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리얼/배경

 


1. 장문
2. 단편 소설
2.1. 울로아의 영약
2.2. 한 탐험가의 여정
2.3. 수집상의 수작
2.4. 펄스 건 스킨 세계관
2.4.1. 시간을 거슬러
3. 구 설정
3.1. 구 배경 1
3.2. 구 배경 2


1. 장문


필트오버의 부유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이즈리얼은 항상 호기심이 많은 아이었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그의 부모님이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것에 익숙해진 그는 종종 부모님과 함께 여행하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듣는 것을 좋아했고, 모든 지도의 빈 공간을 채우겠다는 부모님의 소망을 함께 바랐다.
이즈리얼은 자신의 삼촌인 존경받는 리메르 교수에게 자주 맡겨졌다. 성급하고 제멋대로인 아이를 돌보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던 리메르 교수는 이즈리얼에게 아주 엄격한 가정 교사들을 붙여 상급 지도 제작법과 마법공학 역학, 룬테라의 고대사 같은 과목을 가르치게 했다. 하지만 지식을 흡수하는 데 소질이 있었던 이즈리얼은 공부를 시간 낭비로 여겼다. 공부를 거의 또는 전혀 하지 않고도 시험을 쉽게 통과해서 삼촌의 화를 돋우고 자주 대학교 안을 배회하곤 했다. 이즈리얼은 교정 관리인을 피해 도서관 옥상을 드나들듯 강당 아래에 있는 굴속을 돌아다니는 것을 즐겼다. 심지어 자물쇠 따기를 연습해 교무실에 몰래 들어가 재미로 교사들의 물건 위치를 바꾸어 놓기도 했다.
이즈리얼의 부모님이 필트오버에 돌아올 때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들의 모험담과 앞으로의 탐험 계획을 말해 주고는 했다. 그중 다른 곳으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다는 슈리마의 폭군, 네죽의 사라진 무덤을 찾는 것보다 야심적이고 비밀스러운 모험은 없었다. 이즈리얼의 아버지는 네죽이 부린 마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어디를 여행하든 매일 저녁 필트오버에 들러 저녁을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이즈리얼이 자랄수록 그의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는 간격이 점점 더 뜸해졌고, 결국 어느 해부터 부모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메르 교수는 눈물을 머금으며 분명히 사막 어딘가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즈리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모님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준비에 철저했다. 분명히 어딘가에 살아 계시는 것이 분명했다...
내키지 않는 공부를 포기한 초보 탐험가 이즈리얼은 홀로 나아가기로 했다. 부모님을 찾으려면 네죽의 마지막 안식처부터 찾아야 했다. 이즈리얼은 몇 주 동안 대학에서 천체 지도, 룬 문자 번역본, 슈리마의 매장지가 표시된 안내서, 보안경 등 필요한 물건을 몰래 모았고, 삼촌에게 편지로 작별 인사를 남긴 채 나시라미로 향하는 보급선에 슬쩍 올라탔다.
이즈리얼은 어머니의 꼼꼼한 현장 기록을 따라가며 남쪽으로 향하는 상단 마차와 함께 대사막을 건넜다. 흐르는 모래 아래에 있는 동굴 같은 유적들을 수 개월간 탐사하며 미지의 것을 발견한 기쁨을 만끽하거나 숨겨진 방을 지키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마주하기도 했다. 이즈리얼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부모님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상상하며 부모님의 실종 수수께끼를 해결하는데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져 갔다.
결국 그는 부모님이 해내지 못한 것까지 성공했다. 비교적 최근 지어진 어떤 이름 없는 황제의 묘에서 네죽의 무덤을 발견한 것이다.
거대한 석관 안에는 중앙에 수정처럼 밝은 원석이 박혀 있는 빛나는 청동 장갑 한 짝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이즈리얼이 그 위에 손을 올리자 수천 년 전에 교묘하게 만들어진 함정과 묘실이 그를 덮치려는 듯했다. 이즈리얼은 망설이지 않고 장갑을 낀 후 밖을 향해 달려나갔다. 마지막 백 미터 정도를 남겨 두고는 묘 전체가 모래와 돌무더기 속에 파묻히기 전에 숨겨진 입구까지 순간 이동했다.
이즈리얼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심장박동과 함께 울리는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장갑이 자신의 정기를 흡수해 증폭시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이 장갑은 고대의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슈리마의 신성전사에게 걸맞은 무기이자 탐험가를 위한 완벽한 도구이기도 했다.
필트오버로 돌아간 이즈리얼은 곧바로 모험을 찾아다녔다. 사라진 도시부터 신비로운 사원까지, 보물을 찾아내는 그의 감각 덕분에 대학교수 대부분이 지도로밖에 접하지 못한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는 모험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물론 이즈리얼의 기준에서 그의 모험담은 자신의 진정한 위업을 거의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모험가로 이름을 떨치면 분명 부모님이 돌아와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녹서스와 데마시아 사이의 개척되지 않은 국경 지대부터 자운의 더러운 거리, 프렐요드의 얼어붙은 광야까지. 이즈리얼은 오래전에 사라진 유물을 발견하고 역사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며 명예와 영광을 쫓고 있다. 이즈리얼의 세세한 일화에 반박하거나 그 방법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이 있더라도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다들 질투가 나서 저러는 게 뻔하니까 말이다.

2. 단편 소설



2.1. 울로아의 영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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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무덤의 서늘한 공기가 더없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덥고 습한 정글 속을 걷고 나서인지 천국이 따로 없었다. 물론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 모퉁이 하나를 돌 때마다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영광을 손에 쥘 수 있으니 그 정도 위험쯤은 얼마든지 감수하리라.
돌로 만든 아치형 입구 아래를 걸어가자 먼지가 유령처럼 일었다. 새까만 먼지에 뒤덮여 있던 암벽의 원형 무늬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옛 무덤인 이곳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절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곳. 여러 탐험가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목숨만 잃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마력의 영웅 이즈리얼 아닌가! 무덤의 비밀은 곧 내 손에서 파헤쳐지리라.
미로같이 복잡하게 얽힌 터널 안을 뚫고 들어가자 이내 뾰족한 침이 빼곡히 박힌 모래 덫이 나왔다.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방향을 확인하고는 좌우로 흔들리는 도끼 날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그때였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독사 떼가 튀어나왔다. 한바탕 몸싸움이 벌어졌다. 시작부터 결코 녹록지 않았다. 한 번쯤 탐험해볼 만한 곳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곳에서 살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나가겠노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덤 벽에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붙어 있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왠지 싫지 않았다. 하긴 나 같아도 그랬을 터. 룬 전쟁 이후로 이토록 멋진 사내는 구경하기 힘들었을 테니!
방 한가운데에는 크리스털 유리병 하나가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속에 담긴 투명한 액체는 유리병에 반사되어 은은한 빛을 발했다. 이내 바닥에서 엷은 무지개가 피어 올랐다. 울로아의 영약. 바로 이것이 내가 목숨을 걸고 이곳에 온 이유였다. 대개 위험을 무릅쓴 용맹한 모험가의 이야기는 소설 속에나 등장하는 것쯤으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보물이 발견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전설 속에 내려오는 귀중한 보물을 손에 쥐었다는 건, 미지의 세계를 정복했음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징표이니까.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영약을 찾아 헤매고 있다.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 사람들, 쇠락해가는 나라를 되살리고 싶어하는 왕족들, 궁극의 지혜를 마주하기 원하는 순례자들까지. 채 한 숟가락도 되지 않는 이 영약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탐험과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유리병을 받침대에서 들어 올리는 순간, 무덤 속에 숨겨진 모든 덫은 일제히 나를 포위하게 될 터였다. 그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깍지를 끼고 있던 손가락을 풀었다. 그러고는 가죽 장갑 가운데 박힌 보석에 슬며시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청아하면서도 맑은 푸른 빛깔이 한껏 빛을 발했다. 자,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병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순간 바닥이 심하게 흔들렸다. 행여나 덫에 걸려들까 두려움에 휩싸인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고는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그나마 흔들거림이 덜한 돌 조각 위로만 살금살금 걸었다. 그리고 얼마 뒤, 드디어 유리병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방 안 돌 바닥이 쫙 갈라지더니 이내 둘로 쪼개졌다. 나는 재빨리 장갑을 마력으로 가득 채웠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 나를 압도했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45m나 떨어진 아치형 입구 쪽으로 순간 이동했다. 방 안을 들여다보니 칼날 모양의 막대기 수백 개가 마치 폭포수처럼 늘어져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고는 이내 갈라진 틈 사이로 방 전체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나는 죽은 목숨이었다.
장갑의 마력이 적중한 순간이었다. 이렇듯 내 장갑은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에 꽤나 쓸모가 있다. 하지만 제법 먼 거리를 건너는 상황에서는 그 마력이 영 신통치 않다. 충전하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쿵!’ 벼락이 칠 듯 큰 소리에 벽이 다 흔들렸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메아리가 되어 복도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였다. 무덤은 그리 오래 버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재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금이 점점 벌어지며 바닥을 삼켜버리기 시작하자 나는 얼른 터널 아래로 뛰어 내렸다.
나는 무덤에 들어오면서 분필로 표시해두었던 방향을 따라갔다. 그런데 나가는 길은 너무도 험난했다. 무너져 내린 아치형 입구 잔해 위를 가까스로 내려가 위기를 모면했는가 하면, 살이 데일 만큼 펄펄 끓는 모래 늪을 간신히 피하기도 했다. 또 굴러 떨어지는 거대한 바위에 깔릴 뻔했던 순간도 있었다. 몸을 재빨리 움직인 덕분에 화는 면했지만 말이다.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험난한 여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 오른쪽에 있던 벽이 두 개로 갈라지자 거대한 곤충 떼가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재깍재깍 집게발을 여닫으며 내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턱에서는 진득한 독이 흘러내렸다. 배고픔에 지친 수천 마리의 붉은 거미 떼가 먹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동안 전갈 무리는 독침을 날카롭게 세운 채 앞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어떻게든 빨리 녀석들을 해치워야 했다. 하지만 무서울 건 없었다. 내겐 마력의 장갑이 있으니까!
잠시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았다. 몸 전체의 기를 팔 쪽으로 끌어당겨 장갑에 박힌 보석을 향해 있는 힘껏 몰아주었다.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맥박이 뛰는 소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상대는 어마어마하게 큰 거미 한 마리. 목표물을 겨냥하여 조준한 뒤 공격 시기만 노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거미가 턱을 쫙 벌렸다. 나는 강렬한 광선 한 줄기를 거미 입으로 냅다 쏘아 올렸다.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거미 떼는 이내 불길에 휩싸였다. 껍질 타는 매캐한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토할 것 같이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골목 굽이굽이 또 다른 광선을 쏘아가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집채만 한 바위덩이가 바로 머리 위 천장에서 쪼개지고 있었다. 다행히 장갑에는 마력이 채워져 있었다. 덕분에 나는 3m나 떨어진 곳으로 순간 이동했다. ‘우르르 쾅쾅!’ 뒤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나는 이 자리에 없는 목숨이었다. ‘휴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돌무더기 잔해 속에서 삐딱하게 기울어진 기둥 두 개가 서로를 의지한 채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기둥마저 먼지 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기둥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 나온 직후였다. 바로 옆방을 향해 황급히 달려갔다.
강렬한 태양이 눈부시게 빛났다. 이제 무덤을 빠져나갈 일이 머지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귀청이 터질듯한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이내 휘청거리며 달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눈앞에서 방이 둘로 쪼개졌다. 희망의 빛은 다시 절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마력의 장갑이 있었다.
곧바로 장갑을 가져와 내 모든 기를 보석에 집중시켰다. 온 몸의 기가 빨려나가는 듯했다.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모든 것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보였다. 보석이 마력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특유의 푸르른 빛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력이 모두 채워지고 나자 나는 손바닥을 펴고 둥근 모양의 금빛 광선을 쏘아 올렸다. 터널은 이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날쌘 공격의 여파로 나도 순간 휘청거렸다. 하지만 다시 공격에 집중했다. 재빠르게 쏘아 올린 불빛은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산했다. 빛이 통과하는 길목마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그 길목 사이사이엔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듯한 위태로운 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터널 안은 점점 더 어두워만 갔다. 이따금 흔들리는 바닥에 몸이 휘청거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내겐 더 이상 공격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홀로 서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순간 바닥이 좍 하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속도가 너무 빨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무덤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겨우 몸을 일으켰다. 오직 빠져나가겠다는 일념으로 있는 힘껏 내달렸다.
칠흑 같은 어둠만이 계속되었다. 아무런 빛도 느낄 수가 없었다. 무덤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 옆의 벽은 맥없이 주저 앉았다. 나는 눈을 감고 무작정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슬며시 눈을 떴다. 나는 분명히 땅을 디디고 서 있었다. ‘휴우.’ 안도의 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억세게 운 좋은 놈이니까! 행운의 여신은 언제나 내편이었다. 정글의 눅눅한 공기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
내 뒤로 무덤의 입구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고대의 흔적은 먼지 기둥 속으로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나는 옷가지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러고는 이내 그곳을 떠났다.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나는 또 한 번 해내고 말았다. 이 유리병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아직 12시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아침 나절에 이 정도 탐험쯤은 끄덕 없다고 생각하며 씨익 웃었다.

2.2. 한 탐험가의 여정


'찬란한 성물의 지하실' 탐험 수기
기록자
이즈리얼
필트오버의 가장 위대한 '공인' 탐험가
(필트오버 탐험가 조합의 공식 조합원 자격은 아직 보류 중)
1일 차, 준비
탐험 점검표:
✓ 슈리마의 힘이 깃든 장갑
✓ 강화 가죽 재킷 (새필라이트 로우 거리에 있는 '잘리의 탐험 용품 & 잡화점'에서 맞춤 제작)
✓ 방수 처리한 캔버스 부츠 (이것도 잘리네 상점 제품)
✓ 동굴 탐사 장비
✓ 손 곡괭이? (뭐라고 부르더라?)
✓ 배관 청소부 복장 (일회용) 
✓ 라이트페더사의 멋쟁이 탐험가용 포마드 한 통 (하나 더 가져갈까?)
잘리에게 전부 삼촌한테 청구하라고 했다. 삼촌은 돈이 많으니까.
그럼 탐험 준비 끝!
3일 차, 계획
맞다, 내가 뭘 탐험할지 적어 놔야겠다. 후대를 위해서 말이지.
삼촌은 자운이 한때 '오쉬라 바자운'이라고 불렸던 슈리마의 항구 도시였고, 몇 세기가 지나며 그 이름이 짧아진 것이라는 학설을 내세웠다. 하지만 증거가 많지 않아 아무도 삼촌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난 착한 조카가 되어 증거를 찾고 모든 공을 차지하기로 했다.
소식통에 의하면 산업 발굴 작업 때문에 지하동굴 어딘가 깊은 곳에 균열이 생겼다고 한다.
계획은 간단하다.
내일 그 위치를 찾아 균열 속으로 내려간다. 
증거를 찾는다. (위 참고) 저주받은 항아리나 잃어버린 마법서 같은 것. 세계를 뒤흔들 정도로 멋진 것 말이다.
동굴을 빠져나가 지면으로 올라온다.
저녁을 먹으며 흐뭇하게 삼촌을 바라본다.
수익을 챙긴다?
이 일지는 탐험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 쓰고 있다. 이번 탐험의 기록은 결국 박물관에서 내 대리석 조각상 옆에 놓이게 될 것이다.
(해야 할 일: 조각가 추천받기)
4일 차, 이른 아침
음, 상당히 거대한 균열이다. 등불을 가져오는 걸 깜빡했는데 장갑의 빛이 꽤 밝아서 다행이다. 균열 속을 내려다봤을 때는 말 그대로 숨이 턱 막힐 뻔했다. 먼지가 쌓인 층계와 낡은 통로들이 하나의 미로처럼 얽혀 있다. 미궁 그 자체다. 이제 내려가려 한다. 아래쪽에서 다시 기록하겠다.
아마 리메르 삼촌은 배가 많이 아플 거다.
4일 차, 점심 무렵?
의욕이 떨어진다. 포마드도 거의 다 떨어졌다. 간식을 가져왔어야 했다.
사분의 일 정도밖에 내려오지 않았는데 밧줄이 부족하다. 벽에 난 좁은 바위 턱에서 휴식하며 심각한 현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굶주림을 참고 계속해서 내려갈지, 아니면 모든 걸 버리고 빈손으로 돌아갈지 결정해야 한다.
4일 차, 정오 한참 지남
포마드도 먹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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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차, 늦은 오후쯤
좋은 소식이다! 뭔가를 찾아냈다!
내가 쉬고 있던 곳의 몇 바위 턱 아래에 문이 있었다. 낡은 사암 문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수 세기 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 내자 어떤 상형 문자들이 나타났다. 부엉이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고대 슈리마어 실력이 조금 녹슬긴 했지만, 최대한 해독했다. 아마도 저주에 관한 내용으로 추측된다. 계속해서 불어나는 끔찍한 저주? 아니면 천 가지 저주? 정말 끝내준다! 늘 말하지만 저주받지 않은 건 가치가 없다.
문에서 어떠한 종류의 옛 손잡이도 찾지 못한 나는 최후의 방법으로 장갑을 사용했다. 문을 부수는 바람에 고대인들에게 미안하게 됐지만, 오래된 상형 문자보다는 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더 궁금하다.
이 전실은 정말 흥미롭다. 우선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한 데다가—
잠깐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금이 가는 소리? 발소리인가?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장갑으로 문을 부술 때 전실 기둥에 무리가 갔을지도 모른다. 이만 가야겠다. 파묻힌 탐험가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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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차, 저녁 무렵
재미있었다. 무덤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무덤은 항상 무너지니까. 특히 내가 안에 있을 때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문에 새겨진 내용은 사실이었다. 그 전실은 정말로 저주받았던 것이다.
오쉬라 바자운에는 그 유명한 '찬란한 성물의 지하실'이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곳의 '성물' 중 하나는 한때 황제 직속의 영혼 소멸자였던 카리칸의 소유물이었다. 그는 성가신 존재들을 생명이 없는 사물에 결속해 자신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한 것 같다. 그리고 현재 자운이 있는 바로 이곳에서 죽은 것이다!
게다가 카리칸에게는 그의 유품을 지키는, 느리고 멍청한 불타오르는 바위 병사가 한 부대나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내가 전부 산산조각을 내버렸으니까!
나는 굉장히 잘 보존된 황금 현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현판에는 '불의 날'에 관한 전설과 오쉬라 바자운을 지키겠다는 카리칸의 맹세가 새겨져 있다. 내 작은 가방 안에 숨겨진 역사가 통째로 들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 현판은 세계를 바꿀 것이다!
(학계만 바꾸지는 않기를 바란다. 학계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5일 차?
고대 슈리마의 저주는 정말 한시도 날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바위 병사 (아, 혹시 골렘이었나?) 한 부대만 있던 게 아니라 갑자기 균열에서 물이 쏟아져 들어와 바닥이 잠기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필트강 아래 어딘가쯤에 있는 것 같다.
엄청나게 많은 터널을 헤엄쳐 지나왔다. 잠긴 문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 문을 전부 탐험하고 싶다는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지면에 가까워진 것 같다. 다행이다. 아까 지나온 터널에서 징그럽게 생긴 검은 장어들을 봤기 때문이다. 역겨운 생물이다.
다시 이곳을 탐험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현판을 천으로 잘 감싸서 지킨다면 이번 탐험에서 목숨을 위협하는 온갖 함정과 양말이 젖는 대참사를 견뎌낸 가치가 있을 것이다.
슬픈 소식은 마지막 남은 멋쟁이 탐험가용 포마드를 전부 써 버렸다는 것이다.
6일 차, 문명으로 귀환
잘리네 상점에 앉아 있다. 이곳은 정말 필트오버 최고의 탐험 용품 상점 중 하나다. 사실 나는 이곳의 훌륭한 환불 정책을 써먹으려고 왔다. 내 재킷은 너덜너덜해졌고 부츠는 전혀 방수가 되지 않았다. 제품에 하자가 있다고 말할까 했지만… 고맙게도 잘리가 먼저 다시 제작해 주겠다고 했다.
내가 머드타운의 타짜 패거리와 크라켄핸드를 하다 돈을 잃고 온 듯한 차림새로 이 일지와 현판을 내보이면 탐험가 조합은 절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말끔히 보여야 한다. 새로운 재킷, 바지, 신발, 양말, 포마드까지.
옷이 날개다. 정말이다.
9일 차, 피해 수습
필트오버 상업 지구에서 날뛰고 있는, 불타오르는 괴물들이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사실을 이 공식 기록에 적어 둔다. 난 죄가 없다!
그럼 누구 탓이냐고? 그야 잘리네 점원 탓이다.
자운 깊은 곳의 잊혀진 지하실에서 힘들게 가져온, 어쩌면 마법이 걸려 있을지도 모를 황금 현판을 잘리네 상점의 어리숙한 점원에게 맡기면 절대로 안 된다. 왜냐고?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현판을 천에서 풀어 햇볕이 내리 쬐는 창턱에 올려놓을 거고… 당연하게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불가사의한 언어의 목소리들이 들려올 테니까. 그리고 그 귀중한 현판은 빛을 내다가 엄청나게 뜨거운 파편으로 폭발하며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렇다. 현판이 주야 평분시의 햇빛을 받으면 카리칸의 무시무시한 그렘린들이 해방되는 것이었다.
난 오늘이 주야 평분시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이건 내 잘못이다. 연감을 사서 공부해야겠다.
(해야 할 일: 연감 사기. 잘리네 상점에서는 말고.)
땅이 흔들리고 있다. 이제 펜을 놓아야 할 것 같다. 끔찍한 놈들이 하수구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장갑으로 그중 몇 놈을 쐈는데, 놈들에게 그게 먹혔는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성공이다!
결국, 그 모든 난리를 겪고 남은 증거는 이 일지와 내 진술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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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차, 법률 자문을 구하는 중
예심이 다음 주에 잡혀 있다.
명예훼손에 관한 필트오버의 법을 공부해야 한다. 당연히, 날 변호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2.3. 수집상의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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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분명히 하자면, 난 자눅이 말한 '공포의 군주'인지 뭔지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눅이 구해 달라고 부탁하길래 우스꽝스러운 유리병을 그에게 팔려고 했을 뿐이다. 그저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나라면 끝까지 당신 생각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내 생각대로' 말이다. 그거나 이거나지만.
자눅은 붉은 수염을 기른 프렐요드의 이주자로, 주머니가 빵빵하고 욕심이 많았다. 자눅의 고용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사택은 유물과 미술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 절반은 무덤을 도굴했거나 다른 박물관에서 빼돌린 것이었다. 자눅은 자신이 모은 수집품을 끼고 식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몇몇 수집품이 증명하듯 우리는 과거에 여러 번 함께 일했는데, 문제는 자눅이 날 두 번이나 배신했다는 거다. 뭐 '에셜론 여명'의 잔해를 인양한 후에 자눅이 내 정체를 폭로한 것까지 포함하면 두 번 하고도 반이지만…
그래도 돈 문제가 발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은 칭찬할 만하다. 그에 대한 원한이 꽤나 누그러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즈리얼." 자눅이 접시를 옆으로 밀며 말했다. 그의 이에는 군데군데 양고기가 끼어 있었다. "물건은 찾았나?"
그가 말하는 '물건'은 울로아의 영약이었다. 물론 나는 파레사 인근 밀림에 있는, 함정이 잔뜩 깔린 고대 사원에서 그 영약을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가방에서 뼈와 수정으로 만든 병을 꺼냈다. 손바닥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여기, 의뢰한 물건." 난 유리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흥미로운 병이야. 고대 슈리마 이전의 물건이 아닌가 싶어."
병 안에 든 한 숟갈 정도의 진득한 액체가 달빛에 비쳐 희미하게 빛났다. 자눅의 눈이 커졌다.
나는 엄살을 부리기로 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건 그냥 평범한 고대의 정수가 아니야. 무려 '사원에 묻힐 뻔한' 고대의 정수지. 무너져 내리는 사원을 겨우 탈출했다니까."
"울로아의 영약…"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경외에 찬 목소리였다. "단 한 방울로도 영혼의 갈증을 천 년 동안 해소할 수 있지… 페트리사이트만큼 강한 피부도 얻을 수 있어…"
자눅은 탐욕스러운 손을 뻗어 병을 잡으려 했다. 나는 병을 뒤로 물렸다.
"성격 급하시긴."
"알았어, 알았어." 자눅이 손으로 더듬더듬 책상 서랍의 열쇠를 찾으며 중얼거렸다. "보수. 6만에 합의를 봤었지."
"조합의 정식 인가도 받아 주기로 한 거 기억나지?"
나는 지금껏 많은 곳에서 거절당했다. 술집, 학교, 심지어 소나의 연주회까지… 하지만 내가 현장에서 목숨을 얼마나 내걸었는지 생각하면 필트오버 탐험가 조합에서 거절당한 게 가장 쓰라린 경험이었다. 배은망덕한 놈들.
자눅은 얼굴을 찌푸렸다. "조합은 특히 널 좋아하지 않아, 이즈리얼. 너와 일해 보니 딱히 그들을 탓할 수도 없겠더군." 그는 술병에서 호박색 술을 따른 후 벌컥거렸다. "네놈이 녹서스의 포로수용소에서 날 썩게 내버려 뒀지…"
"감옥 일은 복수였어. 에첼론 여명 사건 때의 복수."
"에첼론 여명 일은 지도 사건에 대한 복수였지."
"지도 일은... 그... 일에 대한 복수였어." 나는 이를 갈았다. "아마 그랬을 거야."
점점 불안해진 나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지 말고, 인가를 받아 주는 것도 거래 조건의 반이었잖아." 나는 자눅에게 상기시켰다.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면 다른 구매자를 찾아보겠어."
자눅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긴장을 깨뜨렸다. "내가 뭐 때문에 너와 계속 일한다고 생각하나? 네가 마음에 들어서야. 우리는 함께한 역사가 있지 않은가. 역사는 거래에 항상 도움이 되기 마련이지." 자눅은 술잔을 비웠다. "서재에서 인가장을 가져올 테니 잠깐 기다리게."
보수를 서재에 두는 구매자라고? 사기꾼들의 뻔한 수법이다. 아마 자눅은 내 멋진 얼굴에 화승총 한 자루를 겨눈 채 돌아올 것이다.
나는 자눅이 돌아올 동안 그가 수집한 유물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내가 그의 의뢰를 받아 입수한 것들도 보였다. 그러던 중 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띄었다. 고양이만 한 크기의 석종이었다. 아랫부분에는 낯선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오치넌." 자눅이 외쳤다. "저승에서 쓰는 망자들의 언어라네. 인간들의 언어가 아니지."
나는 등골이 서늘해져 몸을 홱 돌렸다.
다행히 자눅의 손에 화승총 한 자루가 들려 있지 않았다. 화승총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이즈리얼, 안됐지만 탐험가 조합이 다시 한번 네 요청을 거절했다." 자눅이 가까이 다가와 밝은 곳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공포의 군주는 부활할 것이다. 그 영약으로 말이지."
공포의 군주 같은 소리 하네. 그나저나 이번에는 될 줄 알았는데...
장갑을 장전했다. 분노는 놀랍고도 신비한 동력이다. 항상 말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자눅을 향해 팔을 들어 올리자 그가 총을 발사했다. 마법과 산탄의 대결이었다.
역시! 마법의 승리다. 마법은 언제나 승리한다.
칙칙한 금속 탄환이 에너지파에 닿자 뜨겁게 타오르더니 은빛 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배신자를 상대할 때는 두 배로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나는 장갑을 재빨리 다시 장전했다.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펑 하고 터지자 나는 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짧은 거리를 순간이동하는 건 별로 힘들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자눅이 돌아서기 전에 장갑을 낀 손을 그의 크고 멍청한 머리에 댔다.
"총을 버려, 자눅."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
아, 느낌이 좋지 않은 말이었다. 난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자눅의 발치에 총이 있었다.
자눅이 강하다고 얘기했었나? 자눅은 엄청나게 강하다. 한 손으로 장갑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잡은 자눅은 날 어깨 위로 넘겨 사무용 책상 위에 내리꽂았다. 망할 석종이 척추를 세게 찔렀다. 시야가 하얘지며 흩날리는 파편들이 보였다. 수없이 많은 작은 파편들이.
자눅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 몸을 걷어찼다. 내가 떨리는 손으로 쥐고 있던 울로아의 영약을 억지로 뺏은 그는 마개를 뽑고 액체를 들이켰다.
"네 엉터리 같은 장갑도 불멸의 존재 앞에선 무력할 것이다! 이 영약은—"
"가짜야." 난 쉰 목소리로 말했다. "때깔은 거의 똑같지만." 그리고 훨씬 더 평범해 보이는 유리병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이게 진짜 울로아의 영약이지. 넌 방금 싸구려 장식용 병에 들어 있던 모래 말벌의 독을 마신 거야."
자눅이 빈 유리병을 들여다봤다. 그의 얼굴이 마치 상한 우유를 맛본 것처럼 일그러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차라리 상한 우유가 자눅의 장 건강에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나는 움찔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눅은 날 불필요할 정도로 세게 차긴 했지만, 적어도 얼굴은 건드리지 않았다.
"며칠 동안은 화장실에 붙어 있는 게 좋을 거야."
자눅이 화려한 유리병을 내던지고 허리를 숙이더니 신음하기 시작했다. 모래 말벌 독의 효과가 세고 빠르기는 하지. "이… 건방진 놈… 가만두지… 않겠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장갑을 들어 올려 벽에 마법 에너지를 날렸다. 석조로 된 벽이 갈라지더니 녹아내리다가 바깥쪽으로 폭발했다. 사방에 종이가 흩날렸다. 난 석종을 집어 든 후 부서진 벽 옆에 쭈그려 앉았다.
"언제든지 환영이야. 그리고, 그… 건물 개조 비용은 받지 않을게."
밖으로 뛰어내린 나는 벽을 잽싸게 타고 내려가 근처 옥상으로 건너갔다. 가능한 한 빨리 자눅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말이다. 물론 모래 말벌의 독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침까지 저곳은 꽤 시끄러울 거다.
나는 달리면서 석종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오치넌 종은 어떤 어두운 기운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했다. 탐험가 조합에 이런 걸 잔뜩 안겨 주면 곧바로 정식 인가를 받을 수 있을 거다. 내 업적을 기리며 파티도 열어 주지 않을까? 어쨌든 난 방금 혼자서 공포의 군주인지 뭔지가 부활하는 걸 막았으니까.
어쨌든, 중요한 건 바로 그 사실이다.

2.4. 펄스 건 스킨 세계관



2.4.1. 시간을 거슬러


[image]
''추격''
'에너지포가 두 번 발사되며 내 위에서 폭발해 불꽃이 폭포처럼 떨어졌어. 난 더 빨리 질주했지. 뒤에서는 시공경관의 발소리가 좁은 벽에 울려 퍼졌어. 빠르고 끈질기더군. 난 이를 악물었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저자는 나보다 훨씬 빠르거든...
따돌릴 방법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갈림길에서 나는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가, 곧바로 다른 길로 '순간 이동'했다. 그동안 지겹도록 쫓기며 연마한 속임수이자, 펄스 건 수트의 단거리 공간 왜곡 능력 덕분에 가능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속지 않았다.
순식간에 녀석은 앞을 가로막으며 쌍권총을 발사했다. 시간 왜곡 기술을 사용한 게 분명했다. 나는 양팔을 들어 올렸다. 무엇보다 얼굴을 다치면 안 됐으니까. 첫 번째 에너지포는 팔에 달린 캐논을 스쳤지만, 두 번째는 가슴을 강타했다. 요란하게 울리는 경보 소리를 들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캐논을 난사했지만, 녀석은 손쉽게 피하며 접근하더니 총구를 내 쪽으로 겨누었다. 난 손을 들어 보이며 머리카락을 불어 넘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간 여행을 하느라 머리를 깎을 시간이 없어, 내 황금색 머리카락이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수트가 무기 시스템을 작동하는 동안 시간을 끌려는 의도도 있었다.
시공경관은 바이저 너머로 쏘아보며 말했다. "'도망갈 수 없다. '이번'에는." 이런, 미래의 나와 이미 만났구나. 어쩐지 속임수가 안 통하더라.
(해야 할 일: 비장의 기술을 몇 가지 더 준비하기)
"네 시간은 끝났다, 이즈리얼. 너 때문에 이상 현상이 너무 많이 발생했어."
"장난해? 시공경관의 말장난 수준이 고작 그거야?"
녀석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시간 도피자들과 범죄자들을 잔뜩 체포하고 고속 승진하게 될 텐데, 고작 한다는 말이... '네 시간은 끝났다'?"
녀석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변하더니 가까이 몸을 숙였다.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건방진 자식, 아무리 수작 부려 봐야 이번에는—"
"비전 이동 충전 완료." 됐다! 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유머 감각이 형편없는 이 녀석의 뒤로 순간 이동했다.
아니, 적어도 그러려고 시도했다.
하얀빛이 번쩍이더니, 펄스 건 수트의 코어에서 불꽃이 튀었다. 녀석의 총이 적중한 바로 그 자리였다. 그리고 충격과 함께 나는 제자리에 떨어졌다.
이런.
'우지끈!'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별이 보였다. 얼굴은 다치면 안 되는데! 그때 시공경관의 쌍권총이 가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 났군.'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다.
난 적정량 이상의 에너지를 캐논에 담아 파동을 발사했다. 녀석은 이번에도 재빠르게 피했지만, 에너지 파동에 도로와 벽, 네온사인이 박살 나며 사방에 파편이 튀었다. 무고한 피해자가 없어야 할 텐데.
철없던 시절 이후로 이런 곤경은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싸워야 할 때와 도망칠 때를 정확히 구분할 줄 알았다.
"펄, 여기서 벗어나게 도와줘. 도약은 할 수 있지?" 전속력으로 달리다 보니 입 주변이 축축했다. 장갑으로 닦으니 피가 묻어 나왔다. 코가 부러진 게 분명했다.
"시간 도약 기능이 불안정합니다." 펄이 언제나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펄스 건 코어가 손상됐습니다."
"되긴 된다는 거지? 좋았어!" 캐논에 손을 집어넣고 돌리자 시간 도약 장치의 익숙한 떨림이 전해졌다. 반사적으로 목적지를 입력하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또 그 녀석한테 부탁하면 안 되는데... 우쭐대는 그 표정을 어떻게 견디지?'
그때 잔뜩 열이 받은 경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돌무더기를 헤치고 나오며 내 쪽으로 쌍권총을 난사했다.
이런, 지난번에 만났을 때 나한테 된통 당했나 보다. 아니, 나중에 날 만날 때인가? 나중에 만나게 됐을 때?
역시 시간 여행은 복잡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가만히 있다간 에너지포에 당할 게 뻔했다. 나는 펄에게 모든 걸 맡기고 차원문을 열었다. 그런데 불투명한 푸른색 장벽에 막혀 차원문 너머로 목적지가 보이지 않았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차원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디를 가든 죽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차원문 경계를 넘는 순간, 가슴의 코어가 진동하더니 전기가 방출됐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
''방패''
'저 녀석은 날 보지 못했어. 아직까진.
사실 은신은 내 특기가 아니야. 난 일단 총부터 쏘고 보는 성격이거든. 그런데 지금 내 펄스 건 코어 상태를 생각하면… 뭐, 상황이 바뀌면 전략도 바뀌어야 하는 법이지.'
녀석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옆에 방패를 세워 두고, 창은 바닥에 꽂은 채로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재미없는 놈.
집채만 한 각다귀가 존재하던 다른 차원에서 심히 불쾌한 경험을 한 뒤로, 펄은 손상된 코어에서 에너지를 뽑아 비교적 가까운 펄스 건 신호에 연결했다. 나로서는 다행이었지만, 코어를 빼앗길 운명에 놓인 그 경관은... 뭐, 재수가 없는 거지.
새 걸 훔치면, 아니 빌리면 되는데 고칠 이유가 없잖아?
얄궂게도 이 경관은 내가 잘 알았다. 판테온이라고, 멍청한 데다 예민하기까지 한 녀석이었다. 물론 비극적인 과거 때문이겠지만, 난 관심 없었다.
녀석은 무너진 건물 잔해 위에 서 있었다. 어떤 건물이었는지, 여기가 어떤 차원인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주변 환경은 엉망이었다. 건물들은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초목은 완전히 훼손돼 있었다. 기계와 화학적 재앙이 휩쓸고 간 흔적이 사방에 가득했다.
난 녀석의 뒤로 순간 이동해 캐논을 뒤통수에 살며시 갖다 대며 최대한 무섭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판테온은 얼어붙었다. 뒤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내 정체를 파악하려는 듯 녀석의 바이저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즈리얼." 판테온이 으르렁거렸다.
"판테온, 별일 없지?" 난 웃으며 말했다. 잠깐, 위협해야 할 쪽은 나인데?
"그동안 네놈을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 그런데 이렇게 몸소 행차하다니." 차분히 말했지만, 목소리에서는 긴장이 느껴졌다. 녀석은 화를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손만 까딱하면 조각 같은 얼굴이 날아가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판테온, 지난번에 다 했던 얘기잖아. 오늘은 이 시궁창에서 널 상대할 시간이 없거든? 그러니까—"
"네놈이 이렇게 만들었어." 너무도 단호하게 말하는 탓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닐걸?"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었다. 대꾸할 필요도 없었다. 조금 전 만났던 시공경관에게 내가 썼던 바로 그 수법이다.
하지만 난 참을 수 없었다.
"차원의 경계를 부수며 장난 좀 쳤을 뿐이야."
"너 같은 망나니들 때문에 이 지경이 됐다." 판테온은 황폐하게 변해 버린 주변 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녀석의 시선을 따라갔다. "무분별한 도약은 역설을 만들어내고, 역설은 시공간에 이상 현상을 일으켜. 그럼 시공간 침략자들이 쳐들어오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시공간 침략자들이 여기에?'
판테온은 몸을 일으켰다. 녀석의 머리를 겨눈 캐논이 윙윙거렸지만,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여긴 내 고향이었어. 그런데 그놈들이 이렇게 만들었지."
난 모험을 좋아했고 무모한 짓도 많이 했지만, 지킬 건 지켰다. 그런데 역설을 만들어냈다고? 뭐, 아니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판테온." 난 순간적으로 캐논을 내리며 말했다.
끔찍한 실수였다.
판테온이 달려들었다. 캐논을 발사하자 에너지 방어막이 전개된 방패로 막더니, 내 얼굴을 강타했다. 코뼈가 '또' 부러지는 느낌이 들면서 머리가 핑 돌았다. 녀석은 왼손을 뻗어 창을 불러들였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순간 이동해 공격을 피했다.
"죗값을 치르게 해 주지!"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게다가 지금 상태로는 판테온에게 상대가 안 됐다. 나는 수트의 마지막 힘을 짜내어 언덕 위로 순간 이동해 날아오는 창을 피했다.
시간 도약을 위해 캐논을 작동하자 수트가 요동쳤다. 펄은 손상된 코어에서 동력을 끌어내려고 했다. "시간 도약 기능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안전 프로토콜을—"
판테온의 창이 또다시 날아들었다. 몸을 숙여 피하자 뒤에 있던 석상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펄, 안전 프로토콜 중단해!" 펄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캐논을 발사했다. 차원문의 경계를 넘으면서 한숨 돌린 것도 잠시,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거친 에테르가 몸을 강타했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없는 시공간으로 추락했다.
---
''응수''
'난 급하게 숨을 쉬며 깨어났어.
온몸이 쑤셨지. 세탁기와 건조기에 돌려진 것처럼 말이야. 누군가 내 머리를 감싸 안고 있더군. 시야에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어. 엄하고 단호한 표정이 순간 걱정으로 누그러졌지.'
"다행이야. 도약 과정에서 죽은 줄 알았어."
"대체..."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코어의 전류가 왼쪽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고통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좋지 않은데." 여자가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 '그자'가 곧 도착할 거야. 시공간 침략자들도..."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루시안과 판테온은 먼저 출발했어. 케이틀린은 사격하기 좋은 자리를 찾으러 갔고."
고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여자가 말한 세 사람 중 둘은 아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미지의 시공간에서 의식을 차리자마자, 처음 보는 사람의 입을 통해 듣자니 별로 반갑지 않았다.
그녀도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뻗었다.
난 코어를 움켜쥐며 물었다. "지금이 '언제'지? 너는 누구고?"
여자를 살펴보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영락없는 시공경관의 차림새였다. 시공 검을 옆에 차고 코어가 부착된 날렵한 형태의 펄스 건 수트를 입고 있었다. 생김새로 봤을 때 미래형 모델 같았다. 한쪽 어깨에만 견갑이 달린 제복은 시공경관답게 촌스러웠다.
여자의 표정에서 당혹감이 느껴졌다. "우리 이즈리얼이 아니네."
"우리 이즈리얼이라니. 난 그냥 이즈리얼이야."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기이한 형태의 복도였다. 구조를 이루고 있는 하얀 금속은 크롬으로 장식돼 매끈했으며,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움직였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램프가 파란빛을 발산했다. 마치 펄스 건 수트 내부에 들어온 것 같았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말도 안 돼. 설마 여기는..."
"시공경관의 요새야. 네가 있어선 안 될 곳이지. 어느 시간대에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네가 돌아오기... 아니 '또 다른' 네가 돌아오기 전에." 여자는 눈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안 돌아오기만 해 봐. 가만히 안 둘 테니까."
"여기가 어딘지, 어느 시간대인지 나도 몰라." 난 캐논을 겨누며 최대한 위협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펄스 건 코어는 내가 가져가겠다."
그때 캐논에서 불꽃이 튀었다. "무기 시스템 출력, 현재 10%" 펄이 내 귀에 대고 말했다.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표정을 보아하니 이 여자도 들은 게 분명했다.
"과거에서 왔나 보네." 머리가 아파 오는지, 여자는 콧등을 어루만졌다. "네가 얼마나 비호감이었는지 잊고 있었어."
나는 귀엽게 얼굴을 찌푸렸다. "비호감이라니. 이렇게 매력적인데?"
여자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뒤로 물러섰지만, 그녀는 어느새 접근해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찔렀다.
"어젯밤에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 알겠네. 내가 세 번이나 네 목숨을 구할 거라고 했었지."
"이봐,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으니까—"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내 흉갑을 잡아당기더니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내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를 작동시키자 코어가 열리며 내부 구조가 드러났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뭐라고 말할 겨를도 주지 않고, 그녀는 장갑에서 진단 노드와 초소형 공구를 꺼내 작업을 시작했다.
"혹시... 고치려고?"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코어를 이렇게 망가뜨리다니. 루시안이랑 한판 붙었구나? 그럼 그렇지. 그래도 용케 살았네. 루시안은 표적을 놓치는 법이 없는데." 낮게 중얼거리는 것이 꼭 들으라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나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다. 시공간을 왜곡할 수 있는 에너지 코어가 노출된 상태에서 장난을 쳤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때 복도 반대편이 소란스럽더니, 익숙한 에너지포의 소리가 들렸다. 인상을 쓰며 소리가 난 쪽을 보려고 목을 길게 빼자 그녀는 수트를 잡아당겼다.
"가만히 있어."
푸른 불꽃이 튀고 연기가 솟아나더니, 그녀가 손을 풀었다. 코어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코어의 빛은 평소보다 어두웠지만, 더는 전기를 내뿜지 않았다.
"정말 고쳤네..."
"아마 마지막으로 '한 번'은 도약이 가능할 거야. 어서 가!"
그녀는 돌아서서 달려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던졌다.
"다음에 만나면 안 봐준다. 그러니 죽기 싫으면 그걸 나한테 보여 줘."
그것은 장미와 얇은 검이 새겨진 동전이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와 에너지포의 총성이 들렸다.
"이걸로 두 번이야."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 번을 채우는 일은 없길 바라."
"그렇게 말하면 더 불안하거든?" 내 외침에도 그녀는 들은 체도 않고 모퉁이를 돌아서 가 버렸다.
나는 코어를 두드렸다. 마지막 도약이라... 어쩔 수 없이 그 녀석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우쭐대는 표정을 보기 싫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또 그 녀석에게 빚을 지긴 싫었는데.
난 한숨을 쉬었다. "펄, 준비해." 캐논을 발사하자 또다시 차원문이 열렸다. "에코에게 가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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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톱니바퀴''
'자기랑 너무 닮아서 싫은 사람을 만나 본 적 있어? 그런 사람을 보면 자기 단점이 조오오금 더 잘 보이잖아.
하지만 에코는 그래서 싫어하는 게 아니야.
문제는 저 닭 볏 같은 머리라고.'
"다시는 보지 말자더니." 에코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랬지."
"넌 이렇게 말했지. '그동안 즐거웠지만, 앞으로 서로 안 엮이는 게 좋겠어.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라고." 녀석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기억나."
"그리고 4초 만에 다시 왔네." 에코는 손에 쥐고 있던 큐브를 내려놓더니 팔짱을 끼며 돌아섰다. 세상에. 저걸 손에 넣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던지.
"나한텐 4초가 아니라 4백 년 같았어." 징징대는 것 같아서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널 확실히 만날 수 있는 시간대와 장소가 지금, 여기였을 뿐이야."
"매몰차게 떠난 것 치고 구차하네." 건방진 미소를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쳤어?"
"별일 아니야." 녀석의 아지트에 있는 도구들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시공경관이랑 문제가 좀 생겨서..."
"늘 있는 일이잖아."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게..."
"손대지 마." 고립된 시간 영역 안의 화분을 만지려고 하자 에코가 말했다. 화분 안의 식물은 꽃에서 싹이 되었다가 다시 자라기를 반복했다. 이상 현상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시간을 왜곡하고 있었다. 에코는 이것을 '시공간 붕괴'로 불렀다. 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펄스 건 기술의 활용법이었다. 시공경관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야말로 천재의 솜씨였다.
나는 속이 뒤집혔다.
"새 펄스 건 코어가 필요해. 내 건 망가졌거든." 여자 시공경관에게 그랬듯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혹시 남는 거 있어?"
에코는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나를 비웃는 건 아니었다. 워낙 오래 함께 지낸 탓에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알았어. 그럼 고쳐줄 수 있을까?"
에코는 가까이 오더니 내 흉갑을 살폈다. "세상에, 엉망이 됐잖아? 직격으로 에너지포를 맞기라도 한 거야?"
"...어쩌면."
에코의 입이 떡 벌어졌다. "코어부터 보호했어야지!"
"난 얼굴이 더 중요해!"
"얼굴도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는데." 녀석이 쏘아붙이며 부러진 코를 만졌다. 나는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그럼 새로 만들 수 있어, 없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젓는 에코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왜 안 돼? 네 수트도 처음부터 직접 만들었잖아."
"그래. 대신 그때는 경관한테 슬쩍한 코어가 있었지. 너처럼 말이야."
큰일이었다. 에코도 못 하는 게 있다니.
더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망연자실한 채로 의자에 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마지막 도약을 여기 오느라 써 버렸어. 고치지 못하면... 여기서 살아야 해."
"그건 안 되지." 에코가 가면과 큐브를 집으며 말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내가 도와줄 테니 '내' 시간대에서 꺼져."
고개를 파묻은 채 그에게 물었다. "어쩌려고?"
"코어를 훔쳐야지."
"이미 시도해 봤어. 생각보다 어렵더라."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녀석이 뭔가를 만지더니 시공간 붕괴 장치를 등에 멨다. "멍청한 녀석을 찾아서 빼앗으면 돼."
에코가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들자 준비를 마친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그 난리를 겪고 피곤했을 텐데도, 건방진 미소를 띠며 날 도와주려고 하고 있었다. "가자, 이 멍청한 녀석아."
나는 웃으려다가 멈칫했다.
바로 그거야. 그 멍청한 녀석은 바로 나였어!
"넌 역시 최고야." 나는 에코를 끌어안았다.
"뭐야? 달라붙지 마!"
녀석이 몸부림쳤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온 지 얼마나 됐지?"
"1분 정도? 끔찍이도 긴 시간이었지."
내 얼굴을 밀치고 있는 녀석의 손목을 잡았다. "내가 도착하기 직전으로 시간을 돌려줘."
"대체 무슨—"
"마지막 시간 도약을 쓰기 전으로 가야 해. 그렇게만 해 주면 우리는 영원히 안녕이야."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자, 녀석이 손목을 잡았다.
"머리 만지지 말랬지?"
"에코,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지난번처럼, 응?"
녀석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지난번도 마지막이라며? 게다가 시공간 붕괴는 한 사람밖에 못 써."
"나도 알아. 언젠가는... 그동안의 은혜는 꼭 갚을게."
"아까는 영원히 안녕이라더니."
나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4초 뒤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지긋지긋한 녀석." 에코는 눈을 굴리며 시공간 붕괴 기기를 작동시켰다.
"고마워, 에코. 이 빚은 꼭 갚을게."
"이걸로 네 번째야." 녀석은 내 몸을 끌어당겼다. 기기의 줄을 잡아당기자 시간이 느려지더니 곧 멈췄다. 그리고 빠르게 뒤로 감기기 시작했다.
에코, 너는 역시 최고야.
-
''흐름''
비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거리에서는 희미하게 빛나는 등불이 어둠을 힘겹게 밀어내고 있었다. 주변은 내 부러진 코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온몸의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천둥이 치자 귀가 울렸다. 그야말로 몸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이 시간과 공간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때 한 가게의 이중문이 열리더니 지저분한 몰골의 소년이 뛰쳐나왔다. 어깨에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소년은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모퉁이를 돌아 뛰어갔다.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펄, 타이머 작동시켜." 그러자 바이저 화면의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1초, 2초.'
소년이 나왔던 문으로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무기는 익숙한 푸른빛을 뿜었고, 하얀색 갑옷은 빗속에서도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11초, 12초.'
나는 서둘러서 지름길로 향했다. 오랜만이었지만, 펄의 목소리만큼이나 익숙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만약 실패하면... 아니, 절대 실패하면 안 됐다.
잠시 후, 목적지인 한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어둡고 거대했다. 대피용 사다리를 내린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자 팔이 욱신거렸다. 이제 계단을 통해 11층을 올라가야 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낮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32초, 33초.'
옥상에 올라 건물 내부와 통하는 문 뒤에 숨었다. 몸을 낮추고 자리를 잡은 다음 타이머를 확인했다.
대략 30초 정도 남아 있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45초, 46초.'
문이 열리고 소년이 달려 나왔지만, 그 뒤를 바짝 쫓던 시공경관이 소년의 팔을 붙잡았다. 몸싸움이 벌어지고 소년이 메고 있던 가방이 벗겨져 내 쪽으로 날아왔다.
나는 재빨리 가방을 집어 물건을 챙겼다.
빗소리 사이로 에너지포의 소리가 들렸다.
'55초, 56초.'
총소리가 빠르게 두 번 이어지더니, 아래에서 사람이 땅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돌아봐선 안 됐는데… 결국 돌아봤어.
그 꼬마가 손을 떨면서 총을 들고 서 있더군. 녀석은 천천히 건물 끝으로 걸어가더니 후드를 젖히고 아래쪽에 있는 시신을 바라봤지...'
소년이 망토를 젖히자 덥수룩한 금발이 드러났다.
'바보 같긴. 정말 멍청한 녀석이야.'
제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뒤졌다. 멀리서 자정을 알리는 시계탑의 종소리가 들렸다.
나는 탄띠에 부착된 펄스 건 코어를 꺼내 캐논과 동기화했다. 내가 만들고 개조한 현재의 수트보다 훨씬 작고 단순했지만, 처음 손에 넣었을 때나 지금이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같았다.
바로 자유였다.
나는 펄스 건 코어를 가슴에 고정하고 타이머를 확인했다. 과거의 나는 난간에서 멀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아마 가방이 보이지 않아 당황하던 중, 대피용 사다리 근처에 매달린 가방을 발견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터였다.
가방에 든 옛 캐논에 수동으로 목적지를 입력한 다음 발사했다. 그러자 맑고 투명한 차원문이 눈앞에 열렸다. 나는 미소 지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물론 나 자신에게서 빌린 시간으로 이중 시간 여행을 한 상태였기에, 제때 코어를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다중 우주의 끔찍한 이상 현상을 막을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과거의 내가 이쪽으로 접근했다. 가방이 없음을 확인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 여행자에게 '시간'은 문제 되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길 바랐다.
--
''방패''
'저 녀석은 날 보지 못했어. 아직까진.
사실 은신은 내 특기가 아니야. 난 일단 총부터 쏘고 보는 성격이거든. 그런데 지금 내 펄스 건 코어 상태를 생각하면… 뭐, 상황이 바뀌면 전략도 바뀌어야 하는 법이지.'
녀석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옆에 방패를 세워 두고, 창은 바닥에 꽂은 채로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재미없는 놈.
집채만 한 각다귀가 존재하던 다른 차원에서 심히 불쾌한 경험을 한 뒤로, 펄은 손상된 코어에서 에너지를 뽑아 비교적 가까운 펄스 건 신호에 연결했다. 나로서는 다행이었지만, 코어를 빼앗길 운명에 놓인 그 경관은... 뭐, 재수가 없는 거지.
새 걸 훔치면, 아니 빌리면 되는데 고칠 이유가 없잖아?
얄궂게도 이 경관은 내가 잘 알았다. 판테온이라고, 멍청한 데다 예민하기까지 한 녀석이었다. 물론 비극적인 과거 때문이겠지만, 난 관심 없었다.
녀석은 무너진 건물 잔해 위에 서 있었다. 어떤 건물이었는지, 여기가 어떤 차원인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주변 환경은 엉망이었다. 건물들은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초목은 완전히 훼손돼 있었다. 기계와 화학적 재앙이 휩쓸고 간 흔적이 사방에 가득했다.
난 녀석의 뒤로 순간 이동해 캐논을 뒤통수에 살며시 갖다 대며 최대한 무섭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판테온은 얼어붙었다. 뒤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내 정체를 파악하려는 듯 녀석의 바이저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즈리얼." 판테온이 으르렁거렸다.
"판테온, 별일 없지?" 난 웃으며 말했다. 잠깐, 위협해야 할 쪽은 나인데?
"그동안 네놈을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 그런데 이렇게 몸소 행차하다니." 차분히 말했지만, 목소리에서는 긴장이 느껴졌다. 녀석은 화를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손만 까딱하면 조각 같은 얼굴이 날아가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판테온, 지난번에 다 했던 얘기잖아. 오늘은 이 시궁창에서 널 상대할 시간이 없거든? 그러니까—"
"네놈이 이렇게 만들었어." 너무도 단호하게 말하는 탓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닐걸?"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었다. 대꾸할 필요도 없었다. 조금 전 만났던 시공경관에게 내가 썼던 바로 그 수법이다.
하지만 난 참을 수 없었다.
"차원의 경계를 부수며 장난 좀 쳤을 뿐이야."
"너 같은 망나니들 때문에 이 지경이 됐다." 판테온은 황폐하게 변해 버린 주변 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녀석의 시선을 따라갔다. "무분별한 도약은 역설을 만들어내고, 역설은 시공간에 이상 현상을 일으켜. 그럼 시공간 침략자들이 쳐들어오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시공간 침략자들이 여기에?'
판테온은 몸을 일으켰다. 녀석의 머리를 겨눈 캐논이 윙윙거렸지만,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여긴 내 고향이었어. 그런데 그놈들이 이렇게 만들었지."
난 모험을 좋아했고 무모한 짓도 많이 했지만, 지킬 건 지켰다. 그런데 역설을 만들어냈다고? 뭐, 아니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판테온." 난 순간적으로 캐논을 내리며 말했다.
끔찍한 실수였다.
판테온이 달려들었다. 캐논을 발사하자 에너지 방어막이 전개된 방패로 막더니, 내 얼굴을 강타했다. 코뼈가 '또' 부러지는 느낌이 들면서 머리가 핑 돌았다. 녀석은 왼손을 뻗어 창을 불러들였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순간 이동해 공격을 피했다.
"죗값을 치르게 해 주지!"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게다가 지금 상태로는 판테온에게 상대가 안 됐다. 나는 수트의 마지막 힘을 짜내어 언덕 위로 순간 이동해 날아오는 창을 피했다.
시간 도약을 위해 캐논을 작동하자 수트가 요동쳤다. 펄은 손상된 코어에서 동력을 끌어내려고 했다. "시간 도약 기능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안전 프로토콜을—"
판테온의 창이 또다시 날아들었다. 몸을 숙여 피하자 뒤에 있던 석상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펄, 안전 프로토콜 중단해!" 펄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캐논을 발사했다. 차원문의 경계를 넘으면서 한숨 돌린 것도 잠시,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거친 에테르가 몸을 강타했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없는 시공간으로 추락했다.
-
''응수''
'난 급하게 숨을 쉬며 깨어났어.
온몸이 쑤셨지. 세탁기와 건조기에 돌려진 것처럼 말이야.
누군가 내 머리를 감싸 안고 있더군. 시야에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어. 엄하고 단호한 표정이 순간 걱정으로 누그러졌지.'
"다행이야. 도약 과정에서 죽은 줄 알았어."
"대체..."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코어의 전류가 왼쪽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고통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좋지 않은데." 여자가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 '그자'가 곧 도착할 거야. 시공간 침략자들도..."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루시안과 판테온은 먼저 출발했어. 케이틀린은 사격하기 좋은 자리를 찾으러 갔고."
고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여자가 말한 세 사람 중 둘은 아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미지의 시공간에서 의식을 차리자마자, 처음 보는 사람의 입을 통해 듣자니 별로 반갑지 않았다.
그녀도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뻗었다.
난 코어를 움켜쥐며 물었다. "지금이 '언제'지? 너는 누구고?"
여자를 살펴보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영락없는 시공경관의 차림새였다. 시공 검을 옆에 차고 코어가 부착된 날렵한 형태의 펄스 건 수트를 입고 있었다. 생김새로 봤을 때 미래형 모델 같았다. 한쪽 어깨에만 견갑이 달린 제복은 시공경관답게 촌스러웠다.
여자의 표정에서 당혹감이 느껴졌다. "우리 이즈리얼이 아니네."
"우리 이즈리얼이라니. 난 그냥 이즈리얼이야."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기이한 형태의 복도였다. 구조를 이루고 있는 하얀 금속은 크롬으로 장식돼 매끈했으며,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움직였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램프가 파란빛을 발산했다. 마치 펄스 건 수트 내부에 들어온 것 같았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말도 안 돼. 설마 여기는..."
"시공경관의 요새야. 네가 있어선 안 될 곳이지. 어느 시간대에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네가 돌아오기... 아니 '또 다른' 네가 돌아오기 전에." 여자는 눈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안 돌아오기만 해 봐. 가만히 안 둘 테니까."
"여기가 어딘지, 어느 시간대인지 나도 몰라." 난 캐논을 겨누며 최대한 위협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펄스 건 코어는 내가 가져가겠다."
그때 캐논에서 불꽃이 튀었다. "무기 시스템 출력, 현재 10%" 펄이 내 귀에 대고 말했다.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표정을 보아하니 이 여자도 들은 게 분명했다.
"과거에서 왔나 보네." 머리가 아파 오는지, 여자는 콧등을 어루만졌다. "네가 얼마나 비호감이었는지 잊고 있었어."
나는 귀엽게 얼굴을 찌푸렸다. "비호감이라니. 이렇게 매력적인데?"
여자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뒤로 물러섰지만, 그녀는 어느새 접근해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찔렀다.
"어젯밤에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 알겠네. 내가 세 번이나 네 목숨을 구할 거라고 했었지."
"이봐,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으니까—"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내 흉갑을 잡아당기더니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내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를 작동시키자 코어가 열리며 내부 구조가 드러났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뭐라고 말할 겨를도 주지 않고, 그녀는 장갑에서 진단 노드와 초소형 공구를 꺼내 작업을 시작했다.
"혹시... 고치려고?"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코어를 이렇게 망가뜨리다니. 루시안이랑 한판 붙었구나? 그럼 그렇지. 그래도 용케 살았네. 루시안은 표적을 놓치는 법이 없는데." 낮게 중얼거리는 것이 꼭 들으라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나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다. 시공간을 왜곡할 수 있는 에너지 코어가 노출된 상태에서 장난을 쳤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때 복도 반대편이 소란스럽더니, 익숙한 에너지포의 소리가 들렸다. 인상을 쓰며 소리가 난 쪽을 보려고 목을 길게 빼자 그녀는 수트를 잡아당겼다.
"가만히 있어."
푸른 불꽃이 튀고 연기가 솟아나더니, 그녀가 손을 풀었다. 코어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코어의 빛은 평소보다 어두웠지만, 더는 전기를 내뿜지 않았다.
"정말 고쳤네..."
"아마 마지막으로 '한 번'은 도약이 가능할 거야. 어서 가!"
그녀는 돌아서서 달려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던졌다.
"다음에 만나면 안 봐준다. 그러니 죽기 싫으면 그걸 나한테 보여 줘."
그것은 장미와 얇은 검이 새겨진 동전이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와 에너지포의 총성이 들렸다.
"이걸로 두 번이야."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 번을 채우는 일은 없길 바라."
"그렇게 말하면 더 불안하거든?" 내 외침에도 그녀는 들은 체도 않고 모퉁이를 돌아서 가 버렸다.
나는 코어를 두드렸다. 마지막 도약이라... 어쩔 수 없이 그 녀석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우쭐대는 표정을 보기 싫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또 그 녀석에게 빚을 지긴 싫었는데.
난 한숨을 쉬었다. "펄, 준비해." 캐논을 발사하자 또다시 차원문이 열렸다. "에코에게 가야겠어."
-
''시간의 톱니바퀴''
'자기랑 너무 닮아서 싫은 사람을 만나 본 적 있어? 그런 사람을 보면 자기 단점이 조오오금 더 잘 보이잖아.
하지만 에코는 그래서 싫어하는 게 아니야.
문제는 저 닭 볏 같은 머리라고.'
"다시는 보지 말자더니." 에코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랬지."
"넌 이렇게 말했지. '그동안 즐거웠지만, 앞으로 서로 안 엮이는 게 좋겠어.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라고." 녀석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기억나."
"그리고 4초 만에 다시 왔네." 에코는 손에 쥐고 있던 큐브를 내려놓더니 팔짱을 끼며 돌아섰다. 세상에. 저걸 손에 넣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던지.
"나한텐 4초가 아니라 4백 년 같았어." 징징대는 것 같아서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널 확실히 만날 수 있는 시간대와 장소가 지금, 여기였을 뿐이야."
"매몰차게 떠난 것 치고 구차하네." 건방진 미소를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쳤어?"
"별일 아니야." 녀석의 아지트에 있는 도구들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시공경관이랑 문제가 좀 생겨서..."
"늘 있는 일이잖아."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게..."
"손대지 마." 고립된 시간 영역 안의 화분을 만지려고 하자 에코가 말했다. 화분 안의 식물은 꽃에서 싹이 되었다가 다시 자라기를 반복했다. 이상 현상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시간을 왜곡하고 있었다. 에코는 이것을 '시공간 붕괴'로 불렀다. 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펄스 건 기술의 활용법이었다. 시공경관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야말로 천재의 솜씨였다.
나는 속이 뒤집혔다.
"새 펄스 건 코어가 필요해. 내 건 망가졌거든." 여자 시공경관에게 그랬듯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혹시 남는 거 있어?"
에코는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나를 비웃는 건 아니었다. 워낙 오래 함께 지낸 탓에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알았어. 그럼 고쳐줄 수 있을까?"
에코는 가까이 오더니 내 흉갑을 살폈다. "세상에, 엉망이 됐잖아? 직격으로 에너지포를 맞기라도 한 거야?"
"...어쩌면."
에코의 입이 떡 벌어졌다. "코어부터 보호했어야지!"
"난 얼굴이 더 중요해!"
"얼굴도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는데." 녀석이 쏘아붙이며 부러진 코를 만졌다. 나는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그럼 새로 만들 수 있어, 없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젓는 에코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왜 안 돼? 네 수트도 처음부터 직접 만들었잖아."
"그래. 대신 그때는 경관한테 슬쩍한 코어가 있었지. 너처럼 말이야."
큰일이었다. 에코도 못 하는 게 있다니.
더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망연자실한 채로 의자에 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마지막 도약을 여기 오느라 써 버렸어. 고치지 못하면... 여기서 살아야 해."
"그건 안 되지." 에코가 가면과 큐브를 집으며 말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내가 도와줄 테니 '내' 시간대에서 꺼져."
고개를 파묻은 채 그에게 물었다. "어쩌려고?"
"코어를 훔쳐야지."
"이미 시도해 봤어. 생각보다 어렵더라."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녀석이 뭔가를 만지더니 시공간 붕괴 장치를 등에 멨다. "멍청한 녀석을 찾아서 빼앗으면 돼."
에코가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들자 준비를 마친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그 난리를 겪고 피곤했을 텐데도, 건방진 미소를 띠며 날 도와주려고 하고 있었다. "가자, 이 멍청한 녀석아."
나는 웃으려다가 멈칫했다.
바로 그거야. 그 멍청한 녀석은 바로 나였어!
"넌 역시 최고야." 나는 에코를 끌어안았다.
"뭐야? 달라붙지 마!"
녀석이 몸부림쳤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온 지 얼마나 됐지?"
"1분 정도? 끔찍이도 긴 시간이었지."
내 얼굴을 밀치고 있는 녀석의 손목을 잡았다. "내가 도착하기 직전으로 시간을 돌려줘."
"대체 무슨—"
"마지막 시간 도약을 쓰기 전으로 가야 해. 그렇게만 해 주면 우리는 영원히 안녕이야."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자, 녀석이 손목을 잡았다.
"머리 만지지 말랬지?"
"에코,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지난번처럼, 응?"
녀석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지난번도 마지막이라며? 게다가 시공간 붕괴는 한 사람밖에 못 써."
"나도 알아. 언젠가는... 그동안의 은혜는 꼭 갚을게."
"아까는 영원히 안녕이라더니."
나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4초 뒤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지긋지긋한 녀석." 에코는 눈을 굴리며 시공간 붕괴 기기를 작동시켰다.
"고마워, 에코. 이 빚은 꼭 갚을게."
"이걸로 네 번째야." 녀석은 내 몸을 끌어당겼다. 기기의 줄을 잡아당기자 시간이 느려지더니 곧 멈췄다. 그리고 빠르게 뒤로 감기기 시작했다.
에코, 너는 역시 최고야.

3. 구 설정



3.1. 구 배경 1


사람들은 무엇이 되었든 재능을 타고 난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동시에 재능을 썩히거나 이상한 쪽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제 일인 것처럼 안타까워하곤 한다. 하지만 남들이 뭐라든 무슨 상관인가?
이즈리얼은 마법에 대한 재능을 타고났다. 이즈리얼의 부모는 그를 마법사나 마법기계 공학사로 키우고 싶었지만 이즈리얼의 꿈은 그런 시시한 게 아니었다. 그는 공부가 아니라 방랑과 모험을 사랑했다. 이 천재 소년은 8살 때 이미 필트오버의 지하 동굴과 터널을 모두 돌아다녔고 완벽한 지도를 그려냈다. 그 지도가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에 필트오버 정부는 직접 지도를 구매하고 이즈리얼을 필트오버의 대탐험가로 임명하여 월급까지 줬다. 이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이즈리얼은 비전 마법의 길을 포기하고 고고학으로 전향했다. 그 후 수많은 이즈리얼의 모험담이 소설로 각색되어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즈리얼은 최근의 모험에서 내면에 잠들어 있던 마력을 대면하게 되었다. 슈리마 사막의 피라미드를 탐험하던 중 엄청난 위력을 지닌 부적을 발견한 것이다. 이즈리얼보다 최소 두 배는 덩치가 커야 맞을 법한 크기는 둘째 치고라도, 근처에 마법 에너지원이 있다면 사용하는 사람이 마법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게 해 주는 대단한 물건이었다. 덕분에 이즈리얼은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마법에 대한 천부적인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방랑벽이 있는 탐험가에는 실로 커다란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왠지는 모르겠지만 부적이 소환 마법에 반응한다는 점이었다. 이즈리얼은 갑자기 '별 상관도 없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 '리그 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어떤 소환사'에게 아무 예고도 없이 소환되어 리그의 챔피언 노릇을 해야 하곤 했다. 하지만 정의의 전장에 가끔 소환되는 정도는 자신이 얻은 것에 비해 아주 미미한 대가라고 여긴다.
'''"퀴퀴한 고서들로 가득 찬 곳을 탐험하느라 바쁜 이 몸에겐, 곰팡내 나는 고서는 연구할 시간이 별로 없다구." 이것이 이즈리얼의 신조다.'''[1]

3.2. 구 배경 2


자신감 넘치는 탐험가 이즈리얼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빠져나갈 길을 찾아내는 놀라운 능력을 타고났다. 그는 매일 흥미진진한 사건을 기대하며 룬테라를 탐험한다. 고대 슈리마 제국의 폐허에서 찾아낸 마법의 장갑을 끼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장소를 찾아 나서는 그는 전 세계의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들을 직접 풀어내겠다는 각오로 매일같이 목숨을 건 모험을 한다.
명망 있는 무역상인 이즈리얼의 부모는 인적이 드문 위험한 곳을 여행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필트오버에 남겨진 이즈리얼은 삼촌 리메르 교수의 손에 맡겨졌다. 부주의하고 제멋대로 구는 이즈리얼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싶지 않았던 리메르 교수는 엄격한 가정교사들을 고용해 아이에게 마법기계 공학, 마법공학 역학, 고고학 역사 등의 과목을 가르치게 했다. 이해력이 뛰어난 이즈리얼은 스펀지처럼 지식을 흡수했고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아무 준비도 없이 손쉽게 시험에 통과해 삼촌의 화를 돋웠다.
이즈리얼은 탐험에 대한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는 특히 권위 있는 어른들 몰래 대학 캠퍼스 내를 활보하며 숨겨진 장소를 발견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즈리얼은 공간인지능력이 출중해 캠퍼스 아래 미로처럼 얽혀있는 터널에서도 손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고 건물의 옥상도 마음껏 넘어다녔다. 그렇게 종횡무진 캠퍼스를 누비다 보면 낯설고 신비한 보물이 가득한 비밀 창고를 발견하기도 했다. 교수실 문을 몰래 따고 들어가 물건들을 마음대로 늘어놓는 것도 이즈리얼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이즈리얼의 부모는 머나먼 곳에서 발견한 귀한 물건들을 팔기 위해 정기적으로 필트오버를 방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더 희귀하고 더 강력한 마력을 지닌 보물을 찾고 싶었던 이즈리얼의 아버지는 마법사 네죽의 사라진 무덤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했다. 네죽은 머리에 구불구불한 뿔이 달려 있다고 알려진 고대 슈리마 제국의 마법사였다. 소문의 의하면 그의 무덤에는 마법 보석이 함께 묻혀 있는데, 그 보석을 몸에 지니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곳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즈리얼의 아버지는 그 마법 보석을 손에 넣기만 하면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매일 저녁 필트오버에 들러 저녁을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이즈리얼은 부모님과 함께 모험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부모님은 탐험하며 겪었던 수많은 위험을 예로 들며 이즈리얼을 타일렀다. 이즈리얼이 자라면서 부모님이 필트오버에 오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그러다 마침내 그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리메르 교수는 이즈리얼의 부모가 슈리마 제국의 폐허에 너무 깊이 발을 들여놓았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이즈리얼에게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것 같다고 말해주었으나 이즈리얼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부모님은 분명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며 자신을 만나기 위해 반드시 돌아올 거라 믿었다. 이즈리얼은 네죽의 마법 보석을 지니고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아버지 어머니를 기다리며 아주 긴 저녁 식사를 하곤 했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부모님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적어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아야 했다.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단서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찾았던 장소였다. 마법사 네죽의 사라진 무덤. 아버지는 그곳을 탐험할 거라고 했다.
지난 수년간 이즈리얼은 필트오버 전체를 놀이터처럼 쑤시고 돌아다녔다. 이즈리얼이 들어갈 수 없는 작업실이나 실험실은 없었다. 이즈리얼은 몇 주에 걸쳐 대학 캠퍼스 내에 있는 여러 가지 물건을 수집했다. 그중에는 별자리 지도, 룬 문자가 새겨진 부적의 번역본, 고대 슈리마 제국의 장례 절차 설명서, 보안경 등이 있었다. 이즈리얼은 삼촌에게 떠난다는 메모를 남기고 나시라미로 향하는 배에 몰래 숨어 들어갔다. 나시라미는 슈리마 제국의 항구도시였다.
배가 출발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검표를 하던 승무원은 몰래 배에 올라탄 이즈리얼을 잡아냈다. 선장은 그를 배 밖으로 던져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즈리얼은 나무판자 위에 올라가 균형을 잡고 서서 어차피 배에서 뛰어내리던 참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 배에 계속 타고 있는 것보다는 바다에 빠지는 편이 목숨을 건질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이즈리얼은 별자리 지도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이 배는 지금 바다 표면까지 높이 솟아오른 해저 바위를 향해 가고 있으며 이대로 가다가는 다른 배들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즈리얼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술에 잔뜩 취한 항해사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이즈리얼에게 일등 항해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배는 무사히 나시라미 부두에 도착했다. 이제 네죽의 사라진 무덤을 찾아 나설 시간이었다. 이즈리얼은 먼저 수 세기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폐허와 당장에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은 사원을 몇 달에 걸쳐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는 미지의 세계에서만 누릴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만끽했다. 고대 지하 무덤들 사이에 길을 내기도 했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비밀의 방에서 겨우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부모님이 앞서 걸어가신 길을 뒤따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부모님이 사라진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 세기 전 사망한 황제의 무덤이 모셔져 있는 지하실에는 모자이크 타일이 깔려 있었다. 바닥이 얼마나 매끄럽던지 최근에 타일 작업을 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타일 바닥의 한 귀퉁이를 열심히 쪼았더니 타일 아래 깔려있던 초상화의 귀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오래전에 색이 바랜듯한 그림이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타일을 하나씩 들어 올리자, 머리에 구불구불한 뿔이 튀어나온 남자를 그린 거대한 프레스코화가 나타났다. 이즈리얼이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마법사 네죽의 모습이었다. 쫙 벌어진 네죽의 입 아래로 모래가 거세게 휘돌고 있는 지하 구멍이 뚫려있었다. 이즈리얼은 밧줄을 잡고 지하로 뛰어내렸다. 공기가 부족해 숨이 가빠졌고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 무덤 주위를 손으로 더듬어야 했다. 이내 어둠 속에서 무거운 청동 장갑을 낀 이즈리얼의 모습이 드러났다. 장갑의 중앙에 새겨진 부적이 영롱한 푸른색을 발하며 주위를 밝혀주었다.
이즈리얼은 이제 다시 위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바로 그때, 그를 둘러싸고 있던 벽이 어마어마한 진동을 일으키며 안쪽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천하의 이즈리얼이라 해도 사방이 막힌 상태에서 탈출구를 찾을 방도는 없었다. 이즈리얼은 머리 위에 있는 동굴 입구에 자신이 서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때였다. 장갑에 마력이 조금씩 차오르더니 부적이 환한 빛을 발산했다. 그는 어느새 그가 상상했던 바로 그 장소로 이동해 있었다.
보석 안에 강력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이 마법의 장갑은 이즈리얼이 탈출할 때마다 톡톡히 제 역할을 했다. 사실 처음에는 장갑이 마법 광선을 뿜어낼 수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돌다리를 받치고 있는 주춧돌을 실수로 파괴하고 나서야 마법 광선의 존재를 알았다. 장갑 덕분에 이즈리얼은 여러 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초월체였던 고대의 전사가 이즈리얼로 부활했다고 믿는 유목민들이 그를 놔주지 않을 때도, 잔혹한 사막 폭풍을 맞아 겹겹이 쌓인 모래층 아래에 파묻혔을 때도, 제르사이 종족 무리를 날려버릴 때도 장갑이 큰 도움을 주었다.
마법의 장갑에도 한계는 있었다. 마력을 충전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과 짧은 거리에서만 순간이동 기술을 쓸 수 있는 점은 아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즈리얼을 슬프게 한 것은 부모님이 살아 있다면 그가 마법의 장갑을 발견하는 일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부모님이 살아서 먼저 이 장갑을 발견했다면 장갑이 무덤 안에 남아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즈리얼은 그가 발견한 마법의 장갑과 한 쌍인 또 다른 장갑이 이미 수 년 전에 네죽의 무덤에서 발굴되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이즈리얼은 세계를 탐험하며 미지의 세계가 선사하는 아슬아슬한 스릴을 즐겼던 부모님의 길을 따라가겠다고 맹세했다.
마법의 장갑을 끼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슬아슬한 탈출을 시도하는 이즈리얼은 위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즐기는 편이다. 룬테라에서도 가장 흥미진진하고 위험천만한 곳만 찾아다니는 대담한 탐험가인 그는 모든 것을 운에 맡긴다. 행운의 여신은 지금껏 그의 편에서 그의 모험을 응원해 주었다. 모험이야말로 이즈리얼에게 주어진 진정한 소명이었다.

[1] 오역된 문장이다. 원문은 "There's little time to study musty tomes when you're busy crawling around where the musty tomes originally came from."으로, 뜻은 "난 도서관에 있는 퀴퀴한 고서나 탐구할 시간이 없어. 그 고서들이 원래 있던 곳들을 탐험하느라 바쁘거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