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프리트 에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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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프리트 에베를(Irmfried Eberl)
(1910년 9월 8일 - 1948년 2월 16일)
안락사 프로그램인 T-4 프로그램에서 '안락사 의사'로 악명 높았던 인물이자 트레블링카 강제 수용소의 초대 소장.
이름프리트 에베를은 인스브루크 의대를 졸업한 뒤 적극적으로 T-4 프로그램에 참여해 주로 의학 약물을 통한 처형을 집행했다. 이 때문에 SS 내에선 그를 박사라고 불렀다. 라인하르트 작전 이후 트레블링카 수용소 건설에 참여하여 트레블링카의 초대 수용소장으로 부임했으나 트레블링카 수용소 항목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무능하여 한달만에 해임되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에도 에베를은 엄청나게 의욕적으로 일에 매달려 1942년 8월까지 '''약 28만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트레블링카 재판 당시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그는 매우 야망이 컸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그는 수용소가 '처리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이송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이건, 유대인을 실은 열차들이 수용소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걸 의미했는데 왜냐하면 앞서 간 열차의 유대인들이 아직 다 처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엔 날씨가 매우 더웠고 긴 대기시간 때문에 화차 안은 달궈져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화차 안에서 사망했습니다. 플렛폼에는 시체의 산이 쌓였습니다. 크리스티안 비르트[1]

가 트레블링카를 찾아와서 엄청나게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트레블링카에서 에베를 박사는 사라졌습니다. - 빌리 멘츠 -

" 에베를 박사의 야망은 가능한 한 많은 숫자를 달성하고 다른 모든 절멸수용소를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이송이 이루어져서 하차작업과 가스처형이 더 이상 불가능했습니다." - 한스 힝스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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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차했을 때, 우리는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한 광경을 봤다. 도처에 수백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짐 꾸러미, 옷, 가방, 모든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독일인, 우크라이나인 SS들은 막사 한 켠에 서서 군중을 향해 총을 마구 쏴갈기고 있었다." - 오스카 베르거(Oskar Berge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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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를 다음으로 수용소장이 된 자가 트레블링카 수용소장 중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는 프란츠 슈탕글이다. 전후에 처벌받지 않고 에베를은 의사로 일하다가 1947년 T-4 프로그램에 참여한 혐의로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1948년 구류 중 자살했다.

[1] 베우제츠 초대소장이었다가 라인하르트 작전 검사관으로 영전했다. 라인하르트 작전의 최고 핵심 간부 중 하나로서 나치의 절멸수용소 항목들을 찾아본다면 이 이름을 매우 자주 보게 될 텐데 자세한 사항은 이곳 참조바란다.[2] Hans Hingst. 트레블링카 경비병 중 하나였다.[3] 트레블링카 봉기로 생존한 존더코만도 중 한명으로 1942년 8월 트레블링카로 이송된 뒤 존더코만도로 뽑혀 무려 1년을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