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송)

 


'''북송 제2대 황제'''
'''太宗 廣皇帝 | 태종 광황제'''

'''묘호'''
'''태종(太宗)'''
'''시호'''
지인응도신공성덕문무예열대명광효황제
(至仁應道神功聖德文武睿烈大明廣孝皇帝)
'''연호'''
태평흥국(太平興國, 976년 12월 ~ 984년 11월)
옹희(雍熙, 984년 11월 ~ 987년)
단공(端拱, 988년 ~ 989년)
순화(淳化, 990년 ~ 994년)
지도(至道, 995년 ~ 997년)
'''생몰'''
939년 6월 7일 ~ 997년 5월 8일 (58세)
'''국적'''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북송(北宋)
'''재위'''
'''북송의 황제'''
976년 11월 15일 ~ 997년 5월 8일 (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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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
''''''
광의(匡義)→광의(光義)→경(炅)
''''''
정의(廷宜)
'''부모'''
부황 선조(宣祖) 조홍은(趙弘殷)
모후 소헌태후(昭憲太后) 두씨(杜氏)
황후 ||[[숙덕황후 윤씨|{{{#000,#fff 숙덕황후 윤씨(淑德皇后 尹氏)
]]
의덕황후 부씨(懿德皇后 符氏)
명덕황후 이씨(明德皇后 李氏)
원덕황후 이씨(元德皇后 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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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초기의 삶
2.2. 즉위 과정의 의문점
3. 재위 연간
3.1. 내정 사업
3.2. 오대 십국 종결과 통일
3.3. 요나라와의 전쟁
3.4. 친족 숙청과 후계자 선정
4. 평가 및 이모저모
5. 가족 관계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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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北宋)의 제2대 황제.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지인응도신공성덕문무예열대명광효황제(至仁應道神功聖德文武睿烈大明廣孝皇帝). 이름을 여러번 바꿨는데, 본명은 조광의(趙匡義)였으나 형인 태조가 황제가 되자 피휘하여 광의(光義)로 바꿨다가[1] 즉위 후에는 경(炅)으로 고쳤다. 송태조 조광윤의 동생으로 즉위 과정과 연이은 친족 숙청들은 후술되어있듯 상당한 의문점이 남지만, 이후 나라를 제법 괜찮게 다스려 발목 잡히진 않았다. 978년 오월의 항복을 받고, 다음해 북한(北漢)을 멸망시켜 오대십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2. 생애



2.1. 초기의 삶


송태종 조경은 939년 후당의 금군 장군이었던 조홍은(趙弘殷)과 두씨(杜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조광의(趙匡義)[2]이고 동복형으로는 조광제, 조광윤(후에 송태조)이 있고 동복동생(또는 이복 동생)[3]으로는 조광미(조정미)가 있다. 처음에 어머니 두씨가 태양으로부터 태양이 주는 것을 받고 임신했다고 하며 조광의가 태어난 날 밤에 붉은 꽃이 핀 날 밤에 붉은 기운이 솟아 올라 골목에 가득했다고 한다. 960년 진교의 변에 가담하였을때 형 조광윤을 설득하여 후주 공제에게 양위를 받고 송나라 건국에 기여했으며 이후 진왕(晋王)에 봉해졌고 개봉부윤 등에 임명되었다.

2.2. 즉위 과정의 의문점


송태조 조광윤이 죽던 날 밤 동생 조광의가 광윤의 침실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고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신하들이 방문 밖에서 바라보니 누군가 도끼를 방바닥에 찍으면서 "그렇게 하라!" 라고 외치는게 촛불 그림자로 비치고 있었다. 이후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진왕 조광의가 나와 "형님이 말씀하시기를 '장남 조덕소가 아직 어리고 천하 통일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니 어린 아들을 황제로 삼으면 후주 공제처럼 나라를 잃을까 두렵다. 아우가 제위를 물려받으라.' 라고 하셔서 내가 사양하니 형님이 도끼로 나를 위협하여 어쩔 수 없이 제위를 받겠다고 하자 형님이 숨을 거두셨다."라고 주장하며 제위에 올랐다. 이 고사를 '촛불 그림자와 도끼 소리'라는 뜻의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부 신하들은 태조가 아니라 태종이 도끼를 들고 형을 위협해 죽게 만들고 제위를 찬탈한 것으로 믿었는데, 이 두 형제가 서로 너무 닮아서 촛불의 그림자만으로는 누군지 구분할 수 없었던 것, 태조의 장남 조덕소가 어리기는커녕 오히려 한창 때라는 점이 이 의심의 근원이 되었다. 또한 태조 말기에 태조와 태종은 일부 사안에서 갈등 관계에 있었다. 속자치통감 7권에 따르면 송나라의 수도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태조는 처음에는 낙양, 그 다음에는 장안을 수도로 추진하였지만, 당시 개봉부윤이었던 진왕 조광의는 개봉을 주장하였고, 결국 황제인 태조가 아닌 조광의의 뜻이 관철되었다. 조광의가 개봉에 자신의 세력을 두고 있었기에 반대했다고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 후술되어 있지만 조덕소는 결국 제위를 노린다는 태종의 의심을 받고 자결하고 만다.
그 외에도 송 태종은 금궤지맹(金櫃之盟)을 언급했다. 송 태조 조광윤과 태종 조광의의 어머니인 태후 두(杜)씨가 961년에 임종할 때 아들들을 불러서 조광윤에게 물었다고 한다. "강산을 어떻게 얻었는가?"라는 물음에 조광윤이 조상님의 보우하심 덕분이라고 하자 두태후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그것은 주 세종어린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조광윤이 어린 아들이 아닌 장성한 동생 조광의에게, 조광의는 다시 동생인 조광미에게 황위를 계승시키고 , 조광미는 다시 조광윤의 아들 조덕소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했다.[4] 어머니 두태후의 말에 조광윤과 조광의 모두 이에 동의하여 이 내용을 기록하여 금궤에 넣어 보관하였다고 하며, 이를 금궤지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의문의 대상이다. 먼저 논란 속에 즉위한 조광의가 금궤지맹을 공개한 것은 황위에 오르고도 5년이 지난 후였다. 금궤지맹이 처음부터 있었다면 왜 진작 공개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5] 더구나 두태후가 사망했던 961년 당시 조광윤은 고작 34세였고, 장남인 조덕소는 이미 10세였다. 30대 중반밖에 안 된 조광윤이 조덕소가 장성하기 전에 사망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조광윤이 사망할 당시에 조덕소는 이미 26세였으니 "어린 아들을 황제로 삼으면..." 운운하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임종 직전에 있던 후주의 세종이 7살짜리 아들이었던 시종훈에게 제위를 물려준 상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3. 재위 연간



3.1. 내정 사업


송 태종 조광의가 즉위했을 때 송나라는 건국한 지 고작 17년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태종은 새로운 포부를 밝히고 형 조광윤이 미처 완수하지 못한 통일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조서를 내려 신하들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정사를 논하라고 명을 내렸으며 자신과 상주하려는 자들과는 직접 만나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군신들의 의견을 듣고 직언하게 했다. 아울러 "백성들의 이로움과 병폐 및 시정의 득과 실을 들으면 상서하여 직언하되, 숨김이 없도록 하라"는 명을 직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실행하게 했다.
송 태종은 과거제 정비에 힘을 쏟았는데 과거 거인들을 직접 시험했던 방법을 본받아서 시제를 내고 진사와 제과를 복사했다. 따라서 977년에는 1과에서 무려 500명이 합격해서 전에는 유례없는 인원이 선발되기도 했다. 이때 태종은 자신의 시종들에게 "짐은 박식한 인재를 시험에서 선발하되, 열에 다섯이 뽑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한둘에 그쳐도 (그들을) 정치 도구로 삼을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또 981년 차견원을 설치하여 상참관[6]으로서 외지에서 임지하다가 돌아온 신하들을 모두 차견원에서 '시험 성적 + 인품'에 따라 중서성에서 빠진 인원을 고려하여 임용케 했고, 태종은 모든 관리 시험의 임용과 제수에 관여했다.
그리고 991년에는 대리시, 형부 관리들이 마음대로 법을 운용하고 판결하는 것을 막고자 심형원을 설치하고 전국 각지에서의 판결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하여 기록, 날인 후 이를 대리시와 형부로 넘겨 검토케하고 황제에게 보고케 했다. 그리고 이를 황제가 다시 심형원에 검토한 것을 넘겨 상세히 심의케 한 뒤, 황제의 재결을 거쳐 중서성으로 넘기게 했다. 아울러 판결이 부당할 경우에는 재상이 이를 상주하게 하고, 따로 논의 후 결정케 했는데 이 조치들은 황제권을 강화하고 재상의 권한들을 황제가 가져오게 했다. 또한 형옥의 남발을 방지하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이를 백성이 두드리면 태종이 직접 이를 듣고 판단했다. 아울러 수도로 압송된 죄인들은 황제가 직접 심문했다. 실제로 993년 경기 지역의 농민 모휘라는 사람이 돼지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면서 신문고를 두드리자 태종이 이를 듣고 직접 돼지 값을 물어주기도 했는데 태종은 이때 재상과 신하들에게 '짐이 이런 사소한 일도 직접했는데 웃을 일이지만 이 마음으로 천하에 임하면 백성들이 원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태종은 재위 22년간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때까지 이 업무들을 도맡아 처리했고 종종 아침부터 일을 하느라 점심까지 거르기도 했다. 아울러 정사에 매진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냥과 주색을 삼갔는데, 매를 잡는 개들을 풀어주고 사냥을 하지 않았다. 반면 태종은 저녁에도 늘 책을 읽었고 가족들이 거주하는 동서 6궁에서의 유혹들을 피했다고 한다. 또 바둑을 자주 뒀고 전국 각지에서 고수들을 직접 초빙하는 등 바둑을 좋아했다고 한다.

3.2. 오대 십국 종결과 통일


송나라는 태조 조광윤 때인 963년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호북성의 형남 지방[7]을 합병했다. 뒤이어 965년에는 후촉(後蜀)을 병합했고[8] 971년에는 남한(南漢)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975년 십국 중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진 남당(南唐)까지 멸망시켰다. 따라서 이미 송 태조 생전에 남은 건 송나라 북쪽에 있는 북한(北漢)[9]과 남쪽에 위치한 오월(吳越) 정도였다.
태종은 후주 때부터 이어온 통일 사업을 계속 진행했는데 먼저 978년 항주 지방에 있는 오월은 군주 전홍숙이 스스로 나라를 들어 바치면서 멸망했다. 이에 태종은 전홍숙을 회해국왕(淮海國王)에 봉하고 수도 개봉으로 보내어 안락한 생활을 보내도록 했다고 한다. 이어 1년 뒤인 979년 지형이 험하고 거란과 인접해있는 북한[10]를 공격하여 멸망시켜버렸다. 이때 북한은 거란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고 요나라가 이에 응답해서 지원군을 보냈지만 미처 북한 방어군이 송나라군에게 맞서기 위한 전력이 완성되기 전에, 송나라군은 거란 구원군의 방해 없이 북한을 멸망시키고 당나라 멸망 후 약 70년만에 오대 십국 시대를 종식시켰다.

3.3. 요나라와의 전쟁


후진의 건국자였던 석경당이 거란(요나라)에게 후당을 멸망시키면서 지원의 대가로 바친 연운 16주(오늘날 베이징과 만리장성 사이 부근)는 오대 십국 시대 때부터 중국의 황제들에게 숙원 사업이었다. 당연히 송나라에게도 태조 때부터 연운 16주 수복은 두고 두고 숙원 사업이었다. 심지어 이후 벌어지는 정강의 변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을 정도. 따라서 태종 역시 요나라가 가진 연운 16주 탈환은 북방에서 기병 수급 등 현실적 이유까지 포함해서 반드시 되찾아야할 지역이었다.
이런 이유로 태종이 979년 5월(태평흥국 4년) 대대적으로 편성한 원정군은 강력했기에 거란을 계속 몰아붙었고 거란은 한때 연운 16주 포기도 고려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휘하 장군들이 송태종의 작전지시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행동하다 오히려 기구관에서 요나라에게 탈탈 털리고 만다. 이때 태종과 송나라 원정군은 처음에는 2개의 성을 공략했지만 남경(베이징) 공략에 실패했는데 태종 본인도 화살에 맞고 부상을 당했다. 게다가 태종이 전장에서 사망했다는 말들까지 나왔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수도 개봉에서 무주 공산의 틈을 노려 조카 조덕소를[11] 옹립하려는 움직임까지 발생했다. 이후에도 태종은 연운 16주 수복전을 펼쳤지만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조덕소 옹립 사건은 조덕소가 자결함으로써 끝이 나게 된다.

3.4. 친족 숙청과 후계자 선정


태평흥국 4년(979) 태종은 북한을 평정한 뒤 본인이 직접 대군을 편성해서 요나라와 전쟁을 펼쳤다. 하지만 송나라는 크게 패했고, 태종은 다리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은 채 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겨우 개봉으로 돌아왔다. 이때 태조 조광윤의 장남이자 태종의 조카인 연의왕 조덕소는 화가 나 있는 태종에게 '왜 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상을 주지 않으시냐'고 했다가, “네가 황제에 오르거든 그렇게 하라”며 그 자리에서 크게 혼이 났다.[12] 이렇게 태종에게 노여움을 산 조덕소는 궁에서 돌아온 뒤 불과 29세의 나이에 자결했다. 얼마 뒤, 조덕소의 자살 소식을 들은 태종은 조덕소의 유체를 안고 “멍청한 녀석아.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조덕소가 죽고 2년 후, 태조(조광윤)의 또 다른 아들이자 조덕소의 동생인 진강혜왕 조덕방이 혈기왕성한 22세의 나이에 식사 후 잠을 자던 중에 급사했다[13][14]. 이로써 태조 조광윤의 아들 중 태종 조광의의 제위에 직간접적으로 위협이 됐던 두 황자 모두 이세상 사람이 아니게 됐다. 하지만 태종이 자신의 아들 중 한명에게 제위를 물려주기에는 여전히 불안했다. 태종이 조카들을 제치고 즉위했던 명분인 금궤지맹 때문이다. 만약 모친 두황후가 아들들을 모아놓고 말한대로 한다면 태종의 뒤는 형제상속 원칙에 따라 동생 부도왕 조정미가 이어야 했다.
조홍은과 두황후 사이에서 947년에 태어난[15] 조정미의 본래 이름은 광미(匡美)였다. 하지만 그는 큰형 조광윤이 황제가 된 뒤, 작은형 조광의와 마찬가지로 피휘해서 이름을 광미(光美)로 바꿨다가 작은형이 즉위하자 다시 피휘하여 정미(廷美)로 바꿨다. 그는 작은형 조광의(태종)가 즉위한 뒤 개봉윤에 임명되었고 조야에서 회의할때 형 태종에 의해 앞에 배치되는 등 황제의 동생 이상으로 대접을 받았다. 따라서 조야에서는 태조, 태종의 아들들이 황자라고 불리고 있고, 두황후가 만들어줬다는 제위계승원칙때문에 개봉윤이 된 조정미가 후계자가 될거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낭설이었다. 태평흥국 7년(982), 태종 입장에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가장 큰 위협요소로 인식되던 동생 조정미가 숙청됐기 때문이다. 3월 조정미는 조정에서 태종의 심복들인 시우석, 왕현에 의해 “황제의 동생인 조정미가 반란을 꾀한다”는 내용의 모함을 받아 개봉윤에서 파직되고 서경유수로 쫓겨났다. 이어 4월 재상 조보가 다시 한번 “조정미가 모반을 꾀한다”고 태종에게 은밀히 주청했고, 태종은 조보의 주장을 받아들여 조사를 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5월 조사를 받은 조정미는 부릉현공으로 강등된 뒤 방주로 유배됐다. 방주로 쫓겨난 그는 귀양지에서 2년 뒤인 옹희 원년(984년) 불과 38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조정에서 조정미가 모반혐의가 있다고 하였을 당시, 숙부 조정미의 억울함과 태종의 비정함을 토로했던 태종의 첫째 아들 조원좌(趙元佐)는 이듬해인 옹희 2년(985년)에 조정미가 방주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화를 못 이겨 궁궐에 불을 질러 폐태자가 되었다[16]. 조원좌가 전술한 사건으로 인해 폐서인되고, 태종에게 사랑받던 차남 조원희(趙元僖)는 이 사건 이후 992년에 병으로 죽었는데 사후 조원희의 집안 내부에 가정불화가 있었다는 사실[17]이 드러나 조정을 발칵 뒤집기도 했다.
태종의 뒤는 삼남 조원간(趙元侃)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진종이다.

4. 평가 및 이모저모


젊은 시절 형 조광윤이 제위에 오르는 것을 주도했으며, 송나라가 건국한 이후 이 진행하던 절도사 제도의 폐지를 본인이 즉위한 뒤 완료하여 번진 체제를 종식시켰고, 문치주의를 완료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의 토벌에 실패하고[18] 부상을 입어 997년 58세를 일기로 붕어했으며 영희릉에 안장되었다. 그의 재임 중에 서하가 일어나는 등 그가 죽은 후에 송의 군사력 약화는 심화된다.
그러나 문치주의의 기틀을 다져 훗날 송진종, 송인종 시대의 "함평-경력의 치"라는 송나라 내부 태평성대의 기반이 되었으며 송조 전체의 뼈대를 잡고 기반을 쌓은 인물이다. 후일 송사대서라고 불리는 태평어람, 태평광기, 문원영화 등을 완성시켰다.[19] 괜히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게 아니다.
여담으로 남당의 후주(後主) 이욱을 독살해버렸다. 남당은 송 태조 조광윤에 의해 멸망했고, 마지막 황제 이욱은 송나라의 수도로 끌려와서 살고 있었는데, 자기 생일날 고향을 그리워 하는 시를 지었다가 격노한 송 태종에게 독살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때 태종은 견기약이 든 술인 견기주(牽肌酒)를 비밀리에 보냈는데 음식과 같이 보낸 견기주를 마신 이욱은 전신 근육에 마비가 오기 시작하고 음식을 삼키기 힘들고 입을 꽉 다물고 열지 못하며 마지막으로 숨을 한 번 깊이 몰아 쉬더니 어깨와 엉덩이가 붙어 죽어버렸다고 한다.[20]
형의 죽음에 대한 의혹, 태조의 아들들의 죽음, 동생 숙청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명군이지만 뒤가 구린 부분이 꽤 많은 군주이기도 하다. 이와 상관은 없겠지만 후에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한 뒤 태종의 자손인 송고종은 후손을 보지 못하고 또한 다른 물려줄만한 친척이 없어서 결국 태조의 자손인 송효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게 된다.[21]
개인적으로는 굉장한 독서가였으며 1000권의 태평어람을 하루마다 시간 날때 틈틈이 3권씩 탐독하여 1년만에 읽으니 신하들이 황제의 건강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신하들에게 '책은 펼치기만 해도 이득이 있다'고 말한 것이 오늘날 개권유익(開卷有益)이라는 고사성어로 전해진다.
983년에 동대사의 중 조현(朝見)을 받으면서 천황이 여태까지 바뀐 적[22] 벼슬세습 감탄하였다.

이 그 국왕하나의 성으로 전해 이어지고[23]

신하 세습함을 듣고 (이것으로) 밀마암아 탄식하며 재상[24]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들은 섬오랑캐일 뿐인데 도리어 임금의 자리가 세습됨이 멀고 오래며 그 신하도 또한 이어지며 세습되니 끊어지지 않으니 이것은 아마도 옛날의 도요. 중국당나라 끝의 부터 천하가 분열되고 후량후주를 비롯한 오대도 존속 기간이 오히려 짧았고 대신도 대대로 녹을 세습하는 후손이 이어질 수 있음이 드물었소. 짐이 비록 덕이 지나간 에게 부끄럽지만 늘 밤낮으로 고마하고 두려워하며 다스림의 근본을 조사하여 구하고 조널이 게으르게 굴지 않고 무궁한 업을 세워 오래 갈 수 있는 법을 드리우고 또한 자손의 계책으로 삼게 하고 대신의 후손으로 하여금 녹봉과 벼슬을 세습하도록 하리니[25] 이것이 짐의 마음이오."
(上 聞 其國王 一姓傳繼 臣下 皆世官 因歎息 謂 宰相 曰 "此島夷耳 乃世祚遐久 其臣 亦 繼襲不絶 此蓋古之道也. 中國 自唐季之亂 宇縣分裂 梁·周 五代 享曆尤促 大臣世胄 鮮能嗣續. 朕 雖德慚往聖 常夙夜寅畏 講求治本 不敢暇逸 建無窮之業 垂可久之範 亦以爲子孫之計 使大臣之後世襲祿位 此朕之心焉.")
송사』, 권491, 열전 제257, 외국7, 일본국

양문호장전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송태종의 치세는 고려 경종(975~981) 성종(981~997) 의 치세와 겹친다

5. 가족 관계


태종 조광의는 숙덕황후 윤씨를 첫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윤씨는 송 건국 이전에 죽고, 이후 명문가 출신이자 위왕 부언경의 딸 의덕황후 부씨[26]와 재혼하였다. 의덕황후 부씨는 태종이 즉위하기 이전인 975년에 죽어서 즉위 이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이후 이처운의 딸인 명덕황후 이씨를 맞아들여 황후로 책봉하였다. 진종의 모후였던 원덕황후 이씨는 본래 태종의 부인으로 책봉되었으며 977년에 세상을 떠났고, 진종이 즉위하면서 현비로 추봉되었다가, 황후로 추존되었다.
태종에게는 9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었던 조원좌는 상술한 사건으로 인해 폐서인되다가 진종 즉위 이후 복권되었고, 차남이었던 조원희는 조원좌 사건 이후 7년 뒤에 병사, 셋째 아들이 진종, 그 다음으로 조원걸, 조원악, 조원분, 조원칭, 조원엄, 조원억이 있었다. 조원억은 태종의 다른 황자들에 비해 일찍 요절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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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匡)자가 돌림자였기 때문이다.[2]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3] 어머니가 두황후가 아니라 조광윤의 유모가 생모라는 말도 있다.[4] 쉽게 말해서 형제 상속 후 다시 태조의 아들이 뒤를 이어야 한다는 말이다.[5] 따지고보면 애당초 금궤에 넣고 비밀로 한 이유부터가 의문이다. 황위의 계승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편이 유리하다.[6] 송나라 초 상참관 제수는 모두 상서성에서 결정했다.[7] 삼국지에서 나오는 그 유명한 형주 지방이다. 당시 송나라는 이 곳을 얻으면서 10국들이 연합하고 힘을 모으지 못하게끔 할 수 있었다.[8] 후촉 병합은 사천 지방의 풍부한 물산을 얻어 이를 전쟁 비용을 보충하게끔 해주었다. [9] 이 명칭은 오늘날 학자들이 구분하기 위해 부르는 명칭이다. 당시에는 그냥 한(漢)이라고 했다.[10] 오늘날의 산서성 일대에 있었다.[11] 송 태조 조광윤의 장남이자 송 태종에게는 조카.[12] 다만, 태종이 이렇게 별 것 아닌 일에 과민반응을 보인 것은 이유가 있다. 전술한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송나라가 대패하면서 전선에 나가 있던 송태종의 행방이 잠시 묘연했을 때, 조정 일부에서는 태종이 전사한 것으로 추측하고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덕소는 당연히 유력한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이었다.[13] 기록에 따르면 평소 먹성좋고 식탐 많은 조덕방이 욕심껏 돼지비계와 고기들을 잔뜩 먹고 자택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기록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조덕방 역시 형 조덕소와 마찬가지로 죽음에도 태종이 연관되어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 있다.[14] 조덕방의 후손들이 바로 남송 시대에 다시 송조의 황통을 잇게 되는 조광윤계 황제(효종, 광종, 영종)들이다.[15] 일설에 따르면 조정미의 어머니는 사실 두황후가 아닌 조광윤의 유모이고 그가 이복동생이라고 전해진다.[16] 폐태자 조원좌의 주장처럼 당시에도 조정미 숙청 사건은 시우석과 왕현의 고발, 재상 조보의 주청 모두 그 과정과 근거가 석연치 않다는 의심들이 있었다. 또한 태종이 이들의 주장을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이고 조정미의 혐의를 인정하면서 동생을 유배보내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금궤예맹을 주장하며 즉위한 태종이 심복들을 통해 아들들에게 걸림돌인 동생 조정미를 모반죄를 뒤집어 씌워 숙청했다는 의견도 있다. 조원좌는 태종 사후 동생인 진종이 즉위하면서 복권되었다.[17] 정확히 말하자면 애첩 장씨에 대한 문제였다. 태종은 차남 조원희를 매우 아꼈는데 병으로 요절하자 소성태자(昭成太子)라는 시호를 내리고 밤마다 시를 지으며 죽은 차남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죽은 아들의 애첩 장씨가 조원희를 현혹하여 집안에서 전횡을 일삼은 사실들이 태종에게 보고되었다. 내용에는 ‘장씨가 노비를 때리고 자신의 하인을 때려 숨지게 한 일이 조원희가 모르게 벌어졌다’, ‘장씨가 개봉 서불사에 부모의 혼령을 모시고 참월례제복을 입은 사실’ 등이 있었다. 보고를 들은 태종은 즉시 조사케했는데 모두 사실로 밝혀지자 크게 화를 내며 당장 장씨 부모의 묘를 파괴해버리고 장씨를 죽이게 했다. 따라서 장씨는 즉시 교살되었고 그 가족들도 모두 유배형에 처해졌다. 또 조원희의 측근들도 좌천되거나 유배형에 처해졌다.[18] 천하를 통일하고 그 기세로 를 멸망시키려고 했지만 완패하고 만다. 게다가 이 전쟁에서 화살을 맞아 입은 부상이 나중에 재발해서 붕어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한다.[19] 나머지 하나인 책부원구는 송 진종 때 만들어졌다.[20] 스트리크닌strychnine 또는 파상풍의 작용과 비슷한 걸로 봐서, 마전馬錢에서 추출한 독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21] 후손이 없어서 그 대가 끊기진 않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황위 계통이 끊겼다는 이야기. 당장 송 태종의 후손으로는 남송 영종 때 재상인 조여우(趙汝愚)가 있는데 이 사람은 폐태자 조원좌의 후손이다. 조원좌는 태종의 장남이자 진종의 동복형으로 숙부인 조정미가 아버지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죽자 혈육들에게 한 방법에 크게 반대하다가 궁궐에 불을 지르고 결국 폐태자가 되었다.[22] 광복 이후 학자들이 바뀐 적이 있다며 여러 설을 내놓기는 하지만 모두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다.[23] 일본 황실은 성이 없는데 하나의 성이 어떻게 있겠냐는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성은 부계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나의 부계 혈통이라고 이해하면 된다.[24] 이 때 재상은 동중서문하평장사인데 983년이면 조보(趙普) 아니면 송기(宋琪)다.[25] 우리 왕조만 영원하길 바란다고 하면 듣는 재상이 속상할테니까 너도 자자손손 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이 정도 립서비스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26] 북송 이전의 왕조였던 후주세종이 맞이한 두 황후의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