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문현(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오문현은 1911년 7월 21일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도산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학비 마련이 어려워 중퇴한 후 1929년 상경한 그는 고학당(苦學堂)을 다니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공영하여 사회주의 이론을 연마한 뒤 1932년 4월 귀향하여 농민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일제 식민지통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농민들의 의식을 계몽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1932년 박태술 등과 함께 야학(夜學)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 이 때 이들은 전위조직을 건설할 목표를 세워두고 있었으나, 그 시기가 성숙치 못했으므로 우선은 대중운동에 의한 준비 활동에 힘을 쏟기로 하였다.
1933년 5월, 오문현은 종래의 운동을 보다 확대시키기 위해 황동윤(黃同允)·김홍배 등과 함께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그의 제안에 따라 동년 8월에 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農民組合建設準備委員會)로 발전적으로 개편되었고, 해남을 비롯하여 완도·장흥·강진·영암 등 5개 군에 지부조직이 설치되었다. 이 때 이들의 조직 방침은 ‘농민운동의 지도기관으로서 전라남도 각 군에 걸쳐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고, 농촌 각 부락에 3명 내지 5명으로써 농민반·청년반·소년반을 각각 결성하고, 이들 각 반을 면 단위로 통합하여 각 군의 혁명적 농민조합의 지부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오문현은 해남군 북평면에서 정맹영(鄭孟永) 등 3명을 포섭하여 청년반을 건설하는 등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러한 혁명적 농민조합 건설운동은 1933년 여름 강진군 병영주재소 방화사건으로 조직원 윤가현이 일경에 피체되면서 중단되었으며, 1934년 2월에는 동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 역시 1934년 9월 체포되었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43년 10월 29일 해남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년 오문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