해서 비방하는 편지를 올려 배척해 양업의 단점을 말했지만, 태종은 묻지 않고 상주문을 봉함해 양업에게 보냈다.
986년에는 송나라에서 요나라를 치기 위해 북벌을 시도했으며, 2월에 반미의 부장이 되어 안문관으로 출진했다. 그러나 야율색진의 공격으로 비호에서 패하고 반미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운주, 삭주, 환주, 응주 등의 백성들을 보호해 남쪽으로 갔다.
양업은 요의 세력이 왕성하다는 것을 알고 대석로로 나아가 몰래 운주, 삭주의 수장에게 큰 군사가 대주를 떠나는 날을 기다렸다가 운주 사람들은 먼저 나서게 하면서 군사들을 응주로 가게 해서 요의 군사이 모두 오도록 유인하며, 삭주 사람들이 성을 나오게 해 석갈곡에서 매복해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감군인 울주자사 왕신, 순주단련사 유문유 등이 반대하면서 왕신이 수 만 명을 이끌고 겁먹는 것이라 여기자 불리한 형세에서 병사들을 함부로 죽거나 다치게 해서 공로를 세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했다.
송의 군사들이 대석로에서 삭주로 향하고 양업은 헤어지기 전에 반미에게 여러분은 자신이 적을 피한다고 책망한다면서 먼저 죽겠다면서 자신이 요군과 싸우다가 진가곡구로 오면 협공해달라고 했다. 양업은 야율색진과 싸웠지만 야율색진이 거짓으로 패한 척 하고 물러나면서 소달름이 복병으로 나타나 공격하자 패하고 낭야촌으로 물러났으며, 왕신은 양업의 회보를 받지 못해 요군이 물러난 것으로 알고 공로를 다투기 위해 진가곡구를 떠났고 반미는 왕신을 통제하지 못해 서남쪽으로 나아가다가 양업이 패한 것을 듣고 물러났다.
양업은 진가곡구에 도착했지만 사람이 없자 크게 통곡했으며, 수십 곳의 상처를 입고 병사들은 대부분 죽었다. 책을 읽을 줄 몰랐지만 충성스럽고 용감하면서 지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공격하고 싸우는 것을 연습하면서 병사들과 고생과 즐거움을 함께 했다. 대주의 북쪽은 고생스럽고 추워 사람들 대부분은 담요를 걸쳤지만 양업은 솜옷을 끼고 바깥에 앉아서 군사적인 일을 처리했는데, 옆에서 불을 지피지 않아 얼어죽을 지경이었지만 기쁜 것처럼 하면서 추운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정사를 처리하는 것은 간단하면서 쉬웠고 아랫 사람들에게 다가가 은혜를 베풀어 병사들을 즐겨 쓰였으며, 그가 실패하자 휘하에는 1백여 명이 있었고 양업은 각자 부모와 처자가 있으니 자신과 함께 죽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감격해 눈물을 흘렸고 살아서 돌아간 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아들인 양연옥, 악주자사 왕귀 등도 전사했다.
양업은 혼자 수백 명을 찌르고 말이 중상을 입어 나아갈 수 없자 숲 속으로 숨었으며, 야율희달이 옷자락의 그림자를 보고 활을 쏘자 양업은 낙마해 요군에 붙잡혔다. 양업은 황상께서 자신을 후대해 변방을 막아 적을 깨뜨리기를 기대했는데 간신들의 질투로 명령에 몰려 죽기에 이르렀으며, 왕사가 패배한 것이 쌓이게 했다면서 무슨 면목으로 살겠냐면서 먹지 않고 3일 만에 죽었다.
양업이 죽은 것을 들은 태종은 양업을 태위, 대동군절도사로 증직하고 집에 물품을 후하게 하사하면서 양업의 아들 여섯 명과 왕귀의 아들 두 명을 골라서 이들에게 관직을 주고 임용했다.
2.3. 미디어 믹스
양업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양가장연의는 수도 없이 중화권에서 무협물로 만들어졌다.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