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전투

 



'''석주관 전투'''
'''시기'''
1592년 5월~6월
'''장소'''
조선 전라도 구례읍 석주관
'''원인'''
왜군의 경기도 침공
'''교전국'''
조선 [image]
일본 [image]
'''지휘관'''
원호
<^|1> 고니시 유키나가
'''병력'''
불명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일본군의 진격 일시 저지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전투 이후


1. 개요


임진왜란 초기 일어난 전투이다.

2. 배경


강원도 조방장으로 있던 원호는 일본군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휘하 병력을 이끌고 평해에 다다랐으나, 일본군이 이미 조령을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한다. 그리고 여주로 향해 인근의 향병을 모집하여 병력을 충원하였다.[1]

3. 전개


우선 원호는 여강에 주둔한 적을 쳐서 섬멸하고 더 많은 적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 이에 고니시군은 한성으로 향하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그런데 강원 감사 유영길이 갑자기 원호를 부르자 원호는 하는 수 없이 돌아갔고, 고니시군은 그제야 강을 건넜다.
6월, 원호가 다시 여주에 돌아온 이후 병사들을 다시 모았고, 구미포에 둔진한 일본군을 새벽을 틈타 기습하여 50여명의 목을 베었다. 더불어 마탄에서 많은 일본군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천부사 변응성과 함께 일본군을 격파하여 원주로 향하는 적의 길을 봉쇄하는데 성공했다.

4. 전투 이후


하지만 이후 원호는 또 강원 감사 유영길의 호출을 받았고, 강원도 금화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파하라는 명을 받는다. 원호는 내키지 않아하면서도 금화로 향했지만 일본군이 미리 알고 병력을 매복시켜 놓아 원호는 전사하고 병력도 대부분 탈출하지 못했다. 이로서 관동으로 향하는 일본군의 길이 뚫려 강원도까지 일본군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 여주 전투에서 원호가 일본군에게 연전 연승하면서 이천, 여주, 양근, 지평의 사람들은 일본군 선봉대의 칼날에서 피해갈 수 있었다.
[1] 선조실록에 원호가 병사가 없었는데 도망한 이들을 모아 일본군과 싸웠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여주 인근에 제 위치를 지키지 않고 도주한 향병들을 모집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