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지흥

 



王智興
(758년 ~ 836년)
당나라의 인물.
온현 사람으로 781년에 이납의 사촌형 이유에게 속한 관리로 있다가 이납이 왕온을 파견해 신도숭경과 함께 서주를 공격하게 하자 이유의 지시로 대궐에 가서 긴급한 것을 알렸는데, 왕지흥이 달리기를 잘해 닷새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815년에는 도압아를 지내면서 이원에게 보병, 기병을 위임받아 12월 7일에 이사도의 무리를 격파해 참수한 것이 2천여 급으로 북쪽으로 쫓아가 평음에 갔다가 돌아왔으며, 오원제, 이사도 등을 토벌한 공으로 시어사, 어사중승 등을 지냈다. 821년에 기주자사를 지내다가 무녕절도부사가 되었으며, 이전에 부사들은 문관 관리들을 삼았지만 당목종이 왕지흥이 용기, 지략이 있다는 것을 듣고 하북에 임용하고자 하면서 그를 총애했다.
822년에 3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유주, 진주의 반란을 토벌했으며, 서주로 들어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 10명을 죽이고 염철원에 있는 금전, 비단 등을 노략질하고 상인들의 물건을 3분의 2 정도 빼앗으면서 최군을 내쫓아 서주를 차지하면서 무녕군 절도사가 되었다. 경무장한 병사 2천을 인솔해 호주를 습격했으며, 고승간과 함께 선무의 군사를 격파해 1천여 급을 참수했다. 824년에는 서사관찰사를 지내면서 사주라는 곳에 계단을 설치하고 승려, 비구니를 건너게 해 복을 받게 하는 행사를 하는 것을 조정에 청해 허락받았다.
원화[1] 이래로 칙령을 내려 이에 대한 계단을 설치하는 폐단을 금지하고 있지만 왕지흥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 제일 먼저 청해 설치한 것이며, 이로 인해 사방에서 폭주해 강회 지역이 더 심했고 왕지흥의 재산은 이로 인해 거만이 쌓였다.
827년 7월 25일에 조서를 받지 않는 이동첩을 토벌하게 해달라고 청해 8월 11일에 오중윤, 강지목, 사헌성, 이재의 등과 각기 군사를 인솔했으며, 828년에는 이환을 횡해절도사로 삼도록 요청했다. 9월 14일에는 체주를 함락하고 12월 6일에는 병마사 이군모가 황하를 건너 무체를 깨뜨렸다고 조정에 보고했으며, 이동첩을 토벌한 공으로 검교사도, 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을 지냈으며, 태부에 올랐다가 안문군왕에 봉해졌다.
829년에는 왕지흥이 잔학해 군 내부에서 석웅을 세우려고 하자 이를 안 왕지흥은 석웅이 공로를 세웠으므로 자사로 제수해줄 것을 조정에 올려 벽주자사로 삼게 했으며, 석웅이 무녕을 떠나자 군대 내부에서 석웅과 친한 사람 100여 명을 모두 살해했다. 4월 9일에는 석웅이 군대의 분위기를 흔들었으니 그를 주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당문종은 석웅이 죄가 없는 것을 알고 죽음을 모면시키고 백주로 유배시켰다.
832년에 겸시중, 충무절도사에 임명되었고 833년에는 하중절도사가 되었다가 이후에는 선무절도사를 지냈다.

[1] 806 ~ 820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