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제
[clearfix]
1. 개요
[image]
중국 명나라 제10대 황제. 묘호는 무종(武宗), 시호는 승천달도영숙예철소덕현공홍문사효의황제(承天達道英肅睿哲昭德顯功弘文思孝毅皇帝). 휘는 후조(厚照). 홍치제의 장남. 별로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하는 황제로 명 4대 암군 막장 치세의 시범타를 때린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정덕제 주후조는 어릴 때만 해도 학문을 좋아했고, 특히 불교에 대해 잘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덕제는 황제가 된 후엔 방탕한 생활을 즐기게 된다.
환관 유근(劉瑾)을 너무나 총애했고, 결국 유근은 권신이 되었다. 재위 초반에 일어났던 유육유칠의 난도 유근의 부하가 유근을 믿고 가혹하게 농민들을 쥐어짜다 일어난 결과였는데, 이후 유근은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온갖 못돼먹은 짓을 자행하다가 아예 간땡이가 부었는지 반역까지 꾀했으나[1] 사전에 발각되어 능지형에 처해졌다고한다..
섹스를 매우 좋아해서 미녀들을 모아서 같이 노는 음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이때 수많은 여자와 잠을 자는 것은 물론이고 남색도 같이 즐겨했는데 이를 봐서는 게이로 보이며, 명나라에서 남색이 유행하게 된 이유가 정덕제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미녀랑 수없이 떡을 쳤음에도 정작 후계자를 얻는데는 실패했고 사망할 당시 아들도 형제도 없어서[2] 제위는 사촌동생인 주후총에게 넘어간다. 최후도 참 안습해서 뱃놀이하다 물에 빠져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한다.[3]
2.2. 인생을 건 원맨쇼
한동안 동물원 사파리 놀이[4] 에 심취하여 그렇게 보내다가 싫증이 난 그는, 이후 그 유명한 '''혼자놀기'''를 시작했다.
자신에게 '주수(朱壽)'라는 제2의 이름을 붙인 다음 스스로에게 대장군의 직위를 내린 것이다. 정덕제는 군대를 끌고 갈 때면 주수의 이름으로 출정하였으며, 대장군인 본인이 황제인 본인에게 글을 올리기도 하고 상찬을 하기도 하는 등 혼자놀기의 진수를 보여주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종은 위무 대장군이란 거창한 작위를 자신에게 내렸고, 진국공에 봉하였다. 1519년에는 주수를 태사에 임명하고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투옥시키기까지 하였다.
법률적으로는 '정덕제 주후조'이자 '위무 대장군 진국공 주수'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으나, 둘 다 정덕제였다.
다음은 황제 주후조가 대장군 주수에게 내린 조문이다.
1517년 경 총애하는 신하 강빈과 함께 궁을 빠져나가 주수의 관청으로 되어있는 선부로 향했다. 그곳의 악공이 뛰어나단 얘기를 듣고 갔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신하들 몰래 '''가출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를 안 대신들이 서둘러 쫓아가 환궁을 간하였으나, 무종은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열받은 궁궐 관리들과 신하들이 몰려와 다소 강한 어조로 "궁궐에 머물러 황제의 위엄을 지키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그 말에 화가 치민 무종은 근위병들을 시켜 몰려온 150여명의 관리들에게 태형 30대씩을 내려서 집행한 다음 그대로 자기 갈 길을 갔다. 이때 노쇠한 신하들 중 십수 명이 곤장을 맞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5]"총독 군무 위무 대장군 총병관 주수는 몸소 육사를 이끌고 변경을 조용케 하였으므로 특별히 진국공에 봉하고 매해 쌀 5,000섬을 녹봉으로 주도록 한다."
사실 그가 자신의 영지를 선부로 정한 것은 그 까닭이 있다. 당시 선부는 몽골이 중국으로 쳐들어오기 위한 첫번째 루트였던 셈. 즉 자신을 최전방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특히 몽골군이 응주로 쳐들어왔을 때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웠다. 전투의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양쪽의 군대는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부족해 진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한 기록에서는 승리라고도 하고 다른 기록에서는 패배라고도 한다.[6][7] 어쨌든 황제 본인이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는 걸 생각하면 야전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이 어느 정도 있었거나 아니면 운빨이 기가 막히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이후 이미 진압이 끝난 친척 영왕의 반란을 자신이 직접 잡았다고 하기 위해서 '''"풀어줬다 잡는" 개그쇼를''' 벌이는데,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반란 진압을 위해 난징까지 내려왔다가 중간중간 머무르는 곳에서 낚시와 뱃놀이를 했다. 그러다가 북경에 돌아오는 중 한 호수에서 뱃놀이를 했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 되었다(…).''' 뱃놀이 도중 물에 빠지고 말았는데 신하들이 건져내었으나 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31세로 사망한다.
2.3. 유언
유언만큼은 옳은 소리였는데 "지금까지 짐이 한 짓들은 전부 짐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너희는 짐의 행동을 보고 근신하며 이후 경거망동하지 말거라"는 내용이었다. 루이 14세 필의 참회의 말씀. 그러나 그가 죽은 곳은 자금성도 아니었고 그가 내내 유흥을 즐겼던 거처, 표방(豹房)이었기에 도무지 유언과 매칭이 되지 않는다(…) 죽기 직전까지 표방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당사자와 측근만이 알 것이지만.
사실 저 유언처럼 정덕제가 놀러만 다닌 것은 아니었고, 주수라는 이름을 갔다붙여서 몽골인들을 토벌하기도 하고, 환관 유근을 숙청하기도 하는 등 할 일은 해가면서 놀았다. 물론 밖으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나라 전체에 악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며[8] 후세에서도 유능하다기보다는 유쾌한(...) 청년 황제 정도로 평가받는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덕제는 적어도 후계자인 주후총보다는 백 배 나은 인간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또 다른 막장치세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니 '''그가 죽은 이후 명나라는 본격적으로 삐걱대기 시작한다.'''
3. 평가 - 정말 암군인가?
그렇지 않은 황제가 어디 있겠냐마는, 정덕제 역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황제다. 한족이 기록한 사료 중심으로 접근하는 전통적인 역사 연구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연구방법론이 개발되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연구도 속속 나오고 있다.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보면, 먼저 비록 제멋대로 행동하고 환관을 중용하기는 했지만 '''결코 어리석은 황제는 아니었다.''' 좋은 황제의 첫번째 조건은 좋은 신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덕제 시기에 재상을 지냈던 인물이 이동양, 양정화 등으로 이들은 모두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정덕제는 이 사람들이 하는 조언 중에서 "놀지 말라"는 조언은 빼고 대부분 받아들였다. 또한 자신에게 반대한다고 해서 신하를 처형하는 일이 없었고 쓴소리를 한다고 해서 쫓아내거나 처형하지 않았다.[9] 이 때문에 신하들과 갈등은 있었지만 정덕제가 다스리던 시절에는 그 다음 황제인 가정제나 만력제 시절과 같은 황제와 신하 사이의 정면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정덕제는 놀러다니기는 했지만, 그가 황제로서 해야 할 일에 게을렀다는 뜻은 아니다. 궁 안에 붙어있지 않았을 뿐. 신하들의 보고는 꼬박꼬박 처리하고 국가의 중요 정책은 자신이 직접 결정했다. 다만 황제가 주관해야 하는 의례 행사는 자주 빠지고 친척 또는 '''자신의 아바타'''(...)를 보냈다. 게다가 정덕제는 바깥에 싸돌아다니기는 했어도 상주문은 꼬박꼬박 받아서 일은 했다. 영왕의 반란을 '''풀어줬다 잡는 개그쇼'''라고 욕을 먹는 남순 시기에도 수보를 데리고 내려가서 꾸준히 정사에 관한 논의를 계속했다. '''물론 북경으로 돌아가자는 요구만큼은 씹었지만……''' 그리고 선부로 이동해서 돌아다닐 때도 신하들은 절대 자기가 사는 선부로 오지 못하게 했지만 무조건 상주문은 크건 작건 간에 전부 보내라고 했던 것을 보면 후일 등장하는 암군의 끝판왕 만력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환관에게 휘둘렸던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황제와는 다르게 환관을 중용했을지언정 권력만은 끝까지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악명 높던 환관 유근은 자기 무덤 파는 줄도 모르고 온갖 전횡과 범죄를 저지르다가 뒤에서 그걸 다 보고받고 기록해 놓아서 잘 알고 있던 황제가 일부러 방관하다가 불시에 그의 숙청을 결정하는 순간 그게 다 유죄 판결 내리는 근거가 됐고, 결국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리고 유근이 죽은 다음에 실세를 장악한 환관은 유근의 최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멋대로 설치지 못하고 조금은 자제하였다고 한다. 또한 유근의 전횡은 세금 제도의 개혁을 위해 환관을 이용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환관을 내세워 악명은 고스란히 환관이 받게 하고 황제는 실속을 챙긴 다음 나중에 환관을 처형함으로써 명분까지 챙겼다는 것이다.
무'武'종이란 묘호을 받았던 것처럼 정덕제는 태자시절부터 군사적인 면에 대한 관심이 상당했다. 문신들뿐만 아니라 무관을 총애했고 자주 변방을 순찰하는 걸 좋아했다. 병사들에 대한 포상도 자주 내리고 군대 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고 어려움을 해결해주는데도 관심을 쏟았다. 또 자신이 직접 갑주를 입고 무장을 하여 무예를 익히거나 지휘를 했으며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10] 그만큼 국방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야전사령관으로서의 능력도 꽤 봐줄만 했다는건데 중국은 당나라 이후부터 황제의 전제권이 차츰 강해져 명나라 때부터는 황제 한명의 능력에 따라 나라가 좌지우지되는 정치체계가 고착화되었는데 황제가 군사적인 면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그만큼 국방력이 탄력을 받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11] 특히 수양제나 후대의 건륭제처럼 대규모 원정에 꽂혀 나라에 부담을 주지 않았다는 것도 긍정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정덕제가 아바타 놀이를 했다는게 과연 비판받을 일인지에 대한 수정주의적인 시각도 있다. 군주가 자기 본래 신분이 아닌 제 2의 신분으로 정무를 행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보면 의외로 꽤 있기 때문. 동양권에서는 군주가 군주 이외의 직책을 겸직하거나 여러개의 작위를 가지고 있던 사례가 드물지만 서양권에서는 흔한 사례였고.
정덕제 시기부터 명나라의 상업이 급속히 성장하였고 양명학이 등장하는 등 사상과 문화의 발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정덕제 역시 유목 민족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자금성에 살기 보다는 표방이라고 하는 유목민족식 천막을 치고 살았고 평소에도 이민족의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일상생활에서 산스크리트어나 몽골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서역 인물들과 자주 접견을 하며 교류를 추진했던 것도 명나라 황제 중에서 가장 적극적이었다. 특히 정덕제 때 포르투갈 사절단이 명나라를 방문했고 명나라는 포르투갈과 교류를 시작했다. 좀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황제라고 평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임시 기구를 통해 강력하게 강화된 황권은 황제를 조금씩 허수아비로 만들었고, 환관들과 관료들의 손에 점차 권력을 넘기게 된다. 당장 정덕제가 죽고 나서 대신 양정화가 정덕제의 측근들을 대량 숙청해야 했던 점에서 치세의 문제점이 잘 드러난다. 한 시대를 잘 보낸 황제였으며, 비록 후대의 심각한 암군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명나라의 암흑기의 싹을 틔웠다는 점에서 첫 암군이라 평가하는 데에 부족함은 없다.
4. 기타
- 명 4대 암군 중 하나로 평가받기는 하지만, 사실 다른 3명의 황제들과는 달리 심각한 폭군이나 암군 정도는 아니다. 그저 너무나도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뿐이고, 만일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거나 부잣집 도령이었다면 유쾌하고 엉뚱한 쾌남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양반이 황제였다는 것이다.
- 등불 & 불꽃놀이 매니아이기도 했다. 1514년 정월 축제를 위해 화약을 준비했는데, 그 양이 너무 많았는지 그만 쌓아 놓은 화약이 폭발해 자금성에서 황제의 침궁 역할을 하는 곳이자 대부분의 황제들이 집무실로 쓰던 건청궁이 홀라당 다 타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사태를 보고 신하들에게 한 말이 걸작이다. "멋진 불꽃이었다."(...) 물론 저런 듣는 사람 환장해서 쓰러질 대사를 현장에서 뱉은 건 아니고, 신하들에게 불을 끄라고 명령한 뒤 나중에 한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홀라당 다 타버린 건청궁을 다시 세운다고 전국에서 백만 냥을 걷어 들였다.[출처]
- 돼지 저(猪)가 국성인 주(朱)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12] 피휘가 이루어 졌었던 명나라 시대 중 가장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황제를 도축한다는 의미가 담겼다는 이유로 돼지 도축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가 취소한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사실 정덕제가 돼지 도축에 민감했던 이유는 본인이 돼지띠였던 것도 작용했다.
- 중국에서도 정덕제가 폭군이나 암군이 아니고 그저 너무나도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래서 중국 드라마에서 정덕제는 정치적으로 무능하지만 유쾌하고 착한 왕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협녀유룡이 대표적으로, 1959년 홍콩에서 제작한 영화 강산미인(江山美人)을 무협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유근과 태후에게 정치를 맡겨두고 마구 놀다가 미복 잠행을 나온 후에 백성들의 고통을 알게 되어 태후와 유근을 축출하게 된다는 스토리다. 실제 역사에서도 유근은 축출되어 능지처참 되지만, 이것은 환관들간에 벌어진 내부의 알력 때문이었다. 이 작품이외에도 정덕제가 긍정적이고 유쾌한 인물로 표현된 작품은 흔하다.[13]
- 마법사 무림에 가다에서는 무림 후반에 등장했다. 다만 최후는 실제와 달리 반란군에 의해 참수당했다고.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챠오 윤을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여기서도 놀기 좋아했던 황제로 언급되는 건 여전하며 자신이 총애하는 첩[15] 들과 함께 이곳 저곳을 여행하며 많은 외국인들도 만난듯.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에서는 후반부에 연산군과 죽이 맞아 함께 조선에 왜국 정벌을 위한 지원병을 파견하고 본인이 직접 간다. 심지어 진성대군에게 대장군의 부월을 하사받는다.
- 한 번은 살인 사건을 심사할 때 아랫사람이 너무 뻔한 거짓말을 하는 정황이 보이자 '니들은 내가 진혜제로 보이냐?'며 제대로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16] 즉 그가 비록 체신머리없이 놀아재끼긴 했어도 후대의 만력제나 천계제처럼 정사에 손을 놓진 않았다는 방증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다른 황제를 반면교사로 취급한 본인도 청나라 때에 가서는 놈팽이에 체신머리없는 인간으로 취급받아서 청나라 황제들은 황자들이 공부를 게을리한다 싶으면 '니들은 주후조처럼 되고싶냐'고 훈계했다고...
5. 둘러보기
[1] 여담인데 스스로가 '''황제'''가 되겠다고 측근에게 말했다고 한다. [2] 후궁 마씨와의 사이에 연가공주 1녀만 두었으나, 연가공주도 요절한다. 남동생으로 울도왕 주후위(朱厚煒)가 있긴 했으나 일찍 죽었다.[3] 물에 빠졌을 때 폐에 물이 들어가는 익수 사고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물에 빠져 익수 사고로 사망하는 사례가 많다.[4] 자금성 서쪽에 표방(豹房)이라는 사파리 겸 놀이터를 지었다. 표방이라는 이름은 표범들을 길렀기 때문인데 표범 뿐만 아니라 호랑이도 있었다. 그런데 정덕제는 자신의 무력을 과시한다고 무장한다음 호랑이랑 싸워보기까지 했는데 당연히 상대도 안됐고 까딱하면 죽을 뻔 했다. 주변의 호위무장들이 달려와서 호랑이를 죽여서 간신히 살았다.[5] 형벌 중 하나인 태형은 횡문근융해증을 불러올 수 있고, 이는 급성신부전으로 인한 사망을 초래한다. 또한 상처로 인해 감염에 취약해져 근육 괴사로 인한 패혈증을 불러오기도 한다. 곤장이나 채찍형은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 굉장히 무거운 형벌이었기에 그만큼 사망율도 높았다.[6] 패배라고 보는 기록에서는, 변방 수비군 50여 명이 죽고 몽골인은 16명 정도가 죽었다고 적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승리를 선전하고 패배는 감추었을 테니까 패배가 사실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싸우는 것에 긍정적인 선례가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 문인 관료들에 의해 부정적인 왜곡이 가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비슷한 예인 정화의 원정에 관한 기록이 삭제된 것을 봐도 당시 명나라 관료들이 이런 문제에 얼마나 극도로 예민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7] 무엇보다 큰 규모의 정규전에서 수비군 50여 명이 죽고 몽골병 16명 정도가 죽은 걸로 끝이라는 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규모 피해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상황은 몽골측에서 중국 영토로 쳐들어온 상황. 여기서 명군이 패배하고 물러났다면 자연스레 대규모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어야 하나 당시 행정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몽골군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서로 물러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번엔 양군 피해규모가 발목을 잡는다. 기록만으로 유추할 수 있는 당시 전투의 결과는 서로간에 매우 가벼운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몽골측이 물러났다고 보는 쪽이 앞뒤가 맞는다.[8] 황제가 놀러나가는게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중국에서 황제의 행차는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된다. 궁금하다면 수양제 문서나 건륭제 문서를 보자. 예외가 있다면 예산 편성을 철저히 해서 돈이 줄줄 새는 걸 막은 강희제 정도. 그리고 정덕제는 아무리 중요한 일이 생겨도 북경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북경에 있는 관료들이 정덕제가 있는 곳까지 말 타고 와서 결재를 받아야 했다. 인공위성을 우주로 보내고 통신망이 보급된 21세기에야 휴대전화와 위성인터넷으로 실시간으로 의사를 물을 수는 있지만, 이 당시에는 초고속 통신망이라고 해봐야 봉화나 파발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업무처리속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9] 다만 직접적으로 처형하지만 않았을 뿐, 태형이나 채찍형과 같은 벌을 내리는 경우는 있었으며,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이들이 다수 존재한다.[10] 사실 명나라에서도 직접 전투에 나간 황제는 황제이기 전에 중국을 통일한 장수인 홍무제와 그의 아들이자 제위를 찬탈한 영락제, 오이라트를 상대로 출정했 던 정통제, 그리고 정덕제를 제외하면 없다. 황제가 직접 전투까지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하들이 얼마나 기절초풍했을지를 생각하면...[11]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례로는 북송의 사례가 있는데 창업군주인 송태조 조광윤이나 송태종 조광의 형제는 절도사 출신이라 군사적인 수완이 뛰어나고 변방의 사정도 잘 알고 있어서 요나라를 공격해서 관광보내는 등 능수능란한 대처가 가능했지만 후대의 황제들은 군사적인 능력이 아예 존재하질 않아서 전국에 100만명이라는 대군을 갖추어놓고도 그중 대부분을 수도에 짱박아서 썩혀놓다가 전쟁이 터지자마자 대부분이 도망가서 정강의 변이라는 치욕을 겪은 바 있다. 사료에 따르면 당시에도 북송의 군대는 당나라 군대를 아득히 뛰어넘은 개막장 군대로 악명이 높았었다. 명나라 역시 정덕제 사후 왜구로 인해 항구들이 쑥대밭이 되고 몽골 군대가 북경을 포위하는 등 국방력이 허술해진 모습을 보여준다.[출처] 샹관핑, 《중국사 열전 황제편》, 158p[12] 중국어에서는 두 글자의 발음이 성조까지 똑같은 zhū이다.[13] 2018년에 방영된 사극 양릉전에서도 선한 역할로 비중있게 등장했다.[14] 여담으로 조선에서는 반정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연산군이 병 때문에 정치를 볼 수 없어서 동생인 중종이 임시로 대리인을 하고 있다고 속였는데 연산군이 죽은지 30년이나 지났을 때도 중종이 다음 변명거리를 모색하는 발언이 있는 걸 보아 정덕제는 연산군이 죽은지 몰랐을 것이다. 다만 연산군이 병환 때문에 사신을 만날 수 없다는 말로 무려 30년 이상 동안 속였다는 사실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명나라가 알고도 연산군의 폭군 기질 때문에 묵인했다는 설이 나돌기는 한다.[15] 챠오윤을 포함해[16] 참고로 진혜제 사마충은 백치에 돌대가리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대표적인 명언 중 하나가 바로 하불식육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