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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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朝鮮)[14] 은 고려의 뒤를 이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약 518년[출처][15] 간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지배했던 국가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전제군주정 국가이다.
고려 말 혼란기때에 황산대첩 등의 활약으로 명장으로서 명성을 얻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옛 고조선의 이름을 물려받아 건국하였다.[16] 이후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국호(國號)가 공식 변경된다.
국호를 조선으로 한 날은 1393년 음력 2월 15일이었으며, 양력 1897년 10월 12일에는 대한제국이 공식 선포되었고, 1910년 8월 29일에는 일제에 의한 경술국치에 의해 일제강점기가 시작(국권피탈)되면서 대한제국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후삼국시대를 재통일한 고려와 달리,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통한 국가승계 왕조이기에 초기에는 고려를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17] 다만 고려 말 원나라의 몽골 황실이 내정을 간섭하던 시기의 영향과 성리학의 유입이 고려와 조선의 차이를 크게 결정지었다.[18]
고려와의 가장 큰 차이는 '''숭유억불.''' 조선 이전의 한반도 국가들은 중원에서 유래된 종교적 색채의 학문인 유교(성리학)를 정치적인 학문 정도로 봤지 종교로 보진 않았으며, 삼국사기 중기 이래 천 년간 우세했던 전통적인 불교가 국교(國敎)로서 대접받았다. 그러나 고려 말 중원에서 성리학[19] 이 들어오면서 여기에 정도전을 필두한 사대부들이 크게 감화가 되어 조선을 개국하면서 유교를 원리로 삼고 이후 조선이 멸망 때까지 국가교학(國家敎學)[20] 으로 삼았다. 이는 이전 한반도 국가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또한 고려보다 한층 더 세련된 '''중앙 집권화 관료제 국가'''를 완성했다. 이런 강력한 중앙의 힘은 "유교적 이상에 따라 통치되는 이상적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아 건국 100년 만에 나라 곳곳을 유교로 체득시키는 데 거의 성공한다. 그런 유교화가 가장 정점이었던 것은 17세기의 조선 중기. 이는 다시 후기에 접어들면서 서학의 전파, 실학의 발흥 등과 함께 그 색채가 차츰 옅어져 갔으나, 산업화와 근대화가 진행된 현재의 남북한 모두에 그 잔재가 어느 정도 남아있다. 현재 "전통 문화"라고 부르는 거의 대부분이 조선시대(특히 18세기 이후의 중후기)에 형성된 것들이다.
대한민국은 조선의 영토와 민족, 문화 등을 그대로 계승하긴 하였으나, 이와 국가의 정체(政體)는 완전히 별개이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수도가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에서 그대로 이어져 내려올 뿐더러[22] 현재 통용되는 화폐에 도안된 인물들이 100% 조선 중기 약 200여년 기간에 살았던 사람들이고,[23] 광화문 등 전국 곳곳에서 조선시대 위인들이 기념되고 문자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한글을 공식문자로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은 조선의 문화적인 영향력이 현재에도 계속 그 영향력을 크게 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 마저도 조선 말기에 처음으로 제정된 것이다. 또한 현재까지도 중국, 일본, 베트남 같은 한자문화권의 국가들에서는 조선반도[24] , 조선어, 조선 등으로 한국을 호칭하는 경우가 많다.
2. 국호
태조 이성계는 즉위 후 즉위 교서를 통해 '나라 이름은 이전대로 고려(高麗)라 한다'고 밝히고, 제후국으로서 명나라에 새 나라의 개국과 태조의 즉위를 알리는 내용의 사절을 보낸다. 이때 명은 새 나라의 국호는 무엇으로 고쳤는지를 되묻는데, 이에 조선은 백관을 도당에 모아두고 국호를 논의해 고려라는 국호를 고집하는 대신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和寧)'과 고대에 존재하였던 국가명인 '조선(朝鮮)' 중에 하나를 택하여 달라고 청하고, 명이 조선을 택하여[25] 국호가 확정되었다.
중국에 나라 이름 선정을 부탁한 점은 두고두고 민족주의자들에게 까이고 있지만, 원간섭기이래 더이상 허례가 아니게 된 천조의 '종주권(Suzerainy)' 하에서는 결코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26] 조선으로서도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 만큼 왕씨의 고려 대신 새로운 국호를 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고, 조선이 내정한 '이름 후보' 중 하나를 명이 선택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얻는 외교적 영향력까지 계산하지 않았겠냐는 해석도 있다[27] . 일단 '화령'이란 국호는 지역명에 불과해 국호로서의 정통성이나 당위성이 부족한 데다 요동 정벌을 불러왔던 접경 지역인 철령 지역의 이름을 명이 국호를 허락하기는 힘들다는 것[28] 이라는 점을 조선 정부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기에 조선 정부는 조선이라는 국호을 내정하고 곁가지 후보로서 화령을 함께 제시한 것이 아니냐는 가설도 있다. 즉, 처음부터 조선으로 새 국호를 낙점하고 명에 사실상 보기가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명의 "조선 낙점"은 그렇다 치고, 왜 멸망한지 1500년이나 된[29] "조선"이란 명칭을 가져온 것일까? 여기에는 고려의 정통성에 대항하려는 신 왕조 개창 세력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왕건의 고려 왕조는 옛 고구려의 정통을 이었음을 표방했다. 그러다 고려 중기에는 옛 삼국을 공평하게 골고루 이었다는 쪽으로 역사관이 변하긴 했지만[30] 어쨌든 나라 이름부터가 그 흔적이라 할 수 있고 조선은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설된 만큼, 고려의 정통성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와는 다른 "정통성"을 찾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예로 고려시대의 반란자들은 자주 고구려,[31]신라, 백제의 "정통성"을 끌어다 붙여서 고려에 대항하려 했었다. 하지만 신라나 백제는 이미 그 왕조가 자리잡았던 "연고지"에서나 상징성을 가질 뿐, 이들이 멸망한 지 수백년이 지난 1392년 시점에서 전국적인 정통성으로 끌어올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32][33] 그래서 '''아예 판을 엎어버리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어차피 고구려에 기반한 기존의 정통성의 흐름 내에서는 이성계와 그 일파들은 논리적으로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고조선 역시 요녕성, 길림성, 한반도 북부를 점유했고, 경기도와 강원도 중부 이하 한반도 남부 일대는 진국(국가)으로 불려지는 국가들이 위치해있어서 영유권 밖이었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기자가 와서 주나라의 책봉을 받은 '''기자조선'''의 존재 때문이다. 또한 고조선은 '''연대상으로 최초의 한국계 국가'''라는 점에 있어서도 백제와 신라에 비해 써먹기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또한 준왕이 남하하면서 목지국을 세웠다는 전승이 있는데 실제 목지국의 통치 영역은 타 소국에 비해 컸다고는 해도 오늘날의 시군 몇개를 묶어놓은 수준에 불과했지만 마한의 맹주로써 권위는 있었기에 한반도 남반부 전역에 영향을 끼쳤던지라 한반도 남부도 포괄이 가능했다.
명이 화령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대단히 재미있는 가설이 있다. 화령(和寧)은 함경남도 영흥의 지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몽골 원나라의 옛 수도인 '''카라코룸'''의 한명(漢名)인 화림(和林)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라는 것.[34] 화령부는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붙인 이름이니 그 자체가 친원적인 성향을 띤 것은 아니었지만.[35]
화령과 몽골이 관련되었다는 설은 이미 조선 시대 실학자인 이익이 "'''설마 선대 왕께서 몽고 오랑캐 놈들 땅 이름으로 국호 정해달라고 했겠어? 헛소리겠지.'''" 라고 '성호사설'에서 한 단락을 할애해가며 따로 언급해서 깐 것을 볼 수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화령, 조선 간택 요청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이익의 의견대로 태조와 백관들이 일개 지명에 불과한 화령을 국호로 삼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며, 이미 조선으로 하기로 결정은 났는데 명나라에게 그대로 '통보'해 버리면 명나라 입장에선 불쾌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버리는 카드로 화령을 넣었다는 것. 앞서 말한 대로 화령은 카라코룸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명나라에선 절대 선택할 리가 없는 국호였고 말하자면 일종의 '''결재용 2안 내지는 버리는 카드'''가 아니었을까 하고 이야기한다.[36]성조(聖朝, 이성계)께서 천명을 받아 화령과 조선으로써 명나라에 주청하니 이에 황제가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 무릇 화령의 뜻은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 영락제가 북방을 정벌한 것은 아로태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한 것이니, 화령은 원나라의 옛 땅이다. 원나라의 위소(危素)는 "원 태조(칭기즈칸)가 창업한 땅이라 하여 《화령지(和寧誌)》를 지었으니, 족히 그 증거를 삼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오랑캐의 지명으로 국호를 주청할 리는 없을 듯하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고려 우왕(禑王) 9년에 태조가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을 올린 가운데, "동쪽 경계에 있는 화령의 땅은 도내(道內)에서 가장 땅이 넓고 풍요합니다."라고 한 말이 있다. 그 다음 해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화령부(和寧府)에 오매, 임언충(任彥忠)을 파견하여 간곡히 효유하여 보냈는데, 길이 막혀 반년을 머물렀으니, 대개 화령은 쌍성(雙城)에서 요동(遼東)의 개원부(開原府)로 직통하는 요충지이다. 그러니 '''그 땅은 실로 성조가 창업한 땅'''으로서 이른바 '적전(赤田)'이 이곳이니, 국호를 화령으로 주청한 것은 혹 이 연유가 아니겠는가? - 성호사설 권15, 화령.
조선 외에 청구(靑丘/靑邱 - 푸른 언덕), 소방(小邦 - 소국이란 의미)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이것들은 일종의 별칭으로 공식 국명은 엄연히 '조선'이었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당나라가 망한뒤에도 일본이 한동안 중국을 가리켜 당이라 부른것이나 일본이 일본이란 국호를 공식적으로 채택했었음에도 중국과 조선에서는 여전히 왜국이라고 계속 부른것과 비슷하게 조선을 계속 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인조 때 병자호란 직전 조선으로 도망쳐온 한인들이 청나라가 고려를 침공하기 위해 말을 먹이는 중이라고 말한 부분이 있다. 또한 청나라의 사서에는 조선을 차오햔(조선의 만주식 이름)보단 솔호(고려의 만주식 이름)라는 이름으로 많이 부른다.
2.1. 이씨 조선(이조)
북한이나 중국, 일본에서는 이조(李朝)[37] 라고 부른다. '이씨(李氏)의 조선' 또는 '이씨 왕조'라는 뜻.
동양사에서 중국의 몇몇 국가를 왕조의 성씨를 들어 구분하듯 중국에서는 이조라는 표현을 통해 조선을 구분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조선 왕조를 이씨 조선, 고려 왕조를 왕씨 고려로 구분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도 이조라는 표현은 종종 쓰인 바 있다.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나 열렬한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도 그들의 저서에서 조선 왕조를 가리켜 '이조'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는 이때까지는 고조선이라는 표현이 지금처럼 쓰이지 않은 것에 연유한다. 일례로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할 당시에는 정감록의 영향으로 성씨에 따른 왕조 구분이 영향을 끼쳐 이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신채호는 본인의 연구가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어 단군 - 기자 - 위만 조선과의 구분하기 위해 이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사용하였는데,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바꾼 이후에도 임정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대의 한반도를 조선으로 불렀기 때문에 왕조 국가 조선과 당대의 조선을 구분할 방법이 필요했던 것 역시 이조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된다.
북한에서는 북한의 약식 국명이 '조선'이기에 자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 왕조를 구분하기 위해 이씨조선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다.
다만 고조선이라는 표현이 이미 널리 정착된 이후로 이 용어를 굳이 고집하는 것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고 일제가 이씨조선이라는 국호를 악용한 것은 사실이기에 가급적이면 조선이라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올바른 표현이다.
3. 역사
4. 평가
5. 왕사
6. 왕실
7. 오해
8. 상징
조선 국왕의 어기는 '''태극팔괘도(太極八卦圖)'''라고도 불렸으며, 조선 시대 이전에도 도교적 우주원리에 따라 음과 양, 세상의 이치와 자연의 섭리를 나타내는 영험한 문양으로 여겨져 널리 사용되다가 조선 건국 이후에는 성리학이 국교가 되면서 군주의 어기로 사용되었다. 태극 문양은 사서삼경 중 역경의 계사전(繫辭傳)에서 유래한 태극도(太極圖)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위 어기에 직접적으로 채용된 문양은 1415년(영락 13년) 명 성조의 뜻에 따라 호광 등 42명의 유학자가 편찬한 저서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수록된 태극도이며, 이는 구한말 조선의 국장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는 1882년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조선의 역관 이응준(1832 ~ ?)[39] 이 도안하였다. 미국과의 수교를 앞두고 통상 조약의 조인식에 사용할 국기가 필요하다는 미국측 공사의 청이 있었으며, 이에 국기의 필요성을 느낀 김홍집이 제작을 명한 것이다. 이후 1882년 9월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 등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사용되다가, 1883년 3월 6일 고종의 어명에 의하여 조선국기로 공포되었다. 당시의 태극기 도안은 '태극 문양과 4괘'에 대한 기본적인 지침 외에 제도학에 근거한 자세한 도안법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제작된 태극기마다 도안이 조금씩 달랐다.
9. 정치 체제
조선의 정체(정치 체제)는 국왕 중심제의 '''전제군주제''' 국가이며 바뀐 적이 없다.[40] 특히 조선의 체제는 1910년 대한제국 멸망까지 계속되어왔으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로 한국통감부의 간섭과 개입이 있었다.[41]
국왕에 대한 경칭은 '''전하(殿下)'''로 불려왔다가 1894년 12월 17일 갑오개혁 이후부터는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바뀌어 불려졌으며, 1897년 대한제국 개국 이후에는 '''황제폐하(皇帝陛下)'''로 불렸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후 이러한 경칭도 일제강점기 때 다시 전하로 격하되었다.
관료는 수상(首相)격으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42] 의 3정승 직위가 있으며 갑오개혁 이후로는 영의정이 총리대신 등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조선 조정의 정치 조직은 국왕과 최고 의결 기관인 의정부 3상, 그리고 각 분야의 일을 담당하는 부서와 같은 기관인 육조 판서로 구성되어 있다.
10. 경제
조선시대에 무역이 활발하지 못했고 또한 상공업 발전이 지체되었다는 의견도 일부 있다. 다만 당시 조선은 중국, 일본과는 교류를 했으며 조선의 교역은 내부적인 요인 보다는 명나라의 해금령과 일본의 전국시대 같은 외부적 요인들의 영향이 더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이 전기에 상업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주로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으로 기반 시설이 엉망이되어서 그랬다는 설명과 상업 자본 발전이 늦어서 그랬다는 설명이 있는데,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상업이 동아시아에서 메리트가 없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고려 > 조선의 교체는 원나라의 붕괴와 그로인한 동아시아 무역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생긴 여파'''이기도 하다. [43]
고려는 동아시아의 무역에서 원-고려-왜국의 중간무역으로 큰 이득을 보는 국가였다. 그러나 원 말기, 전세계적인 흑사병의 창궐로 실크로드가 완전히 망해버린다. 이에 따라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양 무역의 중심이었던 원의 경제가 개판이 되는데''', 당시 원은 세조 쿠빌라이 칸이 세운 '지원발행보초'를 통해 은 1냥을 교초 10관으로 정해놓고 유통하고 있었다. 즉,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교초는 휴지쪼가리로 전락한다'''.
당시 교초를 가장 많이 갖고 있던 국가는 원나라, 그리고 원과 무역을 하던 고려, 왜, 베트남 등의 국가들이었다. 그런데 이 교초가 휴지조각이 되자 원과 고려와 왜의 경제가 붕괴한다.[44] 원이 막북으로 쫒겨나고 중원의 새 지배자가 된 명나라는 국제 무역을 최대한 억제하고 자급자족 경제 시스템으로 재편성하면서 교초를 완전히 폐지한다. 그나마 고려는 어느 정도 농업강국이었고, 그럭저럭 현물도 갖고 있었던 지라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지만 왜는 가마쿠라 막부가 버티지 못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대두되며 남북조 시대라는 혼란기가 열렸다. 이로 인해 발생한 것이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다.
결국 경제붕괴와 지속적인 침략으로 인해 고려의 국력이 쇠진하고 대신 조선이 세워졌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고려 때 세워졌던 상업과 국제무역 중심의 경제 인프라는 완전히 몰락한 상황'''이었다고 봐도 좋다. 그 상업 중심의 경제 인프라가 얼마나 끔찍한 피해를 불러왔는지 잘 아는 중국과 조선의 유교 사대부들은 상업에 투자하는 것을 꺼려했고 중농 위주, 자급자족적 정책으로 농업에 투자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무역은 한쪽만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만에 하나 조선의 위정자들이 중상주의적 이념을 가졌다해도, 동아시아 세계 최대의 시장인 중국에서 해외무역을 막는 정책(해금령)을 취한 이상, '''동아시아의 국제무역은 크게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조선의 상업은 관청을 중심으로 한 지역 단위의 정부-개인 거래를 활성화시키고, 다시 이를 조공 무역으로[45] 거래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틀게 된다.
조선의 상업 미비가 외부적 요인과 큰 관련이 있다는 정황은 조선 후기에도 보이는데, 다름이 아니라 청나라의 해금령 완화와 일본의 통일 및 은광 개발, 유럽 상인들의 동아시아 진출로 국제 무역망이 활성되자 조선에서도 중개무역으로써 상업이 발전한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유교 이데올로기 상에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농사를 짓는 사람이 적어져서 국가 경영에 해가 된다고 천시하기도 했다. 사실 상업은 엄밀히 따지면 본인이 생산활동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물건을 옮기는 것으로 돈을 버는 것이라며 상업 천시를 정당화했다. 또한 공업은 일단 본인 손으로 뭔가를 만들긴 하니 상업보다는 덜 천하게 여겨졌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전근대[46] 에는 기근이 거의 일상이었기 때문에 일단 식량을 만드는 농업보다 공업과 상업이 상대적으로 더 천시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공업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해석도 오류가 있는게, 막상 상업이 발전했다는 식으로 일컫는 고려나 신라보다도, 성리학을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더 민간 경제(상업, 수공업, 무역)의 발전이 나타났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상인조합(유상, 만상, 송상 등), 어음, 계로 대표되는 원시적인 선물, 금융 거래가 태동했으며, 놋그릇[47] , 자개, 칠기 등의 생활 용품이 시장에 출시돼 대중화되었다.
교역 역시 초기에만 외부적 요인들로 인하여 크게 타격을 받았을 뿐 후기로 갈수록 이전 고려시대 때 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 ‘민간에 의한 무역’이 이전 시기보다 유의미하게 활발해졌다. 인삼을 가공한 상품인 홍삼의 예처럼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주도의 무역 상품이 개발되었고 상평통보 같은 화폐가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또 대중적으로 꾸준히 쓰이던 시기 역시 유학이 확고히 자리잡은 조선시대때 부터였다. 이전 시기였던 고려는 물물교환, 현물화폐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었고, 소수의 귀족들만이 주도하는 제한적인 무역만이 이뤄졌었다.
또한 조선의 위정자들 역시 상업을 천시하는 이념 자체는 깔려있었으나 현실을 무시해가면서 상업을 억제했을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상인들은 물자 유통을 원할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인식은 분명히 있었다. 조선 후기에 자유로운 상인인 사상(私商)이 늘어나자 한양 도성 내에 금난전권이 주어졌다가 정경유착 문제로 다시 폐지되기도 했고, 대동법을 포함해서 조세 운송 등에 민간 자본에 위탁하는 등 조선 후기에는 조정 차원에서도 상인과 유기적인 협력 관계를 가졌다.
물론 조선 역시 임란 이전까지는 빈말로도 조선의 상업이 크게 발전했다고 하기는 어려우며, 여러 왕이 밀어붙인 화폐정책도 번번히 실패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주둔한 명군이 은으로 식량을 구하려했으나 그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조선의 상업과 화폐경제는 미약했다. 하지만 임란 이후 상평통보가 법정화폐로 자리잡았고, 17-18세기에는 세계무역 트렌드에 힘입어 은도 다소 유입되어 은도 화폐로 사용되었다. 하멜 표류기에도 조선에서 은화가 자주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효종 때는 세의 납부도 은으로 일부나마 대체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처럼 조선 또한 제대로 된 화폐경제가 완벽히 정착하기엔 문제점이 많았다. 조선 후기에도 삼베나 쌀등의 현물거래의 비율이 유럽뿐 아니라 중국, 일본과 비교해서도 매우 높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화폐 부족 현상인 전황(錢荒)은 1700년대 이후로 만성적인 현상이었으며, 조정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로써 논의되었다. 결국 조선은 멸망 직전까지 삼국이나 남북국, 고려 같은 한반도의 다른 왕조들처럼 현물 경제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물론 이에 대해서 더 보충 설명하자면 조선 정확히 한반도는 은이 거의 산출되지 않는 지역이다. 은화같은 금속 화폐의 필수요소인 귀금속(대표적으로 은)이 거의 산출되지 않으니 조선이 자체적으로 은화를 충분히 유통하는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그 막대한 인구(논란이 많으나, 16세기 후반 당시 대략 6000만 ~ 1억 인근), 안정적인 가구의 형성, 생산력이 이미 충분히 높았던 농업 경제 등 탄탄한 내수를 기반으로 전세계에서 막대한 은화를 빨아들이던 국제 은화시장의 최종 종착지이자 블랙홀이었던 중국[48] 이나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던 금, 은, 구리 등의 대대적인 귀금속 채광으로 전근대 화폐 경제에까지 큰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귀금속 매장량이 상당했던 일본[49] 과 비교했을시 막대한 내수도 풍부한 귀금속 매장량도 전혀 없었던 조선이 금속화폐를 안정적으로 풍족하게 유통시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상기한 전황 현상에 대해서도 당대에 이미 구리만이 아니라 은화의 부족으로 인해 더 심화되고 있다고 조정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결론을 요약하면, 조선 시대는 전반적으로 상업이 발전하지 못한 시대였지만 이전에 알려진 통설처럼 발전이 전무한 시대도 아니었으며, 발전의 미비 역시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억압보다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 환경과 금속 자원 부족이라는 자연 환경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면이 크다.
10.1. 화폐
조선은 건국 이래 통화(通貨)를 정착시키려 하였으나 중기까지 지속적으로 실패했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화폐로 삼을만한 귀금속, 그러니까 금과 은의 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 조선은 중국과의 무역시 사용할 은을 당대의 은 공급지였던 일본에서 구해다 썼었다. 일반적으로 상품화폐는 귀금속 화폐를 거쳐 이것이 일반화된 금화 은화 등의 주조화폐가 되었다가 명목화폐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화폐가 된다.
그런데 고려나 조선의 경우 한반도의 자원 특성상 화폐로 삼을만한 금이나 은 등의 귀금속들의 매장량이 근본적으로 매우 부족했기에 이런 과정을 거칠 수 없었고, 중국을 따라한다고 철전이나 동전을 찍어내긴 하였으나 금, 은을 사용하는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실질적 가치가 없는 화폐들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서구의 경우 기본적으로 금, 은 광산이 어느 정도 있었고 로마 제국 이래로 화폐 유통의 경험이 있던데다가, 12세기부터는 경제발전으로 이슬람과 동유럽에서 금은이 유입된 것으로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었다. 구한 말이 되면 김옥균 등이 금본위제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도 금이 없어서 금본위제를 실시할 수 없었다는걸 감안하면 공염불에 불과했다. 일본이 금본위제로 이행할 수 있었던건 청일전쟁에 승리해서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뜯어낸 덕분이었다. 이후 17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상평통보''' 등의 엽전을 사용하기 시작해 결국 정착했다. 이전까지 조선에서 통화 역할을 대신했던 주요 상품은 베[50] 와 쌀이었으며, 포화(布貨)로서의 베는 다섯 새 굵기의 섬유로 짠 중등품인 오승포(五升布)가 기준이었다. 조선에서 화폐가 정착하는 과정은 상평통보 문서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어찌되었든 조선의 이와 같은 화폐유통정책은 정유재란·병자호란과 같은 외침, 사회경제발전의 미숙성, 화폐원료의 공급난 및 화폐정책의 불합리한 운용 등이 직접적·간접적 원인이 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중단된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40년대에는 국내외의 상업이 발달한 개성을 중심으로 강화·교동(喬桐)·풍단(豊湍)·연백(延白) 등 인근지방에서 동전이 원활히 유통되고, 165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국국경과 인접하여 국제무역이 발달한 의주·안주·평양 등지에서도 동전은 통용되었다. 그리고 1670년대 말에 상평통보를 법화로 채택, 유통시키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화폐경제의 확대보급추세가 더욱 가속화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16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물품화폐와 칭량은화의 유통이 지배적인 봉건사회에 명목화폐인 동전이 국가의 유일한 법화로서의 유통기반을 이룩하게 되었다. 동전이 초기의 유통보급단계를 지나 일반적 가치척도·교환수단·지불수단 및 가치저장수단 등 제반 화폐기능을 발휘하게 되자 호조 등 중앙관서와 지방관청, 그리고 각 군영의 비축(備蓄)과 수입지출의 화폐화비율(貨幣化比率)이 높아지고, 소작료·노임의 화폐화가 증진되었다. 또한, 상업자본과 고리대자본(高利貸資本)이 보다 유통성향이 큰 화폐자본으로 전환되는가 하면, 토지·노비·가옥·가축 등에서부터 시장의 일용잡화에 이르기까지 동전을 매개로 하여 거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720년대 이후에는 북쪽으로 회령, 서쪽으로 의주, 남쪽으로 동래와 제주도에서도 동전이 통용되는 등, 유통영역은 국내 각 지방으로 확대되고 각 계층의 화폐에 대한 가치인식은 심화되었다. 따라서 1730년대부터는 상평통보만을 법화로 사용하는 단순화폐유통체제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어, 고액전(高額錢)을 주조, 유통시키는 문제와 함께 금화·은화를 주조하여 동전과 병용하자는 주장이 지식계층에 의하여 제기, 논의되었다. 1810년대에 이르러서는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근대 금·은본위제와 근사한 화폐제도의 개혁방안이 구상, 제시되었다. 그리고 1860년대에는 악화(惡貨) 당백전(當百錢)을 남발함으로써 심각한 화폐제도 내지 유통질서의 혼란이 있었지만, 마침내 조선왕조의 전근대 화폐제도, 즉 단순소박한 단일법화유통체제는 극복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동법이 유지된 결과 세금 납부를 위해서라도 미곡 중심의 경제가 유지되었으며, 지방에서는 여전히 물물교환이 행해졌다. 또 조선 후기에는 대외적으로 청, 일본과 은 거래를 활발히 하였으나, 거의 멸망할 때까지 이것이 경제 체질의 완벽한 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참고로 이후 조선 후기에 정착된 상평통보의 통화 단위는 '''문(文)'''이었다. '냥'이라는 단위가 워낙 많이 사용되어서 통화 단위가 냥이었다고 착각되는 경우가 많으나, 10문이 1전, 10전이 1냥, 10냥이 1관으로 통용되었다. 후에 대한제국기에 전환국이 설치되어 백동화가 주조됨에 따라 통화 단위는 '''원'''(圓)으로 바뀌게 되었으나, 화폐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폭락하여 일본 화폐가 더 많이 유통되었다.
11. 영토·행정구역
1896년의 13도 체계를 기준으로 평안북도(평안남도는 고려시대때 가서야 완전히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51] )와 함경남도 그리고 함경북도는 모두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 조선시대 때 4군 6진을 개척하고 나서야 다시금 한민족의 영토로 완전히 재편입되었다. 그 이전에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이들 영토들은 특정국가들의 지배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사실상 야인들의 영토였었다. 지금 현재 남북한의 영토를 완성했다는 점과 통일신라, 고려 때 보다 더 넓은 영토를 점유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영토 확장은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12. 사법
조선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는 유교이념에 입각한 국가로, 율령(律令)에 기초하여 제도적이고 계량적인 통치를 꾀한 성문법주의 국가였다. 조선의 법률은 중국의 법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 '대명령(大明令)' 및 '대명회전(大明會典)', 청나라의 '대청률례(大淸律例)'와 깊은 연관이 있다. 다만 성문법이 있었다고 해서 법치국가인 것은 아닌데, 근대적인 법치국가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법의 지배원리)를 말하지만, 조선은 이념상으로는 왕이 '법으로' 지배하는 국가였다는 데서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52] . 조선의 왕은 법을 준수하는 자리였지, 법에 복종하는 자리는 아니였으므로 법치국가는 아니다. 그래도 왕권의 독주를 견제하는 장치가 동시대 어느 나라와 견줘도 잘 돌아갔다. 다만, 이는 동시에 조선 정치 시스템의 한계이자 모순이기도 하다. 법적으로는 국왕에게 무한한 권력이 주어지는 체제인데, 실질적으로 강한 신권이 왕권을 제약하는 형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군약신강 문서에도 있지만, 이는 왕권을 제약한 요소인 동시에 국왕권과 신권이 무한 충돌하는 계기가 된다[53] .
12.1. 소송제도
조선에도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이 존재하였다. 자세한 것은 상기 틀의 각 문서 참조.
13. 과학
13.1. 문헌·활자·인쇄술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등 굉장히 세분화되고 쓰는 방법이 체계화된 방대한 양의 기록물들을 편찬했으며, 거기다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고 객관적인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한다. 덕분에 당대의 시대상과 정세, 각종 사건과 국가 상황을 실시간으로 매우 세세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사료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인정받고 있다.[54] 또한 전대인 고려시대 때보다 더 발전한 인쇄 기술력을 바탕으로 서적 편찬 또한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조보 같은 세계 최초의 신문 또한 발행되었다.
13.2. 발명과 발견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앙부일구, 거북선, 화차와 신기전 등등 전대인 고려시대 때보다 한층 더 과학기술이 발전했으며 한민족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한글 창제와 홍길동전 같은 한글 소설의 발달 그리고 형태가 확립된 한국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시조의 발전과 궁중 악기인 편경 제작, 궁중음악인 종묘제례악과 악보인 대악후보 같은 문예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동의보감 같은 의학의 발전 또한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도 제작 기술 또한 계속 발전해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 지도나 대동여지도 같은 훨씬 더 정확한 지도들이 제작되었으며, 천문학 또한 발전해 칠정산 같은 한국계 국가 최초의 역법이 만들어졌고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세계 최초의 고경도 석판 위에 새겨진 전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또한 제작되었으며, 선조대에는 인류 역사에 남은 우리 은하 마지막 초신성인 SN 1604(케플러의 초신성)을 관측해 실록에 기록했는데 이는 현대에 와서 이 초신성이 la형 초신성이었음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일 정도로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대에는 은광석에서 순수한 은을 추출하는 첨단 회취법인 연은분리법이 개발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계속 발전이 이루어졌다.
13.3. 건축·토목
조선의 건축은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 평면적으로 더 복잡하고, 형태가 다양하며, 정교하다. 단순한 일자현 건축에서 탈피해 ㅁ, ㅂ, ㄱ 형태의 한옥이 보편화 되었다. 후기로 가면 만성적인 목재부족에 시달려 휘어진 나무 줄기마저 건축에 적용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상류층에서는 귀한 모과나무 등을 모양 그대로 집 기둥에 써서 자신의 부를 사치스럽게 과시했다. 왕궁, 사찰 같은 대형 토목 건축은 목재 부족으로 건축물의 규모가 작아졌으나[55] 민간의 가옥은 더 발달한 기술과 큰 규모를 갖추었다. 당연히 2층 건물도 있었다.(창덕궁 징광루, 덕수궁 석어당, 도시 지역의 상점 건축들)
13.4. 교통
13.4.1. 도로
일단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에는 10대 대로를 기본으로 지역마다 고을마다 연결도로가 다 있었으며, 조선의 도로망 10대 대로는 경국대전부터 속대전 등 법정 기준 자체가 말 그대로 사신행차가 가능한 대로라서 수레 3대가 연달아 지나갈 수 있어야 하는 등 그 규격 또한 정해져 있었다.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서 후기 실학자들이 도로에 대해 지적하고 수레 사용이 저조한 것을 비판한 바가 있으며 그것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실학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대로 외의 도로들은 수레 하나조차 다니기 좁았던 걸로 보인다. 이러한 기술적인 측면은 조선 조정에서도 문제를 자각하고 있었으며, 실학자들이 내놓은 개혁안은 제도적인 부분은 상당히 많이 무시되었으나 기술적, 물적인 부분은 조선 후기에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수레의 사용률이 늘어나고 국가 차원에서 장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근대 육상 수송은 기술적인 장벽으로 인해 현대인들의 인식만큼 '혁신적'인 개혁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비단 조선만의 한계가 아니라, 당시 세계 최선진이던 유럽조차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놀랍게도 동양은 물론 서양도 19세기 전까진 '돌로 깐 포장도로'라는 걸 거의 안 만들었다. 괜히 로마시대 도로가 유명한 게 아니다. 동시대 중국조차 '남선북마(南船北馬)' 라고 하여 화북에서 수레가 달리는 도로가 많았지만 그 중국 조차도 대부분의 도로들은 판석포장이 아닌 그냥 비포장 흙길 도로들이 비율상 대다수였다.
고대 로마의 도로 발전을 끌고와서 비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 인식과 달리 로마는 어디까지나 농업 위주의 경제였고 상업은 매우 천시하는 사회였으며, 상업은 대부분 수로를 통해 발전했다. 더 정확히는 철도 개발 이전 전근대 시대는 항상 수운의 수송력이 육상 수송보다 훨씬 우월했다. 이건 서양이고 동양이고 로마고 중국이고 극복할 수 없었던 기술적, 물리적 한계다. 당대의 일본 또한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우마를 주로 활용하기 보다는 육상물류는 대부분 사람들이 짊어지고 다녔으며, 물류 유통의 대부분을 세토내해 및 바닷길이나 오사카 운하 같은 수운으로 대부분 해결하였다. 중국이 무리해서 대운하를 뚫은 이유도 이것이다. 18세기 서유럽도 또한 북유럽 평원, 특히 라인 강 하구에 매우 많은 운하를 뚫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유럽 각국들은 기차의 발명 직전까지 상업 유통을 위해 운하 개발에 많은 비용을 투자했었다.
이처럼 19세기 영국에서 매캐덤 도로(쇄석포장) 포장법을 개발하기 전까진 서구 대부분의 도로들은 비포장 흙길이었으며 다른 쇄석포장법 적용을 넓게 살펴봐도 영국이 18세기에 그나마 좀 깔기 시작했지 다른 나라들은 그런 거 없이 그냥 마차들이 흙길을 달리면 그게 도로가 되는 환경이었다. 국가적으로 포장도로를 대대적으로 깔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산업화 이후 미국에서 자전거가 유행한 뒤다.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이 다른 국가에 비해 도로를 유지하기 더 힘들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실제로는 19세기 초 유럽조차도 대부분의 도로가 겨우 비 한번에 진흙탕 뻘로 바뀌었을 정도로 도로 관리 상태는 매우 열악했으며, 이 문제로 보병 이동 속도는 하루에 15~20Km 정도에 불과했다. # 이 이동 속도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군, 명군, 일본군의 이동 속도랑 별 차이가 없다. 즉, "동시대 다른 나라만큼이라도 하지?" 라는 식의 말은, 실제로 동시대 다른 나라랑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반박이 가능하다(...).
참고로 그 일제 조차도 식민지 조선의 도로망을 그닥 늘리지는 않았는데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나오는 도로망 연장과 기성 연장을 살펴보면 도로망 연장의 경우 1921년 23,642km에서 1938년 27,878km로 별로 크게 늘어나지 않았지만, 대신 기성 연장이 1921년 14,743km에서 1938년 23,679km로 크게 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도로망 연장은 기존 도로를 포함한 전체 도로의 길이를 의미하고, 기성 연장은 이미 존재하던 도로들을 근대식으로 개수 완료한 도로의 길이를 의미한다. 즉, 일제 또한 기존 도로의 개수만 많이 했을 뿐 새롭게 더 도로를 연장하거나 크게 늘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로망 연장 측정 시작이 1921년이고 이 시기 도로길이가 대한제국 끝무렵이랑 큰 차이 없었다고 보여지므로 일제가 도로 연장 보다는 철도 위주의 새로운 교통망 구축에 더 힘썼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수레의 사용이 저조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일단 소가 끄는 달구지도 수레이며, 조선을 포함한 한반도 국가들이 중국 화북 지방이나 유럽 국가들 만큼 민간에서도 수레를 대량으로 쓰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에는 말 개체수의 부족이 있었다. 일단 한반도 국가들이 중국 화북 지역이나 유럽처럼 마차들을 많이 운용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만큼 말의 개체수가 충분히 충족되어야 하지만 한반도의 지형상 평야 지대는 굉장히 적으므로 말들을 대량으로 사육할 만한 거대한 말 목장들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소를 말 대신에 사용하기에는 일단 한반도에서 소들은 대부분 농우로서 농사를 돕는데 우선적으로 사용되었고, 무엇보다 소들은 말 만큼 빠르지도 못하고 생각한 것 만큼 힘이 더 좋지도 못하다. 거기다 한반도에서 말들은 그나마 기병 전력으로 사용되는 개체들을 제외하면 민간에서 사용 할 만한 수량은 또 그만큼 더 줄어드니 한반도에서 마차를 대량으로 사용하기에는 근본적인 말 개체수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수레와 육상 교통이라는 단편적인 잣대만을 기준으로 조선의 교통망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13.4.2. 수운
한반도의 기후나 자연환경 등 여러 이유들로 인해 조선의 교통은 육상 도로 보다는 수운 위주로 계속 발전하게 되었다. 조선이 육상 교통을 제대로 키우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필요가 없으니까. 육상 교통을 몇 배로 발라버리는 최강 효율성을 가진 수운을 이용하면 되는데 굳이 도로를 뚫어야 할까? 이미 조선 왕조는 고려 때부터 발전한 수운, 조운로를 수백년에 걸쳐서 고차원적으로 계속 발전시켜나갔다.
이미 18세기부터 조운선의 적재한도는 1000석을 넘어섰으며, 일부 상인들은 2000석 수준의 조운선을 건조했다. 대량의 수운 교통은 자연스럽게 전국 연안 지역의 발전을 불러와 접안시설, 유통업, 금융업, 중개업, 창고, 숙박업이 민간 자본의 투자로 조성되어 해당 지역이 주된 상업 중심지로 변화하였다.#
조선이 한성에 수도를 둔 이유도 임진강, 예성강, 그리고 중부 지방 전체를 포함하는 하계망을 지닌 한강과의 접근성이 우수한 곳이 한성이었기 때문이다. 산이 많아 도로를 건설할 수 없던 조선 입장에서 한성은 중부 지방 전역 을 포괄할 수 있던 명당이었던 것이다. 조선은 도로 대신에 수운에 주력해서 수레 '따위'보다 몇십 배나 더 많은 양을 몇십 배나 빨리 운송할 수 있었다. 현대 대한민국 정부가 교통 인프라에 온 힘을 쏟는 이유도 상공업과 제조업의 발전을 위한 기반인 교통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교통의 요지에서 주막과 객주, 여각 등이 숙박시설 겸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의외로 조선의 상업은 대중들의 생각보단 발달한 편이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은 도시가 작았고 농민이 많았지만 개항 기면업을 통해 확인한 조선의 면업은 1780년대 영국과 비슷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농민 중심이고 그에 따른 시장이 발달했으며 오히려 길드 같은 조직도 강고하지 않아 각지의 산물이 도를 넘어 유통되었다. 그 내실에 대한 평가야 어쨌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조선 후기, 특히 영조 정조 즈음부터는 농본 국가였던 조선에서도 자생적으로 상업과 시장이 (동시기 타국보다 부족할지언정) 이전보다 발전하는 현상이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56]
13.5. 농업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꾸준한 개간과 간척이 이루어진 데다가, 농사직설등의 농서 편찬과 감자, 옥수수, 고구마등 해외작물의 도입으로 농업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이는 동시대 주변국과의 영양상태 비교로도 확인된다. #
하지만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 시대 후반기에는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늘어 소작제가 일반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농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은 세금에다 소작료까지 내야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에 실학 같은 양민의 생활 형편을 개선시키려는 노력도 등장한다. 특히 정약용, 이익, 박지원,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 등은 지주를 축소하고 자영농을 육성하기 위해 토지를 지주로부터 농민에게로 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실학 자체가 조선에서 주류가 아니었던 것도 있고 해서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고로 결국 한반도에서 소작이 사라지는건 '''8.15 광복 이후'''다. 북한에서는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무상으로 분배해버렸고, 이후엔 공산주의 국가들이 으레 그러하듯 협동 농장 또는 집단 농장의 형태로 바뀐다. 반대로 자본주의 국가였던 남한에서는 지주로부터 농지를 구입한 뒤[57] 농민에게 장기 분할 납부의 방식으로 팔아서 분배했다. '''거기다가 6.25 전쟁으로 지주고 뭐고 평등하게 박살나서 소작도 아작났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소작은 불법이다. 그것도 그냥 불법도 아니고 헌법에 금지로 못박아놨다.
어찌되었든 오랜 평화와 낮은 세율, 농업 기술 발전(농업 생산량 증대)으로 조선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조선의 인구는 건국 무렵 550만~75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19세기 말엽에는 약 1700만명 정도로 전근대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무려 3배 가량 인구수가 폭증하였다.조선시대 인구 변동 서기 2019년이 된 지금에도 전 세계에서 국력의 펀더멘탈로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가 인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58] ,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 밀도는 중국 중원, 이집트와 일본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제일 높았으며, 인구의 절대적인 수치 역시 순위권이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높은 인구 부양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14. 풍습
14.1. 혼인제도
조선시대는 왕조 건립 초기부터 배불양유책(排佛揚儒策)과 더불어 중국으로부터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들여와 국법의 기초로 삼음에 따라 '동성동본혼'을 엄하게 규제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신라 및 고려시대에 발견되던 다처제 형태는 점차 사라지고 '본처'와 구분되는 '첩제'가 제도화되었다. 중국식 예교의 도입에 따라 적서(嫡庶) 구분을 명확히 하여 동시에 두 명의 적처를 둘 수 없음을 명시하고, 정적(正嫡) 이외의 서처는 첩 신분으로 전락시켰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중혼금지 법령'이 제정되었는데, 사실상의 다처제 관행은 그 이후에도 존속했던 것으로 추론되며, 다처제 관행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중종시대 이후의 일이다.
14.2. 생활 수준
근세 일본과 중국(명과 청)의 경제적 발전과 비교했을 때 전자의 발전은 상당한 정도이나, 이것이 생활 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표가 되지는 못 할 것이다. 조선의 서민 문화가 동시대 다른 지역들에 비해 그다지 발달하지 못 했다는 시각이 있지만, 단순히 서민 문화가 상대적으로 발달하지 못 했다는 것으로 백성들의 삶의 수준 또한 문제가 있었을 거라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한국사 연구 <조선시대의 끼니>를 보면 조선 사람들이 가난뱅이도 빚을 내어서라도 실컷 먹고 류큐 사람들에게 '''너희 나라 풍속에 늘 큰 사밭에 쇠숟갈로 밥을 떠서 잔뜩 먹으니 어찌 가난해지지 않겠느냐?'''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식탐이 심해서 많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 쓰인 외국인들 전문기에서도 '''조선 사람들의 큰 결점은 대식'''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한민족의 식사량 문서를 참조. 그렇지만 근세 조선의 일인당 곡물 소비량이 과연 우월하였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영훈의 <한국경제사>를 참조하면 조선의 곡물 생산량 증가는 일본과 중국 선진지대를 따라가지 못했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조선 중기의 경제> 혹은 <조선 후기의 경제>에서 서술한 당시 조선의 기근 및 유랑민의 발생은 큰 골칫거리였다. <두 얼굴의 조선사>는 많은 식사를 할 수 있었던 조선인은 일부 운 좋은 사람에 불과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생활 수준을 판가름하기에는 부족하다. 당대 조선인들의 평균 키는 당시 일본인들 보다 최소 약 3cm에서 최대 약 6cm 정도 더 컸는데 이는 현재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평균 키 차이와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기사 자료 '''게다가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생활 수준이 높았을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한 일제시대에조차 일본인보다 조선인의 평균키가 컸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키 차이는 영양 섭취량보다는 그냥 유전적 요인에서 기인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식주를 기반으로 한 생활 수준의 판가름에 대해서는, 적어도 서민 생활만큼은 주변국에 대해서 뚜렷한 우열을 느낄만한 차이는 없었다는 것. 사실 산업 혁명 이전에는 전 세계가 다 그랬다. 서구 국가의 평균 신장을 봐도, 본격적인 산업화가 진행되는 시점부터야 서민을 포함한 평균키가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한국 역시 1950년 이후에야 서민을 포함한 평균키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다. 산혁 직전 프랑스가 조선에 비해서 1인당 GDP가 고작 2배 높았는데, 그나마도 상승치의 대부분은 국가의 군비나 관료 행정 비용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서민 생활 수준에서 특별히 잘 산다고 느낄 부분은 적었다. 프랑스 남부에서 징집된 병사의 키가 고작 164cm인데, 20세기 초 구한말 조선의 남성 평균키가 161cm 정도인걸 생각하면 별 차이가 없는 셈이다.
15. 문화
조선 시대에는 중국과 활발히 교역했는데, 선진적인 문화를 수입하려는 욕구 역시 그 요인 중 하나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도 역시 지속적으로 문화를 수입했는데, 조선 후기의 기득권층이었던 서울 북촌에 거주하던 벌열가문 경화세족들이 그 주역이다. 당시 슈퍼갑 부자들 사이에서는 세련되고 화려한 청나라 문화가 유행해 활발히 중국 문물을 수입하며, 서양이나 중동, 인도의 문화 역시 부수적으로 수입되었다. 조선은 사치를 지양했다는 편견이 있지만, 조선 후기 여흥 민씨, 안동 김씨, 반남 박씨, 전주 이씨 등 가세가 하늘에 뻗치던 당대 명문가들이 향유한 문화 양식은 매우 화려하다.
또한 귀족 위주의 문화가 발전했던 전대 국가들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서민들의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는데 오늘날 전해지는 전통문화의 대부분은 조선시대때 생긴 것들이 많고 특히 탈춤, 판소리, 민화등 서민들의 문화가 많이 발전했다. 실제로 바로 이전 왕조인 고려 시대의 사치품 제작과 또 그걸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은 극소수 귀족들이었고 조선 시대는 민화 등 서민 미술이 크게 발전했다는 걸 생각하면 조선은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문화 면에서 오히려 고려 시대보다 더 발전했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의 유물은 미디어에 잘 노출되는 편이 아니라 사극으로 한정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지도가 부족하다. 도자기가 그나마 유명하며, 칠기나 병풍, 부채, 군사 유물 정도가 한정된 인지도를 가진 편이다.
16.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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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조선의 지배 계급으로 생각되는 '''양반'''은 건국 초엔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조정에 녹을 받고 일하는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했다.[59] 사실 조선 초기의 계급은 전대 고려와 유사한 '''양천제'''(양인 + 천민)였다. 초기만 놓고 보면, 전대 고려의 귀족적 요소들[60] 이 상당부분 제거되었다.[61]
그리고 신분간의 상하 이동도 전대에 비해 한 층 개방적이었다. 양반이 아니더라도 양인인 경우,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62] 과거 제도는 결국 양반층의 계급 세습을 합법화시킨 것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상민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 이런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다.[63]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출처 기사1 기사2 추가로 한영우 교수는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를 4권으로 완결지은 뒤, 4권 말미에 남긴 글 '나가면서'에서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과거시험 제도로 부단히 하층 사회에서 충원했기 때문"이라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 사회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사
물론 이들의 상당수가 명예직이나 하급직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과거에 급제한 것만으로도 출신 지역에서는 명사로 대우받을 수 있는 데다,[64] 여타 문명권에서 이런 법으로 규정된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은 설령 보여주기용일 지라도 드물었다. 다만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750개 가문 중에서 36개 가문이 합격자의 53%를 차지하는 등 소수의 가문에 과거 급제자가 몰려있었으며 1789년 당시 전 인구의 2%를 차지하던 서울에서 43%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는 등 지역과 가문의 쏠림 현상이 발생하였다.[65] 이것은 교육 평등을 법으로 보장하는 사회인 현대와 달리 과거 합격을 위해선 필요한 경전을 구입하기 위한 '''재산'''과 이를 공부하기 위한 '''시간''' 그리고 출제 경향을 위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도 이러한 법률 가문이나 정치 가문등의 명문가들이 있기는 하나 과거 급제자가 수도권에서만 발생한다는 점은 조선이 오히려 지금보다도 격심했던 게 사실이다.
또한 상민이 문과를 급제하여 바로 양반이 되는 매우 힘들었던 것에 반해 무과라는, 좀 더 입관하기 쉬운 시험이 있었다. 무과에서도 유교 경전 시험이 있긴 했는데 문과처럼 깊게 파는 걸 요구하진 않았고, 그나마 문과에 존재하는 서얼 차별도 없었다. 다만 승마 시험이 있었기에 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산은 꽤 있어야 한다는 실질적인 제약이 있던 건 사실이다.[66] 이렇듯 과거 제도를 통해 소수의 귀족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기도 하였지만 새롭게 인재가 등용되는 측면 또한 분명 존재하였다. 에드워드 W 와그너 교수는 이러한 과거 제도의 폐쇄성과 개방성을 조선 왕조의 장기 지속성의 주요 원인으로 꼽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의 국가 체제가 어느 정도 잡혀가자, 신분 체계에 변화가 생긴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관료를 의미했던 양반이 차츰 세습 계급에 가깝게 변모해 간 것. 과거에 응시할 때 재산과 관직이 있는 양반 가문들 및 지주층이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과거 합격과 관직은 세습적 성격을 띄기 시작했으며, 찍어내다시피 한 공신들을 축으로 이루어진 훈구파 성립은 이런 "양반의 계급화"를 고착화시켰다. 관직이 없어도 공신들에게는 토지가 주어졌기 때문. 그 결과 양반의 자손은 관직이 없어도 양반과 다름없는 대접을 받게 되고, 이것이 과거를 보기 위해 유학을 공부하는 지방의 사족들에게 확대 적용되면서 '''양반'''은 점차 하나의 지배계층으로써 고착화되어 간다. 이로 인해 조선은 제도적으로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양인, 천민'''이라는 2계급의 '''양천제'''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이라는 4계급의 '''반상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양반'이 지배 계급으로의 위치가 형성되고, 더 나아가 양반과 상민 사이의 중간 계층인 '중인'의 폭이 넓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반상제 체제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무너진다. 재정 확보가 절실했던 조정이 공명첩 등을 발행하면서 중인, 상민들도 재산만 있다면 양반으로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고, 더욱이 18세기 농업 생산력의 증진과 상업의 발달로 상민들 중 부농들이 나타나면서 이들이 돈을 이용, 편법으로 양반 족보를 사들이면서 양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일단 어떤 방식으로든 양반이 되기만 하면 어느 정도 조세 압박을 회피할 수 있었으니[67] 상민들이 부자건 아니건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한 것. 이런 양반 수의 급증은 결과적으로 국가 재정의 부족을 초래, 이후 19세기 '''삼정의 문란'''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68]
애초 관료를 일컫던 용어였던 양반은 세습 계급화되어 상민 위의 지배 계급으로 고착화되었으며[69] , 조선 전기에는 총인구의 5%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철종 시대에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 학자 사카타 히로시가 유학이라는 품계를 양반으로 잘못 기재한 통계적 오류이며, 실제 양반 비율은 1910년의 전국 호구 조사에서 확인이 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 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했다. 그나마 충청남도가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충청북도(4.5%), 경상북도(3.8%), 한성(2.1%) 그리고, 전라북도(1%) 순이었다.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고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북 경주군(2,599호), 충남 목천군, 경북 풍기군(지금의 영주), 충남 공주군 순이었다. 경상북도와 충청도, 한성(서울)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조선 후기의 화가 김득신(金得臣, 1754년~ 1822년)의 풍속도를 보아도 전형적인 양반 - 평민 - 노비의 모습이 보이는 등 실제 양반이라 할 수 있는 대가세족(大家世族)은 큰 변동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단성 호적을 살펴봤을 때 서얼, 잔반 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양반층은 1910년의 호적보다는 많은 10% ~ 20% 내외로 추정한다.[70]
조선시대는 서얼 계층이 양반으로 편입되고 부유한 상민들이 서원과 향교에 출입하는 양반의 폭이 넓어지는 등 빈부에 따라서 제도상의 신분간 편차와 차별이 완화되는 조짐을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노비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기도 했다. 삼국 시대에 전 인구의 10%에 지나지 않던 노비는 고려 말을 거치면서 전 인구의 30%가 넘게 되었는데 양란을 겪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노비 비율이 전 인구의 최대 30% - 40%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후 조선 후기로 들어가면서 상공업의 발달과 조정의 양인 증가 정책 등으로 신분제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노비의 비중은 극적으로 줄어드는데 이는 단성 호적에서 잘 드러난다.[71]
노비가 이렇게 많았던 것은 대토지를 보유한 양반 관료 계층이 농사에 필요한 노비를 늘리기 위해 경국대전에 종천법을 명시화하였고 갖은 꼼수를 부려 상민을 노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반들이 얼마나 노비에 집착이 심했는지 (다른 지배층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조선 초의 소송은 대부분 노비 송사였고 족보를 조작해 상민을 자신의 노비를 만드는 사례까지 발견된다. 특히 가뭄과 같은 재해로 농사를 망치면 굶주린 상민들은 자발적으로 양반집 노비로 들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협호), 문제는 한 번 노비가 되면 그 신분을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임진왜란 후에는 그나마 납속책으로 노비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노비가 상민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같은 일이었다.
상민의 감소와 노비의 증가로 조선은 만성적인 세금 부족과 병역자 감소에 시달렸고 왕실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를 타개하기 위해 종천법을 종모법이나 종부법으로 바꾸어 어떻게서든 노비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지배 계층인 사대부들의 반발로 실패에 그첬고 일천즉천법이 주류를 이루었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많게는 수천 명에서 적게는 수십 명까지 노비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종의 8번째 아들인 영응대군은 무려 만 명에 가까운 노비를 거느리기도 했다. 다만, 이것은 금계필담의 내용이라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야사집을 제외한 상속 문서를 살펴본다면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이맹현은 노비 757명, 퇴계 이황이 367명의 노비를 자녀에게 상속했으며 중소가문인 전의 이씨 가문이 18세기 중반까지 노비를 100명 이상을 보유한 것으로 추론할 때, 유력한 사대부가는 천여 명 정도의 노비를 소유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도 조선 후기로 갈수록 변하게 된다. 조정에서 점차 양인 증가책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영조 때는 노비종모법을 확정하고 속대전에 납속책을 규정했으며, 이후 정조 때의 노비추쇄관의 혁파, 순조 때의 공노비 혁파, 고종 때의 노비사가절목(노비 세습 금지)으로 이어졌다. 사회적으로도 도망 노비가 증가하고 소작제와 상공업의 발달로 노비가 점차 소작농, 장기고용자(고공)로 대체되면서 노비가 급격히 줄어든다.# 결과적으로 갑오개혁 때 노비 제도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완전히 없어진다.
간혹 노비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으며 사람이 아닌 사고 팔리는 물건 취급받았다고 오해, 혹은 곡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히는 사고 팔리는 '''인간''' 취급이었다. 애초에 사고 팔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물건 뿐이라는 생각 자체가 지극히 현대적인 것이며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 인간도 사고 팔릴 수 있다고 보았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보는 것은 현대에 와서나 보편적이게 된 거고 조선 시대에는 모든 사람은 뿌리는 같지만 가지고 있는 성품에 따라 귀하고 천함이 정해진다고 보았다.[72] 비록 신분 제도가 있었고 노비의 인권이 낮긴 했지만 노비도 역시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생각은 있었다. #선상 노비의 폐단을 구제하게 하다 중종때 노비 출신의 반석평의 출세를 못마땅하게 여긴 대간들도 반석평을 천한 출신이라고만 비난했지 그 이상 나가진 않았다. 오히려 이를 기록한 사관이 '천한 가문이라고 멸시하지 말고 능력보고 사람 뽑자' 라고 한데서 보듯 노비를 인간 이하 존재로 본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철저한 신분 사회였고 법적으로는 양인-천민의 양천제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인에서 많이 세분화되어 있었다. 다만 신분 상승을 위한 방법이 없었던것은 아니라서 아래를 보면 이랬다.[73]
- 전쟁에서 군공 세우기 : 주로 임진왜란에 벌어진 일인데 당시 조선의 상황이 하도 개판이라 노비도 단 한명의 일본군 병사의 목을 따오면 면천되었다. 하지만 관리는 개판이었는지 선조도 "지금까지 올라온 보고대로면 일본군은 다 죽고 없어야 하는 거 아니냐?[74] 근데 왜 이렇게 많이 남아있지?" 라고 하기도 했다. 사실 이 1명의 목만 베어오면 그냥 면천이지만 개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보상에 쩔어줘서 벼슬도 할 수 있었다.
- 역모 고변 : 이것도 좋은 신분 상승의 수단. 삼국시대와 고려는 외침이 잦았다면 조선은 역모 사건이 잦았다. 그런데 당연히 역모가 성공하면 안 되었기에 역모를 고변한 사람에게는 상이 뒤따랐다. 물론 반대로 이것 때문에 거짓으로 고변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었기에 무고죄(혹은 반좌율)에 의해서 거짓 고변자는 유배 내지는 사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중종 때의 정막개, 숙종 때의 정원로, 경종 때의 목호룡 등의 사례를 보면 벼슬도 주면서 자연스레 면천도 이뤄진 모양이다.
- 맘씨 좋은 사람 만나기(?) : 이 부류의 대표적인 사례가 반석평인데 반석평은 원래 노비였다. 그런데 운 좋게도 반석평의 주인이 반석평의 재능을 알아보고 면천시켜줘서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확률이 낮긴 하지만 자신에게 능력이 있고 그걸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자신의 노비라면 자신이 직접 면천시켜주면 되고 자신의 노비가 아니더라도 공노비가 아닌 이상은 노비 주인에게서 사들인 뒤 면천시켜주면 그만이니까.
- 납속 : 정부나 국가에 쌀 등을 바치고 받는 것. 조선 성종 때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아들 4명을 면천시킨 노비가 나온다. 물론 신분이 높은 경우에는 벼슬을 받겠지만.
- 투탁 : 이것은 양반 가문과 '합의'해서 신분 세탁을 하는 것 좀 간단히 말하자면 양반 가문과 접촉해서 "나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나 혹은 내 아들을 당신네 가문에 끼워넣어 준다면 내가 OOO을 해 주겠다" 라는 식으로 협상을 시도하는 것. 이것을 양반 가문에서 승낙하면 이뤄진다. 이것은 명백히 합법이었기에 꿀릴 건 없었다. 이 경우엔 주로 후사가 끊어진 쪽을 잇는 방식으로 했다.
- 족보 위조 : 말 그대로 족보를 위조하는 것. 물론 조선 초기에는 인쇄술이 그리 발달하지 않아 어려웠고 족보 자체도 양이 방대해서 어려운 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인쇄술이 발달하다보니 가능해졌다. 당연히 불법이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졌는지 태평천하를 보면 윤 직원이 자신의 족보를 위조한 경력이 있다고 나온다.
- 인맥(?) : 박문수 관련 일화에서 박 좌수 이야기를 보면 박 좌수는 백정 출신으로 돈은 많았으나 천시를 받아 결국 이방을 통해서 좌수 자리를 얻었다고 한다.[75] 물론 곧 동네 양반들이 들고 일어나 곧 좌수 자리를 잃었지만 직첩이 회수되지 않아 재산 챙겨서 멀리멀리 떨어진 곳에서 왕년에 좌수했다며 양반 행세를 했다고 한다.
17. 군사
17.1. 조선 전기
조선 전기의 군사 제도는 오위(五衛)·금군(禁軍)으로 대표되는 중앙군과 익군체제(翼軍體制)·진관체제(鎭管體制)로 대표되는 지방군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중앙군은 고려의 제도를 대부분 받아들여 십위체제(十衛體制)를 유지하다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1457년(세조 3년)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지휘하의 오위제도(五衛制度)로 정착되었다. '''오위는 의흥위(義興衛) - 중위, 용양위(龍驤衛) - 좌위, 호분위(虎賁衛) - 우위, 충좌위(忠佐衛) - 전위, 충무위(忠武衛) - 후위로 구성'''되어 있고, 각 위마다 5부(部)로 편성되고, 부마다 서울의 5부와 각 도의 진관군사가 소속되었다. 오위는 졸(卒) - 오(伍) - 대(隊) - 여(旅)의 조직으로, 1오는 5졸, 1대는 5오, 1여는 5대로 하는 5진법에 의하여 편성되었다.
또 다른 중앙군의 하나인 '''금군'''은 국왕을 직접 호위하는 군대로 오위에 속하지 않았고,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 등'''으로 인원수는 적었으나 왕권 강화와 직결되어 필요에 의해 설치되고 법제화되었다.
지방군은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곳에서 대체로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의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육수군은 다시 번상(番上)하여 시위하는 시위패(侍衛牌)와 지방의 여러 영(營)이나 진(鎭)에 부방하는 영진군(營鎭軍)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영진군은 각 도의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76] 와 그 밑의 절제사(節制使)·첨절제사(僉節制使)가 지휘했다.
다른 지방군의 하나인 잡색군(雜色軍)은 영·진이 주로 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내륙 지방에 방어할 군사가 없어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향리·관노·무역백성(無役百姓)·공사천(公私賤) 등을 망라하여 편성한 것이다. 잡색군은 마병(馬兵)과 보병(步兵)으로 나누어 25인을 1대(隊)로 편성하여 수령이 지휘하도록 하였으나, 평상 시 군사 훈련에도 참가하지 않아 유사시에 대비하여 전국적 군사 조직 체계를 갖추었다는 데 의의가 있을 뿐이었다.[77] [78]
이러한 군사 조직은 1455년(세조 1년)에 진관 체제로 정비되었다. 먼저 전국적으로 내륙 지방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위의 여러 읍을 좌·우·중의 3익으로 분속시켜 군익도를 편성하는 한편 군익도체제가 불편한 곳에는 별도로 독진(獨鎭)을 두어 이원 체제로 운영하게 했다. 1458년(세조 4년)에는 행정 구역상의 도(道)와 혼동하기 쉽던 군익도의 조직을 주진(主鎭)·거진(巨鎭)·진(鎭)으로 재편하여 각 진의 독자성을 살리면서 군사 기지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하였다. 진관 체제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의 주진 아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여러 진을 통할하는 몇 개의 거진을 두고, 여러 진의 절제도위(節制都尉)[79] ·만호(萬戶) 등이 진을 중심으로 스스로 적을 방어하는 책임을 지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1464년에는 번상군(番上軍)·영진군·익군 등으로 통일되지 않았던 명칭을 정병(正兵)으로 통일하여 균일한 국방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정병 외에도 봉족, 혹은 보인이라는 역종이 있었는데 이는 군대에 나가지 않고 대신 물품[80] 을 내거나 일을 도와주어 군대에 나간 정병 집안의 생계를 돕는 역할을 하였다.
17.2. 조선 중기
16세기에 이르러 진관 체제는 진관에 속한 정병이 군역과 요역을 함께 지면서 각종 폐단이 발생하자 포를 내고 군역을 지지 않는 방군수포(放軍收布)로 변질되고, 외세의 침입을 각 진관의 소수 병력으로 자전자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도내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합심 방어하는 제승방략체제(制勝方略體制)를 강구하게 되었다. 제승방략 체제는 많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적을 막는 총력방어 태세로서의 이점이 있으나, 후방 지역은 군사가 없어 방어선이 무너지면 적을 막을 방도가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왜란 때 이일의 상주 전투,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서 패전한 뒤 일본군이 한성으로 쉽게 진격할 수 있게 된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81]
17.3. 조선 후기
조선 후기의 군사 제도는 중앙의 오군영(五軍營)과 지방의 속오군(束伍軍) 체제로 특징지을 수 있다. 오군영은 조선 후기에 수도 및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 등이다.[82]
훈련도감은 1598년(선조 31년) 10월 서울 수복 후 포수(砲手)[83] ·살수(殺手)[84] ·사수(射手)[85] 의 삼수병(三手兵)을 중심으로 기민(飢民) 구제와 정병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임시 군영이었으나, 왜란 후에는 오위를 대신하여 후기 중앙군의 핵심 군대로 자리잡았다. 훈련과 조직은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束伍法)에 따라 개혁하여 과거의 대부대 단위 전투 형태에서 초단위(哨單位)의 소부대 단위 전투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속오법은 부(部)[86] - 사(司)[87] - 초(哨)[88] 기(旗)[89] - 대(隊)[90] - 오(伍)[91] 로 연결되는 편제로, 대개 120인 ~ 125인의 병력이 군사 조직의 기본 단위인 1초를 이루었다. 다른 군영과는 달리 정기적으로 급료를 받는 받는 직업 군인 위주로 편성되었다.
어영청은 번상하는 향군으로 편제된 중앙군으로 인조반정 뒤 후금에 대한 대비책으로 설치가 논의되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을 계기로 중앙군으로 정착되었고, 1652년(효종 3년) 어영청으로 개편되었다. 금위영은 1682년(숙종 8년) 병조에 직속되어 있었던 정초청(精抄廳)의 정초군과 훈련 도감에 속하여 있던 훈련별대(訓鍊別隊)를 합쳐, 6도 향군을 근간으로 조직·편제되었다. 총융청은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경기도 일대의 방어가 중요하게 되어 경기도 내의 정군·속오군(束伍軍)·별마대군(別馬隊軍)으로 조직·편제되었고, 군사는 2만여 명에 달하였다.[92] 수어청은 1626년에 남한 산성을 개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경기도 남방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국왕의 친위군은 호위청(扈衛廳)[93] 과 용호영(龍虎營)으로 정비되었다. 호위청은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류(金瑬)·이귀(李貴) 등이 반정에 사용한 사모군(私募軍)을 거의 그대로 궁궐 숙위에 충당함으로써 설치되었다. 용호영은 조선 전기의 금군을 모아놓은 금군청(禁軍廳)을 1755년(영조 31년)에 개칭한 것이다.[94][95]
조선 후기 지방 군사 제도의 두드러진 변화는 속오군 조직의 등장과 영장 제도의 설치였다. 속오군은 훈련 도감과 같이 왜란시 임시로 설치된, 양반에서 공·사천에 이르는 총동원 체제로 서 지방의 핵심군이 되었지만 쌍령 전투로 대표되는 운영의 미숙함과 연이은 패배로 붕괴되었다.[96] 이러한 속오군은 병자호란 후 양(良)·천(賤)으로 편제되어 본역 외에 속오역을 지는 일신양역(一身兩役)의 폐해가 발생하였고, 1729년(영조 5년)을 전후하여 천례화(賤隷化)되었으며, 말기에는 수포(收布)·수세군(收稅軍)으로 존재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영장제도(營將制度)는 문신 수령이 가지고 있던 군사권을 무신이 담당하도록 한 것으로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에 대비해 속오군을 강화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수령의 반발·재정 부족·유능한 무장 결핍 등의 이유로 병자호란을 계기로 문신 수령 중심의 훈련 체제로 바뀌었다. 이밖에도 해안과 내륙 지방의 요지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여 방어사가 집중적으로 지키게 하였다. 또한 산성의 중요성이 높아져 별장을 배치했으며, 해안·강안의 요해처에 도(渡)·진(津)을 설치하여 방어망을 구축했다.
18. 인구
출처 : 인구 대사전 <표 3-4> 연도별 조선 시대 인구 추정치, 1392년 - 1910년 #
전근대의 인구 자료를 정확하게 통계 낼 수는 없으므로 위 자료는 모두 추정치다. 왜냐면 조선에선 세금을 피하려고 호구 조사에 일부러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세종 실록 지리지 경기도조에 의하면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조선의 인구 수는 실제 인구 수의 10분의 1 ~ 2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며 조선 세종 시기의 인구는 최대 800만까지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즉,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호구를 통해 계산한 인구 수는 그 수치의 8배 ~ 10배 이상을 곱해야 실제 인구 수에 가까운 수치가 나온다는 것이다. 역시 송사, 고려도경을 기초로 12세기 고려 인구가 210만 구였다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으나 조선 시대 인구수 기록과 마찬가지로 고려 시대의 호구 / 인구 기록의 완정성에도 의문을 제기하는게 바람직하다.本朝人口之法, 不明錄于籍者, 僅十之一二。 國家每欲正之, 重失民心, 因循至今, 故各道各官人口之數止此, 他道皆然。
'''본조(本朝)는 인구(人口)의 법이 밝지 못하여, 문적에 적힌 것이 겨우 열의 한둘이 되므로,''' 나라에서 매양 바로잡으려 하나, 너무 인심(人心)을 잃게 되어, 그럭저럭 이제까지 이르렀으므로, 각도 각 고을의 인구수가 이렇게 되었고, 다른 도들도 모두 이렇다.
세종실록지리지 경기
특히 임란 직후와 19세기에는 조선의 행정력이 불안정해서 추측이 더 힘들다. 한 연구에서는 조선의 인구 통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며, 양반 가문에서 내려오는 족보로 인구 증가율을 추정했는데, 18세기의 연 0.4% 증가율에서 19세기에는 연 0.8% 증가로 계산됐다. 하지만 호구조사 상에서는 19세기에 정체하는 것으로 나온다. 결론적으로, 조선이 인구가 계속 증가했는지, 아니면 인구가 정체했는지, 인구가 어떤 추이를 보이는지는 답을 내릴 수가 없다.#
조선의 인구는 크게 증가한 이전까지 꾸준한 증가 - 임란 직후의 급감 - 임란 이후의 급증 - 19세기의 정체로 표현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인구는 수백만명 수준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했던 것으로 추계가 그려진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농지 재개간, 상업 유통 발달, 새로운 기술의 도입(모내기법 등)으로 18세기에 인구가 1.5배 내외로 급증했다. 그러나 19세기부터는 인구가 정체되기 시작했는데, 당대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렇듯 조선도 인구 폭발로 농지와 식량이 한계가 왔고, 개간할 땅마저 모자랐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삼림은 벌채와 개간으로 축소되어버리고, 자투리 땅마저 농경지로 이용되었을 정도로 인구 압력이 심했다.[97] 당대 조선 식자층들 역시 식량 생산량이 소비량에 미치지 못한다며 우려를 나타냈을 정도다.
19. 외교
19.1. 조명관계
초창기의 조선은 고려 시절 적대지간을 맺어왔던 명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으며 임진왜란 때는 명군이 파병되어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금을 주축으로 한 여진족이 명을 붕괴시키고 청나라를 세우면서 조명 관계가 끊어지게 된다.
19.2. 조청관계
청과는 명을 붕괴시킨 원수지간이라 조선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다만 광해군 때에 와서 명, 후금간의 등거리 외교를 통해서 어느 정도 온건한 관계를 맺어왔으나 인조반정으로 오르게 된 인조 때부터 관계가 급변하여 청을 주적으로 지정하면서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고 인조는 청에 항복하였다.
이후 조선은 청과 군신 - 사대 관계를 맺게 되고, 이 관계는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 발전으로 인해서 이후로 청과의 관계가 긴밀해지게 되었으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 및 청일전쟁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고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청과의 유대 관계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19.3. 조일관계
일본과는 기존의 교린 관계를 맺어왔다가 임진왜란 이후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 정권이 수립된 후 통신사 파견을 통해서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이토 히로부미,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고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불평등한 조일 관계가 수립되었고 문호 개방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1905년에는 을사조약으로 조선통감부의 감독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가 1910년에는 마침내 일본의 식민 지배권에 들어갔다.
19.4. 조미관계
미국과는 수호통상조약 요청을 계기로 대면한 적은 있지만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맺어지지 않았고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 호가 평양 입항을 시도하다가 화재가 발생하게 되고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면서 다소 악화되었으나 결국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에 따라 단교되었다.
19.5. 조러관계
러시아 제국과는 명성황후가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다소 긴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으며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을 계기로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때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전하게 되고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게되면서 관계가 끊어졌다.
19.6. 기타
이외에도 대영제국, 독일 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덴마크 등과도 수호통상조약을 통해서 수교를 맺어왔으나 모두 1905년 을사조약 때 단교되었다. 단 프랑스와는 선교사들의 처형과 병인양요로 인해서, 독일과는 오페르트의 흥선대원군 부친 남연군 묘소 도굴 사건으로 관계가 소원해졌던 적이 있으며 영국과도 거문도 점령 사건으로 한때 관계가 소원해진 적이 있다.
20. 현대의 인식
20.1. 대한민국
사실 현대의 한국인들의 조선왕조에 대한 인식은 마치 서양의 중세 암흑기론처럼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편에 속한다.[98] ‘헬조선’이란 유행어가 겨냥하는 지점은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이기도 하지만, 조선시대이기도 하다. 지금 사회가 나쁘다는 얘기를 다른 그 어떤 나라도 아니고 조선에 비유했다는 건 대중들의 인식 속 조선이 엉망진창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99] 사실 이는 대한민국에만 있는게 아니라 구한말에도 이미 조선 왕조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이미 팽배하였다는 사료들이 남아 있고[100] , 일제 패망 이후 정치 체제를 논하는 과정에서도 조선 왕실을 복구하자는 주장은 주류가 되지 못할 만큼 이미 대중들의 지지를 못 받는 상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도 엇갈린다, 부정적인 의견을 소개하면[101] , 계승범(서강대)은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역사의아침)에서 주민들을 극도의 가난에 몰아넣고 유일사상체계를 강요했다는 점에서 조선왕조를 오늘날 북한사회에 비유했다. 변원림(독일 퀼름대학)은 ‘순원왕후 독재와 19세기 조선사회의 동요’(일지사)에서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가 발생하면서 봉건질서가 해체됐다는 주장에 대해 “봉건제가 해체되면서 맹아가 나온 게 아니라 1,000년 전 골품제가 있던 신라시대 봉건제로 후퇴해버렸다”고 주장했다. 이승환(고려대)은 ‘횡설과 수설’(휴머니스트)에서 조선성리학의 절정이라 우리가 배웠던 ‘이기론 논쟁’이 실은 조선의 후진적 출판 인프라 때문에 제 때 책을 구하지 못해 일어난 해프닝이라 결론지었다.
반대로 조선사 연구의 권위자인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는 "조선시대 신분 상승이 가능했던 것은 서얼과 노비를 제외하고 평민 이상에게 과거 응시 기회가 개방된 덕분"이라며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었던 과거 제도의 전통이 오늘날 역동적인 한국 사회를 만든 토대가 됐다" "조선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였다. 500년간 유지된 과거제도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공부만 열심히 하면 정승과 판서에 오를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오늘날 한국의 강한 교육열이라는 문화적 유전인자를 만들어 준 것이 바로 과거제도라 할 수 있다."고 그의 저서인 '과거, 출세의 사다리(한영우 지음, 지식산업사 펴냄)'에서 높게 평가했다. # #
한국에서는 근대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이 일제 지배와 독재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뿌리와 정통성을 이승만-박정희 정권에서 찾기 보다는 조선시대에 두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조선이 대단해서라기보단 현대에 가장 가까운 국가라서 억지로 나마 연결지을 수 있는 대상이 조선 밖에 없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일 것이다. 정부차원이든 한국인들 개인 차원이든 조선왕조에 대한 계승의식도 암묵적으로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는 할 수 있다. 한국 지폐에 등장한 인물들도 모두 조선시대 인물들이기도 하고[102] 한국의 사극 배경도 죄다 조선인데다[103] 교과서에서도 전근대 중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또한 인터넷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에 대한 글보다 조선에 대한 글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인데 이 또한 현대 한국인들의 조선왕조에 대한 관심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다만 이러한 현상은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보다 조선의 사료가 압도적으로 많이 남은 탓이기도 하다.
실제로 조선과 대한민국의 국가의 정체(政體)는 완전히 별개이지만[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수도가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에서 그대로 이어져 내려올 뿐더러[105] 현재 통용되는 화폐에 도안된 인물들이 100% 조선시대 사람들이고,[106] 광화문 등 전국 곳곳에서 조선시대 위인들이 기념되고 문자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한글을 공식문자로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은 조선의 문화적인 영향력이 현재에도 대한민국에게 계속 그 영향력을 크게 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 마저도 조선 말기에 처음으로 제정된 것이며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과 초대 국무총리 겸 초대 국방장관도 조선의 태조였던 이성계의 직계 후손들이었다.[107]
또한 쿠바와 시리아 같은 몇몇 국가들[108] 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에서도 조선왕조의 정통 후계자로 대한민국을 인정하는데 이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이 대한수교관계를 구한말의 역사에서 부터 찾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일례로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와는 실질적으로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 수교를 맺었지만 이미 그 전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조선왕조와 수교를 맺은 사건을 한미수교의 출발점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이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구조선 및 대한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대부분의 서방국가들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한반도의 정통성을 남북이 나눠 갖은 상황에서 조선왕조 직계 후손인 현 한국인(남한인+북한인)의 인구를 더 많이 확보하고 있고(남한 67%, 북한 33%)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이 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로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서방국가들이 북한보다 남한과 훨씬 관계를 먼저 맺었고 북한과 수교한 이후에도 남한과 훨씬 더 친밀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109]
20.2. 북한
북한은 '조선'이라는 국명을 사용하면서도 정작 조선 왕조에 대해서는 평가가 매우 박한 편이다.[110] 가장 큰 이유는 적국인 남한이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바로 위 남한의 조선에 대한 계승의식 설명에서 보듯이 조선 왕조의 수도 한양은 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로 온전히 계승되었고 그에 따라 조선왕조의 핵심적인 문화유산들도 거의 남한에 남아있는 현실에서[111] 북한이 조선을 띄어주면 이는 남한 정권을 띄우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112]
또한 북한의 지나친 민족의식 강조 또한 북한의 조선 비하의 원인 중 하나이다. 민족의식과 자주성을 강조하고 외세를 극혐하는 북한 입장에서는 외세에 망한 조선을 싫어하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 북한에서는 조선을 '리조봉건통치배'라고 비하하는 등[113] 조선왕조의 영향력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세종대왕과 이순신 또한 나름 조선시대에서는 위인이다 정도로 묘사하지 오히려 고구려 동명성왕이나 연개소문보다도 대접이 못하다. 당장 조선왕조 건국자들인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은 역적 수준으로 취급하는 곳이 북한이다.[114]
조선력사를 비롯한 북한에서 저술한 역사 서술들을 보면 북한의 신라와 조선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굉장히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두 왕조 모두 현 남한 영토에 기반했다는 사실과 사대주의라는 공통의 키워드를 가진 국가라는 점을 알 수 있다.[115]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조선왕조 존속기간이 무려 518년인데 이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면 말그대로 1392년 이후 역사가 붕뜨기 때문에 북한이 조선을 싫어해도 아예 무시하지는 못한다. 당장 북한의 국호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따라서 북한이 조선역사를 지울 수는 없기에 조선에 대한 계승의식이야 가지고는 있지만[116] 남한보다 훨씬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117]
21. 기타
나라 이름이 조선이라서 배 만드는 기술(조선업)이 앞서있다는 드립이 존재한다. 《요재지이》 등에서는 근처에 신선들이 사는 움직이는 섬이 있다고 나온다. 그 외에 조선에서 온 히로인이 등장하는 등, 중국에서도 은근히 인기 있는 곳이었던 듯.
이미 구운몽에서 모에와 하렘을 깨우치고, 호질 등에서 현실은 시궁창의 이치를 깨달았던, 어떤 의미에서는 앞서가던 나라. 일지매에서는 여자들이 뻑갈 법한, 여자 뺨치는 미모의 성격 더러운 미남 캐릭터를, 임꺽정을 통해서는 느와르물의 뿌리를 보여주었으며, 홍계월전에서는 남장여자 용자물을, 방한림전에서는 남장여자 동성결혼을, 금오신화에서는 인간과 귀신의 귀접현상을 연상시키는 끈적한 사랑을 그려냈다. 심지어는 실제로 후타나리마저 존재했으며(예: 사방지), 민담에 따르면 결박 플레이를 즐긴 사람도 있었다. 거기에다가 수간을 즐긴 사람들도 실록에 존재. 또한 세종대왕의 며느리 순빈 봉씨는 양성애자였다. 그 외에도 작자 미상의 춘화에는 3P 플레이가 나오고, 성애신이 엄청나다(…). 역시 선비의 나라답다! 거기에 영이 사람에게 빙의되는 오늘날 공포영화 콘셉트의 이야기도 이미 이때부터 씌여졌다. (예: 설공찬전)
조선 사람들은 흰 옷을 좋아하여 예로부터 백의민족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각종 흉흉하고 음침한 이야기도 많았다. 조선 초기 일본인만 골라 죽인 살인마 이야기라든가 조선 중기에 어린아이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이야기 등이 기록되는 등, 여하간 기록 하나는 정말 넘치도록 남긴 시기였다. 물론 기록이 많으니 끔찍한 이야기도 많은 법이겠지만.[118]
조선의 국왕은 엄청난 업무량을 감당해야 하는 고노동 직책이었다. 조선의 국가 분위기상 늘 끊임없이 공부하고 강론받고 하는 등의 자기 수련을 해야 했다. 게다가 정책 하나 정하려면 먹물 좀 꽤나 먹은 양반들이 덤비는데, 조정에 있는 양반들도 수두룩 빽빽인데, 지방에서도 꽤나 한다 하는 먹물들이 상소로 태클을 걸어왔다. 위에 설명했듯이 왕이 그냥 추진하면 추진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상적인 정치로 신하들 뜻을 존중해야 하니 이를 논리적으로 논박해야 하는 부담도 심했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 반열이었던 태종, 세종도 왕권으로 찍어눌렀던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면……[119] 게다가 왕은 늘 몸가짐을 바르게 해서 모범이 돼야 했기 때문에 누가 없는 자리에서도 딱히 편하지 못했으며, 밥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해야 했다. 한글을 만들고, 과학 기술을 점검하고 농업 정책 연구하는 등의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의 건강이 여러모로 좋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간다. 다만 세종은 본인이 자초한 면도 없진 않다. 해당 문서 참조.
여기서 예외가 있다면 연산군 정도.
1880년 ~ 1910년까지를 학습한 사람이라면 맨 뒤에 '''4'''가 들어간 해에 굉장히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1884년''', '''1894년''', '''1904년''' 참조.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국인들이 스스로 대한민국은 '조선', 한국인은 '조선인'으로 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치 과거 조선에서 스스로를 일컬어 '삼한'이라 했던 경우와 비슷한 용례인 셈인데, '조선의 4번 타자'와 같이 긍정적인 호칭으로 쓰거나 감정 없이 단순히 한국을 그대로 말할 때도 사용되지만 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할 때 쓰는 경우도 있다. 보통은 한국의 구시대적 악습 등을 비꼬거나 할 때 쓰이는데, 여기서 극대화된 것이 바로 헬조선이다.
22. 연표
- 참고 서적: 조선왕조실록
- 1392년 이성계가 고려의 공양왕에게 양위받아 국왕(國王)으로 즉위, 동년 이단(이성계)이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고치면서 국호 확립
- 1398년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은 왕자 이방원이 반란을 도모, 일으켜 정권 장악, 곧 이단이 양위하고 이방원은 자신의 형 이방과를 왕으로 세움
- 1400년 2차 왕자의 난
- 1446년 세종(世宗)이 훈민정음 반포.
- 1453년 세종의 왕자 이유가 쿠데타를 일으킴, 정권을 장악하고 단종에게 양위받아 즉위.
- 1460년 경국대전의 호전 완성.
- 1485년 경국대전 완성
- 1506년 반란 세력이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자 역을 옹립함.
- 1575년 동서분당, 사림이 분열하여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짐.
- 1589년 정여립이 역모 혐의를 받음, 동년 동인 대부분이 처형됨.[120]
- 1592년 임진왜란 발발
- 1598년 임진왜란 종결
- 1623년 능양군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국왕으로 즉위.
- 1624년 이괄이 난을 일으킴(이괄의 난), 반군에 의해 한양을 점거당했으나 곧 탈환.
- 1627년 정묘호란 발발.
- 1636년 병자호란 발발, 이 전쟁으로 인해 조선-청과의 종속관계가 사실상 확립됨, 조선 영토 내의 삼전도비 건립.
- 1721년 신임옥사 발발.
- 1762년 임오화변 발발.
- 1800년 정조(正祖)가 사망, 그의 아들 이공이 즉위. 이 기점으로 세도정치 시작.
-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 그러자 왕족 이하응이 자신의 아들 이명복을 왕으로 즉위시키고 정권을 잡음.[121]
- 1875년 운요호 사건 발생, 조선의 패배.
- 1876년 조-일 간의 강화도 조약 체결.[122] 이후 조선은 서양 세력들과도 조약(불평등 조약)을 맺음.
- 1870년대 중반 개화파 성립.
- 1882년 구식 군인들이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킴(임오군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조선 정부의 고종은 대원군을 긴급히 불러 섭정시킴, 대원군은 개혁정치 대부분을 취소시켜 사건을 무마시키려 하였으나 청군이 대원군을 천진으로 납치함.
- 1884년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급진파 세력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킴. 그러나 3일만에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
- 1894년 동학 세력들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위해 운동함(동학농민운동), 운동이 진행되면서 정치적 운동으로 성장하였고 곧 사회 개혁을 목적으로 움직임. 1차는 정부와 협상하여 종결됐으나 2차는 일본-관군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 동년 청일전쟁 발발. 청-일본과의 싸움에서 일본이 승리하므로써 청은 종이 호랑이가 됨. 동년 조선은 갑오개혁을 실시.
- 1895년 청 - 일의 시모노세키 조약(하관조약/마관조약) 체결, 동년 조선, 을미사변 발발.
-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
- 1897년 고종이 조선으로 복귀, 동년 '대군주' 칭호 사용, 곧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황제로 즉위(연호: 광무/光武)
-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일본 승리로 일본은 조선의 주권을 빼앗는다.
- 1905년 조 - 일의 을사조약 체결. 이 일로 인해 조선은 일제의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없는 국가가 된다.
- 1906년 일본이 을사조약을 기반으로 통감부 설치.
- 1907년 고종이 일본의 압력에 의해 강제퇴위/양위, 그의 아들 이척(이하 순종)이 즉위.
- 1910년 일본이 한일합병조약을 맺음[123] . 조선 왕조가 멸망,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가 실시됨. 조선총독부 설치. 황실은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었고 순종은 이왕(李王)에 책봉됨.
23. '조선'이 들어간 별명이 붙은 것들
- 조선의 간디 - 조만식#[124]
- 조선의 나폴레옹 - 김경천 #
- 조선의 레닌 - 박헌영 #
- 조선의 모스크바 - 대구광역시 #, #
- 조선의 모파상 - 이태준 #, #
- 조선의 발렌티노 - 임화 #, #
- 조선의 예루살렘 - 평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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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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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조직계제 (1414년 ~ 1435년)
→3. 의정부서사제 (1435년 ~ 1455년)
→4. 육조직계제 (1455년 ~ 1515년)
→5. 의정부서사제 (1515년 ~)
→6. 비변사 설치 (1517년 ~ 1864년)
→7. 의정부 기능 부활 (1864년 ~ 1894년)
→8. 내각제 (1894년 ~ 1896년)[12] 고종 연간에 중국과의 사대관계가 청산되면서 갑오개혁을 진행했고, 기존의 중국(명, 청) 연호를 버리고 1392년을 개국기원으로 잡는 연호를 도입하여 개국 503년부터 시작한다.[13] 경우에 따라서 현 일본의 영토인 대마도와 중국의 영토인 건주 여진(옛날 간도 지역) 등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다.[14] 중세 한국어: 됴ᇢ〯션〮, 됴ᇢ〯션〯 / 근대 한국어: 죠션, 조션, 됴션[출처] 링크.[15] 188906일. 대한제국 기간을 제외하면 505년. 황제국을 선언한 대한제국을 분리해서 볼 경우 이리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한제국에서 조선왕조의 왕통은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양자를 서로 분리해서 보진 않는 편이다. 실제 대중적으로도 518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16] 고조선의 '고(古)'는 후에 성립한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훗날 고려시대에 붙인 이름이다. 우리가 아는 단군이 건국한 나라의 원래 국호는 조선이었다. 대개는 후대에 등장한 동명국가의 이름 앞에 '후'를 붙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모든 건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편의에 맞춘 것이라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기준은 없다. 따라서 조선의 경우는 비교적 최근(근세)의 일이라서 그런지 고대에 있던 동명의 국가의 이름 앞에 '고'를 붙이는 듯하다. 태조 이성계(즉위 후 이단)는 고조부 이안사부터 대대로 원의 관직에 있었던 친원가문의 후손이었지만, 원의 고려 이주민 차별 정책이 심해지자 당시 쌍성총관부 천호였던 친부 이자춘과 함께 1356년(공민왕 5년) 쌍성수복전쟁에 참여하여 고려로 귀화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고려 무신으로서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명성을 쌓았으며, 1388년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1392년 조선을 건국한다.[17] 실제로, 고려 성종이 꿈꿨던 유교 국가는 조선의 건국으로 실현되었다.[18] 예를 들어 궁에 고자 내시가 일하는 걸로 확립된 게 고려 말 중원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다. 이전까진 내관이라 하여 하급 문관이 내시의 역할을 대신했으며, 사고로 인해 (가령 개에게 중요 부위가 물렸다든가) 고자가 된 인물만을 내시로써 사용했다. 그 외 적자와 서자, 정부인과 첩의 개념이 확고히 정립된 것도 고려 말.[19] 당시 원나라 유학 중 가장 성행하던 학문. 북송의 주희(주자)를 거치면서 완성됐으며, 불교와 도교의 심성론과 종교적 요소를 유학에 도입했다. 그로 인해 유학에 종교적 성향이 강화됐다.[20] 성리학은 절대로 종교가 아니며 단지 종교적인 요소를 반박하지 않았을 뿐이다. 실제로 당대 사대부들도 위급상황에는 자주 도교나 불교에 의존했다. 심지어는 조선 왕조의 창시자인 태조 이성계조차 불교에 호의적이었다.[21] 이는 조선과 대한민국 간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군주정 국가에서 공화제로 전환된 모든 국가가 해당되는 사항이다.[22] 서울의 점유와 수도로서의 계승은 역사적 정통성 차원에서 남한이 북한에 비해 가지는 우위이다.[23] 해외 화폐에는 고대 혹은 근대화 이후의 인물을 도안하는 경우도 많지만 한국은 유독 특정 시기에 몰린 편이다.[24] 특히 일본이 일본어로 부를때 한반도를 한반도로 부르지 않고 조선반도로 통칭해서 부른다. [25] 당시 명나라 황제인 홍무제 왈, "조선은 옛부터 동이의 명칭으로 그 이름이 유래가 깊으며 아름답기 때문"에, 조선을 국호로 사용하게 하였다.[26] 베트남도 원래 국호가 남월이었던 것을 19세기 초 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월남으로 바꾼 일이 있다.[27]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이라고 선언한 것이 이슬람권의 엄청난 반발과 함께 전세계의 빅 뉴스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강대국의 정치적 결정은 그 자체로 지정학적 영향력을 가진다. 명 스스로가 국호를 선택해줬다는 것은 새로운 신생 왕조를 국제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경계인 출신이 신흥유신들과 왕조를 교체한 조선의 정통성을 흠집내기 힘들어진다. 대내적으로도 종주국에 해당하는 천조가 인정한 국위라는 점을 정치적으로 활용해 새 왕조의 정통성에 힘을 싣는 것은 덤.[28] 명은 이성계의 즉위를 인정하면서 '변방의 흔단(釁端)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요구를 포함했다. 그만큼 조선이 중원을 공격하는 것을 견제했다는 의미.[29] 원래 조선이란 이름이었던 고조선이 멸망한 것은 조선 개국 시대를 기준으로 무려 1,500년 전이다. 엄밀히 말하면 중세 조선 왕조 이전에 조선이라는 단어는 한반도 전체보다는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을 위시한 평안도 지방에 한정하는 전통 지명적인 의미가 강했다. 그리고 어쩌면 십팔자위왕 예언을 실현시킨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과거 조선국공(朝鮮國公)에 오른 이자겸을 보고 참고했을 수도 있다. 당연히 공식 기록에는 없지만.[30] 초기엔 옛 삼국 정체성 중 고구려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지만 현종쯤부터 변한다. 고려 중기에 국가가 편찬한 관찬 삼국사기나 국가의 지원을 받은 삼국유사에서도 고려가 오직 고구려 하나만 이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31] 1217년 최광수가 고구려의 이름으로 봉기했음이 고려사 정의 열전에 있다. 고려가 바로 고구려를 이은 이름인데 어떻게 고려시대에 고구려부흥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겠나,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후삼국 시기에 비해서 약해졌을망정 각 지방의 옛 삼국 유민의식은 여전히 고려 중기까지 남아 있었고, 당시 고려에서 고구려 유민 의식이 가장 강한 지역은 개경과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인 서경 일대였다. 그러나 서경은 묘청의 난 진압의 여파로 대단히 대우가 박해져 있었던 터라 권력의 중심지인 개경에 대해 반항 의식이 강했고, 개경이 혼란기에 접어들어 틈이 보이자 개경은 이제 자격이 없으니 진짜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자기네야말로 새로운 고구려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고구려 부흥을 내세웠던 것. (참고 자료: 고려 무인 이야기). 또한 같은 고구려계 지역이라도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과 삼국시대에는 한낱 지방에 불과했던 개성의 차이도 감안해야 한다.[32] 이는 물론 고구려에도 해당하긴 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보다 훨씬 강성한 국력을 떨치던 카리스마 있는 국가였으며 한때는 백제왕에게 신하(노객)맹세까지 받아내었고 신라는 반속국으로 삼았을 정도로 한반도 전체를 석권하기도 했다. 실제로 고구려 전성기에 고구려가 한반도 내에서 차지한 영토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한 국가는 조선과 고려밖엔 없다.[33] 특히 경기 지역은 후삼국시대에 고구려 계승 의식이 뚜렷했는데, 사실 이 지역의 초기 선주민은 마한과 백제였고, 고구려 이후에는 신라가 차지하였다. 그럼에도 경기 일대에 번진 것은 백제도 아니고 신라도 아닌 고구려 계승 의식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 후기신라에서도 경기 일대를 고구려계 영토로 파악했다. 그정도로 고구려 계승 의식이 강했으며 신라 말기에는 이 지역의 호족들이 대모달 같은 고구려에서 쓰던 명칭들을 사용하며 할거했다. 실제로 고구려는 낭비성 전투에서도 드러나듯이 신라가 경기지역에 진출한 이후에도 경기는 물론 충북지역에도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기도 하였다. 지방세력과 바람 잘 날이 없던 백제나 폐쇄적인 신분제도로 남들과 융화되지 못하고 결국 적으로 돌려버린 신라와 달리 고구려가 자기 중심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이들을 잘 끌어들이고 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것은 470년이 넘는 왕씨 고려왕조의 존재로, 이 때부터는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국가의 명칭으로서 그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경지에 도달하였다.[34] 백과사전에서는 카라코룸을 화령이라고 한다고 하지만 원사 지리지에 나와 있는 정식 명칭은 화령로(和寧路)였다. 정확히는 화령로가 화령로도총관이 관할하는 상위 행정 구역이었고, 그 아래에 화림, 즉 카라코룸이 있다. 사실상 둘을 병용하기도 했고.[35] 물론 공민왕 역시 카라코룸을 욕보이기 위해서 화령을 썼을 가능성은 낮게나마 존재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원래 이 지역이 고려의 화주(和州)였다는 역사적 배경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36] 웃기게도 이후에도 화령은 한 번 더 나온다. 청와대와 화령대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청와대가 선택된 것 이때는 화령이 북한 영토라 그랬을지도?[37] 북한은 문화어 어문 규정에 따라 '이조'가 아닌 '리조'이다.[38] 홍룡포의 보는 조선이 황제국을 선포한 1897년 이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39]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응준과는 동명이인이다.[40] 사실 중국이나 페르시아 같은 전제군주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대신들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즉, 과두정적 요소가 존재한다.[41] 갑신정변 때 정강 14조와 관민공동회 때 헌의 6조에서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적이 있긴 하다.[42] 이들은 의정부(조선 최고의 의결 기관)에 속한 관원이다.[43] 실제로 강원대 동양사학자인 윤은숙 교수는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 (소나무, 2010)에서 “결국 몽·원 제국이 죽어 넘어진 시신위에서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2대 제국이 태어나는데, 하나는 1368년의 주원장의 명나라고 다른 하나는 1392년의 이성계의 조선국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조선의 창업을 좁게는 병들어가던 말기 고려의 내부적 상황과 함께 넓게는 원나라의 붕괴에서 촉발된 사건으로도 해석된다는 것이다.[44] 특히 왜는 가마쿠라 막부가 호조씨 싯켄가의 전횡으로 시시각각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45] 조선은 명에 조공을 바치고 명은 이에 하사품을 내리며, 다시 조선은 왜국에서 조공을 받고 하사품을 내리는 형태였다.[46] 사실 20세기 초에도 마찬가지였다.[47]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릇’의 용도로 도자기가 아닌 놋그릇을 썼다. 화려한 도자기가 적은 것도 역시 이 때문. 정교한 도자기 수요가 전멸해버리니 도자기 기술이 화려해지길 기대하기 어렵다.[48] 중국 내부에서도 15세기 후반부터 은 교역이 활성화되는 등 이미 은이 경제의 내부에 포괄되어 있었던 것이 중국의 강점이었다. 이후 중국은 도자기, 차 등을 유럽에 수출하면서 필리핀, 마카오를 통해 막대한 아메리카산 은을 흡수하고, 생사(生絲), 모자 등의 초기 공업품을 조선과 일본에 수출하면서 일본의 은 또한 무섭게 빨아들였다. 말 그대로 당시 최대의 은 대국이 중국이었고, 이는 청나라의 막대한 국력의 큰 버팀목이 되었다. [49] 연은분리법이 동아시아 경제를 뒤흔들게 된 것은 좀 더 뒤인 1533년 이와미 은광에 이 기술이 유입되면서부터이다. 이에 대해서 조선에서 건너가 연은분리법을 전해줬다는 승려 경수, 종단이 중국인이었느냐 한국인이었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나, 1539년의 기록과 1541년의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조선이 연은분리법의 주요 유출 경로였음은 부정하기 힘들 듯하다. 어찌 되었건 이후 일본은 활발한 은 광산 개발과 맞물려 폭발적으로 은을 생산해내기 시작하고, 16 ~ 17세기 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50] 나중에는 목화의 대중화와 생산량 / 교역의 증가로 면포로 대체[51] 태조 왕건이 삼국통일전쟁 이래로 황폐해진 평양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 백성들을 이주시켜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처음에는 평양 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로 삼았다가 이어 서경으로 개편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 이전에는 사실상 버려진 땅이었다.[52] 이를 잘 보여주는게 사헌부과 사간원이라는 존재였다. 왕이 자신의 임의대로 명령을 내린다 해도 이들이 적법성을 따져 부당하다고 거부하면 왕 역시 GG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53] 특히 연산군으로 인해 발생한 중종반정 이후 왕권은 급격히 쇠락해졌는데 '왕권의 회복=절대권력의 인정=폭군화'란 논리로 신료들이 왕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마저 견제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왕위에 오른 중종은 좌절감을 겪어야 했으며 신료들은 왕의 왕권 수호 및 회복 시도를 '제2의 연산군 출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어떻게든 막았다.[54] 같은 시기 명나라의 공식 국가기록물인 대명실록의 양이 1600만 자 정도인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그 3배에 달하는 '''4965만 자'''이며,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무려 '''2억 4250만 자'''에 달한다. 심지어 승정원일기는 두번의 전란으로 절반 가량이 소실되어 인조 이후의 기록만이 남아 있음에도 저 정도 분량이다. 가히 기록의 나라라 부를만 하다.[55] 더이상 불교가 국교가 아니라 불교 사찰은 그 세가 움츠러 들었기 때문이며, 왕궁 역시 개별 건축물은 정전 같은 주요 건축을 제외하면 딱히 규모가 작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간상 훨씬 더 크고 복잡해졌다. 경복궁이나 동궐(창덕궁, 창경궁)의 규모를 보자.[56] 이런 사회의 변화는 상업을 진흥시키자는 북학파 계열의 실학과 상업을 억누르고 농본주의를 강화시키자는 계열의 실학으로 나뉜 당시 사회상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난다.[57] 신생 국가가 돈이 있을리 만무하므로 유가 증권의 형태로 사들였다. 때문에 지주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곧이어 일어난 전쟁과 산업화로 인해 경제력에서 자본가들에게 크게 밀려나게 된다.[58] 이 당시의 인구란 농업이란 국가 기간산업을 지탱하고 군사력에 동원될 수 있는 인구란 개념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고급의 기술과 고도의 숙련된 인재들, 다시 말해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인적 구성원의 개념을 통칭한다.[59] 양반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신 관료를 일컫는 무반(武班)과 문신 관료를 일컫는 문반(文班)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60] 고려도 제도적으론 양천제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인 내에 권세와 지위에 따라 귀족, 향리 등이 지배 계층으로 존재했다.[61] 고려가 귀족 사회로 일컬어지지만 전대의 통일신라나 삼국시대처럼 귀족이라는 계급이 확고불변한 계급은 아니였다. 사실 고려도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신분간 상하 이동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세한 건 고려 문서 참조.[62] 이는 고려도 보장하긴 했으나 실질적인 면에서는 조선대의 유연성이 더 높았다. 고려의 지배층들(후대에 문벌귀족이라 불리는)의 결집도가 높았던 데다 고려의 직접적 행정력과 법제적 기반이 조선처럼 전 국토에 미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63]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상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64] 과거 제도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이 과거 급제를 위한 노력과 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급제는 커녕 응시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인게 한자였기에 과거에 응시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최소한 한자 정도는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이 한자도 당연히 어려우니 한자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무식쟁이 취급은 안 받는다.[65] 조선 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 일조각, 2007.[66] 참고로 고려는 무과 시험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군공을 세우기는 더 쉬웠는데, 이는 조선에 비해 전쟁과 변란이 많았기 때문이다.[67] 조선 초기의 조세는 조용조 체계였는데,(정작 이것의 원조인 중국은 진작에 때려치웠다.) 이중 전결에 매기는 "조"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인두세다. 그런데 양반은 이런 인두세가 면세다.[68] 양반 수의 증가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자 조정은 인두세가 아닌 재산세 중심으로 조세를 개편하였으나 이 또한 완전치 못했으며, 결국 18세기에는 고을별로 세금액을 규정하고 그만큼 거둬가는 총액제가 실시된다. 이에 부족한 세금은 피지배계층인 상민층에게 집중되어 갔고, 이후 19세기 세도 정치까지 겹쳐 삼정의 문란을 이끌게 된다.[69] 관료를 지칭하는 건국 초에는 그 수가 2천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의 평균적인 추정 인구치가 400만 ~ 500만인 점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0.1%도 되지 않았던 것.[70] 위에서 언급한 사카타 히로시의 기재 오류를 쉽게 이해하려면, 원래 영감(令監)이 종2품 및 정3품의 당상관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며 신분제가 보다 자유로워지면서 신분을 막론하고 뭇 중장년 및 노년의 남성을 가리켜 영감이라고 지칭하게 되는 현상을 떠올리면 된다. 곧 사카타 히로시는 유학을 벼슬을 하는 양반으로 판단 오류를 범했던 것이며 여기서 유학은 '유학자', '양반'이 아니라 전술한 영감과 비슷한 의미를 띤다. 쉽게 말하면, 통상적으로 옛날에 벼슬을 하지 않은 남자와 그 부인이 죽으면 묘비명에 남자는 '유학(孺學)', '처사(處士)', 그 부인은 '유인(孺人)' 이라 기재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다. 처사의 '사(士)'자가 관직에 종사하는 양반을 의미하고, 유인이 본래는 9품 관원의 부인에 대한 칭호이므로 신분제가 철저하던 조선 전기에는 이러한 칭호를 묘비명에 남발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일본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하였던 통명(通名)에 '~우에몬(右衛門)', '~사에몬(左衛門)', '~베에(兵衛)', '~조(藏)', ~스케(助, 丞, 輔, 祐, 佑)'이 유독 많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호칭들은 본래 엄연한 관직명이었으나 무로마치 막부 이후 실제 해당 관직에 종사하지 않는 몇몇 사무라이들이 해당 관직명을 참칭(僭稱)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하기 시작했고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관직과 아무 관련이 없는 농민, 상인, 기술자들도 사용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호칭은 대대로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관직이 없는 자들의 전술한 호칭들의 참칭을 금지했지만, 이 호칭을 아예 실명으로 호적에 등재하는 경우도 상당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구 일본 해군의 핵심 세력인 사쓰마 출신의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이 사람이 전술한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해당 호칭을 실명으로 호적에 등재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사쓰마번에 봉사하고 녹봉을 받는, 엄연히 관직을 가진 사무라이었기 때문이다.[71] 다만, 조선 시대 호적의 경우 당대 행정 능력의 한계, 세금 및 군역 회피를 위한 농민들의 호적 등록 기피 현상, 정확한 인구 조사를 학정으로 인식하던 관리들의 성리학적 인식(호구 조사 자체가 세금, 군역을 걷으려는 목적이므로) 등으로 인해 실제 조선 인구, 신분 비율을 정확히 반영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자.[72] 이것은 왕조국가인 조선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데 만일 만민이 평등하다면 양반과 천민이 평등하다는 것은 둘째치고 왕과 양반 혹은 왕과 천민이 평등하다는 소리가 된다. 당연히 조선시대에서 이 얘기를 했다 하면 어느 왕이든 "너 역적" 이라는 말과 함께 코로 사약 한 사발 들이키게 해 줄 것이다.[73] 노비 기준에서 서술해놨지만 양인도 가능, 단 양인은 이미 자유민이었기에 면천은 해당되지 않았다. 이 경우엔 면천 대신 벼슬을 받는 것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74] 단, 이건 선조가 일본군이 계속 증원(...)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한반도에 체류한 일본군은 20만을 넘은 적이 없지만, 투입된 병사는 40만에 육박했다. 그러니까 20만은 죽고 없었거나 부상으로 전투 불능이 되어 귀국 중이었다는 소리.[75] 아무리 양반에 비해 격이 낮았다고는 하나 이방이 백정 한 명을 위해 이런 편의를 봐준게 이해가 안 되겠지만 이방도 박 좌수가 백정이던 시절에 박 좌수 덕분에 빚을 많이 진 곤경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고 그 이후 서로 형동생 하며는 친분이 깊은 사이였기에 가능했다고 한다.[76] 이후 병마절도사로 명칭이 바뀐다.[77] 이는 임진왜란 이후 도입된 속오군과 유사하다.[78] 다만 이홍두의 '朝鮮前期의 雜色軍'(1999)에 따르면 양계지역이나 제주도 등 여진족이나 왜구 등의 침입이 잦은 외방 지역에서는 잡색군의 군사적 역할도 중요했다고 한다.[79] 거의 각 현의 현감이 겸임하였다.[80] 보통 베나 무명을 내었다고 한다.[81] 그러나 제승방략 체제에 대해 많은 이견이 나오고 있다. 이일이 작성한 북도 제승방략 체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작정 지방군을 한 군데 결집시키는 것이 아니다.[82] 이 중 도성의 경비를 맡아보았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을 삼군문(三軍門)이라 하였다.[83] 조총을 사용하는 군종[84] 창칼 등 근접 무기를 다루는 군종[85] 활을 쏘는 군종[86] 현재의 연대급으로, 지휘관은 천총이라고 했다.[87] 현재의 대대급으로, 지휘관은 파총이라고 했다.[88] 현재의 중대급으로, 지휘관은 초관이라고 했다.[89] 현재의 소대급으로, 지휘관은 기총이라고 했다.[90] 현재의 분대급으로, 지휘관은 대정이라고 했다.[91] 다섯명으로 이루어진 편제로, 지휘관을 오장이라고 했다.[92] 그러나 이러한 숫자는 군포를 납부하는 인원으로, 이들 모두가 군 복무를 했을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93] 350명의 호위군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94] 금군청을 내삼청(內三廳)이라고도 하였다.[95] 금군청 예하에는 내금위 300명, 우림위 200명, 겸사복 200명이 있었다.[96]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선 국방 체계는 모병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군(오군영)으로 개편되었다.[97] 나중에 일본 제국이 조선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을 때 조선의 인구 조사를 하면서 일본 정부는 조선이 인구밀도가 희박하고 미개간지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조선은 이용 가능한 토지 대비 인구 밀도가 상당히 높았고 미개간지는 많지 않았으며 인구 증가율도 높았다.[98] 이는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교조화된 측면이 커서 그렇다. 조선 초기는 한국사에서도 손꼽을만큼 진취적인 시기 중 하나로 인식된다. 한반도 최초의 중앙집권화 완성, 훈민정음 창제와 보급, 예악과 문물의 정리와 과학 기술의 발달, 북방 개척, 왜구 문제 해결 등 많은 업적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99] 이 부분에 대해 굳이 변론하자면 헬조선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이 단어의 시초는 디시인사이드 역사갤러리에서 대한민국을 비난하며 자신들이 일제 강점기를 한국사 최고의 시대로 치켜세우면서 한국사 최악의 왕조로 꼽는 조선에 빗대어 사용한 것이다. 대중이 조선을 최악으로 인식해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말은 아니다. 물론 이 단어가 사회에 널리 퍼졌다는 점에서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다는 근거임에는 틀림없다.[100] 사실 구한말에도 근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의병 활동 또한 활발하였다. 문제는 조선 왕실이 일본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않고 무능한 대처를 하다가 나라를 빼앗기며 친일로 돌아서서 특혜를 누린것 때문에 한국인들의 배신감이 커져서 왕실을 적대하게 되었던 것이다.[101] 단, 이들 의견은 해당 저서 전체의 내용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한국일보에 실린 책 소개글을 그대로 가져온 문장이고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라 조선에 대한 부정적 입장의 대중서임을 미리 염두해둘 필요가 있다. 당장 소개글 자체에 대해서 역사 커뮤니티 내 입장은 이분법적 접근, 논리 비약 등을 이유로 부정적인 의견이 주를 이룬다 #[102] 사실 이는 한국이 지나치게 오래전 인물을 지폐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의 화폐 인물들은 주로 근대에 활동한 과학자, 예술가 등인 반면에 한국은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 좌우 이념 대립, 독재와 군사 정권으로 인한 역사 및 사회적 후유증으로 근대화의 과정을 집단 기억에서 애매모호하게 지워버렸기 때문.[103] 다만 최근에는 조선시대 이전인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다룬 사극들도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104] 이는 조선과 대한민국 간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군주정 국가에서 공화제로 전환된 모든 국가가 해당되는 사항이다.[105] 서울의 점유와 수도로서의 계승은 역사적 정통성 차원에서 남한이 북한에 비해 가지는 우위이다.[106] 해외 화폐에는 근대화 이후의 인물을 많이 도안한다.[107] 이승만은 조선 태종 이방원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 무의공 이순신의 방계 10대손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18대 직계 후손이고 이범석은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17대손 그러니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20대 직계 후손이었다.[108] 북마케도니아의 경우 현재와 국명으로 바뀌기 전에 대한민국과 미수교였지만 친북국가는 아니었다.[109] 미국과 프랑스는 북한과 수교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줄곧 사이가 안 좋던 중국, 러시아와도 1990년에는 당시 소련과 수교, 1992년에는 중국과 수교를 했다.[110] 북한은 국명을 고조선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지만 1948년 국명 선정 과정에서 고조선을 염두에 두고 국명을 선정했을 리가 없다. 당장 북한은 1993년 단군릉 중건 이전까지 고조선을 그리 중시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조선이란 국호로 정한 이유는 다름 아닌 우리 민족권의 호칭이 조선이어서인데 그 조선이란 이름은 2000년도 더된 고조선이 아닌 바로 앞세대 왕조인 조선에서 온 것이다.[111] 제대로 된 북한의 조선시대 문화유산은 신의왕후의 제릉, 정종, 정안왕후의 후릉 및 함흥본궁, 서원 몇 채 정도밖에 없다. 팔만대장경, 고려궁지, 4기의 고려왕릉 및 수많은 고려시대 위인들의 무덤과 사찰들, 여러 점의 고려청자 등 고려시대 문화유산이 남한에도 많이 남아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고려시대 내에서의 남한 영토 비중이 조선시대 내에서의 북한 영토 비중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당장 많은 고려시대 주요 인물들이 남한 영토에서 출생한데 비해 이성계 집안 및 전조 고려의 영향으로 북방색이 짙던 여말선초를 제외하면 북한 영토에서 태어난 조선시대 네임드 인물들은 손에 꼽을 지경이다.[112] 남한 역시 역사 교과서 등에서 조선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배분하고 있긴 하다. 조선이 물론 기록이 앞선 시대보다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심각한 차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학계에서 고조선, 고구려, 고려 등이 수도를 북한에 두었다는 어찌보면 유치한 이유로 이들 국가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도 않고 오히려 남한 대중에게는 이 북방계 국가들이 남방계 국가들보다 호감도가 더 높다. [113] 리조가 북한에서는 비하 용어가 아니다. 조선을 국호로 하는 북한 입장에선 자신들과 구분짓기 위함이다. 저 봉건통치배란 표현이 비하다.[114] 북한에선 '5대 역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해당 인물들이 김춘추, 이성계, 정도전, 이완용, 이승만이다.[115] . 하지만 고대 국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생존을 위한 사대조차 안한 한국사 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 고구려와 고려조차 화려한 전성 시기에도 당시 중원의 단일 왕조라 보기 힘든 북위나 송나라, 요나라 등에 사대했다.[116] 북한도 물론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위인으로 인정한다. 다만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연개소문, 왕건 등 북방계 인물들보다 낮게 평가하고 있을 뿐.[117] 남한 역시도 반대로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다른 위인들보다 높게 평가하는데 이러한 뒷배경도 은연 중에 있을 수 있다. 물론 꼭 그렇다고만 보기엔 이 둘의 업적이 너무 압도적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남한이 북방계 위인들을 깎아내리지도 않을 뿐더러 북한의 남한계 왕조, 인물들에 대한 비방 정도는 지나칠 정도이다.[118] 조선의 기록 기술은 현대 기준으로 보아도 최고 수준이다.[119] 다만 정조의 경우는 신하들을 가르치고 논박하는 것을 꽤 즐긴 편이었다고 한다. [120] 이 사건에 대해서는 동인에 비해 세력이 열세였던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 출처[121]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세도가문들과 비변사를 축출했고, 의정부를 부활시켰다.[122] 이는 불평등 조약으로, 조선을 일본과 같은 자주국으로 인정한다 라는 내용도 있었으나(사실상 청의 종주권 배제가 목적이다.), 일본 중심의 조약인 치외 법권과 화폐 통용, 해안을 자유롭게 측량하는 권한 등 불평등한 내용이 매우 많았고 사실상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조약이었다.[123] 이미 효력이 없는 광무제의 옥새를 사용하여 조약을 체결하였다.[124]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역시 비폭력과 민중 계몽을 앞세우며 조선의 간디라 불린 기록이 있고, '조선의 간디'가 한 두 명에게만 붙여진 칭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에 원불교는 지금보다도 훨씬 작은 군소 종교 단체였고, 소태산 역시 종교인으로써 제 역할을 한 것 뿐 직접적인 독립운동가로 보기는 어렵다. 조선 전체에서 인지도나 영향력을 비교해보았을 때, 간디와 비교할 만한 조선의 대표 인물로 조만식을 꼽는 데에 큰 무리는 없어보인다.[125]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여성 볼셰비키 혁명가(1872년 - 1952년).[126] 비하가 아니라 박열 자신이 자칭한 것이다. 옆 링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