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image] '''대한민국 사적 제229호'''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禮山 尹奉吉 義士 遺蹟


'''소재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근대인물 / 광복운동
'''수량/시설'''
141,007㎡
'''지정연도'''
1972년 10월 14일
'''제작시기'''
1968년
'''공식링크'''
사단법인 월진회 공식사이트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1. 개요
2. 역사 및 중요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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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충의사)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서 자란곳이다. 1972년 10월 14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 229호로 지정이 되었다.
사적지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따로 있는데,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라 하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집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狙韓堂)이라 한다.
윤봉길 의사는 새로운 문화의 습득에 주력하면서 농촌 계몽과 부흥에 힘썼다. 또한 야학회와 독서회를 조직해서 농촌의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929년에는 농촌발전을 위하여 월진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전투승리 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이 있었던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는데, 이것이 4·29의거였다. 윤봉길 의사는 바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2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국가에서는 윤봉길 의사가 이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기념탑을 세우고 1968년에는 충의사를 세웠다. 그 뒤를 이어 윤의사의 생가, 성장가 등이 복원되고 유물전시관과 농촌 계몽운동을 벌였던 부흥원이 세워진 것은 1970년 이후이다.
충의사는 윤봉길 의사의 사당으로서 초상을 모시고 있으며, 그가 평소에 사용했던 유품들은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현재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충의관을 세워 윤의사의 농촌 계몽운동과 4·29의거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11경도를 전시해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매년 4월 29일에는 윤의사를 추모하는 매헌 문화재가 열린다.

2. 역사 및 중요 문화재


충의사는 윤 의사의 영정을 봉안한 본전지역과 윤 의사가 4세 때까지 살았던 생가(광현당),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23세까지 살았던 성장가(저한당)로 나눠져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윤 의사가 23세 때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남긴 '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1]는 친필 유묵과 상해의거 직전 김 구 선생과 교환한 회중시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등 유품이 전시돼 그의 비장했던 숨결을 느끼게 하고 있다.
예산군은 매년 4월 29일 이곳 충의사 본전에서 윤 의사 의거를 추모하는 기념식을 거행한다. 올해로 71주년을 맞는 기념 다례에는 일본에서도 그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졌다.
윤 의사의 생가지는 덕산과 서산시 해미를 잇는 45번 국도와 덕산과 홍성을 연결하는 40번 국도가 만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두 물길이 만나서 이뤄지는 배 모양의 도중도(島中島)라고 불리는 이 자리는 윤 의사의 증조부 때부터 정착한 곳으로 차령산맥에서부터 뻗어 내려온 용봉산의 한 지맥인 수암산의 끝자락이 평지로 내려와 조산(祖山)을 돌아보는 명당이어서 큰 인물이 날 자리였다고 전해진다.
윤 의사는 이곳에서 경술국치를 당하기 2년 전인 1908년 5월 23일에 윤 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7대조가 사화를 피해 당진으로 낙향한 것이 인연이 돼 그 후 예산에 정착하게 됐고, 생계는 15마지기 남짓의 땅을 자작해 이어가는 정도였다고 한다.
글재주가 비범했던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면서 '농민독본'이라는 교과서를 스스로 편찬해 야학을 여는가 하면 월진회를 조직하는 등 농민운동을 주도했다.
윤 의사는 그러나 농민운동만으로는 큰 뜻을 펼칠 수 없음을 깨닫고 23세 되던 1930년 2월 7일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이듬해 8월 독립운동의 본산인 상해로 간 그는 홍커우공원에서 채소장사를 하면서 운명처럼 백범 김 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김 구 선생의 영도 하에 독립운동의 별동대원(한인애국단)으로 활동하던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천장절에 상해사변 전승 축하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거사를 계획하게 된다.
윤 의사는 거사 전 왕 웅(김홍일 장군)을 통해 상해 병기공창에서 '벤또 폭탄'과 '물통 폭탄'을 입수하고, 홍커우공원을 사전답사하는 등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이 담담하고 늠름했다'고 의거 직전 그와 마지막 조찬을 한 김 구 선생은 술회했다고 한다.
김 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도 "윤군은 자기 시계를 내게 주며 '이 시계는 선생님 말씀대로 어제 6원을 주고 샀는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제것하고 바꾸시지요. 제 시계는 이제 한시간밖에 쓸 데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주었다"고 적어 죽음을 앞두면서도 의연했던 윤 의사의 담대함을 소개했다.
궂은 비가 내리는 홍커우공원에는 천장절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의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기와바다 상해거류민단장, 시게마쓰 주중공사, 우에다 9사단장, 노무라 3함대 사령관 등 군 수뇌부와 외교 요인들이 참석했다.
식장 정면에 자리잡은 윤 의사는 식이 시작되고 '전원 묵도'라는 구령이 떨어지면서 장내가 조용해지자 '물통 폭탄'을 단상에 던졌고 시라카와 사령관과 가와바다 단장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참석자 대부분에게 치명적인 중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일본으로 압송돼 오사카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그해 12월 19일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노다산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25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된다.
그는 두 아들 윤종과 윤담에게 남긴 유언에서 "너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서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라고 적어 최후를 맞으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걱정하는 의사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이후 그의 죽음은 긴 망각 속에 파묻혔다가 해방과 더불어 유해 발굴과 환국작업이 활발하게 추진됐다.[2]
재일조선인연맹 이시카와현 본부 교포들이 중심이 돼 윤 의사의 유해 발굴에 나서 1946년 5월 도쿄의 이봉창 의사와 나가사키 백정기 의사 유해와 함께 미군함정에 실려 환국,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의거 이후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중국군 백만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격찬한 것을 보더라도 윤 의사가 짧은 생애 속에 이룩한 쾌거의 무게가 어떠했는지를 잘 함축하고 있다.


[1] 장부출가생불환.[2] 발굴 당시 유해가 사형장 근처의 쓰레기 매립장에 매장되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