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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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西行長(こにし ゆきなが, 소서행장)
(1558년[1] ~ 1600년 음력 10월 1일, 양력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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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가의 가몬, 나카무스비기온마모리(中結祇園守)[2]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가톨릭 신자
2.4. 정유재란
2.5. 세키가하라 전투 그리고 최후
3. 평가
4. 가토 기요마사와의 관계
5. 음모론
6. 기타
7.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일본 전국시대 무장. 기독교도(키리시탄) 다이묘 중 하나로 유명하며, 세례명아우구스티노(Augustino).[3]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의 선봉장이라 국내에서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무장 중 가토 기요마사와 더불어 매우 유명한 인물. 물론 역사책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당시 조선에서도 일본 장수 중에서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임진왜란 관련 조선 측 사료에서는 소서행장(小西行長)이나 그냥 행장(行長)이라는 표현으로도 등장한다. 다른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와는 앙숙지간이다. 자세한 것은 밑의 내용을 참고.
반면 일본에서는 전국시대 일본의 장수들 중에서는 한국에 알려진 것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전국시대 관련 매체에서 종종 비중있게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임진왜란의 선봉장보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는 편이다. 임진왜란 때 악명을 떨쳐서 한국사에선 존재감이 뚜렷하지만, 어디까지나 도요토미가 자신의 정권을 떠받칠 차세대 자원으로 육성하던 젊은 다이묘로, 임진왜란 개전 당시 30대 초반이었다.

2. 생애



2.1. 유년기


본래 사카이[4]의 상인의 아들이자 자신도 상인으로서 교토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고니시 야쿠로였다고 한다. 최초 우키타 나오이에를 섬겼으며, 주로 외교시의 사자로 활동하였다. 1581년 우키타 나오이에가 사망한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발탁되었다. 히데요시 밑에서는 후나부교(船奉行)로서 수군을 통솔하였고, 다이묘가 된 것은 1585년이다. 상인 시절에는 약종상(藥種商), 즉 약재를 주로 취급하였다.

2.2. 가톨릭 신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는[5]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고니시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가톨릭 신자였다. 고니시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고,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특히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에게도 가톨릭을 믿으라고 권해서 세례성사를 받게 했고, 요시토시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예수회에 입회해 사제가 되었다. 그의 사촌 역시 세례를 받아 안토니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6]
고니시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의 난의 진원지가 된다.

2.3. 임진왜란


임진왜란 이전에는 대마도주인 사위 소 요시토시의 신변과 관련된 무역 문제[7]와 자신의 가톨릭 신앙 등의 이유로 침략을 반대하던 쪽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과 전쟁을 막기 위한 시도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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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뜻을 꺾는 데 실패하자 굳이 전쟁을 하겠다면 선봉에 서서 싸우겠다고 자원, 라이벌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보란듯이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 수도 한성을 일본군 중 가장 먼저 점령하고 평양까지 북상하였다.[8]
그러나 무리한 진격으로 공세종말점에 이르면서 평양에서 시간을 허비하게 되면서 의주에 있던 선조를 잡는데도 실패하고 남쪽의 조선 각지에서 군세를 수습한 조선 육군과 의병의 승리로 어려워지는 전세 상황.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 의한 보급문제와 명나라군 등의 등장으로 물러나게 된다. 한성까지도 겨우 후퇴하였고, 행주산성에서 권율의 3천 병사에게 대패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총대장인 우키타 히데이에의 잘못이 크다. 해당 항목 참조.
고니시의 한 달간의 체류에 대해서는, 상인 출신이기에 가진 한계[9]라는 설과 고니시의 반전 의사라는 설, 보급부족 등의 설도 있다.
하지만, 평양까지의 빠른 진격으로 인한 반대급부로 병력들이 이미 상당히 지쳐있다고 보는 것이 진정한 원인으로 보는 것이 최근 견해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조선군들을 계속 상대하면서 경상도부터 평양까지의 긴 거리를 보군으로 단기간에 돌파한다는 것부터가 상당한 부담이었고 평양성 점령 후도 부상자가 상당하였다. 여기에 이순신의 활약으로 인해 수로를 통한 병력 지원과 식량 보급 문제에도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이는 당시 고니시군의 진격 속도를 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선조수정실록 26권의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번째기사를 참조하면 4월 14일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부산진 전투). 또한 선조수정실록 26권의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6번째기사를 참조하면 27일의 이튿날(28일) 신립이 패배하여 전사한다(탄금대 전투). '''고작 14일 만에''' 고니시군은 부산에서 충주까지 진격한 것이다. 이후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일 경신 7번째기사를 참조하면 5월 3일에 도성에 왜적이 침입하니 이양원과 김명원이 퇴주했다고 하였다. '''20일도 안 되어 한양이 털렸다.'''
고니시군의 진격이 20일에 거쳐 이루어졌고, 부산에서 한양까지 400km라고 잡으면, 왜군은 1일에 20km 진격한 꼴이다. 일반적으로 다이묘들이 치고받던 일본 내부와 달리, 조선은 일본인과 어떤 문화적, 민족적 동질감도 없는 완전한 적지이다. 거기에 더해 고속도로라도 있고, 터널도 있는 현대와는 달리, 당시 일본군은 한양에 진격하려면 무조건 소백산맥을 깡으로 넘어야 했다. 산지가 평지보다 많은 국토 특성상 산악행군에 익숙하고,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잦은 전쟁으로 인해 단련된 일본의 정예병이라도 이러한 악조건 내에 1일 20km꼴로 진격한 것은 어마어마한 진격속도라 볼 수 있으며, 객관적으로 보면 선봉장으로서 이를 성공시킨 고니시, 가토의 군사적 능력은 상당하다. 하지만 당시 일본군의 전략 목표가 조선의 도성을 함락해 선조를 잡는 것이었다. 단기간내 한양 함락을 목표로 작계가 구성된 상황이므로 선조가 파천이라는 필살기를 써서 도망가서 일본군이 선조를 잡는 것에 실패한 시점에서는 공세종말점이 올 수밖에 없다. 워낙 일본군 입장에서는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국가방위체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면 20일 만에 한양을 함락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평양까지 더 진격해 쉰 것이라 오히려 대단하다면 대단한 것이다.
류성룡징비록에 따르면 평양성을 함락한 고니시는 의주에 있던 선조에게 “이제 우리 수군 10만이 서해로부터 오게 되는데 대왕의 행차는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도발적인 서찰을 보낸다. 애초 일본군의 전술은 육군과 수군이 병행하는 수륙합동작전이었다. 육군이 빠르게 조선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면 거기에 맞춰 수군이 손실된 병력과 식량을 보급해줘야 했으나 한산도대첩으로 인해 일본 수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만다. 류성룡 역시 징비록에 “왜군의 한 팔을 꺾었기 때문에 비록 고니시가 평양을 점령했어도 군세가 외로워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였다.(중략) 또한 명나라 군사가 육로로 와서 구원하여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이것도 모두 한산도 해전의 공적이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애초 일본군은 조선에서 나는 식량으로 어느정도 자급자족은 가능했다. 하지만 손실된 병력을 충원하기가 어려웠고, 병력 충원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명나라의 개입과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는 전쟁으로 인해 섣불리 북진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적이 경성 백성을 대량 학살하였다. '''행장(行長) 등이 평양의 패전을 분하게 여긴 데다가 우리나라 사람이 밖에 있는 명나라 군사와 몰래 통하는가 의심하여 도성 안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다.''' 오직 여인들만이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남자들 중에는 혹 여자 옷으로 변장하고 죽음을 면한 자도 있었다. 공공기관의 건물이나 개인의 가옥도 거의 불태워버렸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월 1일 #

성중의 유민들은 백에 한둘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생존자도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 안색이 귀신과 같았으며, 사람과 말이 즐비하게 죽어 썩는 냄새가 성 안에 가득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코를 막고 다녀야 했다. 성 안팎에는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공사간의 집들은 하나같이 비어 있었으며 오직 불탄 기왓장들뿐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4월 1일 #

제4차 평양성 전투 이후 조명 연합군에게 평양성을 빼앗기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분풀이로 여성을 제외한 한양에 있던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다. 공공기관의 건물이나 개인의 가옥도 거의 불태워버렸다.
이후 전쟁이 늘어지기 시작하자 이시다 미츠나리와 함께 명나라와의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고니시는 말빨로 한 이름 하는 명나라의 심유경과 함께 열심히 교섭을 해봤으나, 일본의 완전 철군 및 사과를 요구하는 명나라와 조선 8도 중 남쪽 4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를 요구하며 명나라의 황녀를 천황의 후궁으로 삼겠다고 주장하는 일본 사이에 강화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2.4. 정유재란


결국 고니시와 심유경이 양쪽 정부 모두에게 거짓을 고하고 명나라에게는 모든 요구조건이 수락되는 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일본 왕 책봉을 내리는 수준으로, 일본에는 명나라가 마치 일본을 인정한 것처럼 사기를 쳤다. 도요토미가 문맹임을 이용한 대사기극이었으나… 결국 발각,[10] 심유경은 목이 잘리고 고니시는 마에다 토시이에, 요도도노 등의 간청으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다. 다만 최근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이건 야사고, 실제로는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 책봉식을 받은 뒤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뒷통수를 친 것이다. 그러니 무사했던 것.
이후 고니시는 평소 원수 같던 사이인 가토 기요마사를 조선의 손을 빌어 처리하고자 가토의 상륙 정보를 조선 조정에 올리고 이는 상상 이상의 수확을 거두게 된다. 바로 이순신을 파직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사실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일본 측 사료가 적은지라 이 시기 고니시의 의도를 완벽하게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고니시가 이간계를 써서 이순신을 모함하는 데 성공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고 각종 매체에서도 이런 식으로 그리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런 문제는 양국 간의 교차검증을 해야 하는 문제라 고니시의 의도를 함부로 단정짓긴 어렵다.
고니시를 부정적으로 보는 쪽은 고니시가 일종의 반간계를 써서 이순신을 모함하고 조선 수군의 전력 약화에 성공했다고 본다. 가토 기요마사와 아무리 정적 관계라고는 하나 그래도 같은 편에서 싸우는 아군이므로 히데요시 몰래 제거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다시 둘로 해석이 나뉘는데, 하나는 가토 기요마사는 아무 것도 몰랐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니시가 독자적으로 일을 계획했다는 설이다. 이 경우 가토에 대해선 고니시가 고의로 죽일 생각은 아니었으나 '이걸로 이순신을 처리하면 대성공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눈엣가시인 가토를 죽일 수 있으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고니시가 '우리 둘 사이가 나쁘다는 걸 잘 이용하면 저 웬수 같은 이순신을 처리할 수 있다. 어차피 실패해도 가토 당신이 손해볼 일은 없으니 악감정은 잠깐만 접고 한 번 해보자'라고 설득[11]하여서 가토가 미끼 역할을 받아들여 고니시와 가토가 사전에 이 모략을 협의하였다는 설이다.
고니시를 우호적으로 보는 쪽은 애초에 전쟁에 반대였던 고니시가 단지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 주작질이 모두 탄로났다는 이유로 갑자기 전쟁에 우호적으로 바뀔 사람이 아니었다고 본다(죽을 때조차도 할복을 거부할 정도였던 사람이니). 따라서 화친 실패에 결정적 역할을 한 가토 기요마사를 말 그대로 조선 수군의 손을 빌어 몰래 알려 제거하려 했다고 본다. 한편 가토가 상륙한 뒤에 고니시가 조선 측에 아쉬워한 내용도 조선왕조실록에 있다.[12] 물론 고니시를 부정적으로 보는 쪽에선 이 발언도 '악어의 눈물' 같은 거짓말이라고 해석한다.
고니시의 행동은 오로지 가토 제거 하나에만 확실히 고정되어 있다는 설은 일본 사학계에도 존재한다. 고니시는 당시 심유경과 함께 협상 중이었고, 협상이 잘 풀려나가고 있다는 증거는 조선군과의 전투 중단 또는 최소한 확전 중지다. 어찌되었건 조명 연합군과의 전투가 격렬해지면 협상이 결렬된다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이순신의 존재가 해상을 원천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군 간의 팽팽한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고, 협상 무드는 그 위에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니시가 이런 이순신을 제거해 버린다면 당연히 순식간에 힘의 균형이 붕괴되어 버리고 일본군은 거칠 것이 없이 확전을 벌여 전쟁은 더욱 격해진다. 당연히 이것은 고니시의 협상의 파탄과 직결된다. 그리고 협상의 파탄은 고니시에게 있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즉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고니시의 행동은 단순히 라이벌이자 협상의 악조건 중 하나인 가토 제거에 전적으로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니시의 입장이 진심이든 아니면 반간계이든지 간에, 그가 흘린 정보로 가토를 잡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가토가 정확히 몇 시에 바다를 건너올지 알 수도 없었고, 더구나 당시 겨울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파도와 바람이 강해 조선 수군이 무작정 부산 바다에서 가토를 기다리는 건 자살 행위이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어명을 받아 부산으로 출정은 한다. 출동을 했지만, 가토가 이미 상륙한 뒤라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이에 선조가 알고도 낚이는 바람에 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고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면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것이다.[13] 이렇게 정유재란에 다시 참전하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노량해전에 대패하면서 후퇴. 다만 이 때 고니시군은 명군을 매수하여 무사히 전장에서 벗어나 부산으로 철군하는 중이었고, 노량해전에서 죽을 뻔한 장수는 시마즈 요시히로였다. 최종적으로 전군이 퇴각을 완료한 시점은 11월 25일.

2.5. 세키가하라 전투 그리고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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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영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벌인 내전에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여 잘 싸웠으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과 함께 공격당하여 패배하며, 후퇴하다 전장을 이탈한 지 4일 만에 도쿠가와의 부하들한테 붙잡혀 1600년 교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처형되었다. 가톨릭 신자라 할복을 하지 않았고[14], 조리돌림을 당하는 온갖 수모를 겪은 후 참수되었다. 죽기 전 같은 가톨릭 신자였던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고해성사를 받게 해달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요청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한다. 참수 시 불교승려가 관례적으로 고니시의 머리 위에 불경을 얹고 염불을 했는데 고니시가 "나는 키리시탄(기독교인)이다. 어딜 불교의 것을 나에게 들이대느냐!" 하고는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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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상
숙적 가토 기요마사의 공격을 받고 있던 우토 성은 끝까지 버티다가 고니시의 처형 소식이 들어오자 항복하고, 성을 지키던 고니시의 동생 유키카게는 할복하였다. 쓰시마 섬 도주 소 가문의 소 요시토시와 결혼한 딸 마리아는 세키가하라 이후 이혼당하여 갓 낳은 아들과 함께 쫓겨났으며,[16] 아들은 모리 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고니시의 가문은 멸문되었으며[17] 고니시의 봉토는 가토 기요마사가 소유하였다. 고니시의 가신들 역시 많은 수가 가토 가문으로 흡수되었다. 고니시의 우토 성을 점령한 가토는 그 성의 망루 하나를 자신의 구마모토 성에 옮겨 설치하고 "우토 망루"라고 불렀다고 하나,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우토 망루는 원래부터 있었고, 우토 성 출신 가신들이 있는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한다.[18]

3. 평가


전쟁을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었지만 일단 전투에 임하면 돌아보지 않는 전형적인 전국시대 영주였다. 이 때문에 전쟁에 반대했음에도 조선에 끼친 피해 자체는 가토 기요마사보다 크면 컸지 적지 않다. 일본에서도 한국에 잘 알려진 것처럼 가토 기요마사와 라이벌로 묘사하기도 한다.[19] 일단 일본에서는 고니시보다 가토가 더 유명한 편인데, 둘이 라이벌격으로 대립한 건 사실이므로 가토가 좀 비중이 있으면 거기에 딸려가는 편이다. 단 일본에서는 인지도나 인기에서 가토에게 밀리고 대중매체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묘하게도 여성향에서는 인기가 좋은 편이다.
선봉장으로서 부산진성,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주력군을 괴멸시키고 한양평양을 점령해 조선을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점과 전쟁 반대, 화친을 위해 국서를 위조, 조선인 양녀 등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인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인물이기에 한국에서는 다른 일본군 장수들과 비교했을 때 대우가 미묘하다. 당대 조선 조정에서조차 가토는 불구대천 원수로 여기면서도 고니시에게는 비교적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강화회담을 주도한 것에서 엿보이듯 일단 조선이 좋아할 만한 학문적 소양은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일단 한문을 알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메리트다.[20]
또 믿기 힘들겠지만,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는 일본 몰래 미리 조선 측에만 알려 백성들을 대피시키자고 주장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뿐 아니라 일본의 사료인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도 나오는 내용으로 교차검증이 된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일본군이 심유경에게 알렸다고 되어 있긴 하지만 정황상 일본군=고니시라고 봐도 무방하다.
>『我日本往晋州兵馬三十萬, 恐不能當, 修書密報。 今本府之民, 預避其鋒銳。 彼見城空人盡, 卽撤兵東回.』
>
>해석: 이번에 진주로 가는 우리 일본 군대가 30만 명이나 되니 아마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보내어 은밀히 알려 진주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예봉(銳鋒)을 피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우리 일본 군대도 성이 텅 비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곧 철병(撤兵)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다.[21]
명나라와 일본이 화평조약을 맺은 와중에 뜬금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 공격을 명하자 일본 장수 어느 누구도 그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당시 명나라 사신 신분이었던 심유경부산에 왔을 때 이야기한 대목이다. 물론 화평약속을 깨는 공격이기에 반대한 것이기도 하다.
고니시의 이익은 쓰시마의 이익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것은 분명하다. 순전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막으려 했다는 것도 물론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고니시가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려고 무진장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애초에 사카이 상인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일찍이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서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국력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이묘로서 주군 히데요시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허무맹랑한 조선과 명나라 정복에는 애초부터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
그러나 평양성에서 패전한 이후에는 한양에서 학살을 저지르는 등, 따지고보면 이쪽도 가토 못지않은 만행을 저질렀다. 상대적으로 온화한 제스처를 취한 것은 사실이나 일관적인 태도로 보기는 어려운 것.
오늘날 일본에서는 그다지 언급되지 않고[22] 높이 평가되지 못하지만 애초에 평범한 장수였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봉장으로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23]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점이 많은 인물임은 분명하다.[24]
임진왜란을 반대해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여가면서까지 강화를 주도한 인물이기 때문에 일본 창작물보다는 한국 창작물에서 대우가 조금 더 좋은 편이며, 단순하고 과격하게 묘사되는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에 비해 더 말이 통하는 쪽으로 묘사되는 편이다.

4. 가토 기요마사와의 관계


가토는 바로 옆동네의 다이묘인데, 원래 이웃끼리가 더 사이가 안 좋은 법. 상시 접경에서 영토 문제로 다투었다고 한다. 다만 석고 자체는 가토가 한끗발 더 높았다.[25]
다만 고니시가 처음부터 가토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 집권후 지방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직신들을 각 지방에 골고루 분배했고 특히 둘의 영지가 있는 규슈시마즈가 자리하고 있고 옛 류조지 가문의 세력을 등에 업은 나베시마(鍋島) 가문[26]도 있었기 때문에 직신들 중에서도 제일 믿을 만한(혹은 능력 있는) 가토 기요마사구로다 간베에, 고니시 유키나가를 배치했다. 특히 가토와 고니시의 영지는 남북으로 붙어 있기 때문에 둘의 연계가 중요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히데요시의 권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영토로 싸운 기록은 없다. 오히려 히데요시의 구상에 걸맞게 서로 도와가면서 잘 지냈다.
그러나 임진왜란 몇 년 전부터 가토가 영지 내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하면서 가토의 영지 내 신자들이 대거 고니시 측으로 도망가자, 그들의 처우 문제로 다툰 적은 상당히 많다.[27] 특히 둘의 사이가 크게 벌어진 것은 가토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울산성 전투에서 고니시가 조선과의 화친을 위해서 가토의 지원요청을 일부러 묵살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이때 가토는 태화강물이 끊기고 먹을 것도 떨어지는 등 온갖 고생을 한터라 이때의 트라우마가 단단히 맺혔는지, 귀국 후 만든 구마모토 성은 식수공급용 우물을 120개나 팠고 성내 다다미나 외벽재를 죄다 토란 줄기로 만들어서 유사시 장기간 농성에 대비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훗날 사쓰마 군대와 정부군이 격돌했을 당시 최대 격전지였는데, 워낙 방어력이 대단하여 사이고의 반군이 57일이나 공격했는데도 뚫지 못했고 이를 두고 사이고는 나는 정부군에게 진게 아니라 가토 공에게 진 것 이라고 말했다. 자세한 것은 서남전쟁 항목이나 구마모토 성 항목 참조.
이렇게 둘의 사이가 불구대천이라는 것은 매우 유명해서, 조선 사람들조차 이 둘이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고니시 유키나가는 위에 나왔듯이 자신과 가토 기요마사가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작전에마저 써먹기까지 했다. 물론 이는 위에서 보듯 사실인지 아닌지는 고니시와 가토만이 알겠지만

5. 음모론


조선 땅을 밟은 네임드급 기독교(정확히는 가톨릭) 신자다 보니 반기독교 측에서는 그가 임진왜란에서 벌인 학살을 기독교와 연관짓거나 기독교가 고니시를 찬양하고 이순신을 사탄으로 여긴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경우가 많았고, 정반대로 일부 근본주의 개신교 측에서는 고니시의 악행을 가톨릭과 연결지으며 예수회나 교황청이 배후에 있다는 주장을 하는데, ''' 전부 검증되지 않은 헛소리다.''' 상기 이순신 사탄설의 허위에 대해 잘 분석해 놓은 글이다.#
애초부터 교황이나 가톨릭 사제들은 임진왜란에 대해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았는데, 히데요시가 “조선을 치고 나면 다음은 명나라까지 치겠다”고 하는 시점부터 이미 그들에게 이 전쟁은 허황된 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건 가톨릭이 조선에 우호적이어서 혹은 크리스천으로써의 양심 때문만은 아니고, 이미 일본보다 먼저 마테오 리치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진작에 명나라에 들어가 선교하면서 가톨릭은 당시 명나라와 일본의 국력 차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칫 일본의 조선 침략군이 명나라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예수회가 유형무형으로 일본과 커넥션이 있다고 알려졌다가는 명나라에서의 선교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계산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크다. 고니시 유키나가[28] 역시 이들 선교사나 상인들과 생각이 같았다.
안토니오 꼬레아의 경우처럼 조선에서 잡혀온 많은 사람들이 나가사키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노예로 매매되기는 했지만, 1598년 9월 4일 나가사키에서 세르게이라 주교가 일본 각지의 선교사들을 소집하여 조선인 노예 매매에 대한 대책회의를 열고 인신매매에 종사한 포르투갈 상인에 대하여는 선교사에게 주어진 권한에서 최고의 형벌이라 할 수 있는 파문에 처하는 동시에 노예 한 사람의 매매에 10쿠루자아드의 벌금을 징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을 보면, 적어도 가톨릭 사제들은 인신매매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면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에 대해서 한 번 트집을 잡았던 적이 있었으니 제 몸 사릴 필요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내려서 기리시탄들을 탄압한 것도 전쟁에 불교 승려들을 동원한 것도# 그러면 기독교보다 불교가 더 나쁜 놈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모두 종교적인 이유보다 정치적 이유가 더 강한 결정이었다. 우선 기리시탄 다이묘들의 경우 서양 선교사들과의 연줄을 통해 이국과 교역하면서 재력을 쌓거나, 서양으로부터 조총이나 불랑기포 같은 신무기를 수입해 보유하기도 했으며[29] 동시에 기리시탄 다이묘들에게 종교적 지도자로써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그들 다이묘의 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모습은 가뜩이나 밑바닥부터 기어올라와 만인의 꼭대기에 서고 싶어 안달이 난 히데요시에게는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던 것(후술). '''센고쿠 시대 불교 세력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양상이 예수회와 기리시탄 다이묘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 승병들은 조선이나 명나라의 승려와 달리 예전부터 종교 세력을 넘어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고 사병을 육성해 '''전국시대 때 다이묘들과도 대등한 군사력'''을 과시했던 데다, 당시 일본에서 '''고급 학문을 접할 수 있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승려는 말하자면 군사력뿐 아니라 지식까지 갖춘 고급 인력으로 그런 인력을 히데요시가 우선적으로 전쟁에 동원하자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전 항목에서는 안코쿠지 에케이를 예로 들며 일본 불교의 승려가 조선군에게 피해를 입힌 사례로 들었는데, 안코쿠지 에케이 이외에 일본 승병들과의 어떤 교전이나 피해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고, 안코쿠지 에케이 자신도 조선의 선비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강항간양록에 따르면 모리 데루모토의 모주 즉 작전참모로써 히데요시와 데루모토 사이를 중재하거나 전장에서 작전 기획을 세우는 데에 활약했지, 일선에서 자신이 나서서 사람을 죽인다거나 하는 전투를 치른 것은 아니었으며[30] 정유재란 때에 종군해 전란의 참상을 일기로 남긴 승려 게이넨처럼 “산도 강도 불타고 있다. 지옥의 옥졸조차도 죄수를 저렇게까지 학대하지는 않을 텐데...”라며 조선인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을 슬퍼한 이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명나라를 치는 것이 성공하면 조선과 중국에 키리시탄 포교를 허락하겠다'''”며 며 회유하려 했지만, 애초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히데요시가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31] 사실 선교사들이 임진왜란에 대해서 “이건 미친 짓이야”라고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성직자로써의 양심 때문이 아니더라도 센고쿠 시대의 전란기를 거친 일본군의 공격 전술이나 전후처리 패턴이 제3자 입장에서 보기에 쉴드 쳐주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악독한 것도 사실이었다.[32] 예수회 동인도 관찰구역 순찰사였던 알레산드로 발리냐뇨(Alessandro Valignano)[33]가 1592년에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러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히데요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벌써 조선국을 정복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히데요시)의 정복욕에 의한 것입니다.'''

Alessandro Valignano, Adiciones(1592) del Sumario de Japon, Adicion 4, IV, 487.

알레산드로 발리냐뇨는 예수회의 동인도 선교구역 관찰사의 위치에 있었고, 임진왜란이 있기 2년 전인 덴쇼 18년(1590년) 인도 총독의 대사 자격으로 주라쿠다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회견하고 외국의 진기한 물품을 선물한 적이 있다. 이는 히데요시가 내린 바테렌 추방령, 즉 선교사들에 대한 추방 명령을 철회시켜보려는 목적이었는데, 바테렌 추방령을 내린 시점에서 히데요시는 예수회를 별로 좋게 보고 있지 않았고, 이건 어느 정도 예수회가 자초한 측면도 있었다.
규슈 정벌이 시작되기 전인 덴쇼 14년(1586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에서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료(Gaspar Coelho)와 접견했는데, 그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이 끝나면 조선에 출병해 명나라가 있는 중국 대륙까지 침공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코엘료에게 털어 놓으면서 “대륙 정복에 성공하면 각지에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선교사들을 지원해 줄 테니까, 그 때가 오면 포르투갈 선박 2척을 나한테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고, 코엘료는 이러한 히데요시의 계획에 찬동하면서 “'''규슈에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많습니다. 예수회 선교사인 제가 주선할 테니까, 그들과 합동해서 작전을 짜보도록 하죠'''”라고 제안했다.[34] 코엘료로써는 '''권력자인 히데요시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동시에 선교를 더욱 수월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히데요시는 도리어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 사이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생각 이상으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코엘료의 의도와는 반대로 “'''이놈들 봐라? 위험한데?'''” 하는 위기감을 품게 되었다.
규슈 정벌이 끝난 뒤인 덴쇼 15년(1587년) 6월 10일 히데요시가 하카타에 왔을 때 코엘료는 다시 자신의 범선인 푸스타(Fusta) 호를 타고 하카타 만 해상에서 히데요시를 접견했는데, 히데요시가 거의 군함 수준으로 무장이 되어 있는 푸스타 호 안을 둘러보고 “이거 군함 아니냐?”라고 놀라워한 적이 있는데, 이때의 경험도 히데요시에게 포르투갈 전함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이런 무장력을 가진 예수회라는 집단에 대한 공포감을 더 부추겼다는 지적이 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선교사로써 코엘료는 선교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권력자 히데요시에게 “'''예수회는 언제든 당신의 편에서 힘을 보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며 환심사기용으로 예수회가 가지고 있던 무장력을 보여준 것이었지만, 히데요시는 이걸 “'''우리 예수회는 이 정도의 힘이 있으니까, 히데요시 네가 권력자랍시고 함부로 나대지 마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 마디로 '''소헤이의 기독교 버전.'''[35]
이후 가스파르 코엘료는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발호하고 나가사키 등 예수회 영지를 몰수해 자신의 직할령으로 삼자 기리시탄 다이묘들을 규합하여 무력으로 히데요시에 대항하려 했고, 몰수당한 나가사키 등의 영지를 되찾기 위해 기리시탄 다이묘들로부터 군수물자를 얻으려 했지만, 기리시탄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나 아리마 하루노부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코엘료는 다시 마닐라, 마카오, 고아에 연락해 '''2,300명의 병력을 일본으로 급파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예수회 동인도 관찰구역 순찰사였던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의 조치로 끝내 무산되었다. 결국 히데요시를 달래기 위해서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히데요시를 찾아 그를 달랬고,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임진왜란) 계획에 전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36]

아무도 원하지 않은 전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함에 의해 저질러졌다.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의 보고서 中 #

박철 교수(전 한국외대 총장)는 1930년 일본 역사학자 야마구치(山口正之)의 ‘세스페데스의 서간문 연구’ 논문에서 왜군의 ‘종군신부’라고 단정지은 것이 세스페데스 신부를 일본군 종군 신부로 보게 된 것으로 이를 역사 왜곡이라 지적하면서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온 것은 극비리에 이뤄졌고 그 배경에는 1566년부터 가스파르 비렐라 신부가 ‘꼬라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한 숙제를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1587년 바테렌 추방령이라 불리는 선교사 추방 명령을 발표한 터라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 방문은 극비리에 이뤄졌고, 도착한 후에도 1년 동안 웅천 왜성의 은밀한 곳에 칩거하면서 때를 엿보았지만 1년 만에 체류 사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가자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 방문을 도왔던 일본의 지방 제후(키리시탄 다이묘)들이 그를 황급히 일본 땅으로 돌려보냈다는 것.[37] 박 총장은 이어 그가 귀국하는 와중에 쓰시마 섬에서 조선 귀족의 자손으로 보이는 어린 포로를 데려가 비센테(Vicent)라고 세례를 주고 보살핀 점이나 임진왜란의 참화에 대해 보고서를 만들어 일본에 있던 예수회 부관구장 신부에게 알림으로써 유럽에 전쟁의 진상을 최초로 알린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이며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6. 기타


조선의 전쟁 고아들을 많이 양육했다고 하며, 그 중 유명한 인물로는 조선인 양녀 오타 쥬리아가 있다. 평양 혹은 순천에서 주운 고아를 양녀로 삼아 이름을 오타로 짓고 가톨릭에 입교시켰다. 고니시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가 막부의 가톨릭 박해로 유배되어 여생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한국인 최초의 예수회 수도자복자 권 빈첸시오는, 유키나가의 딸인 고니시 마리아의 연줄로 신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호오를 떠나서, 당시 한일 교회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거물임은 분명하다.
임진왜란의 선봉장 경력 때문에, 아마 한국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일본인 중 한 사람일 것이다. 행적 때문에 보통 그나마 개념인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 편. 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한자를 그대로 읽어 한국에는 소서행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7. 대중 매체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기타 창작물 참조.

[1] 일본어 위키백과 小西行長 문서에 따르면, 『선조 실록』 선조 28년(1595년) 2월 10일(癸丑) 6번째 기사에 "행장 올해 서른 여덟(行長今年三十八)."이라는 설명이 유일한 기록이다. 역산하면 로쿠 원년(1558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2] 마모리란 신사의 부적을 의미하고 기온은 현재의 교토 야사카 신사, 나카무스비는 가운데에 매듭이 지어졌다는 뜻이다. 즉, 가운데에 매듭이 지어진 기온사의 마모리 문양이라는 뜻이 된다.[3] 공교롭게도 칼의 노래를 집필한 소설가 김훈과도 세례명이 같다.[4] 지금의 오사카. 사카이 쪽이 아니라 산요 지방, 현재 고베, 히메지, 오카야마 지역이라고도 한다.[5] 사실 어린 시절에는 신앙심이 깊지 않았으나, 독실한 가톨릭 무장인 다카야마 우콘과 친교를 맺고 나서 신앙심이 깊어졌다고 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거의 사람이 달라져서, 거만했던 행동이 사라지고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이 되었으며, 오사카에 한센병 요양원을 세우고 고아원 사업에 힘썼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이는 고니시 자신의 세례명의 유래가 된 인물과도 비슷한 부분이다. 항목 참조.[6] 고니시 안토니오는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한다.[7] 대마도는 조선에서 수입하는 물자에 경제를 많이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조선과 사이가 나빠질수록 피해를 입는다.[8] 평양에 주둔하면서 조명연합군과의 전투 도중 동생과 사촌을 잃기도 하였다.[9] 단, 당시의 상인은 재력을 바탕으로 한 무력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고니시 자신도 '전투에서는 선봉에서 싸워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0] 도요토미 본인은 가나조차 못 읽는 문맹이어도, 비서 격으로 승려 사이쇼 조타이를 두고 있었으니 결국은 알게 됐다.[11] 물론 이 역시 고니시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날씨와 통신 문제 등으로 인해 이순신이 가토를 바다에서 잡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을 근거로 진지하게 설득했을 수도 있다.[12] 「조선의 일은 매양 그렇다.(너희 나라가 하는 일이 매번 그렇다.) 기회를 잃었으니 매우 애석하나 이 뒤에도 할 일이 있다. "朝鮮事每每如此失機會, 可惜可惜, 然此後, 亦有所爲之事云。" 출처는 경상도 위무사 황신의 장계, 선조실록 84권, 선조 30년 1월 23일 甲寅 2번째 기사.[13] 다만 이 사건은 고니시가 해냈다기보다는 조선 조정이 개삽질했다고 봐야 한다. 따지고 보면 당시 조정의 상황을 보면 고니시가 진심이든 낚시든 걸리게 되어 있었다.[14] 가톨릭을 비롯한 기독교에서 자살은 금기사항.[15] 비기독교적 문화와 신앙도 기독교적 교리를 해치지 않는 선이라면 존중을 하는 가톨릭의 현재 모습을 생각하면 다소 생소 할 수 있겠지만, 가톨릭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전까지만 해도 비기독교 종교는 물론 같은 기독교 계열 종교인 개신교에게도 신랄한 비판을 하던 모습이 팽배해있었다.[16] 고니시 마리아의 아들은 외가의 성씨를 따라 고니시 만쇼가 되었고, 훗날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고니시 만쇼 신부 역시 1644년에 에도 막부가톨릭 박해에 걸려들어 순교하였다.[17] 다만 직계는 아니지만 그의 후손들이 어느 정도 살아남긴 했던 것 같다. 경복궁 궁궐 지킴이 중 하나로 한국인과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둔 고니시 다카코(小西貴子) 씨가 그의 후손 중 하나이며, 2007년에는 후손들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기사도 있다.[18] 그래서 1980년대에 나온 소설인 김성한7년전쟁이나 엔도 슈사쿠숙적 같은 작품에서는 과거의 설을 채택해 서술하고 있다.[19] 고니시는 가토 기요마사를 무식한 칼잡이라고 불렀고, 가토는 그런 고니시를 미천한 장사꾼 아들이라고 불렀다.[20] 문을 숭상하던 조선과 달리 당시 일본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물론이고 거의 대부분의 무장들은 한문을 제대로 몰랐다. 아니 한문은 고사하고 자기 이름도 일본어로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일본 무장들이 본격적으로 교양을 갖추게 된 건 크고 작은 전쟁이 끝나고 무사들의 성격이 행정관리와 같이 변화하는 에도 시대였다.[21] 선조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0일(임술) 8번째기사[22] 아주 없진 않으며, 적어도 동상이 세워질 정도면 지명도가 꽤 있다는 말이다. 다만 동상이 세워질 당시 우토시에서조차 반대 의견이 많았는데, 그만큼 400년간 평가절하되었다는 이야기다.[23] 일본 내에서는 육전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군을 동원할 때는 항상 선봉에 섰으니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은 인재였다. 키이의 사이가 정벌, 시코쿠의 초소가베 씨 정벌이나 규슈의 시마즈 씨 정벌에서 수군을 이끌고 큰 활약을 했다. 임진왜란에서의 군공은 일본 측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24] 고니시가 참여한 전투 중에 패전이나 성과가 크지 않은 전투는 대부분 본인이 주도적으로 역량을 발휘할 만한 기회가 없었던 경우 아니면 압도적인 우위에 밀려난 경우 둘 중 하나였다. 4차 평양성 전투는 조선군과 명군 등 5만이 투입되어 단순 비교로도 고니시군의 3배에 달했고, 오토모가 원군을 보내주지 않아 이미 3차에 걸친 전투로 지친 고니시 군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행주대첩 등 다른 전투는 모두 주요 지휘관이 아니라 그 일원으로만 참여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세키가하라 전투조차 고니시 군은 주축이 아니었다.[25] 고니시 24만 가토 26만[26] 이방자 비의 외가.[27] 사실 그들의 주군인 도요토미 역시도 가톨릭을 싫어했다는걸 감안하면 가토의 대응은 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고니시가 가톨릭 신자라는거[28] 사실 많은 일본 영주들 상당수가 고니시 유키나가처럼 개인적으로는(그리고 유키나가와 같은 가톨릭 신앙의 문제로써도) 임진왜란을 반대했지만, 히데요시에 의해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는 전장에서의 학살과 잔혹 행위에서까지 그들의 윤리나 신념을 내세우며 튀려고 하지도 않았고, 특히나 가톨릭 신앙이 두터웠으며 상인 집안 자제로써의 계산적인 두뇌로 이 전쟁 하면 안 된다고 믿었던 고니시도 마찬가지였다.[29] 오토모 소린 같은 경우는 아예 불랑기포의 제조 기술까지 자체 보유하고 있었다.[30] 간양록에 따르면 안코쿠지 에케이의 상관(고용주) 모리 데루모토에 대해서 “성정이 우리나라 사람을 닮아서 느긋한데다, 조선인의 코나 귀를 베는 것을 보고 ‘사람으로써 못할 짓’이라고 망설이고 가엾어 했다”고 적었다. 물론 고니시 유키나가처럼 개인의 신념이랑 무장으로써의 임무 수행은 별개지만.[31]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반적 인식은 다음을 근거로 한다.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을 중심으로 ->,교회사 연구 제49, 2016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혜경(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강의전담교수)[32] 개전 초기에 동래부가 처절한 항쟁 끝에 함락되었을 때에 동래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보아도...[33] 오다 노부나가에게 모잠비크 출신의 노예로 '흑인 사무라이'로 유명한 야스케를 소개한 인물이다.[34] 가스파르 코엘료는 이미 1년 전인 덴쇼 13년(1585년) 기리시탄 다이묘들과 이들을 앞세운 선교 활동을 지원하고자 루손(필리핀)에 함대 파견을 요청하고 있었다.[35] 이런 히데요시의 예수회에 대한 위기감이나 불쾌감이 마냥 편집증적인 망상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게 당장 히데요시는 주군을 모시던 시절부터 군사력을 가진 종교가 세속의 정치 권력에 맞서 얼마나 강력하고 위협적인 반대 세력이 될 수 있는지를(그리고 그걸 자기 주군이 얼마나 힘들게 밟아 조졌는지) 본인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다. 일본의 다른 다이묘들은 말할 것도 없고.[36] 출처: 윤재필 《16세기 예수회의 일본선교 연구》(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조용준 《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37] 다만 히데요시의 바테렌 추방령이 에도 막부의 기리시탄 탄압 수준의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금령은 아니었다. 신토나 불교에 대한 배척(키리시탄 다이묘들의 경우 자신의 영지 내에 있는 신사나 사찰을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헐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강제개종(하거나 혹은 시키거나)을 금지하되,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자기 의사로 믿는 것까지 막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바테렌 추방령의 목적은 다이묘가 키리시탄이 되는 경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허가 아래 가능하도록 해서 예수회가 다이묘들과 접촉해 연계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