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유

 



1. 개요
2. 일생
3. 정치적 영향
3.2. 활동양상
4. 정치적 견해
4.1. 붕당
4.2. 번진
4.2.1. 번진과 붕당
5. 참고문헌


1. 개요


李德裕(787년 ~ 849년)
후기의 우이당쟁에서 '''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재상으로서 특히 무종(당) 대에 압도적인[1] 영향력을 끼쳤다.
저서로 '''《회창일품집(會昌一品集)》'''[2], 《좌안서성(左岸書城)》, 《차유씨구문(次柳氏舊聞)》, 《수하청경상망산거(首夏清景想望山居)》 등이 있다.

2. 일생


자 문요(文饒). 명문인 조군 이씨(趙郡李氏) 출신으로, 헌종(당) 때의 재상 이길보(李吉甫)의 아들[3][4]이다. 음사(蔭仕)로 출사(出仕)하여 문필에 뛰어났기 때문에 한림학사(翰林學士) · 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가 살던 시대는 덕종(당)에서 선종(당)에 이르기까지 8명의 황제가 집권하던 시기였고, 이때의 주요한 내부 과제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하려는 중앙정부와 지방의 번진 세력과의 대립이었다.[5] 그는 경학(經學) · 예법을 존중하면서도 귀족적 보수파로서 번진(藩鎭)을 억압하고, 회골 등 외족을 격퇴하는 데 힘써 중앙집권의 강화를 꾀하였다.
무종의 회창(會昌 : 연호) 연간에 권세를 누려 이종민(李宗閔) · 우승유(牛僧孺)[6]등의 반대파를 탄압하였고, 폐불(廢佛)을 단행하였다.[7]
선종의 즉위와 함께 실각, 우승유[8] 등에 의하여 해남도(海南島)로 추방되었다.

3. 정치적 영향



3.1. 우이당쟁


이 부분의 설명은 우이당쟁에 기술

3.2. 활동양상


특히 당 무종의 회창 6년 기간에 다양한 활동 이력들을 확인할 수 있고 당 무종에게서 상당한 지지와 신뢰를 받았다.
우선 그가 한 행적과 관련된 무종 시기의 주요 사건들은 상술했던 내용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회골의 구축[9] + 변경지역의 안정 회복
  • 유진(劉鎭)의 반란 평정 + 번진세력의 약화
  • 환관(宦官) 세력의 발호 억제
  • 회창폐불
다음 자치통감의 기록은 회창폐불의 과정에서 드러난 이덕유의 강경한 태도이다.

오대산(五臺山 : 산서성)에 있던 승려[10]

는 대부분 유주(幽州 : 북경)로 달아났다. 이덕유가 진주관(進奏官)을 불러 말했다. "너는 재촉하여 본사에 보고하는데, 오대산의 승려가 장수가 된다면 반드시 유주의 장수만 같지 못할 것이고 병사가 된다면 반드시 유주에 있던 병사만 같지 못할 것인데, 어찌 헛되이 그들을 거두었다는 이름을 만들어 사람들의 입을 물들이는가! 다만 근래에 유종간(劉從諫)이 무수한 떠돌이를 불러 모았으나 끝내 무슨 이득이 있었는가를 보지 아니하였는가!" 장중무(張仲武)는 마침내 두 자루의 칼을 봉하여 거용관(居庸關 : 북경시 창평현)에 보내고 말하였다. "떠돌아다니는 승려가 경내로 들어오면 즉시 그를 베라." 주객랑중(主客郞中) 위박(韋博)이 이 일은 너무 지나쳐서는 아니 된다고 하니, '''이덕유가 그를 미워하고''' 내보내어 영무(靈武)절도부사로 삼았다. - 무종 회창 5년


또한 자치통감의 다음 기사들은 무종이 그를 매우 지지하고 신뢰하였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회골이 요새에 도착하고 힐알사가 공물을 들여보내서면서부터 조칙을 내려야 할 때마다 황상은 대부분 이덕유로 초안을 잡도록 하였다. 이덕유가 한림학사에게 맡기기를 청하자 황상이 말하였다. “학사는 사람의 뜻을 다 서술하지 못하니 반드시 경이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야 하오.” - 무종 회창 3년

4월, 신미일(13일)에 이덕유가 물러나 한직(閒職)에 나아가기를 청하자, 황상이 말하였다. “경이 매번 자리를 사양할 때마다 나로 하여금 열흘간 불안하도록 만드오. 지금 큰 일이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경이 물러나기를 요구할 수 있소!” - 무종 회창 3년

8월, 무신일(28일)에 이덕유에게 태위(太尉), 조국공(趙國公)을 덧붙여주니 이덕유가 고사(固辭)하였다. 황상이 말하였다. “'''경에게 상으로 내릴 관직이 없는 것이 한스럽소!''' 경이 만약 마땅히 받을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짐은 반드시 경에게 주지 못할 것이오.” - 무종 회창 4년


4. 정치적 견해


논문 「李德裕政治思想研究」의 개요에서는 이덕유의 정치적 사상을 6가지로 정리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 첫째, 군주를 공경하고, 황권을 강화하는 것이다.[11]
  • 둘째, 현신을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해야한다.[12]
  • 셋째, 군신은 모두 실무에 충실해야 하며, 군주에게 말을 교묘하게 꾸며서는 안 되며, 군주는 간언을 받아들이는 기량이 필요하다.[13]
  • 넷째, 명절함과 공업을 중시하고 붕당을 반대한다.[14]
  • 다섯째, 정치를 위해서는 "오히려 변화를 권하는 것"이 필요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략은 때에 따라 제도가 마땅히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15]
  • 여섯째, 집권자는 가능한 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데, 이것은 정치적인 바를 행하는 기본 보증이라고 할 수 있다.[16]

4.1. 붕당


붕당의 영수로 인식된 인물이지만 그의 정치적 견해는 붕당을 배격하는 쪽이었다.
특히 신하들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나무에 비유하여, 정직한 사람을 측백나무와 소나무로, 사악한 사람을 등나무에 비유하였고, 이에 따라 정직한 사람은 일심으로 군주를 섬기며 타인의 도움을 원하지 않으나, 사악한 자는 반드시 붕당을 이루어 서로를 속이고 감춘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덕유가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무당파론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어왔으며, 현재는 그가 이당(李黨)의 당수였음을 인정하는 것이 정론이다.[17][18]

4.2. 번진


재상으로 있을 때 변방을 중시하고 힘써 번진(藩鎮)의 세력을 약화시켜서 중앙집권을 공고하게 만들었다.[19]
이덕유의 활약은 무종 시기의 번진 문제의 일환이었던, 소의(昭義) 번진의 유진(劉鎭)[20]과, 양변(楊弁)의 반란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나며, '''하북의 관행'''[21]이라고 불리던 특권을 자랑하던 하북삼진[22]을 동시에 제어하려고 하였다.
또한 전략적으로도 성덕, 위박 등의 절도사 병력을 이용하여, 정부군을 조력하도록 하였으며, 이로 하여금 반란군을 고립시켰다. 이는 그가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며 지방의 사정에도 밝았던 점이 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23]
하북삼진의 통제에 대해 이덕유가 개입한 내용은 자치통감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군사를 사용한 이래로부터 하북(河北)에 있는 세 진에서 매번 사자를 파견하여 수도에 도착하게 되면 이덕유가 항상 그들을 대면하고 타일렀다. "하삭(河朔 : 하북의 이칭)의 병력이 비록 강하나 자립할 수는 없으니 모름지기 조정의 관작과 위령을 빌려서 군정을 안정시켜야 한다. 돌아가 너의 절도사에게 말하라. '''그가 대장을 시켜서 선위칙사(宣慰敕使)를 맞이하고 관작을 요구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스스로 충의를 떨쳐 공로를 세우고 업적을 만들어 밝으신 주군께 알려져 은혜가 조정에서 나오도록 만드는 것이 역시 영예롭지 않겠는가!''' 또 귀와 눈으로 얻은 것을 가지고 말하면, 이재의(노룡절도사)는 유주에 있으면서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창경을 평정하였으며 군대 안에서 내쫓기게 되었지만[24]

절도사 노릇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고 나중에는 태원을 진수하여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다. 양지성은 대장을 파견하여 칙사가 탄 말을 막고 관직을 요구하였으나 군대 안에서 내쫓기게 되자 조정은 끝내 그 죄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는 두 사람이 재앙이나 복을 받은 사례로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덕유가 다시 그 말을 황상에게 보고하자, 황상이 말하였다. "응당 이와 같이 밝게 알려야 할 것이오." 이로 말미암아 삼진(三鎭)은 감히 다른 속마음을 갖지 못하였다. - 무종 회창 4년


4.2.1. 번진과 붕당


번진과 붕당이 연관된 내용으로 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참고로 해당 사건들은 거의 연달아 일어났다. 또한 이 기사는 붕당이 단순히 붕당 구성원들이 주류로서 머무는 조정 내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방의 상황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일례이다.

이덕유는 태자태부, 동도유수인 우승유와 호주(湖州, 절강성) 자사 이종민을 원망하여 황상에게 말하였다. “유종간(劉從諫)[25]

이 상당(上黨, 산서성)을 10년간 점거하다가 태화(太和 : 문종(당)의 연호)연간에 들어와서 조현하였는데, '''우승유와 이종민이 집정하였으나 그를 머물게 하지 않고 재상을 덧붙여 내려 놓아 주어서 가도록 하여 오늘날의 재앙을 만들었으며 천하 사람들의 힘을 다 써서야 마침내 거둘 수 있었으니, 모두 두 사람의 죄입니다.”''' - 무종 회창 4년

이덕유는 또 사람을 시켜 노주에서 우승유와 이종민이 유종간과 서소(書疏)를 주고받는 것을 찾도록 하였는데 찾지 못하자 마침내 공목관(孔目官) 정경으로 하여금 유종간이 우승유와 이종민의 서소를 받을 때마다 모두 스스로 불태워서 훼손하였다고 말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정경을 어사대에 보내어 조사하여 묻게 하니 중승(中丞) 이회와 지잡(知雜) 정아는 믿을 만하게 여겼다. 하남소윤(河南小尹) 여술이 이덕유에게 편지를 보내어 유진이 격파된 소식이 도착하자 우승유가 소리를 내어 한탄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덕유가 여술의 편지를 주문으로 올리자 황상은 크게 화를 내고 우승유를 태자소보(太子少保), 분사(分司)로 삼고 이종민을 장주(漳州 : 복건성 장보, 하남동도의 속주) 자사로 삼고 10월 무자일에 우승유를 깎아내려서 정주(汀州 : 복건성 장정) 자사로 삼고 이종민을 장주 장사로 삼았다. - 무종 회창 4년

11월에 유승유를 다시 깎아내려서 순주(循州 : 광동성 혜주시) 장사로 하고 이종민을 봉주(封州 : 광동성 봉개현)로 멀리 유배하였다. - 무종 회창 4년


5. 참고문헌


사마광, 자치통감
이근명 편역, 『중국역사』, 신서원, 2002.
김명희, 「이덕유의 정치론 관한 소고」, 호남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 7, 2000.
하원수, 「우승유와 이덕유의 대외인식상의 차이와 그 배경 - ‘우이당쟁’의 재검토」, 『중국고중세사연구』 1, 1994.
李文才, 「李德裕政治思想研究」, 首都师范大学学报, 2010.

[1]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당 무종 시기의 자치통감을 읽어보면 이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대의 중요한 문제인 번진 문제에서부터 대외정책에, 그리고 무종에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제시하는 등 그 영향이 적지 않다.[2] 이 글에는 붕당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 진정으로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면, 붕당을 이룰 필요가 없음을 설명하고 있으며, 붕당을 취하는 일은 개인의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3] 여담으로 말하면 이 이길보를 정치적으로 공격했던 사람이 바로 우승유였고 이게 우이당쟁의 심리적 요인 중 하나가 되게 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다음에 있는 주석과 같다.[4] 헌종 원화(元和) 3년(808) 대책을 올려 실정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하여 이길보의 배척을 받아 오랫동안 기용되지 못했다.[5] 특히 헌종(당) 시기에는 순지화(順地化)라는 이름으로 가장 왕성하게 번진을 토벌했다. 자세한 내용은 헌종(당)문서 참고.[6] 이 사람이 우이당쟁의 '''우'''이다.[7] 이 폐불 조치를 회창폐불(會昌廢佛)이라고 부르는데, 이 폐불 조치는 선종이 즉위하자 다시 복불(復佛)되었다.[8] 이와는 반대로 우승유는 회창(會昌) 원년 이덕유가 재상이 되자 실권을 잃고 지방으로 좌천되어 떠돌았는데, 선종이 즉위하자 다시 돌아와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다.[9] 이 과정에서 힐알사(黠戛斯) 세력과 입공관계를 맺었고 회골과 화친을 위해 보내진 당 헌종의 17녀이자 화번공주인 태화공주가 무종 시기에 당으로 귀환했다.[10] 문수보살이 현시하였다고 전하였고 사원이 많았기에 승려 역시 많았다.[11] 第一, 尊崇君主, 强化皇权[12] 第二, 亲贤臣、远小人[13] 第三, 君臣都须务实, 不能矫饰文辞, 君主要有纳谏的气量[14] 第四, 注重名节与功业, 反对朋党[15] 第五, 为政须“尚权变”, 治国方略要顺时制宜而不能拘泥不变 [16] 第六, 执政者必须尽可能掌握实际权力, 这是政治上有所作为的基本保证[17] 특히 범문란(范文瀾)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덕유가 스스로 말하기를) 정직한 사람은 붕당을 이루어 모이지 않는 자들이라 하면서, 자신이 붕당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라고 비판하였다.[18] 또한 그가 권력을 잡은 무종 연간의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그가 우승유 등을 탄핵하는 내용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다.[19] 우이당쟁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당은 대체로 번진정책 등에서 강경노선을 우당은 온건노선을 지향했는데, 이들이 집권하는 시기에 따라 조정의 태도도 이들의 경향을 따라갔다. 헌종 시기 번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한 이길보, 무종 시기 재상이었던 이덕유의 태도와 앞의 두 경우와 반대의 양상을 띠는 목종 시기 우당의 태도였다.[20] 무종 대의 자치통감을 살펴보면 소의 번진 문제는 큰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문제이며, 당시 그만이 유진을 토벌하자는 주장을 냈고, 무종 역시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였다. 또한 그는 유진을 사면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황제인 무종 앞에서 그 태도를 확실히 정했다. 또한 이는 우이당쟁의 상황에서 우승유 등의 우당과는 반대되는 이당 특유의 번진에 대한 강경기조의 일환이자 예시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21] 영토를 세습하고, 영내 호구의 신고와 조세의 상납을 이행하지 않으며, 관할지역 내의 주현관을 맘대로 임명하는 현상을 이렇게 불렀다.[22] 위박(魏博), 성덕(成德), 노룡(盧龍) 번진이며 특히 당조에 반항적이었다.[23]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천성에서 일할 때에는 밖으로는 나라의 위엄을 선양하며, 안으로는 변경 방비를 구상하는 행적을 언급하는 등 지방 사정에 익숙함을 알려 주는 내용이 있다.[24] 절도사들이 하위 군대에 의해 쫓겨나는 일은 절도사 체제 속에서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났다.[25] 소의 번진의 유진은 바로 유종간의 동생 우교위장군 유종소(劉從素)의 아들로 소의 번진을 계승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