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배경
우르곳은 늘 자신은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처형인으로 나약한 자들을 처치하던 시절 우르곳은 힘이 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녹서스의 이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살아 있는 화신으로, 도끼를 휘둘러 그 이상을 실현시켰다. 처형당한 자들의 시체가 산이 되어 쌓일 때마다 우르곳의 자존감도 높아만 갔고, 그의 압도적인 위풍에 경외심을 품고 자신도 전장에 나가서 싸우고 싶다는 녹서스인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우르곳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는 단 한 마디 말이면 충분했다. 자운 깊숙이 들어가 녹서스의 지도자를 없애려는 음모를 처리하라는 명령 한 마디. 그 임무는 함정이었지만, 우르곳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 스웨인이 불멸의 요새를 손아귀에 넣으면서 우르곳 자신은 녹서스의 수도에서 제거될 운명이었다는 것을. 화공 남작들이 파견한 요원들에게 포위당한 우르곳은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격분했지만, 자운 지하의 화학공학 광산 감옥으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노예로 전락한 것이었다. 이는 가치를 완전히 상실한 것이었다. 우르곳은 음울한 침묵으로 광산의 지옥 같은 환경을 견디며 죽음을 기다렸다. 드레지에서는 죽음이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드레지의 교도소장인 보스 남작은 가끔 죄수에게 자유를 선사했지만, 그걸 반기는 죄수는 없었다. 보스 남작이 주는 자유라는 것은 남작의 칼끝에 고문당하며 자백을 하는 최후의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우르곳은 갱도에 메아리치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자운의 경이로움에 눈을 떴다. 이 도시에는 무언가 놀랍도록 특별한 점이 있었다. 남작의 고문을 받는 죄수가 토해내는 비밀에도 그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하지만 우르곳은 보스 남작 앞에 끌려나가기 전까지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처음에는 남작이 자신을 끝장낼까 두려울 뿐이었다. 하지만 남작의 칼이 우르곳을 찔렀을 때, 우르곳은 자신의 몸이 이미 고통에는 이골이 났음을 깨달았다. 우르곳의 몸은 칼날 정도로는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 드레지에서 우르곳은 처형인이었을 때보다 더욱 강하게 단련된 것이었다. 우르곳은 그때 고통이야말로 자운이 간직한 비밀이라는 사실임을 깨달았다. 우르곳은 웃음을 터뜨렸고, 보스 남작은 기겁을 하고 드레지를 떠나 지상으로 올라가 버렸다. 자운의 지하 광산 감옥에서 무정부의 치세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감옥의 통제권을 쥔 우르곳은 새로운 생존 실험에 몰두했다. 그는 자기 몸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들을 폐품 기계 장치로 바꾸어 넣었다. 폐품 기계공학은 그 기술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자들이 개발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기 위한 기술이 고통의 모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르곳이 보스 남작의 손에서 탈환한 드레지 지역은 더 이상 경비대가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무법 지대가 되었다. 죄수들은 새로운 주인이 된 우르곳을 보스 남작보다 더 두려워했고, 심지어 우르곳에게 광기에 가까운 존경을 표하는 자들도 많았다. 힘의 본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우르곳의 설교를 끝도 없이 들어야 했고,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가는 우르곳의 손아귀에 목이 졸렸기 때문이었다. 녹서스의 첩자 하나가 우연히 드레지에 들어왔을 때에야 마침내 우르곳은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게 되었다. 첩자는 우르곳을 알아보고 탈출하는 것을 도와 달라고 청했지만, 우르곳은 첩자를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팬 다음 지하 감옥의 암흑 속으로 던져 버렸다. 우르곳은 깨달은 것이다. 녹서스를 지배하는 것은 힘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인간은 나약하다. 지배자도, 거짓말도, 아니 그 무엇도, 생존이라는 순수한 혼돈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우르곳은 광산 감옥 안 화학공학 광맥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폭동을 시작했다. 자운이 지금의 모습이 되던 날 발생했던 것 못지않은 폭발이 도시 전체를 뒤흔들었고, 그 충격으로 드레지는 쪼개졌다. 많은 죄수들이 죽었고, 수천 명이 지하동굴 속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가치 있는 자들은 살아남았다. 그날 이후로 우르곳의 공포 정치는 더 악랄해져만 갔다. 공업용 기계와 녹서스의 잔인함이 끔찍한 모습으로 합쳐진 존재인 그는 화공 남작들과 그 하수인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갔고, 탄압받던 자운의 시민들은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는 자운 시민의 목을 짓밟는 압제자를 쓰러뜨릴 새로운 구원자로 추앙되었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들과 힘 있는 자들의 가치를 가리지 않고 심판했다. 우르곳이 행하는 죽음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이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도 가치가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르곳이 마침내 필트오버 상인 조합 대표들에게까지 힘을 뻗치자, 보안관들이 마지못해 개입했다. 우르곳은 쇠사슬에 몸이 묶인 채 보안이 철통같은 감옥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는 부랑배들, 지하동굴 고아들과 잊혀진 존재들에게 '살상 병기' 우르곳이 전설로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우르곳에게 쇠사슬을 채우려 시도한 것은 필트오버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를 오래 가둬 놓을 수 있는 철창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
2. 우르의 후예
[image] 우리는 자운의 길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얽히고 설킨 배관 파이프와 스테인드글라스는 잿빛 대기 때문에 부옇게 흐려 보였고 색도 선명하지 않았다. 화학공학 오염물질이 덕지덕지 내려앉은 골목마다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조리는 내 옆에서 달렸다. 머리카락은 젖어서 엉겨 붙었고 가지고 있는 단검은 죄다 녹슬었다. 환하게 빛나는 미소만이 그 지저분한 더께 아래 아름다운 얼굴이 숨어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조리 뒤에는 블렌크가 따라왔다. 녀석의 압축 스프레이 캔에는 야광 물감이 가득하고 녀석의 머리에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가득하다. 스커즈는 아니나다를까 맨 뒤에 처져 있었다. 녀석의 이름은 “역겹다”는 의미로, 말 그대로 역겨운 짓만 골라 한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만 그렇다는 것이다. 스커즈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매연에 대고 우리 조직의 이름을 외쳤다. 오늘 밤은 우리가 접수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지하동굴 라이더파다!” 우리는 낄낄거리며 스커즈를 따라 외쳤다. 우리는 어렸고, 주체할 수 없는 생기가 넘쳤다. 그 무엇도 겁나지 않았다. 이렇게 거리를 거침 없이 질주하는데도 아무도 막으러 나서지 않으니까 말이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마치 자운 자체가 우리를 점점 더 도심 한가운데로 끌어들이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 전에 두들겨 패서 물건을 빼앗고 피 흘리는 채로 도랑에 처박은 지하동굴 채집꾼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갔다. 놈이 갖고 있던 동전이 우리 주머니에서 짤랑거렸다. 잠깐의 즐거움을 맛보기에는 충분한 돈이었다. 우리는 자운 한복판에서 열리는 시장인 블랙 레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우리한테 시머 와인을 팔까?” 조리가 물었다. “아까 그놈 패는 데 너무 힘을 썼더니 목말라 죽겠어.” 블렌크가 비웃었다. “그 시장에 있는 놈들은 어린애한테도 팔아. 그러고는 그 어린애도 팔아버리지.” “너네 둘 다 입 닥쳐.” 스커즈가 헐레벌떡 따라오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녀석의 얼굴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근심 어린 표정이 떠오르더니, 주름이 한 가닥 생겨났다. “저 소리 안 들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어두컴컴한 밤거리를 응시했다. 왜 눈살을 찌푸렸냐고? 귀를 찌푸릴 순 없으니까.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 몸에다 증강체를 몇 개 넣었다면 몰라도. “아무 것도 안 들리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역병 걸린 쥐새끼가 방귀 뀌는 소리도 안 들려.” “내 말이 그 말이야.” 스커즈가 웅얼거렸다. 뒤이어 찾아온 침묵은… 우리 머리 위쪽에서 번들거리는 빛을 내는 필트오버보다도 더 무겁게 느껴졌다. 안개를 뚫고 느릿느릿 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이륜 수레들이 뒤집힌 채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뒤집힌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바퀴들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늘어선 좌판대에는 이국적인 물건이 가득했지만, 그걸 지키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악취를 맡자 아까 우리가 때려눕힌 그 채집꾼이 생각났다. 악취가 어찌나 강렬한지 눈물이 고였다. 그놈이 피 흘리는 걸 봤을 땐 눈물 한 방울 안 났는데. 그리고 시체들도 있었다. 대부분 화공 남작의 휘장을 걸쳤고, 처참한 몰골이었으며, 길바닥의 자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야말로 대학살이었다. “누군지 참 지저분하게도 해놨네.” 블렌크가 싱긋 웃더니 시체를 하나 골라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학살의 잔해는 조심스럽게 저 쪽으로 치워가며. “와인 값 좀 아끼겠는걸?” 조리가 갑자기 몸서리를 쳤다. “저기… 누가 있어.” 그녀는 앞쪽 공터의 파이프에서 뿜어져나오는 매캐한 화학공학 연기구름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아까부터 내가 맡은 악취도 거기서 나오고 있었다. 악취는 점점 심해져서 이제는 내 오감을 짓누르다 못해 귀에서 윙윙 소리가 났다. “사… 사람이야.” “저건 사람이 아냐.” 나는 조리의 시선을 따라 점점 커져가는 초록색 형태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그 거대한 형체에는 기계 다리와 수많은 총이 달려 있었는데, 마치 기계공이 파이프 하나를 다른 파이프에 연결할 때처럼 개조되어 있었다. 온몸은 불타오르고 그을음투성이였다. 그 형체를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움츠러들었다. ‘그것’은 화학공학 연기에 숨막혀 하는 어떤 남자의 몸뚱이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높이 들어올렸다. 남자가 고통 때문에 몸부림을 치자, 괴물은 남자를 조롱했다. 기계가 웅웅거리며 진동하는 듯한 그 목소리 때문에 뱃속까지 떨리며 내장이 다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이게 네놈이 원하는 거겠지.” 괴물은 자못 다정한 투로 말하더니 남자의 얼굴을 파이프의 갈라진 틈에 댔다. 화학공학 가스가 솟구쳐 나왔다. “들이켜라. 뱃속 깊숙이.” 남자는 몸부림을 치며 허공에 발길질을 했지만 차츰 동작이 잦아들었다. 마지막으로 남자의 증강체 팔만이 버르적거리며 최후의 절박함을 표현하다가 그마저도 멈춰버렸다. 그 황동 팔뚝이 번뜩이는 모습에 나는 문득 깨달았다. 저 괴물이 한 팔로 대롱대롱 들고 있는 시체는 화공 남작이었다. 저런 최신식 증강체를 끼고 다닐 만큼 돈이 남아도는 사람은 그 사람들뿐이니까. 이름이 핏빛 남작이었나 뭐였나. 그럼 지금 시장 바닥에 여기저기 나자빠져 있는 이 시체들은 저 남작의 부하들이겠지. 아니, 부하들이었겠지. “도망쳐야 돼.”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 무자비한 학살에서 친구들 쪽으로 돌아섰지만, 녀석들을 볼 수가 없었다. 파이프에서 새어나오는 가스가 독을 품은 거대한 초록 구름처럼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고, 그래서 숨을 쉬기도 어렵고 또… 또… 달아나기도 어려웠다. 우리는 진작 달아났어야 했다. 조리, 블렌크, 스커즈가 근처에서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리고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소용돌이치는 구름 속으로 손을 뻗어 하염없이 더듬었다. 누구라도, 아니 뭐라도 붙들고 같이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뒤이어 사람 몸뚱이가 땅에 떨어지는 풀썩 소리와 함께, 압축 스프레이 캔이 자갈과 부딪치며 내는 땡그렁 소리가 들렸다. 블렌크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블렌크가 죽었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괴물이 구름을 헤치며 다가왔다. 거대한 금속 다리 한 짝이 내 바로 옆에 쿵 내려앉았고, 다른 다리가, 그리고 또 다른 다리가 뒤를 이었다. 하나같이 화공약품이 들어찬 배관과 툭 튀어나온 총열을 잔뜩 두르고 있었다. 총열이 내뿜는 연기는 뜨거웠다. 땅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지금도 타는 소리를 내는 것은 저 총에 맞았기 때문이겠지. 목구멍 안에서부터 독성 가스만큼이나 시디신 진실이 올라왔다. 입 안에서 그 맛이 느껴질 정도였다. 난 여기서 죽는구나. 괴물이 내 목덜미 쪽 옷을 잡아 나를 들어올렸다. 이제 괴물의 얼굴이 보였다. 공포를 그대로 형상화한 얼굴이었다. 인간의 얼굴이었기에 더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아니, 적어도 몸의 다른 부분에 비하면 인간에 가까웠다. 방독 마스크는 마력을 내뿜기라도 하는 듯 은근한 빛을 발산했지만, 괴물의 눈은 그보다도 더 번뜩였다. 그 눈에는 지성이 엿보였다. 내 공포를 읽었을 때에는 미소를 띠는 것 같기도 했다. “자운의 아들이여. 이름이 뭐냐?” 그는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그르렁거리듯 물었다. 날카로운 말투였는데, 어느 지역 억양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말에 희미하게 남은 내 마지막 용기마저도 꺾여 버렸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증오의 힘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는 한 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괴물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 남작 놈, 알아보겠냐? 다른 놈들도 그렇지만, 저놈 역시 이 도시를 지배하려 들었지. 자기 부하들을 지하 깊숙이까지 보냈고, 광산 감옥도…” 가스가 빙빙 소용돌이를 치자 괴물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지옥으로 만들었어. 이제 놈은 없다. 놈에게 다른 이들보다 월등한 힘을 준 바로 그것에 당했지. 그런데 너, 지저분한 시궁창에서 찍찍거리는 쥐새끼는 살아남았어. 그러니 말해 봐라, 둘 중 누가 강하냐? 너희 중 누가 살아남을 자격이 있겠냐?” 갑자기 괴물이 나를 놓는 바람에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친구들 몸뚱이 위로 내려앉아 버렸다. 녀석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아까 그 화공 남작처럼 숨이 막혀 캑캑거리고 있었다. 스커즈는 입에서 거품을 질질 흘렸고, 조리는… 나는 눈물이 나올까 봐 조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도 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달아나라.” 괴물이 말했다. “네가 어떻게 살아남았고, 남작은 왜 살아남지 못했는지 도시 전체에 알려줘라. 네가 처음으로 내 증인이 되는 거다.” 나는 쭈뼛쭈뼛 망설였다. “도망치라니까!” 괴물이 포효했다. 나는 그때서야 조리를 제대로 보았다. 조리는 훌쩍이면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내게 팔을 뻗었다. 나는 이런 모습으로 조리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리를 웃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지금도 조리를 웃는 모습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다시 자운의 길거리를 질주했다. 상상이 가는가? 허파가 불타는 듯하고 숨이 턱에 닿았을 때, 내가 내지르는 비명이 내가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를 그대로 품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을? 나는 살아남았다. 내 친구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
해당
문서 참조 바람.
4. 구 배경
세상엔 완력이나 책략, 무기를 다루는 기술을 활용해 영웅이 된 전사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론 한사코 죽지 않으려 애쓸 뿐인 자들이 있다. 우르곳은 한때 녹서스의 위대한 군인이었으면서도, 지금은 피폐해진 육체를 이끌고 죽음을 거부하고 있는 특이한 존재이다. 우르곳은 저돌적인 전사였다. 매번 전선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고 적진을 혼돈으로 밀어 넣었다. 너무 저돌적이었던 탓인지, 때때로 심한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렇게 손도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걸음도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무렵 우르곳은 녹서스의 최고 처형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불구가 된 자신의 팔에 낫을 고정하고 피비린내 나는 처형을 집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르곳은 인생 최고의 영광을 거머쥘 뻔한 날에 최후를 맞게 됐다. 군대 생활에 익숙했던 그는 다른 지역으로 사형을 집행하러 갈 때 항상 군사들을 대동했다. 그리고 운명의 그 날, 우르곳과 그의 부대는 데마시아 왕세자 자르반 4세가 녹서스 군을 급습하려고 잠복해 있던 것을 발견해 사로잡았다. 포로를 호송하기엔 녹서스까지 길이 너무 멀어 위험했으므로, 우르곳은 즉석에서 자르반의 처형을 준비했다. 그러나 막 자르반의 숨통을 끊으려던 찰나, 데마시아의 전사 가렌이 이끄는 불굴의 선봉대가 사형장을 덮쳤다. 우르곳은 가렌의 칼에 그 자리에서 두 동강이 나버렸다. 녹서스 사령부는 우르곳의 헌신에 보답하고자 시신을 블리크 학회로 가져갔다. 흑마법으로 부활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평생 혹사로 너덜너덜해진 육체엔 흑마법사의 부활 주문이 듣지 않았다. 그 때 자운의 신망받는 학자 스탠윅 피디들리 교수가 한 가지 해법을 제시했다. 실험실에서 우르곳을 위해 새 육체를 만드는 것이다. 우르곳은 이제 사람보다는 기계에 더 가까운 몸을 갖게 되었다. 금속 혈관에 흑마법의 기운이 흐르는 몸으로, 이제 우르곳은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은 자를 찾아 헤맨다.
|
원문 링크'''후보:
우르곳'''
날짜: CLE 20년 8월 24일
'''관찰'''
우르곳이 거미처럼 생긴 다리로 빵빵하게 부푼 몸뚱어리를 떠받치고서, 전쟁 학회의 대전당을 따라 어기적어기적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서툰 몸놀림을 가장하고서 민첩하게 지나가는 그를 따라, 대리석에 금속이 긁히는 마찰음과 빠직거리는 에너지의 둔한 파열음이 퍼진다. 무서우리만치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 덕에, 시선에 깃든 결연함은 눈치 채기 어렵다.
오른팔에는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섬찟한 칼날이 있다. 왼팔 끝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끼워 단 듯한 대포가 손을 대신하고 있다. 그가 아름답게 장식된 대리석 문 앞에 삐걱대며 멈춰 선다. 그리곤 관절로 연결된 금속 다리 하나를 들어올려 앞을 막고 있는 장애물을 치우려 쭉 뻗는데, 발끝이 닿자마자 문이 미끄러지듯 열린다. 몸을 지탱해 주는 마법 기계공학 엔진에서 흘러나오는 으시시한 빛에 물든 흉터투성이에다 누덕누덕 기워진 피부 위로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리며, 우르곳이 종종 걸음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회고'''
주위를 감싼 낯익은 어둠이 점점 짙어져 간다. 강한 바람이 휙 불어오자 두피를 타고 흐르는 땀이 느껴졌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다가올 일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우르곳은 손에 든 도끼 자루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어라, 내가 손가락이 있었나! 그가 눈 앞으로 손을 휙 들어올렸다. 두 눈이 어둠에 서서히 적응하면서, 그는 멀쩡하게 붙어 있는 다섯 손가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응시했다. 그 손가락 틈으로 입에 호루라기를 물고 있는 지휘관 사이온의 음침한 얼굴이 보였다.
순간 하늘을 가르며 번쩍이는 번갯불에 저 멀리 검은 형체가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나자 우뢰 소리가 대지를 진동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지금 이게,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인 건가? 날카롭게 귓전을 찢는 상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르곳은 자기도 모르게, 저 멀리 서 있는 적을 향해 앞뒤 살필 겨를도 없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침입자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전열을 정비하라!”
저 앞에서 군사들이 대오를 이루며, 돌격하는 그를 막으려 데마시아 방패들이 겹겹이 성벽처럼 막아 섰다. 뭔가 잘못됐어. 적의 수가 너무 많다.
우르곳이 조금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 선봉에 선 적의 방패를 내리찍자, 적이 뒤로 쓰러졌다. 우르곳은 눈 앞의 위험은 생각조차 않고서 곧장 뛰어들어, 무기를 크게 휘두르며 적의 방어선을 점점 더 허물어뜨렸다. 주위가 아비규환으로 변하면서 전투의 함성이 드높아졌다. 순간, 데마시아 군의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새로 생긴 상처에서 눈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쓱 닦아내며 우르곳은 난리통을 슬쩍 둘러봤다. 또 다시 번개 줄기가 번쩍이며, 선봉대의 후방에서 참나무 고목을 짚고 선 채 의연하게 목청껏 명령을 내리고 있는 갑옷 차림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우르곳이 다시 전투 도끼를 휘두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전우들의 함성에 더욱 절박해진 그가 적군의 후방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데마시아 군이 재집결하며, 아군은 이제 수적으로 압도당할 판국이었다. 우르곳은 적장을 막으려고 도끼를 높이 쳐들고, 다시 전장 깊숙이 훌쩍 몸을 날렸다.
순간 적이 옆으로 몸을 피하고, 도끼날은 나무 등걸을 깊이 파고들었다. 우르곳은 단단히 박혀버린 무기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사납게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은빛 섬광이 번뜩이더니 사방이 고요해졌다. 두 팔을 쭉 뻗은 채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그의 시야가 흐려졌다. 절단 당한 두 손목 바로 아래가 불타는 듯 화끈거리며 선혈이 솟구쳐 나왔다.
“기억나나, 우르곳?”
낯익은 목소리가 그에게 물었다. 우르곳이 말을 건넨 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학살의 현장이 문득 사라지고, 이젠 동틀 녘이다. 지금 서 있는 곳은 숲 속 빈터였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타고 지저귀는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 앞엔 데마시아의 힘
가렌이 몇 발짝 앞에 서서, 한가롭게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기억한다, 데마시아인이여.”
불구가 된 전사가 고통을 참으며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놈이 내게 한 짓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가렌이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조롱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닌데?”
눈 깜짝할 새 가렌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서서 환호를 올리는 녹서스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르곳의 오른손이 있던 자리엔 이제 야전 군의관이 붙여준 살벌하게 생긴 검이 손을 대신하고 있었다. 발치를 내려보니 흑단 같은 머리칼의 잘생긴 젊은이가 묶인 채로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다름 아닌 데마시아의 왕세자
자르반 4세가 두려운 기색도 없이 날카로운 갈색 눈을 들고 자신을 처형하려는 우르곳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패전했을지는 몰라도, 왕자의 몸에 밴 자부심과 위엄만은 꺾을 수가 없었다.
생사를 판가름할 일격을 날리려 팔을 높이 치켜든 채, 우르곳은 싱긋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때, 화살 한 발이 그의 가슴을 정통으로 꿰뚫으며 휘두르던 팔을 멈춰버렸다. 우르곳이 고통스러운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자, 예의 갑옷 입은 자가 위협적으로 무기를 치켜든 채 말도 안되는 속도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겨우 볼 수 있었다.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우르곳의 몸뚱이 밑으로, 느리고 둔탁하게 뛰는 심장 박동에 맞춰 뜨뜻한 피 웅덩이가 삽시간에 고여갔다. 이렇게 끝낼 순 없어! 이럴 순 없다! 이건 자신의 승리를 장식하는 최고의 순간이어야만 했다. 이럴 순 없는 일이야! 시커먼 어둠이 주위를 감싸며, 이제 자신을 살해한 자와 단 둘만 남겨졌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우르곳?”
가렌이 칼에 체중을 실으며 물었다.
우르곳의 힘겨운 헐떡임은 이내 멈췄다. 이제 다시 온전한 몸이 된 그의 금속 다리들이, 분노로 떨며 삐그덕거렸다. 금속으로 된 척추를 따라 강령술의 기운이 뻗쳐 흘렀다.
“복수를 위해!”
포효하는 그의 두 눈은 증오로 이글거렸다.
가렌이 끄덕이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우르곳은 대답 대신 머리 위로 강력한 칼날을 치켜들고서 원수의 형상을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가렌의 형상은 어둠 속에 유령처럼 흩어져 버렸고, 우르곳의 검이 가른 것은 그저 허공일 뿐이었다. 눈 앞의 거대한 문이 벌컥 열렸다. 리그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