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예
1. 개요
남북조 시대의 문인이자 무장. 자는 회문(懷文). A.D. 442년 ~ 520년.
2. 생애
2.1. 초기
제나라, 양나라 시기 인물이며, 본적은 경조(京兆) 두릉(杜陵)이다. 조부 때 양양으로 이주하였다.
일찍이 출사하여 상용태수를 역임하였는데, 동혼후(東昏侯) 소보권(蕭寶卷)의 폭정에 반기를 든 옹주자사 소연(蕭衍)의 반정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며, 이후 소연의 반정이 성공한 이후, 관군장군(冠軍將軍), 강하태수, 행영부사에 올랐으며, 정국이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후방이라 할 수 있는 영주(郢州)를 수비하며 안정시켰기에 소연의 신임을 크게 얻게 된다.
2.2. 양나라 건국 후
이후 소연이 양위를 받아 양나라를 건국한 후 도양자에 봉해졌으며, 후에 보국장군, 예주자사에 오르게 된다. 이후 북위의 수차례 침공을 막아내며 위명을 떨치기 시작한다. 양의 천감 4년(502년)에 왕사(王師)를 이끌고 북위를 공격하는데, 이때 소현성 전투에서 북위군을 제압, 이후 합비에 도달하게 된다. 이때 합비는 북위의 남방 요충으로 북위 역시 장군 양영윤(陽靈胤)을 위시한 5만의 병력과 이외의 병력을 합비로 파견하여 양의 군대를 막게 하니 양의 장수들이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에게 위예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여 안심을 시킨다.
'용병의 법은 기(奇)를 갖고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태여 병력이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
이후 북위가 인근의 회정성을 함락시켜 양민 1000여명을 죽이자, 위예는 크게 분개하였으며, 이에 비수에 쌓았던 보를 무너뜨려 합비에 수공을 감행하게 된다. 당시 합비에 있던 북위의 장수 두원륜(杜元倫)이 병사들을 독려하여 양의 군대를 막고자 했으나 석궁에 맞아 전사하며 합비는 함락되게 된다. 이때 1만여명의 포로와 수만 두를 해아리는 가축을 취하게 된다.
2.3. 종리 전투
위의 북벌 이후 북위는 당시 중산왕(中山王)원영(元英)을 총사령관으로, 희대의 명장 양대안을 선봉으로 하여 100만 대군을 구성, 남정에 나서게 된다. 이때 이들의 진격로에는 북서주(北徐州) 회하(淮河) 인근에 있던 종리(鐘離)성이 있었으며, 이 당시 이곳은 양의 명장 창의지(昌義之)가 수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북위의 남정군은 종리를 포위, 공격하고자 하였으며, 양나라는 20만 대군을 편성, 조경종(曺景宗)을 총대장으로, 위예를 부장으로 하여 구원에 나서게 된다. 이때 비록 조경종은 총대장이었으나, 연배나 경륜에서 앞서는 위예의 의견을 쫒았으며, 사실상 위예가 대군을 지휘하게 된다.
이후 종리에 대한 북위의 공격 선봉에는 양대안이 나서게 된다. 양대안은 그 위명에 어울리는 엄청난 맹격을 가하며 종리성을 위협하였으며, 위예 역시 그의 매서운 공격을 막기 위해 수례와 석궁을 동원하며 종리성에서 격전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수차례의 공격에도 불구, 양나라보다 북위의 군대가 피해가 커지자 양대안을 군사를 물렸고 양 명장간의 대결은 위예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종리성 전투는 위예의 계략을 따른 조경종과 양나라의 승리로 끝나는데, 이들은 종리성 20리 밖에 녹각을 세워 하나의 성을 구축하였으며 이에 북위의 원영은 위의 성을 공략하고자 했으나 위예의 지휘를 받은 양나라 군대의 수비에 막혀 함락시키지 못하게 된다. 이후 양의 장수 풍도근(馮道根)이 이끄는 양의 수군이 북위가 설치한 부교 및 진채 등을 파괴하며 북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게 되었고 북위는 사령관 원영 등이 패주하며 종리성 전투는 양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때 종리성 전투의 승전으로 위예는 통직산기상시, 우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식읍 700호를 하사받게 된다.
2.4. 말년
종리성 전투 이후에도 양은 북벌을 재차 감행하였으나, 이때 북벌군이 철군 중 포위될 위기에 놓이자 위예가 구원에 나서 이를 풀어내기도 하였다. 이후 고령을 이유로 여러차례 사직을 청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520년 시중(侍中),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제수되나 병을 이유로 거절하기도 하였다. 그해 8월 향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3. 기타
본래 위예는 몸이 허약하여 말을 타지 못하였으며, 전장에 나아갈 때는 가마에 올라 나아갔다. 이에 동시대에 활약한 양대안과 비교되는 경우가 간혹 발생한다.
또한 고아들을 제 자식과 같이 키웠으며, 사병들이 죽으면 그 유족에게 제물을 나눠주어 그가 죽었을 때 재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에 양무제는 그가 죽었을 때 전 10만냥, 포 100필 및 보물등을 하사하였으며 그의 장례에 대한 일체의 비용을 대신 지급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