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호(송나라)

 


梁顥
(963년 ~ 1004년 6월)
북송의 인물로 자는 태소(太素). 양문도(梁文度)의 아들. 운주(鄆州) 수성(須城) 사람. 염씨의 남편.
양연(梁涓)의 증손자로 양유충(梁惟忠)의 손자이다. 부친 양문도는 자가 환연(焕然)으로 양호와 같은 운주 수성 사람이다. 양인(梁仁)으로 불렸으며 북송의 상서랑(尙書郞)을 지냈다. 양문도는 양호가 태어난지 얼마안 된 964년, 30세의 나이로 요절 했는데 당시 양문도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양몽(梁蒙), 둘째가 양단(梁彖)、셋째가 양상(梁象), 넷째가 바로 양호였는데, 양호는 송태종 치세 기간인 985년에 장원(狀元)으로 급제해 대부(大府), 관찰부관(觀察推官)을 지냈는데 이 때가 23세였다.
987년에는 소동이 일어나 호단(胡旦), 조창언(趙昌言)과 함께 좌천되었다. 이후 조서가 내려져 입경(入京)했고, 관직을 옮겨 중승(中丞)으로 복직되었다.
이후 양호는 부추관(府推官), 삼사관(三司關), 서도판관(西道判官)에 봉해졌고 이후 관직을 옮겨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다. 997년, 양려(楊勵), 주태부(朱台符), 이약종(李若拙)과 함께 급제해 998년, 출사해 청정잠(聽政箴)을 헌상했고 이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지냈다. 1004년, 양호는 개봉부윤(開封府尹)을 지냈는데 그 해 6월, 갑자기 급병에 걸려 결국 급사하니 향년 42세였다.
양호와 염씨 사이에서는 총 3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첫째가 양고(梁固), 둘째가 양술화(梁述和) 셋째가 양적(梁適)이었다. 장남 양고는 987년 생으로 자가 중견(仲坚)이고 아버지와 같이 장원으로 급제해 벼슬을 지냈는데 가문의 전통인지 양고도 겨우 33살의 어린아이로 사망하니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