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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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용소 구내에 있었던 트레블링카 역. 현재 트레블링카의 내부 구조물을 찍은 사진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남아있는 구조물도 없다. 역사를 찍은 소수의 사진, 수용소 내부의 동물원을[1] 찍은 사진이 유일하다. 트레블링카 역은 수용소에서 약 6km 떨어져 있었는데 앞서 간 열차가 희생자들을 수용소에 하차시키는 동안 뒤에 있던 열차들은 트레블링카 역에서 대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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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레블링카 모형 전체를 확인하려면 이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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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레블링카 추모비.
'''Obóz zagłady w Treblince''', '''SS-Sonderkommando Treblinka(Treblinka II)''' (폴란드어)
'''Das Vernichtungslager Treblinka''' (독일어)
'''Treblinka extermination camp''' (영어)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라 세운 절멸수용소로 바르샤바 근교 트레블링카에 위치해 있었다.
'트레블링카' 이름이 붙여진 수용소는 '트레블링카 Ⅰ 수용소'와 '트레블링카 Ⅱ 수용소'가 있었는데, 1941년 9월에 지어진 '트레블링카 Ⅰ 수용소'는 노동수용소였으며, 1942년 7월에 지어진 '트레블링카 Ⅱ 수용소'가 바로 절멸수용소였다. 오로지 유대인 절멸을 위해 만들어졌던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트레블링카 Ⅱ 수용소)는 폐쇄할 때까지 가장 빠른 속도로 유대인을 학살하던 곳으로서, 1942년 7월부터 1943년 10월까지 단 15개월간 운영되면서[2] 약 80만~92만의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43년 10월 20일 해체되어 사라졌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끔찍한 곳이었음에도 아우슈비츠의 악명에 가려 이 수용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경향이 비슷한데, 증거가 철저히 인멸되었던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은 종종 '잊혀진 죽음의 수용소(Forgotten Camp)'라 불린다.
- 절멸수용소는 노동수용소나 강제수용소와는 달라서 오로지 유대인 절멸을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었다. 절멸수용소 역시 넓게는 강제수용소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나치는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 또는 '죽음의 수용소(Todeslager)'라는 용어를 혼용하며 행정적으로도 이들 절멸수용소와 기타 강제수용소를 구분했다. 또한 다른 강제수용소의 존재는 필사적으로 숨기거나 하지 않았지만 절멸수용소만큼은 그 존재를 일급 기밀로 다뤘고 적이 당도하기 전에 어떻게든 없애버리려 했다. 절멸수용소들은 '분류작업'이 없이 극소수만 존더코만도로 선발하거나(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 헤움노) '분류작업'으로 소수만을 노동가능인원으로 선발하던(아우슈비츠, 마이다네크) 곳이었다. 아우슈비츠는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동 가능인원으로 분류되는 인원은 10~20%에 불과했던 데다 최종적으로 사망률이 85%에 이르렀기 때문에 절멸수용소에 가깝다. 분류작업이 아예 없던 소비보르의 사망률은 99.98%, 베우제츠의 경우 99.989%, 트레블링카의 경우 99.993%, 헤움노의 경우 99.996%였다. 절멸수용소가 아닌 노동/강제수용소의 사망률은 15%~59%였고, '노동을 통한 절멸'을 시행하던 곳으로서 유대인과 함께 정치범 등 '바람직하지 못한 자', 피지배 지역의 엘리트들, 전쟁포로 등도 주된 수감자였다.
- 말라 비틀어진 유대인의 시체가 가득 쌓인 수용소의 전경을 촬영한 비디오는 홀로코스트의 끔찍함을 보여줄 때 많이 활용되는 시각 자료다. 하지만 이 비디오들은 거의 전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촬영된 것으로, 이 시체들은 죽을 때까지 노동하다 기아와 질병으로 결국 사망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수용소 안에 시체가 쌓인 이유는 전쟁 막바지까지 운영되던 노동수용소가 미처 시체를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수용소보다 희생자 수가 월등히 많았던 절멸수용소들은 홀로코스트의 뼈대를 이루었음에도 나치가 증거를 집중적으로 파기한 탓에 남아있는 시각 자료가 거의 없다. 수용소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자료는 단 한 가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존더코만도가 극비리에 촬영한, 나체로 가스실로 끌려가는 여성들, 시체를 화장하는 모습을 찍은 4장의 사진이 유일하다. 홀로코스트의 주된 방식 한 가지는 죽을 때까지 일하다 말라 비틀어져 죽는 것이기보단 수용소 도착 즉시 학살된 후 불태워져 그 재가 땅에 뭍히거나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이 이 끔찍함을 시각 자료 없이 상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증거가 부족한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이 덜 알려져있는 이유다.
2. 건설, 운영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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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확대 가능. 총독부는 지도에 총독부(Generalgouvernment)라 표시된 지역[4] 과 커즌 선(붉은 선) 너머 갈리치엔 구역을 합친 영역이다.[5] 하얀 두개골은 대규모 총살이 일어난 곳 중 몇 곳을 표시한 것이다.
폴란드 침공 시작부터 나치 수뇌부, 특히 히틀러와 괴벨스 등은 유대인 절멸을 하나의 옵션으로 고려하고 있었지만 바로 확정한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일단 게토에 수용되었으며 1941년 상반기까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먼저 이들을 마다가스카르 같은 오지에 대규모로 추방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고, 루블린 근교 등에 유대인을 격리하는 마을을 새로 짓는 등 계획을 일부 실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소전쟁 개막과 함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처리 방침은 빠르게 '절멸'로 기울어졌다. 1941년 8월 히틀러가 구두로 유대인 절멸을 결정했으며, 1941년 10월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는 루블린의 SS 경찰 사령부 오딜로 글로보츠닉에게 구두로 절멸수용소 건설을 지시했고, 1941년 12월에는 폴란드 총독부가 3개 절멸수용소(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베우제츠) 중 1개(베우제츠)를 건설 중이었다. 1942년 1월 20일 행정부 책임자와 친위대 핵심 지휘관이 모인 가운데 열린 반제 회의에서 나치 독일의 유대인 문제 처리 방침이 '절멸'로 확정되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른 절멸수용소 중 가장 늦게 착공되어 1942년 7월 완공되었다.
수용소를 짓기 전 이 지역은 석회석 광산이 있던 곳으로 근처의 공업도시들과 잘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숲속에 가려 은폐되어 있었다. 또한 광산의 여러 기계시설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SS는 이곳을 절멸수용소를 짓기 최적의 장소로 꼽았다. 절멸수용소를 짓기 전 1941년 9월 이미 나치는 이 위치상 이점 때문에 노동수용소인 트레블링카 Ⅰ 수용소[6] 를 지었고. 반제 회의에 의한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라 1942년 4월 절멸수용소인 트레블링카 Ⅱ 수용소를 착공하여 1942년 7월 완공시켜 가동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첫 희생자들은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었다. 수용소가 완공된 직후 1942년 7월 22일 밤 바르샤바 게토에서 처음으로 6,000명의 희생자가 수용소로 왔고, 존더코만도로 쓸 극소수가 추려진 후에 나머지는 다음날 새벽 학살되었다. 이송 직전 이미 바르샤바 게토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7월 21일 나치 독일은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평의회(Judenrat) 의장이던 아담 체르니아코프에게 찾아가 상세한 인구 통계와 게토 지도를 제출하라 명령하고, 이튿날 7월 22일 일찍 다시 아담 체르니아코프에게 찾아가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전원을 '동쪽'에 '재정착'시킨다 통고하며 매일 6,000명 씩 게토 한가운데 있는 철도역 야적장(Umschlagplatz, 움슐라그플라츠)으로 집결시키라고 명령했다. 물론, 만일 매일 6,000명 씩 보내지 않으면 100명의 유대인 인질과 체르니아코프의 아내를 처형하겠다는 협박도 빼놓지 않았다. 40량으로 구성된 텅 빈 화물 기차가 인근에 정차하고 있을 때 체르니아코프는 '재정착'이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게토에서 가장 취약한 인원이었던 고아들은 남게 해 달라고 나치 행정부에 간청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치 행정부는 이를 완전히 무시했고 오히려 고아들도 광장으로 빨리 보내라고 독촉하자 체르니아코프는 좌절감에 빠져 그의 일기장 마지막에 "그들이 내 손으로 직접 내 동포인 아이들을 죽이라 한다. 나는 이제 죽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쓰고 재정착 시작 이튿날 7월 23일 청산가리 캡슐을 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7][8]
초대 수용소장이던 이름프리트 에베를(Irmfried Eberl)은 효율적인 학살 시퀀스를 만들지 못했다. 단기간에 바르샤바 게토에서 26만의 유대인이 몰려들자 끊임없이 공회전을 돌리던 엔진은 자주 고장났다. 그럴 때면 광장에 가득찬 유대인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해 학살했다고 한다. 시체 처리도 이뤄지지 않아 10마일 밖에서도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이곳에서 학살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주변에 확실히 알려졌다.[10] 수용소가 가득차는 바람에 화물칸에서 내리지 못한 유대인들은 시체 썩는 냄새를 맡고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하고는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나치의 학살을 더디게 했다. 나치는 한달만에 에베를을 해임했고 후임으로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장이던 프란츠 슈탕글(Franz Stangl)을 앉혔는데, 이 괴물은 가장 오래 소장으로 앉아 있으면서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학살 시퀀스를 완성했다.수호멜(이하 '수'): "제가 처음 트레블링카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인상에 대해 말씀드려도 될까요?"
란츠만(이하 '란'): "네."
수: "그러니까, 매일 약 100명의 유대인들이 선발되어서 시체들을 참호로 옮기는 일을 했어요. 이해되나요?"
란: "시체들을... 어디서 옮겨왔나요?"
수: "여기서요."
란: "아, 네."
수: "그들은 언덕에 서서... 그림으로 보여주자면, 여기에는 가스실의 문이 있었고, 여기는 공터였습니다. 여기로 시체들이 나왔어요."
란: "네, 네. 그리고 참호에 넣어졌나요?"
수: "꽉꽉 채워넣어졌죠. 유대인 일꾼들이 참호에 시체들을 넣었어요. 더운 8월날이었습니다."
란: "더운..."
수: "더운, 더운."
란: "네, 열기요."
수: "가스 때문에 땅이 마치 파도처럼 꿈틀거렸었죠."
란: "시체에서 나온 가스 때문에요?"
수: "네. 상상해봐요, 참호들은 6에서 7미터 정도 깊이로 파져 있었고 그 자리에 빼곡하게 시체가 채워졌어요. 그 위엔 아주 얇은 두께로 모래가 덮였고 날은 더웠죠. 더위가 아주 작열했어요."
란: "그걸 직접 봤나요?"
수: "봤죠. 단 한번, 처음 도착했던 그 날에만 봤습니다. 어, 그리고 우린 토하고 울고... 그리고..."
란: "울었다고요?"
수: "울기도 했었죠, 네."
란: "냄새는 어땠죠?"
수: "지옥같았죠."
란: "지옥같았다고요?"
수: "네, 네. 가스가 계속 땅에서 스며나오고 있었으니까요. 그건 정말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끔찍한 악취를 풍겼..."
란: "수 킬로미터나요?"
수: "수 킬로미터나요!"
란: "어느 곳에서나 악취가 났나요?"
수: "사방팔방에서 났어요."
란: "트레블링카 안에서뿐만 아니라 주변 다른 곳에서도요?"
수: "사방에서라니까요. 바람 부는 방향에 따라서 냄새가 이리저리 퍼졌습니다. 이해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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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조, 학살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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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8월 수용소 구조. 확대 가능.
트레블링카 수용소 자체와 관련 자료들은 거의 파기되었기 때문에 수용소의 구조는 한동안 알 수 없었지만 1964년 트레블링카 재판에서의 증언으로 어느 정도 확인되었다. 수용소는 크게 수용소 관리 인원들이 있던 1구역, 기차역과 광장이 있던 2구역, 가스실과 소각로가 있던 3구역으로 나눠졌다.
'''1구역'''은 다시 두 구역으로 세분화되어있었는데 한 구역은 '''직원 구역(Living Camp)'''으로서 수용소 본부 겸 수용소장 숙소 및 집무실·간부 숙소·경비병 숙소·간부와 경비병들이 산책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숲과 야외 '카페테리아'·'동물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직원 구역은 수용소장 이하 SS 간부와 우크라이나인 경비병의 사무 및 생활을 위한 구역이었으며, 이 구역 내에서도 독일인 SS 간부와 우크라이나인 경비병의 막사는 서로 급을 달리하여 구분해놓았다. 다른 한 구역은 '''수감자 구역(The Ghetto)'''으로서 유대인 존더코만도들이 숙면을 취하고 식사를 하며 점호를 받는 구역이었는데, 대형 막사 하나와 변소와 수감자들의 점호를 위한 광장으로 구성되었다. 수감자 구역은 당연히 존더코만도의 탈출 방지를 위해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었으며 일과가 끝난 밤부터 일과가 시작되는 아침 일찍까지 문이 잠겼다. 대형 막사와 변소는 수감자 구역에서도 광장을 사이로 마주보고 멀찍이 위치해 있었고, 대형 막사 내부는 여러 공간으로 나뉘어 일반 남성 수감자 숙소·일반 여성 수감자 숙소·카포 숙소·부엌·세탁실·세면실·재단실과 제화실 등 작업실들·양호실(···)[11] 로 구성되었다. 광장은 주로 매일 점호를 위해 존더코만도들이 집합할 때 사용되었지만, 존더코만도의 노동 의욕을 북돋우기 위해 일요일 오후에 허락된 휴식 중 열리곤 했던 존더코만도 악단의 연주를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수용소 간부들은 1구역의 수감자 구역을 조롱하려는 의도에서 '''게토'''(···)라고 불렀다.
운영 초기, 바르샤바에서 트레블링카로의 추방은 두 편의 화물기차에 의해 이뤄졌는데, 당시 폴란드의 열차망은 독소전쟁으로 인해 극도로 혼잡해서 바르샤바에서 트레블링카까지 고작 100여 킬로미터 오는 데 며칠이 걸리기도 했다. 물론 이 동안 화물칸 유대인들은 음식과 식수도 제공받지 못했고 수용소에 도착 전에 상당수가 사망했다. 당시 대부분의 경우 수용소로 향하던 화차는 수용소에서 6km 정도 떨어진 트레블링카 역에 정차했다. 트레블링카의 기차역은 위장되어 있었는데 번듯한 역사가 지어져 있었고 역사 내부엔 시계, 시간표, 트레블링카 근처를 목적지로 표를 파는 매표소 간판이 그려져있었다. 위장의 목적은 희생자들로 하여금 이곳이 더 먼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가는데 잠시 들렀다 가는 환승역으로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유대인들은 여기서 내리진 않았고 앞서간 열차가 수용소에 희생자들을 하차시키는 동안 유대인들은 역에 정차한 화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상술했듯 역에서 대기하던 유대인들은 많은 경우에 엄청난 갈증으로 고통받았는데, 이때 주변 지역에 살던 마을 사람들이 물을 주려 했으며 화차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유대인들을 향해 많은 폴란드인들이 목에 손을 긋는 제스처를 취하며 경고를 했다고 한다. 그럴 때면 역사에 근무하던 우크라이나인 경비병들이 막았으며, 고통받던 유대인들로 인해 화차 내가 시끄러워지면 화차 문에다 총을 쐈다고 한다. 가끔 화차의 창문을 넘어 탈출하는 유대인도 있었는데, 화차에서 나온 순간 경비병에게 처형되었다고 한다. 앞서 간 열차가 빈 화차를 끌고 돌아오면 대기하던 다음 열차가 수용소로 향했다. 생존자들의 증언, 근처 마을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트레블링카는 위장은 했지만 화차 내의 많은 유대인들이 이때쯤 되면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고 한다. 학살 속도가 더뎌진 1943년에는 곧장 수용소로 향한 듯 하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는 하차작업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처우가 가혹했는데, 경비병과 간부들이 직접 희생자들을 매질하며 내리게 했다. 하지만 이미 게토 이송때부터 무작위 처형을 수없이 목격했던 유대인들은 이곳에서도 그 비슷한 가혹행위가 일어나는 것 정도로 여겼다. 기차에서 내린 유대인들은 역사 뒤에 있던 광장으로 가서 일단 물품들을 내려놓고 대기했고 아픈 사람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 그리고 저항하는 인원들은 광장 한 켠에 있던 적십자가 그려진 기짜 양호실로 보내져 대기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목적은 명확했기에 분류작업은 없었다. 이곳으로 보내진 유대인들은 '노동 부적합 인원'으로 분류되어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을 여지 없이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졌다. 트레블링카에 보내진 유대인들이 잠시나마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한가지, 상대적으로 젊고 강해보여서 존더코만도로 뽑히는 것 뿐이었다.[12] 다시 돌아와서, 광장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에게 존더코만도들이 다가와 다음 기차를 타기 전에 샤워를 시켜준다며 따라오라고 했고 그들은 광장 옆 격리된 곳에 있던 탈의실에서 옷을 벗었다. 이들이 광장에서 떠나면 양호실에 있던 약자들은 뒤에 숨겨져 있던 7m 깊이의 거대한 구덩이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이들을 따로 끌고 나온 이유는 희생자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였다. 총살은 SS 하급분대지도자 빌리 멘츠(Willi Mentz)에 의해 이뤄졌는데 트레블링카가 폐쇄될 때까지 이 인간 손에 직접 처형당한 유대인은 수천명에 달했으며 수용소 인원들은 이 인간을 프랑켄슈타인이라 불렀다.
학살의 마지막 과정까지 희생자들을 속였던 아우슈비츠에서와 달리, 트레블링카의 희생자들은 탈의실에서부터 채찍을 얻어맞으며 '샤워실'로 향했다. 이들이 '샤워실'로 향할 때는 좁은 숲길을 지나야 했는데 SS는 자기들끼리 이 길을 '튜브' 또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 불렀다. 트레블링카의 '튜브'는 나치의 절멸수용소들 중에서 가장 완성된 형태였는데, 먼저 지어졌던 베우제츠의 '튜브'는 직선이어서 학살 구역이 일부 드러났고 그 다음 지어진 소비보르의 튜브는 곡선으로 만들었으나 너무 길어서 희생자들이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트레블링카의 '튜브'는 거리가 짧으면서 곡선으로 만들어져 학살장을 감추면서도 희생자들에게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일행이 가스실에 도착하면 먼저 저항의 가능성이 큰 남자들을 가스실에서 학살했고, [13] 그동안 밖에서 기다리는 여성과 아이들은 비명소리를 들으며 이곳이 샤워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공포에 질려 발작했고 일부는 자신도 모르게 배변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트레블링카를 방문한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회스는 이런 관행이 비 효율적이라고 서술했다. 운영 초기에는 학살의 속도가 이송되는 유대인 수를 따라잡지 못해 상술했듯 유대인을 실은 기차가 트레블링카 역 등 주변 역에서 대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블링카는 그 거대한 규모 때문에 하루에 약 12,000명을 학살할 수 있었고 시설이 증설된 1942년 말에는 25,000명까지 가능했기 때문에 주변 역에 있던 화차의 대기 시간은 대개 하루를 넘지 않았다. 구 가스실 건물에는 6개의 가스실이 있었고 신설 가스실에는 10개의 방이 있었는데, 신설 가스실 건설 이후엔 구 가스실은 이송되는 유대인이 너무 많을 때만 다시 가동했다. 하지만 여전히 6개의 가스실을 가지고 있던 소비보르, 베우제츠보다 학살 용량이 컸다.[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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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레블링카 신설 가스실. 확대 가능. 샤워실처럼 위장되어 있었고 건물 가장자리에 엔진 두기가 부착되어 있었다. 이 엔진의 배기가스가 샤워기를 통해 각 가스실로 흘러들어갔고 희생자들이 모두 사망하면 각 가스실에 붙은 밖으로 통하는 큰 문을 통해 시체가 꺼내졌다. 희생자들은 사진에 나온 건물 왼쪽, 그러니까 사진 상에서 엔진실이 있는 곳의 반대편으로 들어왔다. 출처는 ARC(Aktion Reinhard Camp) 홈페이지로 라인하르트 계획에 따라 지어진 절멸수용소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사이트다.
처음 지어진 가스실은 밀폐된 세개의 지상 건물들을 이어붙여 만들었고 상술했듯 내부에 6개의 가스실이 있었다. 수용소의 전력공급실에는 소련의 전차에서 제거해 온 큰 엔진이 있었는데, 이 엔진의 배기가스가 배출되는 파이프가 땅 속을 통해 가스실 바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엔진을 공회전시켜 일산화탄소를 가스실로 흘려보냈고 약 20분 뒤 가스실의 희생자들은 모두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프란츠 슈탕글이 수용소장으로 부임한 이후 1942년 9월 10개의 가스실을 가진 새로운 건물을 거대하게 지었고 이때에는 독일제 엔진을 부착했다는데, 이 부분에 대해선 트레블링카 재판 당시 증언이 엇갈렸기에 확실치는 않다. 연료는 과거엔 디젤이었던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지금은 가솔린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어쨌든 가스실에서의 학살이 끝나면 존더코만도들이 시체를 수레에 태워 밖으로 내보냈다. 1943년까지 이 시체를 매장했지만 독일군이 카틴 학살로 매장된 폴란드인의 시체를 발견한 후 매장이 증거인멸에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1943년 3월 매장된 시체들을 꺼내어 소각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그 뒤 시체를 소각할 거대한 구덩이를 팠고 뼛가루는 모래와 섞여져 주변의 넓은 지역에 흩뿌리거나 거대한 구덩이(Mass Grave)를 파서 묻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폐쇄될 때까지 이 방식을 유지했고 아우슈비츠의 '치클론 B 방식'을 도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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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덩이를 파는 트레블링카의 굴착기. 트레블링카 내부에서 촬영되었다. 트레블링카에는 기종이 다른 굴착기가 두 대 있었다.
수용소에는 SS 해골부대 소속 인원이 20명 정도 있었고 대부분 수용소의 간부였다. 경비병은 약 100여명 정도였는데, 이들의 상당수는 놀랍게도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소련군 중 독일군에 편입된 자들이었다. 이들의 편입이 자발적이었는지는 상당한 논란거리인데, 확실한 것은 1941년 말 소련군 포로수용소의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기 전에도 독일군에 협력한 소련군 포로가 있었다는 점이다.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대가 점차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자 나치는 악독하게도 소련군 포로 중에서 학살대를 새로 선발했는데, 그 중 '트라브니키(Trawniki men)'라 불린 부대가 악명높았다. 이들에게 직접 총살당한 유대인, 슬라브인도 수만에 달했다. 트레블링카에서 근무한 슬라브인 경비병들도 비슷한 맥락으로 선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수용소의 더럽고 끔찍한 일들은 1000여명의 존더코만도들이 맡았다. 이 중 1구역에 살던 700명의 존더코만도들 역할에 따라 3가지 색깔의 삼각형 중 하나를 패용했는데, 파란색 인원은 화물칸에서 유대인들을 하차시키고 이미 사망한 유대인들을 꺼냈다. 빨간색 인원은 광장에 쌓인 희생자들의 물건을 분류했고 노란색 인원은 이 물품들을 품질에 따라 다시 분류하고 물품에 붙은 다윗의 별을 제거했다. 노란색 인원 중 일부는 물품들 속에서 현금이나 보석을 모았다. '죽음의 유대인(Totenjuden)'으로 불린 나머지 300명의 존더코만도들은 3구역에 살았는데 이들은 가스실에서 시체를 꺼낸 뒤 매장하거나 소각하는 일을 맡았다. 존더코만도들은 수시로 경비병들에게 구타당했는데 그럼에도 멍이 든 상태로 일을 하러 나왔다면 희생자들을 속이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즉각 처형되었다. 끔찍한 환경 때문에 많은 존더코만도들이 밤에 스스로 목을 매었다. 대부분의 존더코만도들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새로운 인원으로 대체되었다. 가장 강한 인원만이 끝까지 '일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며' 더이상 일할 수 없게 된 인원은 바로 그날 가스실로 보내졌다.
트레블링카는 존더코만도들에게 지옥이면서도 참으로 아이러니한 곳이었다. 이렇게 '생명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먼 곳에 '동물원'이 있었다. 1943년 초 이곳에서 근무하던 SS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자 수용소장 프란츠 슈탕글은 경비병들이 주둔하는 구역 내의 작은 건물을 개조해 동물원을 만들도록 했다. 이 건물 주변을 철창으로 두른 뒤 근처 숲에 사는 여우, 사슴 등을 잡아와 키웠다고 한다. 동물원 외에도, 존더코만도로 처음 뽑힌 인원은 그날 밤까지 아이러니로 가득 찬 이런 노래를 외워야만 했다.
부헨발트에서 잠시 근무한 적 있던 부수용소장 쿠르트 프란츠가 부헨발트의 제소자들이 부르던 노래의 멜로디에 직접 가사를 만들어 붙인 노래로 트레블링카의 간부들은 존더코만도들에게 자주 이 노래를 시켰다. 이 노래 말고도 존더코만도들이 불러야 했던 노래는 몇가지 더 있었다고 한다. 아래 4장에서 후술하겠지만, 클로드 란츠만 감독과 인터뷰했던 트레블링카 전 간부 프란츠 수호멜(Franz Suchomel)은 인터뷰 당시 란츠만의 요청으로 이 노래를 직접 불러주었다.
4. 주요 간부
가장 오래 수용소장으로 재직했던 프란츠 슈탕글은 나치의 주요 전범 중 하나로서 전후에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문서 마지막에 별도의 장을 할애해 서술했다. 이 장에서는 프란츠 슈탕글을 제외한 다른 간부들을 소개한다.
4.1. SS 상급돌격지도자 이름프리트 에베를(Irmfried Eberl)
이름프리트 에베를 항목 참조
4.2. SS 하급돌격지도자 쿠르트 프란츠(Kurt Fra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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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1월 17일 - 1998년 7월 4일)
1914년 1월 17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난 쿠르트 프란츠는 1929년부터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다가 1935년에 독일 국방군 육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2년 후인 1937년에 친위대로 이적한 후 토텐코프 사단에 배치되어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의 간수로 일했다. 1939년부터 그는 T-4 프로그램에 동원되어 1942년 4월에 베우제츠 강제 수용소로 배속되었다. 1942년 8월에 트레블링카 강제 수용소로 이동한 쿠르트 프란츠는 프란츠 슈탕글 소장 아래에서 부소장으로 일했다. 2대 수용소장이었던 프란츠 슈탕글이 수용소장이었을 때 수용소 2인자였다. 후술하겠지만 SS 의무실에서 근무하던 유대인 율리안 호롱지츠키를 의심해 첫번째 봉기 시도를 좌절시켰다.
1943년 6월에 친위대 소위로 승진한 후 1943년 8월부터는 트레블링카가 폐쇄되는 11월까지 소장으로 일하며 본인의 사디즘적 기질을 발휘하여 유대인들에게 온갖 잔학행위를 자행했으며,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훗날 그가 잔악행위를 매우 즐겼다고 증언했다. 1943년 8월 말 마지막 학살 이후 슈탕글이 트리에스테로 발령된 뒤 수용소장이 되어 수용소 철거를 지휘했다. 전후 미군의 포로가 된 쿠르트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주하여 다시 요리사로 일했지만 1959년에 서독의 사법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수용소 내의 잔학행위로 트레블링카 재판을 받았다. 1965년 트레블링카 재판으로 종신형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지만 1993년에 건강악화를 이유로 석방되어 1998년에 양로원에서 사망했다.
4.3. SS 하급분대지도자 '프랑켄슈타인' 빌리 멘츠(Willi Men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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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에서 두번째가 빌리 멘츠
가짜 '양호실'에서 가스실 이동을 지체시킬 수 있는 인원을 직접 총살한 간부. 트레블링카 재판 당시 그의 증언에 따르면 비르트가 시켰다고 한다. 비르트는 빌리 멘츠가 해야 할 일을 알려준다면서 그의 눈 앞에서 직접 유대인 몇명을 총살했고 빌리 멘츠에게 남은 유대인들을 총살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직접 총살이 빌리 멘츠의 일이 되었다고 한다. 존더코만도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항상 양호실에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얀 의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무시무시하게도 처형 때도 의사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이송된 유대인 뿐 아니라 수백명의 존더코만도 역시 이 자에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존더코만도들은 그를 프랑켄슈타인, 또는 건맨이라 부르며 매우 두려워했다. 전후 숨어지내다가 1964년의 트레블링카 재판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78년 건강악화를 이유로 풀려났다가 출소 후 3개월 뒤 사망했다.
4.4. SS 분대지도자 하인리히 메테스(Heinrich Matt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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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설명한 트레블링카의 세 구역 중 '학살구역'의 책임자였다. 존더코만도들에겐 죽음의 사신과도 같았던 인물로 깔끔함에 매우 집착해서 수레를 제대로 씻지 않았다는 이유로 존더코만도 둘을 그자리에서 처형한 적도 있었다. 1942년 말 존더코만도 사이에서 티푸스가 돌 때 감염자 여덟명을 '가짜 양호실'로 보낸 적이 있었고 어떤 존더코만도가 작업중 물을 마셨다는 이유로 처형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수시로 존더코만도들을 구타했다고 한다. 구타당해 멍이 들거나 일을 못하게 되면 그 존더코만도는 그대로 처형되었다. 라인하르트 작전 종료 뒤, 다른 거의 모든 간부들처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토벌임무를 받아 트리에스테로 발령받았고 전후 숨어살다가 트레블링카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 종신형을 끝까지 살다 사망한 듯 하다.
4.5. SS 하급분대지도자 프란츠 수호멜(Franz Suchom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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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태어난 주데텐 독일인으로 1979년 서독 바이에른의 Altötting이라는 체코와 가까운 마을에서 사망했다.
희생자들의 물품 압류와 수집을 담당했다. 또한 유대인 여성들을 위장된 가스실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학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진 않았다고 인정되어 1964년 트레블링카 재판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67년 석방되었다. 트레블링카 재판 때부터 출소 후 사망할 때까지 트레블링카에 대한 증언을 많이 했는데, 현재 알려져 있는 트레블링카의 상세한 정보 상당량이 이 자의 증언에서 나왔다.
그의 자세한 증언을 듣고 싶다면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대작 다큐멘터리 쇼아(Shoah, 1985)[16] 를 보기 바란다. 1부의 중간 부분 ~ 2부의 앞부분에 걸쳐 클로드 란츠만이 노령의 프란츠 수호멜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조금씩 나온다.[17] 트레블링카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증언에 의해 모인 것이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에서 증언이 서로 상충되어 정확하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 프란츠 수호멜의 증언 중에선 이 문서에 적힌 내용과는 사소한 부분에서 다른 것이 조금 있을 수 있지만 그 차이의 범위가 크지는 않다. 이 트레블링카 문서 역시 쇼아에 나온 증언들을 상당 부분 참고해 작성했다. 란츠만과 수호멜 인터뷰 전문 영어 번역
그와 란츠만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트레블링카가 무얼 하는 곳인지 몰랐다고 한다. 나치 상부는 그가 유대인 '재정착지'로 가서 그곳의 제단사와 신발장이들을 감독하는 일을 하게 될 거라고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1942년 8월 20일 7명의 동료와 함께 트레블링카로 처음 발령되었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슈타디에 하사가 [18]
수용소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줬어요. 우리가 지나가고 있을 때, 그들은 가스실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시체들이 마치 감자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장면은 우릴 공포에 질려 떨게 만들었어요. 우린 돌아와서 짐을 놓고 앉아서 늙은 여자처럼 울었습니다. 그 뒤, 우리는 에베를에게 갔습니다. 우린 그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에베를은 "그럴 수 없네, 내 사람들은 너무 지쳤어. 넌 여기 머물러야 해." 이후 우린 다시 에베를을 찾아갔습니다. "대위님. 전 이걸 견딜 수 없습니다. 전 너무 약하다구요. 여기서 일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에베를이, "수호멜, 그냥 하기 싫다고 말하게나. 그냥 말하게. 그럼 난 너를 니가 있어야 할 곳에 보낼 거야."(란츠만: '니가 있어야 할 곳'이라구요?) 전방이요. 그곳은 그저 언제 죽는 지를 증명하는 곳이었습니다.
4.6. 에리히 푸흐스(Erich Fuc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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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3개 절멸수용소의 처형용 엔진 설치를 담당했다. 전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1966년 소비보르 재판으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5. 트레블링카 봉기
이런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존더코만도들은 오랫동안 봉기를 준비했다. 폴란드군의 군의관이던 율리안 호롱지츠키(Julian Chorążycki)는 트레블링카 SS 의무실에서 근무했는데 그가 처음으로 봉기를 계획하고 인원을 모았다고 한다. 그는 노란색 인원이 모은 돈을 받아 경비병을 매수하려 했으나 1943년 4월 안타깝게도 수용소 간부에게 의심을 사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독을 먹고 자살해 비밀을 유지했다. 그 뒤 역시 폴란드군 군의관이었던 베레크 라이헤르(Berek Lajcher)가 리더를 이어받았고 6월 15일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은 연기되었는데, 당시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진압된 이후 이곳으로 보내진 봉기군 중 하나가 수류탄을 숨겨와 탈의실 주변에서 터뜨려 SS를 여럿 죽였다. 이 사건으로 패닉에 빠진 SS는 수용소의 경계를 강화했고 수용소로 들어오는 희생자를 대폭 줄였다.[19] 하지만 일감이 줄면서 존더코만도들은 쓸모가 없어진 자신들이 곧 다음 차례라는 걸 직감했고 더는 계획을 지체하지 못했다.
1943년 8월 2일 40명의 경비병들이 근처에 휴가를 보내러 떠난 사이 존더코만도들은 무장 봉기를 개시했다. 복제한 열쇠를 이용해 무기고의 문을 연 이들은 20정의 소총과 20개의 수류탄, 그리고 소정의 권총으로 무장해 경비병들을 공격했다. 700명의 존더코만도들은 수용소 각 건물에 불을 지르고 가스 처형의 원료인 석유 저장고를 폭파시키며 분전했지만 무기가 너무 적었고 이들 중 리더였던 라이헤르를 포함 500명이 수용소 내에서 전사했다. 200명이 살아남아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전화선을 미처 끊지 못했기 때문에 수용소장이었던 프란츠 슈탕글(Franz Stangl)은 주변 부대에 지원을 요청해 이들의 탈출을 막았다. 이들 중 절반이 추격당해 사망했지만 나머지 약 70여명은 폴란드 국내군에 의해 구조되거나 현지 마을에서 숨겨준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다. 이들 중 종전까지 생존한 사람은 단 67명이었다. 살아남은 이들 중 칼만 타이그만(Kalman Taigman)이란 분은 후일 트레블링카의 존더코만도 생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지옥. 완전한 지옥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살아있는 사람이 그런 지옥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절대 상상하지 못한다. 살인자들, 작은 것까지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이 모두 죽이는 뼛속까지 살인자인 놈들."'''[20]
'''"It was hell, absolutely hell. A normal man cannot imagine how a living person could have lived through it – killers, natural-born killers, who without a trace of remorse just murdered every little thing."'''#
6. 폐쇄와 발견
봉기가 진압된 뒤에도 한동안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학살을 계속했고 8월 21일 비아위스토크 게토에서 이송된 유대인들을 마지막으로 살해한 뒤 트레블링카에서의 학살은 종료되었다. 하지만 트레블링카 봉기로 인해 수용소 시설 상당부분이 파괴되어 있었고 수용소 운영을 계속하다간 또다시 대규모 봉기가 터질 위험도 있었다. 그리고 이미 중부 폴란드의 유대인 거의 전부가 트레블링카에서 사라진 뒤였기에 루블린의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관 오딜로 글로보츠니크(Odilo Globocnik)는 어차피 없애야 될 이 수용소를 좀 더 빨리 없애기로 했다. 8월 말 루블린에서는 프란츠 슈탕글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토벌을 보조하는 임무를 내려 트리에스테로 발령냈고 부수용소장이던 쿠르트 프란츠(Kurt Franz)를 수용소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새 수용소장의 지휘 하에 수용소 해체가 시작되었다. SS는 남아있던 존더코만도들에게 시설을 완전히 없애도록 해 증거를 인멸했다. 가스실은 벽돌 단위로 해체되었고 바로 그 자리에 해체된 벽돌로 농가를 세우고 주변에 루피너스라는 꽃을 심어 농장처럼 만들어 수용소의 흔적을 완전히 없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인 SS 경비병 한명을 가족들과 함께 상주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주변 지역에 있던 약 700채의 민가들까지 완전히 파괴해 없앴다.
트레블링카의 해체가 거의 완료되어가던 1943년 10월 19일 폴란드 유대인이 거진 절멸되었다고 본 폴란드 총독부는 라인하르트 계획을 종료했다.[21] 이미 아우슈비츠의 학살시설이 거대하게 완비되어 있었기에 나치는 유럽 전역에 아직 남아있던 유대인들을 학살하는데엔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한편, 수용소 해체를 맡았던 마지막 존더코만도들은 차례차례 20~30명 단위로 총살되다 마지막 200명의 존더코만도가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로 보내져 처형되면서 모두 사망했다. 소비보르 역시 10월 14일 대규모 봉기가 성공하는 바람에 트레블링카처럼 해체 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트레블링카와 자신들의 존더코만도들을 처형한 것을 마지막으로, 트레블링카 해체 후 대략 한달 뒤 사라졌다.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몰아낸 소련군은 1944년 8월 16일 트레블링카에 입성했다. 소련군은 이곳에서 소량의 인골과 유품들을 찾아냈는데 소련의 나치 전쟁범죄 조사 위원회가 나와 조사를 했지만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전후 나치의 홀로코스트 정황이 명백해지면서 이 지역에 대한 조사도 재차 단행되었다. 이때 참으로 추악한 일이 일어났는데, 희생자들의 금품을 찾고자 폴란드 각지에서 인간들이 찾아와 이곳의 땅을 헤집어놓았고 이 때문에 시체 소각 구덩이, 미처 꺼내지 않고 매장했던 시체의 유골 등이 엄청나게 드러났다. 이와 함께 홀로코스트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절멸수용소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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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폴란드 각지의 한량들에 의해 파헤쳐진 트레블링카의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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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1945년 소련군에 의해 촬영된 트레블링카의 마지막 흔적.
7. 희생자 수
최대의 게토인 바르샤바 게토, 역시 가장 큰 게토 중 하나였던 비아위스토크 게토의 유대인을 포함해 폴란드 중부의 유대인 거의 전부가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보내졌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제외한 5개 절멸수용소에서 학살된 유대인은 약 200만명에 달하는데 이들 중 절반에 가까운 사람이 이곳에서 학살되었다. 트레블링카로 보내진 유대인은 봉기로 살아남은 67명을 제외하곤 모두 학살되었다고 추정되기에 트레블링카 이송 자료만 있다면 바로 희생자 수치로 더해지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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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플러 전보(Höfle Telegram).[22] 확대 가능. 13/15의 숫자들을 보자. 큰 숫자들 위의 작은 숫자는 12월 31일 직전 2주간 각 수용소로 이송된 유대인 수이다. L은 루블린(마이다네크), B는 베우제츠, S는 소비보르, T는 트레블링카를 나타낸다. 트레블링카의 경우 5가 하나 빠진 오타이다. 5를 추가할 경우 전체 합계인 127만 4166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 숫자는 또다른 홀로코스트 보고서인 코어헤어 보고서(Korherr Report)[23] 에 나온 것과도 일치한다.
1965년 마지막 수용소장 쿠르트 프란츠 재판 때에 뒤셀도르프 재판부는 트레블링카의 희생자 수로 70만을, 1970년 프란츠 슈탕글 재판때엔 90만으로 늘려 인용했다. 하지만 여전히 150만까지 추정하는 학자도 있는 등 희생자 수 산출에 있어 편차가 상당히 컸다. 하지만 2000년 영국이 회플러 전보를 공개하면서 희생자 수를 좀 더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회플러 전보에 따르면 1942년 12월 31일까지 단 5개월동안 트레블링카로 보내진 희생자 수는 713,555명으로 트레블링카 희생자 수를 산출할 때 확정된 최소 수치로서 언급된다. 하지만 12월 11일부로 학살이 종료된 베우제츠와 달리 트레블링카는 학살속도가 더뎌지긴 했어도 1943년 8월까지 학살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희생자가 71만명보다 확실히 많을 것으로 추정해서 보통 80~90만 정도로 본다. 이에 따라 트레블링카 수용소 박물관은 80만을 인용하고 있고 이스라엘 야드 바셈 박물관은 87만을 인용한다. 미국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는 87만~92만으로 본다. 80만 이하를 인용하는 학자들은 항상 '최소'라는 단서를 붙이고, 일부 학자들은 120만까지로 보기도 하는데 이 수치는 신빙성있다고 여겨질 수 있는 수치 중 최대치이다.
아우슈비츠가 절멸수용소로 개조된 이후 약 30개월 동안 110~130만이 학살되었는데 트레블링카에서는 단 13개월만에 80~90만(이들 중 70만은 5개월 동안)이 학살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곳이 얼마나 끔찍한 곳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8. 전후
아우슈비츠는 노동수용소의 기능도 겸해서 살아남은 사람이 조금 있었던 데다 구조물 상당부분을 미처 파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증거가 넘쳐나서 전쟁 직후부터 광범위한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트레블링카는 완전히 철거되었기 때문에 증거가 부족해서 전쟁 직후 꽤 오랫동안 수용소 간부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던 루돌프 회스는 빠르게 조사를 받고 1947년 목이 매달렸지만 트레블링카의 간부들은 1940년대가 다 지나가도 학살 혐의조차 받지 않았다. 긴 시간이 흘러 나치사냥꾼들의 집요한 추적으로 1964년 살아남은 수용소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재판이 진행되어 대부분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67년에는 수용소장이던 프란츠 슈탕글이 잡혀 재판을 받았고 1970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1958년 폴란드 조각가 프란치셰크 두셴코가 가스실이 있던 자리에 8m 높이의 추모비를 세워주면서 트레블링카 추모지가 생겼다. 이후 추모지에는 17000개의 화강암을 땅에 박았는데, 이 17000이란 숫자는 홀로코스트 기간 중 파괴된 유대인 공동체의 수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돌들 중 몇몇에는 폴란드 도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추모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철도 받침목이 추모지까지 이어져 있는데 이것은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들어가던 철도의 실제 받침목은 아니고 역시 60년대에 추모의 성격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1964년에는 폴란드의 국가 순교자 추모지로 지정되었는데, 이때의 행사에는 30,000명의 사람과 함께 트레블링카 봉기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참관했다.
'산 자들의 행진'[24] 은 아우슈비츠 뿐 아니라 이곳에서도 이루어지는데, 홀로코스트를 기리기 위해 폴란드를 방문하는 단체 유대인들은 보통 아우슈비츠로 가기 전날 트레블링카를 먼저 들러 산 자들의 행진 행사를 한다고 한다.
종전까지 살아남은 존더코만도 중 마지막 생존자인 사무엘 빌렌베르크가 2016년 예루살렘에서 9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기사
9. 수용소장 프란츠 슈탕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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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Stangl (1908. 3. 26. ~ 1971. 6. 28. )'''
루돌프 회스는 알아도 프란츠 슈탕글, 크리스티안 비르트 등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유는 간단한데, 이들은 홀로코스트의 대표격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소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10만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루돌프 회스가 그 악명을 모두 가져가기엔, 90만의 죽음에 책임이 있던 프란츠 슈탕글, 60만의 죽음에 책임이 있던 크리스티안 비르트의 악행도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1만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던 아몬 괴트보다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몬 괴트는 절멸수용소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인간 때문에 사망한 사람의 수는 앞서 서술한 것들보다 훨씬 적었지만 특유의 잔혹한 성격으로 인한 무작위 처형, 그리고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통해 악명이 널리 전해졌다. 어쨌든 이 둘은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비해 그 악명이 가장 덜 알려진 인물들일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대량의 죽음은 통계가 되어버리기 때문에[25] 어느 수준을 넘어선 죽음에 대해선 악행의 정도, 비극의 정도를 제대로 가늠하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1만명을 죽인 아몬 괴트, 110만을 죽인 루돌프 회스의 악행 중 무엇이 더 나쁜 것인지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아몬괴트도 알면서 더 많은 사람을 죽인 프란츠 슈탕글이나 크리스티안 비르트를 모르는 건 안된다'같은 의견은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나쁜 놈으로서 이 둘의 악명을 기억하는것도 도의적으로 균형있는 일일 것이다. 어쨌든 이런 관점에 따라 프란츠 슈탕글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프란츠 슈탕글은 1908년 오스트리아 알트뮌스터의 가난한 야간 경비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대단히 나빴다고 했는데, 1916년 아버지가 영양실조로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만 했다. 처음 그는 지터라는 악기를 배워 교습 강사로 일하다 15세때 방직공의 도제로 들어가 일했다. 하지만 방직업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1930년 오스트리아 경찰에 들어가 근무했다.
1940년 나치가 T-4 프로그램을 시작하던 당시 슈탕글은 몸담고 있던 린츠 게슈타포의 상관과 트러블이 많았다.[26]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던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원한다고 간청했고, 결국 T-4 프로그램 시설의 보안 책임자 자리를 맡게 되었고 하트하임 안락사 센터로 발령받았다. 이때 그는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하인리히 힘러의 눈에 들었다. 1942년 3월 T-4프로그램이 거의 종료되었을 때 히믈러는 그에게 게슈타포로 돌아갈 지 아니면 라인하르트 계획에 참여할 지 선택하도록 했고 그는 라인하르트 계획을 선택해 루블린으로 발령받았다.[27] 그리고 한달 뒤 그는 히믈러에 의해 새로 지어지던 소비보르 절멸수용소의 초대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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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블린의 총독부 SS 경찰 사령관이자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관이었던 SS 집단지도자(Gruppenführer. 중장에 상응) 오딜로 글로보츠니크(Odilo Globočnik). 폴란드 총독부와 그 주변 유대인 200만명을 학살한 최고 실무책임자로 전후 1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1945년 5월 31일 체포되었고 체포 당일 심문 직전에 입속에 물고있던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어 자살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처음엔 소비보르 수용소가 단지 '군수 지원 캠프'라고만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곧 숲속에 숨겨져있던 가스실을 찾아내었고 그의 상관이자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관 오딜로 글로보츠니크(Odilo Globočnik)가 다가와 그에게 '만약 유대인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가스실로 보내도 좋다'고 말했으며 그렇게 유대인이 죽으면 '새로 보내준다고' 말했다고 한다.[28] 소비보르에는 베우제츠나 트레블링카에 비해 이송되는 유대인 숫자가 적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슈탕글이 소장으로 있던 1942년 8월까지 단 4개월 동안 1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 무렵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가 지어졌는데, 트레블링카의 초대 수용소장이던 에베를이 무능하자 SS는 그를 해임하고 프란츠 슈탕글을 새로 부임하게 했다. 슈탕글이 트레블링카의 수용소장으로 부임할 당시, 위에 상술했듯 트레블링카는 완전한 혼돈 상태였다. 학살 시퀀스 구성에 '무능'했던 전임 수용소장 이름프리트 에베를은 밀려드는 유대인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속여야 했을 역 주변에서도 마구잡이로 총살했다. 위장의 기능을 상실한 수용소에는 시체와 밀려드는 유대인,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유대인, 무질서하게 버려진 그들의 소지품 등이 마구 섞여 있었고 시체 썩는 냄새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에베를이 해임된 직후 크리스티안 비르트가 상황을 일단 수습했고 이후 프란츠 슈탕글이 부임하여 위에서 서술한 학살 시퀀스를 완성했다. 1943년 말 트레블링카가 폐쇄된 뒤 그는 트리에스테로 발령받아 크로아티아 파르티잔 토벌을 보조했다. 그 뒤 1945년 초 비엔나로 돌아가 오스트리아 지역 방어에 투입되었다.
전쟁의 막바지에 그는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T-4계획에 관여한 혐의로 1947년까지 조사받았다. 하지만 연합국이 트레블링카에 관한 정보를 아직 많이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량학살 혐의를 적용받진 않아서 구류는 느슨한 편이었는데, 1948년 5월 아내와 과거 소비보르 수용소 동료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로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친 나치 성향의 오스트리아 가톨릭 주교 한명의 도움도 있었는데 그는 1952년 바티칸의 추궁을 받아 주교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탈리아로 탈출한 슈탕글은 이후 쥐구멍 라인[29] 을 통해 시리아를 거쳐 1951년 브라질로 들어가 정착했다. 놀랍게도 그는 무려 16년 동안 브라질에서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의 학살 혐의를 알고 있었음에도 1961년에나 영장을 발부했다. 그리고 주 브라질 오스트리아 영사관에 그의 이름이 버젓이 등록되어 있었음에도 나치 사냥꾼이던 지몬 비젠탈이 증거를 수집하고 그를 추적해 내는데 또 6년이 걸려 그는 1967년 2월에야 브라질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곧 서독으로 인도되어 뒤셀도르프 재판부로 넘어가면서 학살을 저지르고 20년이 더 지나서 재판대에 오르게 되었다.
재판대에 오른 슈탕글은 6년 전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학살을 인정하긴 했으나 자신은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는 한때 경찰이었던 경험을 살려 (근거의 적절성과는 별개로) 꽤나 논리적인 변론를 했는데, 범죄를 정의하는 4가지 구성요소인 '행위자(Subject)', '목표(Object)', '행위(Action)', '의도(Intent)' 중 '의도'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범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즉,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전형적인 관료형 전범임을 주장한 것. 하지만 비젠탈이 모은 증인과 증거는 치밀했고 결국 3년의 재판 끝에 1970년 그는 서독의 법정 최고형이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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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신형을 선고받은 프란츠 슈탕글을 취재하는 기타 세레니.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여성 전기작가 지타 세레니(Gitta Sereny)[30] 가 그를 찾아와 취재했다. 그는 역시나 재판에서 그랬듯 학살은 자신의 일이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세레니는 그의 '일'에 대해 상세한 질문을 많이 던졌는데 슈탕글은 이에 답하면서도 자신의 죄라고 인정하는 건 거부했다. 하지만 세레니가 인터뷰 막바지에 어떤 추가적 질문도 없이 그를 바라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하자 결국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유죄'라는 말을 했다. 처음에는 그의 일을 상당히 끔찍하게 생각했지만 곧 익숙해졌다고 했으며 종국에는 즐겼다고 말했다. 그는 튜브에서 가스실로 향하는 유대인의 행렬을 말을 타고 다니며 둘러보거나 망루 위에서 지켜보았다고 했다. 또한 화차에 실려 무더기로 이송된 유대인들을 인간이 아니라 빠르게 처리해야 할 화물로 보았다고 했다. 기타 세레니는 6개월간 총 70시간 동안 그를 인터뷰했는데, 그가 유죄를 시인했던 그 마지막 취재 후 19시간 뒤 프란츠 슈탕글은 뒤셀도르프의 감옥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1971년 6월 28일).[31]
기타 세레니와의 인터뷰 일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다음은 Into That Darkness: An Examination of Conscience에서 슈탕글의 마지막 인터뷰를 담은 부분 일부이다. 책 일부만이 나온다. 다만 미리보기 마지막 부분에 하술한 내용 전부가 나온다." 세레니(이하 Q) : 당신이 종국엔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프란츠 슈탕글(이하 A) : 브라질에 들어온 뒤 1년 쯤 뒤 언젠가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는데요... 내가 탄 기차가 도살장 옆에서 멈췄습니다. 우리 안의 가축들이 기차 소음을 들으며 울타리를 따라 빠르게 이동하면서 기차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가축들은 내 창문 옆으로 아주 가깝게 지나갔는데요... 한마리 한마리가 밀집되어서 울타리 너머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보자... 이건 폴란드를 생각나게 하는군. 확실히, 바로 저렇게 희생자들이 바라봤지. 그 깡통 속에 들어가기 전에 말이야.'
Q : '깡통'이라 하셨는데 무슨 뜻인가요?
A : ...그 뒤론 통조림 고기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바라보던 그 커다란 눈들... 바로 뒤에 자신들이 죽을 거라는 걸 모르면서 말이죠...
Q : 그래서 당신은 그들을 인간이라고 느끼지 않았다는 건가요?
A : 화물이요. 그들은 화물이었습니다.
Q : 언제부터 그들을 화물이라 생각했죠?
A : 아마 트레블링카의 학살구역을 처음 본 뒤로 그랬던 것 같군요. 내 기억으론 비르트가 거기 서 있었는데, 구덩이 옆에는 검게, 파랗게 썩은 시체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인간적인 부분이란건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건 엄청난, 엄청난 양의 부패한 살점이었습니다. 비르트가 말했습니다. "이 쓰레기들을 가지고 무얼 하지?" 아마 그때부터 저는 그들을 무의식적으로 화물로 본 듯 합니다.
Q : 그 희생자들 중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한번이라도 당신의 아이들을 떠올린 적 있나요? 부모의 입장으로서 어떤 생각을 했나요?
A : 아니오... 전 한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그들을 거의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대량의 화물이었습니다. 전 가끔 벽에 서서 그들이 '튜브'로 들어가는 걸 지켜봤습니다. 근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들은 나체로 발가벗겨져서 밀집된 채로 달리면서, 채찍을 맞으면서 마치...
Q : 그걸 바꿀 수는 없었나요? 당신의 지위에서 마치 가축우리에서와 같은 나체 이동, 채찍질을 멈출 수는 없었나요?
A : 아니요. 아니요. 전혀요. 이건 시스템이었습니다. 비르트가 고안했죠. 이건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 #
수많은 나치 관료들이 바로 슈탕글의 사례와 같이 위에서 전해진 명령을 따른다는 명목으로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학살자가 되었다. '그는 T-4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는 트레블링카 수용소장이 되었다' 같은 무미건조한 서술과 함께 그가 학살자가 되는 과정이 드러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그가 그런 끔찍한 직책을 맡게 되었을 때 그가 어떤 생각을 했었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바로 위의 증언과 같았다. 그는 직책을 맡게 되었을 때 어떤 결심이나 마음의 준비 같은 걸 하기 보단 자신의 직책에 따라 수행해야하는 의무로서 일을 처리했고, 평상시를 살아가는 자신의 인격과 학살행위를 완전히 분리했다. 그에게는 '유대인은 정말 나쁜 인간이니 꼭 죽여 없애야 한다'는 증오 따윈 없었다. 유대인을 죽이는 것, 아니 그의 생각에 따르면 '화물을 처리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고, 관료제에 따라 더 능력있던 그가 이 자리를 맡아 더 완벽하게 수행했을 뿐이었다. 아돌프 아이히만, 크리스티안 비르트, 아몬 괴트처럼 자신의 신념으로 유대인 말살계획에 완전히 공감하며 발벗고 나서 학살을 저지른 것들도 있었지만 다른 많은 나치들은 의지가 배제된 살인명령에 따르는 기계였기 때문에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난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부끄럼이 없소....난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해치려 하지도 않았어요..." 그는 뭔가 다르게, 이전보다 덜 예민하게 강조했고, 다시 오랫동안 기다렸다. 나는 처음으로, 그동안 많은 날을 인터뷰했지만 처음으로 그의 대답을 거들지 않았다.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그는 마치 탁자에 붙어있는 것처럼 탁자를 두 손으로 움켜잡더니, "그렇지만... 저는 거기 있었지요." 기묘할 정도로 메마르고 피곤한, 후회의 어조로 이야기했다. 이 몇 마디 문장이 나오는 데 거의 30분이 걸렸다. "네 맞습니다." 마침내 그가 천천히 말했다. "실제로 저도 책임(Guilt)을 짊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죄.... 나의 죄를 오직 이 대화에서만 ... 이제서야 처음으로 이야기하게 되었군요..." 그는 이야기를 멈췄다.
그는 "나의 죄"라는 단어를 이야기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이 대화의 마지막에 그의 몸과 얼굴은 축 쳐져 있었다.
약 1분 뒤 약간 성의 없이 탁한 목소리로 그가 다시 이야기했다. "저의 죄는, 제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겁니다. 그게 저의 죄입니다."
"아직 여기 있다구요?"
"전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게 제 죄입니다."
"당신이 죽었어야 했다는 의미인가요? 아니면 죽을 용기가 있었어야 했다는 말인가요?"
"뭐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군요" 그가 애매하게, 이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지금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근데 그때는요?"
"맞습니다." 그는 천천히 대답했는데, 아마 내 질문을 의도적으로 잘못 해석한 것 같다. "난 20년을 더 살았어요. 그 좋았던 20년이요. 하지만, 이젠 정말 살아 있는것보단 죽는 게 나은 것 같군요." 그는 좁은 감방을 둘러봤다. "전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솔직한 어조로 그가 얘기했다. 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젠 그만하지요. 지금껏 해왔던 이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젠 끝냅시다. 이젠 이야기를 끝내자구요." 그리고 끝났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탕글은 19시간 뒤, 다음날 월요일 오후에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슈탕글 전기의 부재 An Examination of Conscience(양심에 대한 시험)는 많은 의미를 담는다. 관료제에 속한 한 명의 관료가 부당한 명령을 받고 자신의 양심을 시험했을 때, 슈탕글은 오답을 고른 사람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을 트레블링카의 수용소장직에 앉힌다면 그 중 상당수가 나치의 처벌을 각오하고서라도 정답을 고를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 중 양심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트레블링카는 가동될 수 있는 것이다. 국가사회의 개개인에 통용되는 도덕률로써 비극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것을 막을 또다른 방법은 바로 부당한 명령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관료제는 거대한 국가의 의지를 어떻게든 실현시킬 수 있게 하는데, 그 의지가 불순하다면 관료제는 끔찍한 도구가 되고 만다. 나치즘이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증오의 이데올로기가 관료제가 잘 잡힌 나라를 삼켜버리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 슈탕글의 사례로써 잘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행정 체계가 대단히 거대해지고 복잡해진 오늘날 관료제를 포기하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다. 한 국가사회에 단 한사람이라도 절멸수용소장의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도덕률을 만들 수 없다면, 슈탕글의 사례, 더 나아가 홀로코스트가 오늘을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끔찍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정부를 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 즉 교묘한 선동 속에서 불순한 의지를 내포하는 증오의 이데올로기를 인식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