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검무
1. 개요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는 기록이 '책으로 남아있었던' 목검을 쓰는 칼춤이다.
2. 상세
최제우는 쇠(서양)과 반대되는 개념인 나무(동양)를 상징으로 서양과 맞선다는 의식으로 목검을 사용하였으며, 그의 선조들도 무관 출신이 많이 있었다.
기본동작은 천도교의 교리에서 따온 "시 천 주 조 화 정 영 세 불 망 만 사 지 13개" 이며 이 동작들을 보면 직접적인 싸움을 하는 무술이 아니라 액살베기 검무, 쌍검무와 같이 '신(동학에서는 한울)'을 영접하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며 자연을 감상하며 서양의 침략과 탐관오리를 물리치는 의식에 가깝다.
동작 시는 천지의 개벽을, 천은 하늘을, 주는 주인, 화는 될화, 정은 바를 정, 세상 세,아닐 불, 일만 만, 알 지 자 이 동작의 이름이 모두 천도교의 교리이자 의식이다.
목검을 하늘에 찌르는 동작, 옆으로 후리는 동작, 한 바퀴 도는 동작, 옆구리에 칼등을 갖다 대는 동작, 큰 원을 그리는 형태 등이 계속 이어져 시에서 주까지 조선시대에서 기녀들의 기예로 변한 쌍검무에 비해 역동적이다.
옛 서적 같은 기록으로는 "제자들과 나무검으로 칼춤을 추었다" 라는 기록만 있고 나머지 동작에 대한 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복원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명지대 운동학과 장효선 박사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목마를 타며 배운 작대기 칼춤이 선소리꾼, 목공예 장인 등으로 이어지는 가계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에게 목검을 선물한 장인인 장효선 박사의 고조할아버지가 배운 것이었고, 다른 수련자들은 칼춤을 잊어버리게 되었지만 이 집안만 5대에 걸쳐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천도교 행사가 진행될 때 칼춤을 춘다든가하며 천도교와 인연도 깊고 서울 외에 용담검무의 탄생지인 남원에 도장을 하나 장만하게 되면서 더 많은 수련생이 보유될거라 예상된다. 천도교 측도 대부분 용담검무의 복원을 달갑게 여기고 있으며 이번에 건강운동이나 수양으로 멀리 전파된다면 모체인 천도교가 없어질 때까지 이어지게 될지 모른다.
이 검무에 대한 논문이 현재 남아있으며 검무가 만들어진 의도, 형태, 역사, 건강운동으로써의 가능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용담검무와 별 연관없는 내용인데 확실한 연구논문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효선 박사는 신라시대의 황창랑 쌍검무가 본인의 연구를 통해 복원되었다고 주장하며 1.5킬로 그램짜리 환도 두개를 들고 전부터 공연을 해왔다. 그래도 쌍검무는 가벼운 칼이 좋다면서 1.0킬로 그램짜리 칼이 적격이라고 한다.
황창랑과 마찬가지로 무거운 칼을 쓰고 칼을 뿌리는 형태가 전통적인 '기' 발산형 칼춤이긴 하지만, 실제 황창랑과 형태가 많이 다를 수 있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