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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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수나라(隋)에 이은 중국의 통일 왕조로 618년에 수의 당국공이자 관롱집단 출신인 이연이 건국해 907년 애종 때 후량의 주전충에게 멸망하기까지 289년간 20대의 황제가 다스렸던 국가였다. 정권 교체만 제외하면 수나라의 정치 체제와 문화를 계승하기도 했다. 수도는 장안이었으며 고대, 중세 중국 제2의 도시인 낙양이 부수도로 기능하였다. 장안은 인구가 100만이라 칭할 정도로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4]
전통 중국 문물을 발전시킨 왕조이자 동시에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추진하였고 이민족의 문화에 대한 인정과 자치를 인정하는 등 다민족적인 국제적인 요소가 가장 짙었던 왕조로 평가받는다.[5] 북쪽으로는 회흘(위구르), 토번(티베트), 남방의 베트남과도 교류를 하였다.
한국사에서는 백제의 맹공과 고구려의 협공으로 인해 위기에 빠졌던 신라의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6] 또한 일본이 백제 멸망 이후 견당사를 보내 중국 문물을 수입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반도는 위치상 중국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지만, 당나라는 그중에서도 한반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7] 향후 1000년 이상 지속되는 동아시아의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완성한 나라였다.
그러나 670년대부터는 초반의 성장세가 꺾이고 신라, 토번, 돌궐 제2제국, 발해 등에게 연달아 패하거나 휘둘렸으며 지배 체제의 모순과 문제점, 지배층들의 이해 관계의 상충으로 인하여 안록산의 난 이후 이민족들과 중국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당나라 정부 자체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어 쇠퇴의 길을 밟았다.
2. 출신
당나라 황실의 기원은 수황실과 마찬가지로 한족인지 선비족인지 불분명 하지만 선비계 가문이 호한 융합 시기에 한족 명문가인 농서 이씨의 족보를 위조한걸로 보는 견해가 크다. 이러한 설들을 지지하는 출처는 진인각(陳寅恪), 장경(張競), 요미원(姚薇元) 등이 있다. 후대 한족 왕조들에 의해 편찬된 기록이나 한국의 사료[8] 를 보면 모두 당을 선비족 정권보다는 한족 혹은 한화된 선비족 정권으로 여기고 있다.
당나라 시기 쓰여진 구당서에는 당나라의 황실이 진나라의 명장 이신, 전한의 명장 이광의 후손을 자칭한 흥성제 이고의 자손임을 자처한다. 후대인 송시기 쓰여진 신당서에는 구당서에 비해 이민족을 강조했다.
당나라 멸망 이후엔 중국의 후계 왕조들과 주변 국가들은 당나라를 한족 국가로 인식했다. 황족을 포함해 지배층에 선비족 혈통이 많았지만 북위 효문제 이래 선비족을 포함한 5호의 한족화와 한족 사족층의 등용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특히 홍농 양씨,태원 이씨,청하 최씨, 박릉 최씨 등 유서깊은 한족 명문가들이 북주 이래 수당 시대의 지배층이 된 관롱 집단에 포함됐다.[9] 특이한 시각으로 요미원은 수나라, 당나라 황족들을 철륵 튀르크에 기원했다고 보고 있다.
일본의 모리야스 다카오는 탁발 국가설[10] 을, 중국의 진인각이나 장경, 요미원 등의 학자는 선비화한족설, 한화선비설, 호한혼혈설 등을 제기하고 있다. 이미 선비족 왕조는 북위 효문제 이래 적극적인 한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한자로 기록된 당나라 황실의 계보 중 하나에는 농서 이씨인 당의 시조는 춘추전국시대 유명한 사상가 노자로 나와 있으나 당나라 이씨와 혈연적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수 황실과 비슷한데 선비계 가문이 호한융합시기에 한족 명문가의 족보를 위조한 걸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당태종이 관롱집단의 지지를 얻고 장안성에 입성한 직후 노자 사당부터 만들었던 이유가 그가 노자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으나 단순한 쇼맨쉽으로 혈통을 단정짓긴 힘들다. 선비족이 부계이며 한족 노자 계통이 모계라는 설도 있으나, 신당서에서 당왕실 이씨의 계보는 탁발의 달도(達闍)이며 선비어 달도(達闍)의 의미에 대해서 호랑이설, 어둠 속의 빛을 의미하는 고대 튀르크어 '타르두'(Tarduš)설, 오얏설 등이 있다.
당 왕조 수립의 주체는 북주 시대 관중 사족+우문씨를 따라 관중으로 이동한 호한 지배층이 융합해 형성된 군벌인 관롱집단이라 불리는 세력으로, 이들은 선비족 왕조인 북주에서 지배층으로 활동하며 집안끼리의 통혼을 통해 인척으로 맺어져 있었다.[11] 북주의 우문씨와 수의 양씨, 당의 이씨 모두 당시 실세인 무천진에서 나왔다. 수문제는 북주 때만 해도 보육여견(普六茹堅)[12] 이라는 선비족 성명을 갖고 있기도 했고(수 왕조 개창 전후에 개명) 당 고조 이연의 어머니도 선비족 성씨인 독고씨에서 나왔다.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계기도 씨족지라고 해서 오랜 과거부터 존재하며 타지방 출신들을 차별하던 관롱집단들의 족보를 모아 약화시켜 다수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8주국 가문에도 한족 여성들은 후궁이 되거나 축첩에 이용되기도 했지만 8주국의 정식 통혼은 선비족끼리만 이루어졌다. 이연의 친인척이 모두 독고씨인 것처럼 말이다.
당나라 황실은 스스로를 선비족이라 칭하지 않았기에 이를 정복 왕조나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처럼 보는 것은 곤란하다. 수 황실이 자신들을 한족 명문가 홍농 양씨, 그중에서 후한 태위 양진의 후손을 자처했듯이 당 황실 역시 노자의 후손인 농서 이씨를 자처했다. 애시당초에 당나라는 수나라와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침투왕조로 평가된다. 당나라를 이민족 정복 왕조라고 보기도 힘들 뿐더러, 당나라는 황실에서 한족과 다른 언어, 관습, 문화를 가지고 이를 더러 한족에게 강요하기도 한 원나라, 청나라와는 성격이 다르다.
3. 역사
3.1. 초당(初唐)
당국공 이연의 둘째아들인 이세민은 아버지[13] 에게 수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 것을 진언하고[14] , 여러 곳에서 높은 전공을 세우며 건국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에 이연은 이세민을 천책상장(天策上將)에 봉하는 등 크게 신임하였다 이에 불안해진 장남이자 황태자 이건성과 삼남 이원길이 이세민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으로 세민은 위기를 맞고, 심지어 형제들간의 모임에서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이에 이세민은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궁궐 안에서 형 이건성과 이원길을 살해하고(현무문의 변), 직접 황태자에 봉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연은 스스로 이세민에게 제위를 물려주게 된다. 일각에선 당태종이 자신이 먼저 쿠데타를 일으키고는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변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태종 이세민은 국가의 제도를 총체적으로 정비하여 후대에 정관의 치로 칭송받는다. 외부로의 확장도 활발해서 수나라 때부터 눈엣가시였던 주변 세력을 연달아 격파하지만 다만 고구려와의 대결에서 (고구려-당 전쟁) 연개소문, 안시성주 등의 활약으로 패배한 점이 오점으로 남았다. 뒤를 이은 고종은 황후 측천무후의 진언에 따라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침공하여 승리한다. 내친 김에 신라까지 정복하려 하였으나(나당전쟁)에서 신라에게 패배하고 토번 전선의 악화가 겹쳐 실패하고 만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토번 전선과 한반도 전선에 둘 다 발을 담그고 있었고, 두 전선 모두 무너지자 더 이상의 확장을 포기하게 된다.
3.2. 무주(武周)
이후 무후의 궁궐에서의 힘이 점점 커지고, 고종이 늙어 힘이 약해지면서 무후는 사실상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후 무후는 몇 명의 황태자를 죽이거나 몇 명의 황제를 폐위시키거나 한 뒤 국호를 주나라(周)라 칭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른다. 전례없는 '''중국 최초의 여황제''' 탄생으로 당(唐)은 사라질 뻔 하였으나, 이에 반감을 가진 중신들이 그녀가 병든 말년에 정변을 일으켜 무후는 국권을 내놓고, 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던 중종이 복위했다가 다시 제2의 여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황후와, 황태녀를 생각하고 있던 위후의 딸 안락공주에 의해 독살되었다.
3.3. 성당(盛唐)
측천무후와 고종의 딸인 태평공주는 올케 위황후, 조카 안락공주와 대립했고, 예종[15] 의 아들인 이융기가 고모인 태평공주와 손을 잡고 아버지를 복위시켰다. 이후 정치적으로 큰 힘을 얻은 태평 공주와 황태자가 된 이융기가 대립하기 시작했고, 이융기가 황제로 즉위한 후 태평 공주가 숙청되면서 당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종의 시대는 국가의 재정비와 교류의 발달로 '개원의 치(712년 ~ 740년)'라는 태평성대를 열게 되었다. 수많은 명재상들의 보필로 내치와 외치를 갈고 닦았다. 내적으로는 "화적법"을 반포해 국내의 조세/군량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에 성공하고, 부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완전히 바꾸었다. 다민족 정책으로 선비족 문화의 면모를 보여 외적으로는 돌궐 · 토번 · 거란과 같은 유목세력들과 협력하여 실크로드를 이용하였다. 하지만 결국 위구르족에 의해 당나라 세력은 다시 약해진다.
또한 치세 말년(741년 ~ 755년, 천보난치)에 하필이면 현종이 며느리(…) 양귀비에 푹 빠지게 된다. 양귀비에 의해 현종은 아예 정사에 손을 놓고, 정국은 재상 이임보 (뒤이어 양국충) 등 몇몇 지도층과 양귀비의 일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게다가 당시 지방의 치안을 담당한 절도사들의 세력이 커지고, 그중 가장 힘이 강했던 안록산이 안사의 난을 일으키면서 궁궐이 함락당하고 양귀비가 그녀에게 반감을 품은 군병(軍兵)들의 강요에 의해 자살하는 사태를 겪었다.
3.4. 중당(中唐)
이후 당나라는 심하게 막장트리를 타게 된다. 바로 절도사의 난립 + 토번의 흥성 때문이다. 당나라는 건국 당시 균전제와 연계한 군사 제도인 부병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토지 지급량이 줄어들면서 과중한 군역에 못 이겨 군역을 피해 도망치는 도호화가 진행되었고 이는 당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측천무후, 당 현종 시기부터 심각한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은 번진을 설치 했다. 이때까지의 번진은 어디까지나 변경지역에 국한되었는데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내지에도 번진을 설치하는 내지번진이 설치된 것이다. 이로서 당조는 수도 인근 지방 일부와 당을 지지하는 강남지방의 번진(순지 번진)을 제외하곤 잠재적인 적들에게 둘러 싸인 형국이 된다 절도사들의 군사력은 급속히 강해지고, 절도사들끼리 서로 결탁하여 중앙 정부로 조세를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심지어 중앙 정부의 군사력은 규모와 훈련, 사기 모두에서 최악의 막장 군대가 되는 등 당나라는 총체적인 쇠퇴를 겪게 된다. 특히나 번진은 물론 당 황실에서도 부병제를 대신하여 용병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재정 부담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한때는 절도사들을 진압해서 지방 통치를 반짝 복구해 그럭저럭 120년을 버티지만, 외부적으로는 토번과 회흘의 강성으로 당은 장안까지 위협받는 시기였다. 또한 안산의 난에서 위구르는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장안을 칩입하는데 이 때 장안 시내는 대단한 피해를 얻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연의 자손은 남자든 여자들 싸그리 노예로 끌고 가서 후계자 문제로 고통을 받기도 하였고 황폐화된 장안은 한동안 재기 불능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또 요동과 만주 지방은 거란과 발해의 세력권이었다. 또 이정기의 치청 번진 등은 사실상 반독립 왕국이었다.
이때 활약한 황제가 두 사람 있는데 바로 (숙종, 대종 다음인) 덕종과 (순종 다음인) 헌종이다. 덕종은 양세법을 실히하여 재정을 충실히 했고 당조에 적대적인 하북 3진을 치러 나섰지만 전선이 지지부진했던 사이에 장안에서 주차-이회광의 난이 터지고, 그거 진압한 후에도 토번-회흘과 중앙아시아를 두고 계속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화해했다. 덕종의 노력은 헌종에게 이어진다. 특히 헌종 시기가 되면 친위 부대인 신책군이 설치되고 이를 이용해 적대적인 번진을 모두 진압한다. 이에 번진의 재정과 군사력을 회수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등 큰 소득을 거두었다("원화중흥"). 그렇지만 헌종은 말년에 금단에 빠지고 불교를 맹신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 환관에게 독살당하고 만다. 다시 당조는 막장으로 흘러간다.
3.5. 만당(晩唐)
이후 당은 환관들이 좌지우지하는 나라로 서서히 몰락한다. 최후의 중흥 군주 선종 때부터 시작된 연속된 반란 크리는 희종 때 터진 황소의 난을 통해 당나라에게 그야말로 페이탈리티를 먹이고 말았다. 사실 당조가 적대적인 번진에 맞서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에 충성하던 순지였던 강회(강남-회수) 지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강남 개발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고 상업이 발달하자 강회 지역은 부유해졌다. 당조는 이 지역에 과중한 세금을 매기고 이를 이용해 신책군을 만들어 당조에 적대적인 번진에 맞섰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지역은 당의 착취에 저항하게 되었다. 이미 구보의 난, 방훈의 난 등이 있었고 끝내 소금 밀매상 출신인 황소가 나옴에 따라 당은 확실하게 골로 가게 된다. 농민 반란군에 불과했던 황소군은 막장이었던 중앙군을 마구 격파하면서 유유히 장안에 입성하였고, 주민들의 지지까지 얻으며 다음 왕조를 예고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에 포위되고, 심복이었던 주온(=주전충)이 배신하여 관군에 합류하면서 황소의 난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주전충은 자신의 이름을 파자해 인왕중심(人王中心)이라고 해석하는 등 이미 야심을 품고 있었고, 이미 당나라는 막장 크리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전충이 황소군을 자기 세력으로 흡수하는 등 세력을 키워 당나라를 멸망시키니, 전충(全忠)이란 이름이 무색해져 버렸다. 당의 애제를 끝으로 당은 289년 만에 멸망한다.
3.6. 후계국가
오대십국시대에 오대의 하나인 후당과 십국의 하나인 남당은 당나라의 후계 국가를 자칭했으나 후당의 경우 왕조의 연결성은 불분명하다. 후당 황가는 애당초 사타족이었으니 아예 연결성이 없고 남당은 남오의 승상 서온의 양자였던 이변이 남오를 찬탈하여 세운 나라이다. 이변은 당 황족인 이각의 후손이라 자칭하긴 했다.
4.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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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행정 층위는 3단계이다. 도(道)-주(州)-현(縣).
원래 고대 중국의 행정구역은 춘추전국시대에 각 국은 자신의 영토에 군(郡)이 설치하였다. 그 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36군(郡)을 설치하였다. 한(漢)대에 이르러서 전국을 9주(州)로 나누어 최상위 행정 구역으로 주(州)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원래 주(州)는 삼국지에 나오는 형주나 서주#s-2같이 광역 행정 구역이었다. 그러다 시대가 점점 흘러 진(晉)나라를 거쳐 5호16국시대에 이르러 주(州)는 광역 행정 구역에서 그 치소를 가리키는 지역명[16] 으로 변화하였고, 주가 분할되어 그 수는 계속 늘어났다. 당(唐) 태종은 최상위 행정 구역으로 10도(道)를 설치하였고, 광역 행정 구역의 도(道)는 한국과 일본에도 도입되었다.[17]
5. 군사 제도
군대는 절충부가 전국에 6백 곳이 존재하는데, 소속 병사는 상중하로 나뉘어 초기에는 상 1000 ・ 중800 ・ 하600명, 후에 1200・1000・800명으로 증원되었다. 10명이 1화(火), 5화가 1대(隊), 4대가 1국(國)을 이루었고, 각각의 지휘관을 화장(火長) ・ 대정(隊正) ・ 교위(校尉) ・ 절충도위(折衝都尉)라 불렀다. 600 × 1000=60만 명으로 이것이 당 왕조의 정규 병력이었다. 물론 옛날 국가들이 흔히 그러했던 것처럼 총원이 다 채워지지 않은 곳들도 있어서 장부상 병력에 비해 실제 병력은 더 적어 정규 병사들만으로는 부족할 경우 따로 징병을 하기도 했다.
6. 평가
선비족이 한족을 정복한 후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북위 때부터 진행된 호한 융합이 완성된 침투 왕조의 전형이자 최종형으로 꼽힌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봐도 상당히 중요한 국가 중 하나다.[18] 우선 한국사에서는 잘 알다시피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시대를 종식시킨 바 있다. 또한 당은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후한 이후 대륙에서는 삼국지부터 시작된 위진남북조시대라는 혼란기를 겪었는데 이 혼란기는 근 370년이나 이어지는 긴 시기였다. 흔히 한나라는 유럽의 고대 로마와 비교되곤 하는데, 로마 또한 고대 통일 제국을 완성하였으나 로마의 멸망 이후 다시는 통일 제국을 등장시키지 못했다. 당나라는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과 가끔 비교된다.
이러한 혼란을 마무리하고 대륙을 통일시킨 것은 수나라였다. 수문제는 당현종의 '개원의 치'에 맞먹는 수준으로 나라를 번영시켰으나, 하필 후임자인 수양제가 나라를 대차게 말아먹어(...) 이종사촌인 당고조 이연에게 제위를 찬탈당한다.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정권을 장악한 문벌귀족은 오대십국시대까지 명맥을 이었고 송태조에 와서야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당나라도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당태종부터 당고종, 측천무후를 거쳐 장기적인 통일 왕조를 등장시키는 데 성공한다.
도중에 중국사 유일의 여자 황제 측천무후가 등장하고 국호가 주(周)로 갈리는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측천무후가 고용한 북문학사에 의해 태상황제로 퇴위하고 측천무후의 후손이자 당나라 이씨가 복귀되면서 국호 또한 당으로 돌아왔다. 측천무후의 치세 또한 역사적으로는 사실상 당나라 치세나 다름없기 때문에 당태종부터 측천무후의 치세까지 당나라의 장기집권을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북송 이후에 보편화되기는 하지만 과거제의 형태도 이때 완성되었다.
당나라의 존재 의의는 '''중국 대륙의 재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그것을 성공하지 못한 유럽 및 서양사학계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와 함께 요주의 연구 대상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나라 황실 이씨는 관롱집단이라고 해서 오호십육국시대에서 대륙으로 유입된 선비족이 한족에 동화된 자들이었다. 이러한 기원 때문인지 당나라는 중원 바깥의 이민족들도 인재라면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이정기, 고선지, 흑치상지, 설계두, 장보고,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는 본국이 아니라 당으로 진출해서 명성을 떨쳤다. 외국인 유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837년 당나라 국학에서 공부하는 신라인은 216명이었고 이조차 사비 유학생은 제외한 기준이었다. 국비 장학생은 당에서 왕복 교통편과 의복이나 식비 같은 체제비에 책값까지 지원했다.
다만 이러한 외국인 고용 기조는 측천무후처럼 관롱집단과 문벌귀족에게 일정 이상의 지지를 받을 수 없던 일부 권력자들이 이들 외의 인재들을 고용하기 위해 외국인들을 대거 끌어다썼다. 무천진 관롱집단과 문벌귀족은 역사와 혈통부심이 장난이 아니라 차별이 대단했는데, 관롱집단이거나 역사적인 문벌귀족이거나 신라인들처럼 사이좋은 이민족이 아니면 마음대로 다니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원나라 시대까지도 중국은 외국인 유학생들을 받아들였는데, 명나라 이후 극도로 폐쇄적인 사회로 변해서 유학생 응시제도까지 폐지된다.
현대 중국인들에게 중국 역사상 가장 좋아하는 왕조 시기를 꼽으라 하면 대부분 당나라 시기를 꼽을 정도로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영광스러운 과거로 인식되고 있다. 역대 왕조 중 가장 활발한 대외 팽창정책과,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혼란기를 최종적으로 마무리지었다는 점,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태평성대를 이룩한 당태종과 당현종이 있었으며 심지어 당태종과 위징의 관계는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 중 하나라고 치켜세워진다는 점, 또 중국 역대 왕조들 중 가장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 같은 이유로 인해 가장 인기있다고 한다. 물론 마지막 이유는 약간 중국 경내 소수민족을 흡수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로 현 중국 당국에서 밀어주는 것과 연계되기도 한다. 당나라가 멸망한지 5백여 년이 지난 명나라 치세에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대명(大明)'이 아닌 '대당(大唐)'인이라고 소개하는 부분이 최부의 표해록에 나오며, 현대 차이나타운도 중국인들은 당인가(唐人街)라고 부른다. 한(漢)이 한족(漢族)의 어원이 된 민족적인 개념이라면 당(唐)은 문화적인 개념의 중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당과 실크로드로 인한 활발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인식이 좋은 편.
사회문화적으로 동아시아에 분류되는 통일신라, 발해, 일본, 베트남에서는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율령, 불교, 유교를 통해 국가 체제가 자리잡힌다. 또한 균전제 - 조용조 - 부병제 - 율령제 - 3성 6부로 대표되는 당 중기까지의 국가체제는 고대 중국 국가체제의 완성으로 여겨지고 당 후기 이후 격변하게 된 국가체제 또한 고대사회에서 동아시아 중세사회로 넘어가는 제도적인 변화로 주목받는다.
당삼채로 대표되는 도자기 등은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때 화려하면서도 이국적이고, 자유로운 풍조를 띄게 되었으며, 이러한 문물은 이슬람을 거쳐 유럽에도 일부 영향을 주게 된다. 종이가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문명으로 넘어가 전 세계로 퍼지게 된 중요한 사건은 빼놓을 수가 없다. 불교와 도교의 교단이 확립되어 다양한 종파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것도 당의 시대이며, 문학적으로도 이태백, 두보, 백거이, 한유, 이고 등의 문학적 업적이 후에 고문#s-2(古文)의 표본이 되었다.
반면 절도사나 환관 등의 문제에서 보이듯이 권력의 통제와 국가 통치의 구조라는 부분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 계속 펼쳐졌으며, 결국 이러한 문제에서 온 내전과 국력의 소모는 당의 멸망의 하나의 원인이 됐다.[19] 환관들의 전횡은 후한, 명나라 '''이상으로''' 심각해서 헌종 이후 황제들을 환관이 옹립하고 환관이 시해하거나 폐위한 황제들도 있을 정도였다[20] . 그래도 당나라의 이름값은 사라진게 아니라서 오대십국시대에만 해도 당나라에게서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이유로 국호를 당으로 한 후당, 당나라 황실의 후손을 사칭하며 국호를 당으로 한 남당 같은 국가들이 있기도 했다. 심지어 후당의 경우 후당의 장승업은 후당의 이존욱이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자 당나라 황실의 후손을 황제로 세울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이존욱도 주전충을 당나라 황제를 쫓아내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 시대임에도 관료제의 발달과 행정력의 정교함으로 유명하다. 당대 일본의 승려 엔닌이 당을 여행하며 집필한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당에서는 당으로 들어오는 외국인들을 모두 체계적으로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각 도시마다 관료들이 오고가는 것을 중앙에 보고하고, 일본에서 온 외국인인 엔닌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도착지에서는 엔닌의 정보를 훤히 알고 있었다. 고대에, 그것도 중국처럼 넓디넓은 대륙에서 중앙정부에서 각 지방의 입출입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 정작 동양의 초 중앙집권적 체제와 서양의 행정체계를 받아들인 현대 중국은 독재와 관료들의 부패 때문에 지방통제력과 행정력이 제대로 굴러가지를 않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21]
지름길이지만 출입이 불가능한 지역이라 엔닌은 뇌물을 써서 통과하게 해달라고 고위 관료에게 청탁했더니 당나라에서는 관리가 뇌물을 받지 않는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기록했다. 이때가 당 행정력이 무너지던 당 말기 시절이며, 공무원들이 예나 지금이나 봉급문제와 지위문제 때문에 뇌물을 많이도 받아먹는다는 걸 생각한다면 놀랍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해당 관리가 청백리였을 수도 있지만.
7. 한국사에서의 관계
신라, 발해 등의 나라가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교역을 하는 등의 모습도 있었던 한편 몽골 제국, 요나라 다음으로 한국 국가들과 가장 치열히 치고 받은 나라로 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2차례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 그리고 신라와 싸운 나당전쟁, 고구려의 후손국인 발해와도 천문령 전투와 발해 무왕 시기 발해가 당나라의 등주지방을 공격해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는 등 당나라는 고구려-백제-신라-발해 등 한국사 고대국가들과 많은 전투를 치루었다.
8. 역대 황제
9. 계보
10. 추존 황제
11. 임시(비정통) 황제
12. 관련인물, 항목
- 가서한
- 견당사
- 곽자의
- 고구려-당 전쟁
- 고선지
- 김춘추
- 김법민
- 고문간
- 능연각훈신(능연각 공신)
- 당/군제
- 대명궁 - 당나라의 황궁
- 당나라 군대
- 당삼채
- 당-남조 전쟁
- 두보
- 무미랑전기
- 백거이
- 복고회은
- 삼국통일전쟁·나당전쟁
- 상관완아
- 소정방
- 소고구려
- 설인귀
- 신라방
- 안락공주
- 안정공주
- 안진경
- 양귀비
- 양염(당나라)
- 연헌충, 연헌성 (연남생의 아들)
- 왕사례
- 위징
- 위황후
- 유종원
- 이광필
- 이극용
- 이태백(이백)
- 이하
- 장보고
- 장손무기
- 적인걸
- 최치원
- 측천무후
- 태평공주
- 현장
- 화번공주
- 황소의 난
13. 여담
[1] 장안이 수도일때도 배도(陪都)로써 기능했다.[2] 황제의 현 중국어 발음은 황디(huángdì)지만 당나라 시대의 중고음으로는 황떼이(/ɦwɑŋ tei/)에 가까웠다.[3] 636년에 저술된 수서(隋書) 등 다수의 고문헌에 대(大)자가 붙어 언급된다. 대당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현장의 순례 여행기인 대당서역기. 물론 이전 왕조에서도 대(大)자가 붙는 용례는 있다. 삼국지의 대위(大魏)나 진서의 대진(大晉), 그리고 앞서 언급한 수서에서도 대수라는 용례가 나온다.[4] 때문에 관중 지역의 식량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었던 당대 후기에는 거의 국가 대부분의 식량 공급을 강남 지역의 생산력에 의지하게 된다.[5] 다만 대외적인 활동이 활발했고 국제적인 요소가 많았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한계점도 분명하였다.[6] 물론 이 과정에서 신라나 발해와 군사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7] 역대 중국 왕조 중 한반도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왕조를 꼽자면 당나라가 원나라와 더불어 양대산맥이다.[8] 조선시대 필수 교재였던 동몽선습 같은 것.[9] 하지만 지배층에 안착한 선비족과 그 외 유목민족들과 다르게 피지배층의 대다수는 한족 혈통이었고 이들은 법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많았으며 차별 또한 존재했다.[10] 모리야스 다카오(森安孝夫) 오사카대학 동양사학과 명예교수의 발언[11] 옛부터 관롱집단의 무천진 8주국 가문은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무천진 출신의 선비족 장수 집안하고만 혼인을 하였다.[12] 보육여가 성이고 견이 이름이다.[13] 이연은 수나라 황제였던 양광과 이종사촌 관계였다.[14] 당시 수나라는 대운하건설과 고구려 원정 실패 등으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15] 중종의 동생으로 마찬가지로 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다.[16] 예를 들어 삼국지를 보면 종종 강릉성과 형주성을 혼용해 적곤 한다. 그냥 혼용해서 적으면 괜찮은데 형주성과 강릉성이 별도의 성으로 나오는 자아분열(?)을 보여줘서 독자를 혼돈에 빠트리기까지 한다. 이는 삼국지 연의가 명대 나관중의 소설이고, 이처럼 지역명으로 형주는 강릉을 의미하게 되었다.[17] 한국은 고려 성종때 10도를 설치하여 현종대에 5도 양계가 되었고, 조선 때 8도가 되어 현재 대한민국과 북한의 도제도에 이르렀다. 일본은 율령국을 제도화할 때 5기 7도로 도입되었고, 메이지시대에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어 홋카이도를 제외하고 사라지게 되었다.[18] 물론 전근대 시대 중국 통일 왕조 중에서 세계사적으로 안 중요한 나라는 없다.[19] 이런 절도사 문제는 오대십국시대를 일으키게 되었으며 결국 송태조가 절도사의 병권을 빼앗는 것으로 정리된다.[20] 후한과 명나라는 적어도 환관에 의해 시해된 황제는 없었다. 후한은 십상시의 난 이전만해도 외척과 환관세력이 어느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었고 명나라는 아무리 강력한 환관이라도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제거가 가능했다.[21] 공무원들에게 지방 시찰을 나가라고 했더니 현장을 안 나가고 사진을 합성해서 속여 보고하는 일도 많다. 게다가 이건 양반이고 가짜 '''경찰서''', 가짜 '''지방정부''', 가짜 '''군인''' 등 별 기괴한 것이 다 있다.[22] 원래 묘호는 후당의 명종 이사원이 추증한 경종(景宗)인데, 그리고 이 애종이라는 묘호는 후량의 주전충이 선양 받고 올린 시호는 애황제(哀皇帝)인데, 이는 이사원이 경종이라는 묘호를 채택하다가 중간에 취소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주전충이 올린 시호인 애자를 따서 묘호를 애종으로도 호칭되었다.[23] 부황 소종의 연호를 그대로 습용[24] 이형의 현손/玄孫[25] 庚子, 400년 ~ 404년[26] 建初, 405년 ~ 4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