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수(1887)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유동수는 1887년 12월 11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동면 마령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5일(음력 2월 15일) 편항시장에서 유연성으로부터 전국에서 3.1 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니 우리도 이 틈을 타 독립만세를 부르고 관청을 파괴하면 반드시 조국이 독립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흔쾌히 찬성하였다.
이후 유연성·유교희·박재식·이강욱(李康郁)등 7명의 동지와 함께 편항시장의 공동 타작장에 모여 장날인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그 진행방법으로써 만일 일본 경찰이 제지하면 편항주재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각각 인근 지역의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동참케 하기로 하고 자신은 마령동 지역을 담당하였다.
3월 21일 오후 2시경, 500여명의 군중이 편항시장에 모이자, 그는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이때 주재소에서 2명의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유연성을 강제로 체포해가자 계획대로 편항주재소로 달려가 그곳에서 유연성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이 위협사격을 가하자 동시에 군중들의 분노도 폭발하여 유동수 등의 지휘아래 투석과 몽둥이로 주재소와 순사의 숙사를 파괴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이어 여세를 몰아 임동면사무소까지 행진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와 비품을 파기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한 그는 당국의 추적을 피해 영양군에 잠입한 뒤 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 등과 함께 영양군 입암면 대천동에 거주하는 이원오(李元五)의 집에 모여 비밀회합을 갖고, 3월 25일 영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일제 헌병분견소가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하는 바람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시위는 예정대로 전개되어 천여 명에 달하는 군중이 영양읍내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후 재판에 회부된 유동수는 1919년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건물 손괴·가택침입·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6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안동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8년 2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유동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