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 전투

 



'''이치 전투'''
梨峙戰鬪

'''시기'''
1592년 음력 7월 8일(양력 8월 14일)
혹은 음력 8월 중하순[1]
'''장소'''

조선 전라도 진산군 외곽 이치
'''원인'''
일본군의 전라도 진공
'''교전국'''
조선 [image]
일본 [image]
'''지휘관'''
대장 '''권율'''
선봉장 황진
후군장 황박†
기병장 권승경
편비장 공시억
편비장 위대기
<^|1>'''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병력'''
1,500 명
병력 규모 불명[2]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조선군의 승리
'''영향'''
일본의 후방 전선 안정화 실패 및 보급난 심화.
1. 배경
2. 전개 및 결과
3. 논란
4. 권율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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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image]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 전적지 위치도[3]
이 전투를 알기 위해선 우선 왜란 초기 전라도 군의 동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월 27일 경상감사 김수의 구원 요청을 받은 전라방어사 곽영은 조방장 이지시와 5,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경상도 구원에 나섰다. 4월 30일 곽영은 경상 우방어사 조경, 군관 정기룡과 함께 금천역에서 교전을 벌여 수급 30여급을 얻고 5월 4일 전라도로 귀환했다. 이와 별도로 조방장 이유의는 도순변사신립에게 합류하기 위해 2,000명 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북상했으나 충청도 연산에서 전라감사 이광의 명령에 따라 후퇴한다.[4]
신립의 패전 소식을 접한 조정은 평양으로 몽진하는 한편 보덕 심대를 이광에게 파견해 근왕병을 모으게 했다. 이보다 앞서 이광은 이미 전라도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근왕병 모집을 독려하는 한편 전 부사 고경명에게 근왕을 권하는 격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도내에 유서를 돌리고 경상도에도 격문을 보냈다. 그리고 5월 1일 근왕병을 이끌고 북상했다. 그러나 충청도 공주에서 선조의 파천 소식을 접하자 이광은 근왕병을 해산시키는데, 장성현감 백수종, 고선현감 신경희, 광주 목사 권율, 전 첨사 백광언이 싸울 것을 건의했으나 듣지 않았다. 모여든 이들이 실망하고 인심은 몹시 흉흉하여 불안해지니 사람들은 앞으로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가뜩이나 4월 30일 선조가 한양을 떠나 몽진길에 오르는 파천으로 민심이 급격히 이반된 상태였다. 왕조 국가에서 파천은 불가피하다지만 유교적 절대 왕정인 조선에서 임금의 파천은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다.
경상감사 김수가 그랬듯 개전 이전 전쟁 준비로 도민들을 꽤나 들볶았던 전라감사 이광은 근왕을 포기한 일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때마침 근왕을 독려하는 조정의 교서가 도착하자 재차 근왕병을 모집해 나섰다. 전라도만이 온전히 보전되고 있었기 때문에 근왕병 징집도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각 고을에 할당된 군사들 숫자를 채우기 어려워 무리하게 징집하자 반발이 일어났다. 게다가 정여립 사건으로 지역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유림들이 대거 사라진 영향도 컸다. 순천과 옥광의 군사들이 형대원과 조인을 맹주로 추대하고 노령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순창으로 들어가 관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저질렀다. 순창군수 김예국은 간신히 빠져나왔다. 근왕을 위해 병력을 이끌고 오는 담양부사 이경린의 군사도 난군(亂軍)을 만나 담양의 군사들도 흩어졌다. 남원, 구례, 순천의 군사들도 삼례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지하는 관리들을 찌르고 달아났다. 이광이 고부군수 왕경조에게 퇴각하는 군사들을 참하라고 하자, 왕경조는 군사들에게 잡혔다가 전주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1592년 12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팔도의 일을 전라도가 다 맡아서 하느라 피폐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면서, 자신의 마음은 이미 죽고 형체만 남았다며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하였다.
김예국이 조인을 잡아 죽임으로써 사태는 겨우 진정되었고, 이광은 근왕에 나섰다. 이번에는 충청감사 윤석각과 경상감사 김수까지 합친 삼도근왕군이었다. 당시 경상도는 함락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명목상으로만 모집해서 경상도 80명, 충청도 8천 명, 전라도 4만 명의 삼도근왕병이였다. 5월 26일 전라도 근왕군은 타도 근왕군들과 합류하여 삼도근왕군이 완성됐다. 숫자는 충분했으나 실전 경험이나 훈련도는 떨어지는 근왕군은 6월 5일 용인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왜군과 교전하게 된다. 아침밥을 짓던 도중 기병 수십기의 기습을 당하자 제대로 반격한번 못해보고 전장 공포에 휩쓸려 전면 패주한다. 이 사건이 용인전투이다. 이광은 6월 15일 전라도로 귀환했는데 이와 거의 동시에 전라병사 최원이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김천일의 의병 2천 명과 함께 북상했다. 수 만의 병력을 동원한 근왕에 2번이나 실패해 군사들이 대거 흩어진 상황에서 2만 2천을 더 차출해 보낸 탓에 당장 전라도 방어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크게 줄었다.
한양을 점령했으나 선조를 잡는데 실패한 왜군은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해 전라도 지역을 장악할 필요성을 느꼈고 5월부터 전라도로 칼끝을 돌렸다. 전라도 공격을 맡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우선 휘하의 승장 안고쿠지 에케이에게 전라감사를 자칭케하며 경상 우도를 통해 전라도로 진격할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안고쿠지 군은 5월 말에서 6월 초사이 벌어진 곽재우 의병대와의 교전에서 패해 물러났다. 고바야카와는 공격 방향을 바꿔 무주와 금산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려 했다. 왜군의 공격을 감지한 이광은 곽영을 금산에, 이계정을 육십령에, 장의현을 부항에, 김종례를 동을거지(冬乙巨旨)에 배치해 수비를 강화했다. 6월 17일 무주 경계에 출현한 고바야카와 군은 6월 22일 금산에 도달해 조선군과 교전을 벌였다. 금산 군수 권종은 전사했고 곽영과 김종례는 고산현으로 퇴각해, 6월 23일 금산성이 왜군의 손에 들어갔다.
웅치에는 김제 군수 정담, 동복 현감 황진, 나주 판관 이복남, 전 전주 만호 황박이 방어선을 구축했고 금산 함락 소식을 듣고 남하한 고경명 의병대가 연산에 주둔했다. 곽영군은 고경명의 의병대와 합류해 금산 공격을 위해 나섰고 황진은 남쪽 장수 방면을 지키던 조방장 이유의가 달아나자 남원 방어를 위해 내려갔다 7월 5일경 다시 웅치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7월 7일, 왜군이 웅치로 밀어닥쳤다. 하루 종일 벌어진 교전 끝에 정담이 전사하고 이복남은 남은 군사를 수습해 전주 동쪽 10리에 위치한 안덕원에 방어선을 쳤다. 7월8일, 때마침 황진의 군사가 합류해 교전을 벌였고 간신히 왜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5] 전주 공략에 실패한 왜군은 진안에 머무르나 7월 17일 금산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 고경명 의병대가 금산의 왜군을 공격했으나 7월 10일 참패했고 고경명, 유팽로 등은 전사했다. 이것이 1차 금산 전투이다. 무려 6,700명[6]의 의병 부대와 이들과 함께한 전라방어사 곽영의 관군이 와해되면서 전라도 군민은 한층 부족해진 병력으로 왜군의 2차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아래 알려진 시기 문제까지 고려하면, 조헌이 영규의 병력과 합쳐서 약 1300-1500여 명의 병력을 말아먹은 제2차 금산전투도 이치 전투 이전 시기에 포함된다. 이 2번의 전투로 합쳐서 약 8,000여 병력 중 상당수가 날아가는데, 이에 따라 이치전투에 참전한 조선군 총합이 2,000이 채 안된다.

2. 전개 및 결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웅치에서의 전투 이후 군사를 다시 이끌고 이치를 공격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이끌고 높은 산의 고개를 점거하여 크게 전투를 벌였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면서 분전하였으며, 중간에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선군의 사기가 저하되는 불상사가 있었으나 권율의 독려로 결국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3. 논란


일반적으로 이치 전투는 7월 8일 웅치 전투와 동시에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선조수정실록과 임진전란사의 영향이다. 선조수정실록은 그달에 있었던 일들을 긁어 모아 1일 짜로 적어두었는데 거기에 이 두 전투가 나란히 실려있고 전산화가 되어있지 않아 사료 분석할 때 무작정 책 펴놓고 읽어가야 했던 60년대 저작인 임진전란사가 이 전투가 동시에 발발한 것으로 서술하면서 그런 인식이 굳어졌다.
금산과 이치 사이의 진산이 아닌 연산에 고경명 의병대가 7월 2일부터 주둔하고 있었으나 진산과 연산은 25키로 정도 떨어져 있고 대둔산의 험한 줄기로 가로 막혀 있어 이치의 전투에 고경명군의 참전은 어려웠을 것이다. 애초에 고경명은 전라도 방위가 아니라 근왕을 외치면서 한양공격을 위해서 북상을 시도중이었다가[7] 다시 금산으로 목적지를 바꾼 것이었다.
이치 전투의 시기에 대해선 여러 사서가 서로 다른 시기를 전투 개시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어 콕 집어 말하기가 쉽지 않다. 확실한건 웅치 전투랑 동시에 벌어지진 않았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선 7월 10일조에 7월 20일 왜군이 진산으로 내려와 관사를 불태우고 금산으로 돌아갔다고 적고 뒤에 전라도 관군의 병력 집결 현황 등 다른 내용을 적은 뒤에 다음 기사를 실었다.

금산의 적 수천여 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의 복병장(伏兵將)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너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는데 30여 명을 베었다.

이치 전투를 기록한 내용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기사를 근거로 이치 전투 개시 시점을 7월 20일로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또한 난중잡록 기사가 전해들은 내용을 후에 모아 적은 것임을 감안해 황진행장에서 황진이 이치에 배치되었다고 기록된 7월 10일부터 7월 20일 사이였을 것 이라는 연구자도 있다.(곽호제, 2000년, 壬辰倭亂期 倭峙大捷의 意義와 再檢討, 충남사학)[8] 하지만 이는 난중잡록에서 왜군이 진산 관아를 불살랐다는 기사와 이치 전투를 연달아 벌어진 사건으로 본 것이다. 난중잡록 기사는 조경남이 체험한 것 이외의 부분은 전해듣거나 본 것을 한데 몰아 적은 게 많기에 진산 방화와 이치 전투도 연이은 사건이라 단언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선조수정실록에선 웅치 전투와 함께 7월 1일 기사에 실었으니 자세한 일시는 불명이나 어쨌든 7월에 일어났다고 적은 것이다. 웅치 전투에 참전했고 이치 전투에서 전사한 황박의 후손이 조상의 행적을 정리해 펴낸 죽봉황공유적(竹峯黃公遺蹟)에선 이치 전투와 황박이 전사한 시점을 '''8월 28일'''로 기록했다.[9] 권율의 행장과 행적을 담은 만취당실기(晩翠堂實記)에 실린 이치주첩서(梨峙奏捷書)에는 고경명과 조헌이 이미 순절했다 적어 2차 금산 전투가 벌어진 8월 18일 이후의 일로 기록했다. 조익의 포저집(浦渚集)에 실린 황진행장에선 7월 10일에 이치에 도착해 공시억, 위대기, 황박과 며칠간 지키다 왜군이 공격해 오자 교전을 벌였다고 적었다.
오희문이 전란을 피해 피난하는 과정에서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쇄미록(瑣尾錄)에선 광주 목사에서 나주 목사로 전임된 권율이 7월 15일 나주에서 장수로 향하다 7월 17일 태인군에 있던 이광의 부름을 받고 그쪽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8월 9일 기사에 7일부로 전라도 각지의 관군이 금산성 탈환을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는데 난중잡록에선 7월 10일 기사에 적힌 내용이다. 작전은 중간에 중지되었으나 일부 관군은 공격을 강행해 8월 9일 금산쪽으로 나아갔다 패배, 남평 현감을 비롯한 500여명의 전사자를 냈다. 쇄미록은 역공에 나선 왜군을 '''8월 17일'''에 격퇴한 전투가 이치 전투라 적고 있다. 이는 후대의 기록인 만취당실기와도 일치한다.[10]
권율이 전라 감사 겸 전라 순찰사 승진에 대한 기록에서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선조 실록에서 권율이 전라 감사 겸 순찰사로 임명된 게 7월 22일인데 만약 그전에 이치 전투가 있었다면 실록 기사엔 간략히하는 과정에서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쳐도 개인기록에는 이치 전투의 공으로 승진했다는 기술이 있을 법한데 실록의 해당 기사는 물론 사위 이항복이 지은 권율의 유사와 묘비명, 최립이 지은 권원수행주비, 신흠이 지은 신도비명 어디에도 권율이 이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전라 감사가 되었다는 대목이 없다. 권율의 전라 감사 임명은 이치 전투와 무관할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권율의 묘비명을 비롯한 개인 기록에 이치 전투 승전과 승진이 관련있다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으며 참전자인 권율과 황박의 기록을 담은 만취당실기와 죽봉황공유적. 전라도 장수에 연고가 있었고 피난생활을 하기도 했던 오희문의 쇄미록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8월 중하순이 가장 유력하긴 한데 이 기록들이 전투와 시차가 있고 다른 기록을 확실히게 논파할 만한 근거를 갖춘 건 아니라서 좀 애매하다.
사실 시기 문제는 이 전투의 규모 문제와도 연동이 되어 있다. 웅치 전투와 동시에 일어났느냐(가능성은 낮지만), 양차 금산전투 이전이냐 이후냐에 따라 코바야카와가 동원 가능한 병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국어 위키의 경우 이치, 웅치 전투가 동시기에 일어난 것으로 파악하고 웅치를 공격한 안코쿠지 에케이의 1대 1만명, 이치를 공격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2대 2천명으로 기술하였지만[11] 이치와 웅치 전투가 별개, 그것도 상당한 시차를 둔 전투라면 이치에 사단급 병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행주에서 무려 10배의 병력차를 극복한 대승을 거둔 권율 본인이 직접 '''"이치가 행주보다 더 힘들었지. 애들도 약해터졌는데 병력차도 열배나 됐었고."'''고 말 할 지경인데(화포 전력 차이가 있긴 하지만) 코바야카와가 고작 연대급 병력 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임진왜란에 투입된 왜군 장수 중 코바야카와는 일본 내에서의 평가가 가장 높은 장수 중 하나[12] 인데, 전략적 식견이 높았던 그가 전라도로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투에서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4. 권율의 증언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에 의하면 사위인 이항복과 이야기를 나누었을때, 권율은 이 이치 전투를 자신의 제일 자랑스러운 전공이라고 했다고 한다. 잡아낸 적은 행주대첩이 더 많지만, 행주 대첩은 이치 전투에 비해 본인의 직급이 높아서[13] 병사들을 통제하기가 쉬웠고, 전라도의 장병들이 모두 본인의 휘하였으며, 왜병들 역시 전쟁 초기에 비해 기세가 꺾인 상태에서 싸웠으니 이치 전투보다 공을 세우기 쉬웠을 뿐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이 전투로 전라도의 진격로가 차단되면서 '''의병들의 성장과 반격, 이순신의 불패 신화'''가 계속될 수 있었으니, 그 여파는 대단했다.

세상에서는 내가 행주에서 한 일을 공으로 삼는데, 이는 참으로 공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나는 항오(行伍) 사이로부터 일어나서 공을 쌓은 것이 여기에 이르는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적잖이 치렀다. '''그 중에 전라도(全羅道) 웅치(熊峙)에서의 전공(戰功)이 가장 컸고 행주의 전공은 그 다음이다. 그런데 나는 끝내 행주의 전공으로 드러났으니,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대체로 웅치의 싸움은 변란이 처음 일어날 때에 있었으므로, 적(賊)의 기세는 한창 정예하였고, 우리 군사는 단약(單弱)한데다 또 건장한 군졸도 없어서 군정(軍情)이 흉흉하여 믿고 의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능히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血戰)을 벌여서 천 명도 채 안 되는 단약한 군졸로 열 배나 많은 사나운 적군을 막아 내어 끝까지 호남(湖南)을 보존시켜 국가의 근본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어려웠던 이유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서로(西路)가 꽉 막히어 소식이 통하지 않았고, 본도(本道)가 패하여 흩어져서 사람들이 대부분 도망쳐 숨어 버렸으므로, 내가 비록 공은 있었으나 포장(褒獎)해 줄 사람이 없어 조정에서 그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그러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없는 깜깜한 밤에 자기들끼리 서로 격살(擊殺)한 것과 같았으므로, 공이 드러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행주의 싸움은 내가 공을 세운 뒤에 있었으므로''', 권위(權位)가 이미 중해져서 사심(士心)이 귀부(歸附)하였고, 호남의 정병(精兵)과 맹장(猛將)이 모두 휘하에 소속되어 군사가 수천 명을 넘었고 지리(地利) 또한 험고하였으며, 적의 숫자는 비록 웅치에서보다는 많았으나 그 기세가 이미 쇠해졌으니, 이것이 공을 세우기가 쉬웠던 이유이다. 게다가 마침 천병(天兵)이 나와서 주둔하고 우리 나라 제로(諸路)의 근왕병(勤王兵)들이 바둑알처럼 기전(畿甸)에 포치(布置)되었을 때, 강화(江華)로 피란 가 있던 도성(都城)의 사민(士民)들이 우리의 승전(勝戰)을 학수고대하던 터에 나의 승전이 마침 다른 여러 진영(陣營)보다 먼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쉽게 드러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항복, <백사집> 잡기에 수록된 권율의 말


[1] 2차 금산 전투가 음력 8월 18일에 일어났는데 이치전투가 그 전일 수도 그 이후일 수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 전이라는 편린이 남아있으나, 당사자들은 그 이후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기록자가 오해한 것을 그대로 기록한 부문이 난무하기에 추가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2] 진산역사박물관에는 2만명 규모라고 기재되어있음[3] 금산에서 곧장 전주로 넘어오는 길에 있는 별 표시가 이치 고개(배티재), 용담호를 통해 진안을 거쳐 들어오는 길에 있는 별 표시가 웅치 고개(곰티재)[4]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지휘하던 병력은 동쪽 산줄기로 빠져 나가거나 아예 강을 건너 도주한 수백 혹은 수천의 패잔병을 남기고 전멸했다.[5] 황진이 안덕원에서 왜군을 물리쳤다는 포저집과 계곡집, 고대일록 인명록에 언급된다.[6] 600-700명이 아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등장한 단일 최대규모의 의병이다. 고경명 문서에도 있지만, 전라도에서도 고경명의 기가 막힌 패전 이후로 절반 규모의 병력도 모을 수 없었다.[7] 전라병사 최원의 군대와 김천일의 의병은 이미 북상한 뒤였다.[8] 고경명 군과 싸우자 마자 진산으로 달려내려갔을리는 없을테니 일단 7월 10일은 아니다.[9] 2차 금산 전투 이후이다.[10] 이 기록이 맞다면 2차 금산 전투 불과 하루 전에 이치전투를 치른 것이 된다.[11] 말도 안되는 추정이다. 본대가 어떻게 별동대보다 적단 말인가.[12] 벽제관 전투에서도 활약했으며, 이후 오대로에 올라가는 거물이었다.[13] 권율은 이치 전투 때는 광주 목사, 행주 대첩 때는 전라도 순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