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익(후한)

 


劉翊
(? ~ 192)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자상(子相).
영천군 영음현 사람으로 집안이 풍족해 평소 사람들을 구제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았다. 일찍이 여남 부근에 갔을 적에 진국의 장계례가 스승의 장례식을 가기 위해 멀리 가야 했지만, 예기치 않게도 추위와 얼음으로 수레가 파손되었다.
유익이 장계례에게 장례식에 빨리 가도록 해야 한다면서 이름을 대지 않고 수레를 건네주고 자신은 말을 타고 떠났다. 장계례는 그가 유익일 것이라 여겼고 후에 영음을 가게 되자 수레를 돌려주러 갔으며, 유익은 문을 닫고 돌아가게 하면서 만나는 것을 거절했다.
항상 질병을 칭해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충불이 하남태수로 부임하면서 공조를 불렀으며, 유익은 그가 삼공의 아들이었으므로 출사했다. 충불은 유익이 시기를 골라 출사한 것을 존경하면서 신임했다.
양적의 황강이 정부인의 권력에 등을 업고 산천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자 충불은 정부인이 권세가 있고 황제의 좌우를 섬기므로 인정해야 원한을 사지 않을 것이며, 인정하면 백성들의 이득을 빼앗을 것이라고 했다. 유익은 이를 인정하면 아첨한다는 오명을 쓸 것이라면서 이로 인해 재앙이 일어난다면 부자의 인연을 끊고 만약 처형된다고 해도 고아가 된 것은 아닐 것이라 하자 충불은 그 말을 듣고 황강에게 가담하지 않았다.
충불이 효렴으로 천거했지만 유익은 취임하지 않았고 후에 황건적이 봉기하자 군현에서 굶주림에 시달렸는데, 유익은 식량을 나눠주어 살아난 사람이 수백 명이 되었다. 고향에서 가난한 사람이 죽었을 때는 정중히 장사를 지내고 과부나 홀아비가 있으면 결혼을 주선했다.
헌제가 장안으로 천도하자 상계연이 되었는데, 이 때 도적들이 나타나 도로가 단절되자 통행할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었다. 유익은 밤 중에 다니면서 낮에는 숨어지내 겨우 장안에 도착했고 조서에 따라 충성과 근면함을 칭찬받아 의랑에 임명되었다가 진류태수로 승진했다.
유익은 귀한 보물을 가지지 않고 수레와 말만 남기고 스스로 몰아서 동쪽으로 돌아가기로 했으며, 관을 나온 지 수백 리가 되는 길거리에서 사대부들이 병사하는 것을 보자 말을 팔고 관을 사면서 옷을 걸치고 납관했다.
또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힘들어 하는 사람을 보고 그대로 떠나는 것은 뜻 있는 자가 아니라면서 사람들의 제지에도 타고 있던 소를 죽여 궁핍함을 해결했지만, 결국 유익을 포함해 모두 굶어죽었다.

1. 창작물에서


소설 조조(한종리앙 저)에서는 장막 휘하의 공조로 원소의 명령으로 여포를 죽이기 위해 문추가 진류로 왔는데, 장막에게 문추가 2천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급히 장막을 찾는다고 알렸다. 장막이 여포와 함께 연주에서 군사를 일으키기 직전에 지시를 받고 순욱에게 찾아가 진류에 엄청난 양의 군수품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러 간 후에 돌아갔는데, 순욱은 이런 요청한 것을 수상히 여겨 장막 등이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알아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