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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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인(王守仁)
1472년 ~ 1528년
1. 개요
2. 업적
3. 명장으로서의 면모


1. 개요


중국 명나라 중기의 사상가이자 정치가로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이다.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陽明)이며, 원래 이름인 왕수인 대신 호를 사용하여 왕양명(王陽明)이라고 곧잘 불린다.

2. 업적


대표적 업적은 양명학을 창시한 것이다. 양명학은 당시 과거시험 합격에 치우쳐 있던 주자학(朱子學)을 비판하며 창시되었으며, 당대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양명학을 창시함으로써 이지(李贄), 하심은(何心隱), 나여방(羅汝芳) 등 제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의 나카에 토주(中江藤樹)가 일본에 양명학파를 설립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책에는 대학문과 전습록이 있으며, 전습록은 김동휘란 사람이 신원문화사를 통해 국내 정발했다.

3. 명장으로서의 면모


사상 분야에서의 업적과 명성이 워낙 크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당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군사지휘관이었다.[1]
소년 시절에는 무관을 동경하여 병법 연구에 몰두했고, 북방을 유람하며 오랑캐 소년들과 말타고 활을 쏘며 어울리기도 했다. 이 때의 경험은 후에 지방행정관으로서 일하면서 도적떼나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가장 큰 군사적 성공은 1519년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의 반란을 평정한 것이다. 정덕제가 친정을 결정할 정도로 큰 반란이었는데 당시 병주부사였던 왕수인은 뛰어난 책략으로 정덕제가 도착하기 전에 1만의 병사로 10만의 영왕군을 괴멸시키고 주신호를 사로잡았다.[2] 이 과정에서 후장 장전식 포 불랑기포를 동양의 전장에서 처음 도입하기도 하였다. 이 후 벼슬을 떠나 있었으나 1528년 광서성에서 일어난 반란 토벌을 명 받고 성공적으로 진압한 후 귀환하던 중 병을 얻어 사망한다.

[1] 실제로 명나라 말에 간행된 광명장전의 역대 중국 명장 174명에 포함되어 있다.[2] 정덕제가 와 보니 이미 반란이 평정되어 있었고 친정까지 왔는데 빈 손으로 가기 그래서 주신호를 풀어줬다 다시 잡는 쇼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명은 환관의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나 뛰어난 성품과 능력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