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이태
劉以泰
(? ~ 1715)
조선의 인물. 자는 백원(伯源). 호는 신연당(新淵堂), 원학산인, 인서.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 사람으로 1710년과 1713년에 두번의 부름을 받았다. 숙종이 병이 나 전국의 명의를 불렀다. 어의가 되어 도수환 처방으로 임금 숙종을 치료하였다. 그 공로로 말 한마리와 비단을 받았다. 그리고 종 1품 숭록대부 안산군수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았다.
유이태(劉以泰)는 일생동안 바른 길을 걷는 정도(正道), 부모를 공경히 모시는 효도(孝道),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시도 (施道), 병의 근원을 탐구하여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도(醫道), 사람들이 장수(長壽)하는 수도(壽道) 등 5도(道)를 실천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해 모친상을 당할 때 그 여막을 떠나지 않아 향리 사람들이 그를 칭찬했으며, 할아버지, 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리자 기도하고 할아버지, 아버지의 병환이 완쾌되자 하늘의 도움이라 여겨 때마침 흉년이 들어 여러 일가, 이웃 등이 기아에 허덕이자 부유한 친구들에게 곡식 100여석을 얻어 이들을 구했다. 인근에서 그를 칭찬하고 효행과 선행을 알리는 행장이 전해지고 있다.
사우들과 후세 사람들은 유이태의 의술을 중국의 명의 화타와 편작에 비유하였다.
1696년 조선인 최초로 홍역치료서 <마진편>을 저술하여 홍역치료의 태두가 되었고, 그의 치법은 정약용의 <마과회통>에 영향을 끼쳤으며, 산청을 홍역치료의 발상지로 만들었다. 소식(小食)을 권유했고, 건강할 때 계절에 따라 섭생을 잘해야하며, 병든 초기에 신속히 질병을 치료해야 하고, 건강이 회복된 이후에 더욱더 건강관리를 철저히 해야한다는 건강관리 요령을 남겼다.
그는 의학의 발전과 질병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의원 동시에 환자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여 진정으로 의원을 따르는 심의(心醬)이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실린다는 신의(神醫)라고 불렸다.
유이태탕과 순산비방의 설화 그리고 조선의 명의 중에서 가장 많은 설화를 남겼고, 강강술래에 채록되어 있는 조선의 유일한 명의이다.
어려서 글공부를 할 때 밤마다 미인이 나타나 유혹했지만 마음 굳게 공부했다. 그 미인이 입맞춤을 해달라고 요구하자 유이태는 이를 들어줘 그 미인의 입에서 자신의 입으로 구슬이 들어왔다가 그 미인의 입으로 구슬이 빨려들어갔다.
이 일 이후로는 유이태는 그 미인을 그리워하다가 점차 안색이 창백하고 몸이 야위어졌는데, 서당 훈장이 자초지종을 묻자 유이태를 이를 이야기하고 서당 훈장이 구슬이 입에 들어올 때 삼키라고 했다.
유이태가 그 미인을 만나 입맞춤을 하게 되자 구슬을 삼켰는데, 그 미인은 한 마리의 흰 여우로 변해 달아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유이태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고 더욱 총명해져 한 번 듣거나 본 것은 잊지 않게 되었으며, 의술을 열심히 공부해 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되어 국왕의 병환에 부름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구슬이 사라진 후에는 평범한 재주만 가지게 되고 기억력이 줄어 건망증까지 걸릴 정도였으며, 며느리가 몸살병에 걸릴 때 콩나물을 다려 먹이려고 했다가 콩나물을 잊어먹어 비녀나물이라고 하다가 며느리를 놓쳤다고 한다.
유이태가 남긴 유적지는 산청, 거창, 함양에 산재해 있다. 산청 생초에는 인술을 펼쳤던 혜민국, 서실, 묘소, 유이태낚시바위, 매봉재. 1713년 임금이 제공한 말을 타고 출발한 관동이 있다. 금서면 화계리 왕산에 장군수약수터[1] 가 있고 오부면에 마음병치료약수터(찬샘이)가 있다. 거창에는 이태사랑바위, 침대롱바위,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생가, 1714년 참봉 정중원과 슬잔을 나누었던 동계고택, 선영 황산, 조부를 문안하기 위하여 넘어 다닌 다름재, 서당이 있다.
허준 관련 드라마에서 허준의 스승이라는 유의태의 모델 인물이다. 1965년 경희대 한방병원장 노정우가 전해들은 산청의 명의 유이태 이름을 진주 유(柳), 의로울 의(義), 클 태(泰)로 만들어 인물한국사에 발표하였다. 이은성이 이글을 읽고 드라마에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했다. 물론 생존연대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실제 유이태는 허준보다 후대의 사람이다.
드라마 속 유의태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 ~ 1715)
1. 소개
조선의 인물. 자는 백원(伯源). 호는 신연당(新淵堂), 원학산인, 인서.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 사람으로 1710년과 1713년에 두번의 부름을 받았다. 숙종이 병이 나 전국의 명의를 불렀다. 어의가 되어 도수환 처방으로 임금 숙종을 치료하였다. 그 공로로 말 한마리와 비단을 받았다. 그리고 종 1품 숭록대부 안산군수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았다.
유이태(劉以泰)는 일생동안 바른 길을 걷는 정도(正道), 부모를 공경히 모시는 효도(孝道),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시도 (施道), 병의 근원을 탐구하여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도(醫道), 사람들이 장수(長壽)하는 수도(壽道) 등 5도(道)를 실천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해 모친상을 당할 때 그 여막을 떠나지 않아 향리 사람들이 그를 칭찬했으며, 할아버지, 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리자 기도하고 할아버지, 아버지의 병환이 완쾌되자 하늘의 도움이라 여겨 때마침 흉년이 들어 여러 일가, 이웃 등이 기아에 허덕이자 부유한 친구들에게 곡식 100여석을 얻어 이들을 구했다. 인근에서 그를 칭찬하고 효행과 선행을 알리는 행장이 전해지고 있다.
사우들과 후세 사람들은 유이태의 의술을 중국의 명의 화타와 편작에 비유하였다.
1696년 조선인 최초로 홍역치료서 <마진편>을 저술하여 홍역치료의 태두가 되었고, 그의 치법은 정약용의 <마과회통>에 영향을 끼쳤으며, 산청을 홍역치료의 발상지로 만들었다. 소식(小食)을 권유했고, 건강할 때 계절에 따라 섭생을 잘해야하며, 병든 초기에 신속히 질병을 치료해야 하고, 건강이 회복된 이후에 더욱더 건강관리를 철저히 해야한다는 건강관리 요령을 남겼다.
그는 의학의 발전과 질병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의원 동시에 환자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여 진정으로 의원을 따르는 심의(心醬)이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실린다는 신의(神醫)라고 불렸다.
2. 설화
유이태탕과 순산비방의 설화 그리고 조선의 명의 중에서 가장 많은 설화를 남겼고, 강강술래에 채록되어 있는 조선의 유일한 명의이다.
어려서 글공부를 할 때 밤마다 미인이 나타나 유혹했지만 마음 굳게 공부했다. 그 미인이 입맞춤을 해달라고 요구하자 유이태는 이를 들어줘 그 미인의 입에서 자신의 입으로 구슬이 들어왔다가 그 미인의 입으로 구슬이 빨려들어갔다.
이 일 이후로는 유이태는 그 미인을 그리워하다가 점차 안색이 창백하고 몸이 야위어졌는데, 서당 훈장이 자초지종을 묻자 유이태를 이를 이야기하고 서당 훈장이 구슬이 입에 들어올 때 삼키라고 했다.
유이태가 그 미인을 만나 입맞춤을 하게 되자 구슬을 삼켰는데, 그 미인은 한 마리의 흰 여우로 변해 달아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유이태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고 더욱 총명해져 한 번 듣거나 본 것은 잊지 않게 되었으며, 의술을 열심히 공부해 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되어 국왕의 병환에 부름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구슬이 사라진 후에는 평범한 재주만 가지게 되고 기억력이 줄어 건망증까지 걸릴 정도였으며, 며느리가 몸살병에 걸릴 때 콩나물을 다려 먹이려고 했다가 콩나물을 잊어먹어 비녀나물이라고 하다가 며느리를 놓쳤다고 한다.
유이태가 남긴 유적지는 산청, 거창, 함양에 산재해 있다. 산청 생초에는 인술을 펼쳤던 혜민국, 서실, 묘소, 유이태낚시바위, 매봉재. 1713년 임금이 제공한 말을 타고 출발한 관동이 있다. 금서면 화계리 왕산에 장군수약수터[1] 가 있고 오부면에 마음병치료약수터(찬샘이)가 있다. 거창에는 이태사랑바위, 침대롱바위,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생가, 1714년 참봉 정중원과 슬잔을 나누었던 동계고택, 선영 황산, 조부를 문안하기 위하여 넘어 다닌 다름재, 서당이 있다.
- 저서 : 마진편, 인서문견록, 실험단방, 1975년 잃어버린 의서 2권, 1940년대 초반 화재로 소실된 부인방과 침구방
3. 기타
허준 관련 드라마에서 허준의 스승이라는 유의태의 모델 인물이다. 1965년 경희대 한방병원장 노정우가 전해들은 산청의 명의 유이태 이름을 진주 유(柳), 의로울 의(義), 클 태(泰)로 만들어 인물한국사에 발표하였다. 이은성이 이글을 읽고 드라마에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했다. 물론 생존연대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실제 유이태는 허준보다 후대의 사람이다.
드라마 속 유의태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4. 참고문헌
- <기억하고 싶은 조선의 참 의원 유이태>
- <조선의 명의 유이태 연구>
- <허준의 스승 柳義泰는 허구다.>
[1] 산청군청에서 柳義泰약수터로 이름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