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문현(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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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오문현(吳文鉉)
생몰
1911년 7월 21일 ~ 1943년 10월 29일
출생지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도산리
사망지|
전라남도 해남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오문현은 1911년 7월 21일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도산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학비 마련이 어려워 중퇴한 후 1929년 상경한 그는 고학당(苦學堂)을 다니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공영하여 사회주의 이론을 연마한 뒤 1932년 4월 귀향하여 농민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일제 식민지통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농민들의 의식을 계몽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1932년 박태술 등과 함께 야학(夜學)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 이 때 이들은 전위조직을 건설할 목표를 세워두고 있었으나, 그 시기가 성숙치 못했으므로 우선은 대중운동에 의한 준비 활동에 힘을 쏟기로 하였다.
1933년 5월, 오문현은 종래의 운동을 보다 확대시키기 위해 황동윤(黃同允)·김홍배 등과 함께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그의 제안에 따라 동년 8월에 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農民組合建設準備委員會)로 발전적으로 개편되었고, 해남을 비롯하여 완도·장흥·강진·영암 등 5개 군에 지부조직이 설치되었다. 이 때 이들의 조직 방침은 ‘농민운동의 지도기관으로서 전라남도 각 군에 걸쳐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고, 농촌 각 부락에 3명 내지 5명으로써 농민반·청년반·소년반을 각각 결성하고, 이들 각 반을 면 단위로 통합하여 각 군의 혁명적 농민조합의 지부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오문현은 해남군 북평면에서 정맹영(鄭孟永) 등 3명을 포섭하여 청년반을 건설하는 등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러한 혁명적 농민조합 건설운동은 1933년 여름 강진군 병영주재소 방화사건으로 조직원 윤가현이 일경에 피체되면서 중단되었으며, 1934년 2월에는 동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 역시 1934년 9월 체포되었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43년 10월 29일 해남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년 오문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