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

 



[image] [image] [1]
'''이름'''
최제우(崔濟愚)
'''초명'''
제선(濟宣)
''''''
수운(水雲)
'''생몰 기간'''
1824년 12월 18일 ~ 1864년 4월 15일(총 14364일)
'''출생지'''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2]
'''본관'''
경주 최씨
'''비고'''
동학의 '''교조(敎祖)'''

1. 소개
2. 생애
3. 최후
4. 여담



1. 소개


조선종교 사상가이자 동학(천도교)의 창시자 겸 제1대 교주[3]. 호는 수운(水雲)이며 현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출생이다. '경주 최부잣집'의 비조인 최진립의 7대손이다.[4]

2. 생애


아명은 복술(福述)이었으며 30대 시절 제선(濟宣)이라는 이름을 제우[5]개명하고 13살에 울산 출신의 부인 박씨과 결혼하여 꼬마 신랑 역할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실제로는 19세에 결혼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10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17세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일찍이 고아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재가녀였으므로 최제우는 재가녀의 자손이 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문과를 볼 수 없었으나 부친인 근암공[6]은 "모름지기 8살 때까지 공부를 시켜보면 싹수를 알 수 있다." 하며 최제우에게 유학 교육을 시켰다. 대학자에게 수학을 받았으나 가세가 기울고 양친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결혼을 하며 먹여살릴 식구가 생긴 최제우는 생계 방편이 없는 몰락한 양반의 처지가 된다. 농사도 배우지 않았으므로 무과를 준비한 흔적이 보이나 무인의 길을 접고 10년 동안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장사꾼으로 일한 듯하다.[7]

이때 최제우는 조선이 망해간다는 암담한 현실을 선각한 듯하다. 청나라대영제국과의 아편 전쟁을 전해듣고서 청나라가 대영제국에게 패배당했으니 우리나라는 순망치한의 상태라고 생각했으며 서학을 표방한 서양 세력들은 무슨 일이든 다 할 만큼 능통하기는 하지만 침략하려는 마음가짐을 지녔으니 서학도 올바른 정신 세계는 아니라고 판단한다. 이 문제에 대해 높으신 분들에게 협의를 해보려 하였으나 양반들은 장사꾼 행색인 최제우에게 판에 박힌 말들(공자 왈 맹자 왈)을 하며 현실조차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최제우는 "요순지치도 공맹지덕도 부족언"[8]이라며 말 그대로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문화가 필요한 "다시 개벽"의 시대가 왔다는 깨달음을 확고히 한다.

장삿일을 끝내고 1854년 가지고 있던 전답을 팔아 울산[9]에서 지내며 철물점을 하다가 사업을 그르치고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시 고향인 경주 용담으로 들어가 천도를 얻으려는 수행을 계속 하던 어느날 신내림과 흡사한 현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상제'라고 부르는 존재와 대면하여 주문의 말과 병을 고치는 부적 문양을 받는다. 동경대전에서 전하는 최제우의 체험은 다음과 같다.

 不意四月(불의사월 心寒身戰(심산신전 疾不得執症(질부득집중 言不得難狀之際(언부득난상지제

 뜻밖에도 4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중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有何仙語(유하선어 忽入耳中(홀입이중 驚起探問則(경기탐문즉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 물은즉

 曰勿懼勿恐(왈물구물공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

 世人(세인 謂我上帝(위아상제 汝不知上帝耶(여부지상제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하느님)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問其所然(문기소연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曰余亦無功故(왈여역무공고 生汝世間(생여세간 敎人此法(교인차법 勿疑勿疑(물의물의

 나 또한 공이 없으므로[10]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曰然則(왈연즉 西道以敎人乎(서도이교인호

 그러면 서도(서양의 도(道)=기독교의 성경)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曰不然(왈불연 吾有靈符(오유영부 其名仙藥(기명선약 其形太極(기형태극 又形弓弓(우형궁궁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않노라. 나에게 영부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受我此符(수아차부 濟人疾病(제인질별 受我呪文(수아주문 敎人爲我則(교인위아즉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汝亦長生(여역장생 布德天下矣(포덕천하의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동경대전東經大全 - 포덕문布德文


최제우는 자신의 신내림이 은 아닌가 하면서 1년을 다시 수행하고서 그때 얻은 가르침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고 동학을 창시한다.


3. 최후


동학의 규모가 커지고 동학의 위협론 등이 폐쇄적인 영남 서원 사이를 오가면서 동학을 배척하는 움직임이 생긴다. 이로 인해 1862년 9월 경주 관아에서 최제우를 처음 체포하였으나 제자들의 탄원으로 인해 석방되었다. 이후 동학 활동을 지속하였다가 1864년 이름만 바꾼 서학이라는 혐의와 '혹세무민'한다는 혐의를 받아 조정에 체포된다. 조정에서 파견된 선전관 정운귀(鄭雲龜)가 올린 장계에 따르면 '경주에 가까워올수록 주문[11] 소리가 마을마다 채우고 있었다'고 하므로 당시 동학의 파급력이 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최제우는 체포되어 과천까지 왔다가 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따른 조정의 혼란 때문에 다시 대구에 있는 경상 감영으로 이감되었는데 경상 감영에서 사형이 집행되어서 41세 나이로 순교(殉敎)하였다. 오히려 타 학문에 대한 배척도가 심한 영남 지방에서 재판을 받은 것이 더 안 좋게 작용했을 수 있다. 이후 최시형이 제2대 교주가 되어 동학을 이끌었다.[12]

4. 여담


  • 최제우의 사상은 증산계통 종교원불교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 증산교에서는 중요한 인물이 최제우다.
[1] 왼쪽의 초상화는 한국 최초 서양화가로 알려진, 춘곡 고희동 화백이 1893년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기사 그림을 바탕으로 그린 것을 수정한 수정본이다. 당시 천도교 교단에서 요청했던 그림으로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해당 초상화는 현재 천도교에서 공식 존영(사진이나 초상화를 높여서 부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오른쪽의 초상화는 순종의 어진을 그린 구한말 최후의 어진 화사였던 이당 김은호 화백이 1909년에 그린 작품이다. 동학의 교파 중 하나인 시천교에서 요청한 작품이고, 최제우의 수양딸인 주씨(朱氏)의 증언을 토대로 그려내 작품이다. 사상적으로 한국사의 근세와 근현대를 가르는 한 인물의 얼굴을 전근대미술의 마지막 화가와 근대미술의 시발점인 화가가 동시에 그려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2]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는 용담성지라는 천도교성지가 있는데, 바로 최제우의 출생지이다.[3] 종교를 창시했기 때문에 교조(敎祖)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인다.[4] 족보상으로는 최진립의 형 최진흥(崔震興)의 7대손인데 6대조 최동길(崔東吉)이 최진립의 넷째 아들로서 후사가 없는 최진흥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5] '우매한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있다.[6] 근암공은 퇴계 이황 학파의 정통 계승자로 당대 영남 선비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7]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최제우가 "시정에서 장사도 해보았고 한량들 틈에 끼어 활도 쏘아 보았고 호협자와 함께 말도 달려 보았고 일찍부터 유도, 불도, 선도와 <야소실>에 이르기까지 제자백가서를 낱낱이 섭렵해보았다"라고 기록한다.[8] 요순의 통치, 공자맹자의 가르침도 이 난국을 타파하기에는 부족하다.[9] 현재의 울산광역시 중구 유곡동[10] 서학의 신 관념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 또 다른 문헌에는 노이무공(노력을 하나 이룬 것이 없는)이라고도 전해진다.[11]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12] 같은 경주 최씨지만 최시형은 완전히 몰락하여 머슴살이로 생계를 꾸리던 사람이었다. 최제우가 철저하게 능력만으로 후계자를 정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 뒤를 이은 최시형도 최제우의 정신을 철저하게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