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당쟁

 

'''꺼져가는 의 숨통을 끊은 결정적 치명타'''

1. 우당과 이당
2. 우이당쟁의 시작
3. 깊어지는 이종민과 이덕유의 갈등
4. 격화되는 우이당쟁
5. 최후의 승자는 선종


1. 우당과 이당


우이당쟁 혹은 우이의 당쟁이라 부르는 이것은 9세기 전반 당 조정내에서 있었던 "우당"과 "이당"의 극심한 정쟁을 일컫는 말이다.
우당은 우승유,이종민을 영수로 하는 당인데 우승우의 성에서 따라 "우당"이라 칭했으며, 이당은 이덕유,정담을 영수로 하는 당으로 이덕유의 성에 따라 "이당"이라 칭했다.
이들이 대립하기 시작한 시점은 당 헌종 원화3년, 서력으로는 808년에 과거문제로 서로간에 갈등이 시작되어 무려 40여년을 치고박은 끝에 당 선종 대중3년, 서력으로 849년에 이덕유가 애주(오늘날의 남해도)에서 숨을 거둠으로 일단락된다. 이 40여년 동안에 무려 6명의 황제가 바뀌었는데 헌종-목종-경종-문종-무종-선종이었다.(...)
이 두당의 싸움에 하도 질려버렸는지 문종은 "하북의 적을 없애는 것은 쉬우나, 조정의 붕당을 없애는것은 어렵다"라고 한탄할 정도였다고 한다.[1]

2. 우이당쟁의 시작


우이당쟁의 근원은 과거문제로 인해 시작되었다.
당나라 헌종 당시 재상은 이길보였는데 그는 다른 재상인 이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이길보의 정책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는데 이런 정책에 대한 불만은 과거시험 책문에서 터지고 만다.
과거에 응시한 이종민과 우승유가 책문에서 이길보의 정책을 대놓고 깠는데 이길보의 반대파들은 이에 반색하며 이 책문을 대대적으로 추켜세웠다. 이길보는 이에 반발해 헌종에게 읍소했고, 헌종은 이길보의 편을 들었다. 이길보를 대놓고 까버렸던 이종민과 우승유는 과거에 합격했음에도 장기간 임용되지 못했고 이종민과 우승유의 편을 들었던 조정 대신들도 파면될 정도였다.
6년후, 이길보는 사망하고, 이강은 병으로 재상직을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종민과 우승유는 임용제한에서 풀려 조금식 승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길보의 아들 이덕유는 한림학사가 되어 아버지를 공격했던 이종민을 적대시했고 결국 조정의 실권을 장악해나간 이덕유는 이종민이 과거시험에 부정한 청탁을 받았다는 이유로 지방관리로 내쳐버렸다.
이런 이덕유에 맞서 이종민은 당을 만들어 대응했다. 우이당쟁의 서막은 이렇게 해서 오른 셈이었다.

3. 깊어지는 이종민과 이덕유의 갈등


문종 대화 3년, 서력 820년에 이종민은 환관들과 손을잡고 마침내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마침 이덕유도 절서절도사의 임기가 끝나 중앙으로 복귀하여 재상에 추천될 자격을 갗췄으나 이종민은 우승우를 끌어들이고 자신의 당을 동원해 이덕유를 악의적으로 밀어내려했다. 결국 이덕유는 재상이 되지 못하고 의성절도사가 되어 지방으로 다시 내려갔다.
이후 서촉절도사로 옮긴 이덕유는 중요한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토번에게 전략적 요충지인 서촉 유주를 상실한지 20여년이 넘은 상태였는데 당은 이 서촉 유주를 탈환하기 위해서 몇차례나 공세를 펼쳤지만 모두 실패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덕유가 서촉절도사로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서 토번의 장수 실달모가 유주를 바치면서 투항해온것이었다. 이덕유는 이를 반기면서 조정에 토번을 칠것을 상주했다.
그러나 이종민과 우승유는 이덕유가 단지 반대파라는 이유만으로 이 좋은 기회를 반대했다. 이들은 유주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토번과 화친중인데 공격하면 자칫 토번이 역습하여 장안까지 쳐들어올수 있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했던것. 결국 문종은 이종민과 우승유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토번에 유주성을 돌려주고 실달모등의 투항한 장수들을 토번으로 돌려보내버렸다. 당연히 실달모등은 라사에서 처형되고 만다.

4. 격화되는 우이당쟁


문종은 유주사태를 생각하다가 이종민과 우승유가 좋은 기회를 놓치게 했다고 후회한뒤 이덕유를 재상으로 불러들였다. 대신 이종민과 우승유는 지방관리로 내려보냈다.

5. 최후의 승자는 선종


무종이 죽었고, 환관들은 멍청함으로 유명한 이침을 옹립했지만, 아니었다.
선종은 즉위하자마자 이당마저 추방한 뒤에, 자신만의 내각을 꾸렸고,
소정관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만들었다.
[1] 구당서 176권 이종민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