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권율'''
權慄

[image]
행주산성 충장사의 권율 장군 표준영정.
'''시호'''
'''충장공(忠壯公)'''
'''군호'''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공신호'''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본관'''
안동 권씨
''''''
언신(彦愼)
''''''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직위'''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ㆍ홍문관
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 세자사
'''생몰연도'''
1537년 ~ 1599년
'''출생지'''
경기도 강화도호부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연리)#
1. 개요
2. 젊은 시절
3. 임진왜란 초기
5. 독성산성 전투
7. 도원수 권율과 정유재란
8. 충무공 이순신과의 관계
9. 원균과의 관계
10. 인물됨과 일화
10.1. 권율과 이항복
11. 미디어 매체에서
12. 기타

[clearfix]

1. 개요


'''남아(男兒)는 감의기(感意氣)요, 공명(功名)을 수복론(誰復論)이겠는가![1]

'''

'''증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 세자사 영가부원군'''

조선 중기의 문관[2]이자 장군.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

2. 젊은 시절


1537년 경기도 강화도호부(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연리)에서 태어났다. 6대조가 여말선초의 유학자이며 조선의 개국공신권근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냈던 권철로 뼈대있는 집안 출신이다. 권철의 넷째 아들로 막내. 소싯적 일화를 보면 왠지 대인군자의 풍모가 느껴지는 에피소드가 많은데 6세 때 한번은 어머니가 하얀 비단옷을 새로 지어주며 입으라고 하자 입기 싫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묻자 "의복은 몸만 가리면 그만이지 뭐 하러 남의 시선을 생각합니까?"라고 대답했는데 아버지 권철은 이 얘기를 듣고 비범한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3]
가문도 좋고 나름대로 똑똑했던 것 같지만 특이하게도 40세가 되도록 관직을 얻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권율에게 "과거를 보든지 집안 이름을 써서 관직이라도 얻든지, 자네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 텐가?"라고 묻자 권율 왈, "옛날 태공망은 나이 80에 현달해도 오히려 천하를 경영하여 백성을 구제했는데 아직 내 나이가 태공망의 반밖에 안 되는데다 능력까지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출세가 늦을 걸 걱정하겠는가?"며 반박했다고 한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대인군자의 풍모가 느껴지는 부분. 다른 선비들처럼 방에 틀어박혀서 글공부만 한 것도 아니고 지인들과 어울려 전국을 여행하거나 지리를 연구하는 등 한량처럼 지냈다고.
벼슬길에 뜻을 두게 된 이유는 아버지 권철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아버지 권철은 죽기 직전에 막내아들 권율을 빤히 쳐다보다가 "널 내가 낳았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는데 이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금강산에 들어가 과거 급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벼슬길에 늦게 올라 1582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4]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니 이 때 나이가 46세였다.[5] 그 후 전라도 도사, 예조 정랑, 호조 정랑, 경성 판관 등을 거쳤다.

3. 임진왜란 초기


1591년 류성룡윤두수의 추천을 받은 권율은 호조 정랑에서 의주 목사로 전격 발탁되었다. 이 무렵에는 늦게 출세한데다가 문관 출신이다 보니까 부하들 중에는 권율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 1592년 봄에 북경에 간 역관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요동 지역을 어수선하게 했다는 말이 나와서 국문하는 일이 있었는데 권율도 사건의 불똥을 맞아 파직되고 만다. 그러나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권율이 능력이 있다는 신하들의 간언을 듣고 다시 기용해 전라도 광주 목사에 임명되면서 임지로 내려가 부임했다.[6]
이때 일본군의 북상으로 수도가 함락되었는데 전라도 순찰사 이광(조선), 방어사 곽영 등을 필두로 3도(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근왕군 5-8만여 명을 모집하여 한양으로 북상했다. 이 때 권율은 방어사 곽영의 중위장 자격으로 함께 북상했다. 근왕군이 수원쯤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 일본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자 "적의 대군이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굳이 소수 적과의 싸움에서 병력을 소모하지 말고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서 서쪽 길을 튼튼히 하여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보장한 다음에 적의 틈을 살피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립시다"라며 신중론을 들고 나왔으나 이광과 곽영은 듣지 않았다. 결과는 바로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 최대의 안습 크리 사태로 유명한 용인 전투. 도주하는 조선군 속에서도 권율은 통솔력을 발휘해 자기 부대를 온전히 수습하여 임지로 무사히 돌아와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고 다시 남원에서 1천여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북진 계획을 재차 수립했다.

4. 이치 전투


이 무렵 일본은 한양을 점거하고 한반도 전체를 장악해 나갔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반격으로 인해 보급로에 차질이 생겼다. 이에 일본군 수뇌부는 곡창 지대인 전라도로 군대를 보내 점거해 병참 기지화할 계획을 세웠는데 부대의 총사령관은 전국시대의 지장 모리 모토나리의 셋째 아들로 유명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소식을 들은 호남 지역의 조선군은 요격하기 위해 금산의 이치 고개와 진안 웅치 고개로 진군하여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권율은 동복 현감 황진과 함께 이치를 맡아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전투 중 황진이 총에 맞고 일본군이 이 틈을 노려 조선군이 설치한 목책을 부수고 쳐들어오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권율은 병사들을 격려하며 저항해 격퇴했고 결국 일본군은 물러갔다.[7] 이 전투로 전라도가 보전되어 반격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도성 수복을 꾀하여 1만의 병사를 이끌고 직산까지 북상했는데 당시 체찰사였던 정철이 군량 문제 때문에 관내에 있으라고 하자 잠시 주저하다가 행재소에서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고 계속 북진했다. 이 때 선조는 권율에게 검을 보내며 말하기를 "명령에 불복하는 이가 있으면 이 칼로 베어버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5. 독성산성 전투


1592년 10월 북진하던 권율은 성급하게 북상했다가 피해를 본 용인 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우선 수원(현재는 오산시 내부에 위치해있다)의 독성산성(독왕산성)에 주둔했다. 통첩을 받은 일본군 대장 우키타 히데이에는 배후를 염려하여 한양에 주둔하던 군대를 독성산성으로 보내어 3군데 진을 세우고 성의 농성하던 조선군을 포위했다. 대체로 12월로 기록하고 있지만 난중잡록은 10월 18일에서 11월 이전에 전투를 치룬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공성이 여의치 않자 일본군은 독성산으로 들어가는 물을 끊어 지구전을 펼쳤으나 권율은 야밤에 기병대를 운용해 물을 막은 제방을 끊고 일본군 진영을 불태우는 등 유격전을 펼치며 지속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에 전라도사 최철견이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자 일본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적이 물러나자 권율은 정예 기병 1천여 명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해 큰 전과를 올렸다.
8군 소속 다이묘인 나카가와 히데마사는 일본 측의 기록에 1592년 11월경 수원 부근에서 매 사냥을 하다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조선군이 독성산성 안팎에서 유격전을 펼치던 이 무렵에 공격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때 나카가와 히데마사를 포로로 잡아 명나라로 압송시켰고 1599년 사형에 처해진 것으로 나온다.
야사에는 일본군이 농성하는 조선군의 저항이 거세자 독성산성에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당시 독성산성에는 물이 귀했으나 권율은 이를 감추기 위해 로 말을 씻는 시늉을 했고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본 왜장은 독성산성에 물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물러났다고 한다. 지금의 수도권 전철 1호선 역 중 하나인 세마역의 이름은 이 전설에서 유래한다. 세마(洗馬)라는 말 자체가 '말을 씻는다'는 뜻으로 독성산성은 세마역 근처에 있다.
이후 명나라의 원군과 합세하여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조방장 조경을 보내 마땅한 곳을 탐색하다가 행주산성을 택하였고 조경에게 명하여 목책을 세운 후 병사를 행주산성으로 옮기는 작업을 실행했다. 그러면서 독산성에 소수의 병사를 남긴 채 대군이 남은 것처럼 위장하고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이동했다. 행군 도중 4천명을 뽑아 전라병사 선거이에게 맡겨 시흥[8]으로 보내 적군을 견제하게 했다.

6. 행주대첩


마침내 행주산성에 주둔한 권율이었지만 올 줄 알았던 명나라군은 벽제관에서 참패하고 병사들도 약 3천명이어서 위태로운 형세였다. 그래도 행주산성이 신경쓰였던 일본군은 3만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했지만 권율의 뛰어난 통솔력과 정예 병사들의 선전 끝에 이를 크게 물리쳤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적장인 우키타 히데이에와 이시다 미츠나리의 통솔력이 막장 수준[9][10]인 것도 권율의 승리에 크게 일조했다. 이것이 유명한 행주 대첩이다. 행주 대첩에서 승리한 후 권율은 적의 재침을 경계하여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해 파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 부원수 이빈 등과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후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협상이 진행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임지로 복귀했다.
사실 선조는 곧바로 도원수 김명원을 교체하고자 했는데 벽제관 전투 이후 명나라의 강화 교섭 시도에 대하여 조선 조정의 반대 입장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도체찰사 류성룡과 도원수 김명원에 대해 불만과 권율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거기에 김명원이 사실 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섣불리 장계를 올려 장수 신각을 죽게 만든 경력도 있었기 때문에 선조는 무슨 트집을 잡든 김명원만은 자르고 싶어했다. 김명원은 군정 사무에는 능했지만 지휘 능력은 낙제였고 유순한 성품 탓에 장수들 통제에도 애를 먹었기에 교체할 필요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비변사에서는 "권율이 경기 지역의 지형지물과 군사 정세를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 결과 도원수의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의병의 절제권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1593년 3월 이후부터 한동안 군사 지휘권은 종전대로 유지되었지만 권율이 전라도 관군을 이끌고 의병까지 관장하게 됨으로써 실질적인 지휘권은 권율에게 있었다.[11] 마침내 1593년 6월 권율은 김명원을 대신해서 도원수가 되었고 경상도에 주둔했다.

7. 도원수 권율과 정유재란


도원수로서 한동안 조선군의 군무를 총괄하다가 1596년 도망병을 즉결 처분한 죄를 받아 해직되었다가 곧 다시 재임용되어 한성부판윤, 충청도 관찰사 등을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도원수가 된 권율이었지만 그 활동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부터 강화 교섭 기간 중에 명이 일본군 공격을 금지하는 바람에 권율은 마음대로 일본군을 공격할 수 없었고, 장수들 간에도 사이가 좋지 않아 이를 해결하는 데에도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또한 강화 회담 때문에 조선군의 군기가 해이해져 병력이 와해되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바람에 이것도 신경쓸 문제였다. 그래서 안팎에서 '권율은 도원수로서 무능하다'는 비판까지 나오게 되었다.[12]
그래서 오늘날에도 권율도 별로 한 게 없다는 식의 비판이 나오기도 하는데,[13] 사실 이 부분은 권율의 무능함이라고 보기 어렵다. 임진왜란과 다르게 정유재란은 경상도 지역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국지전 성향이 강했으므로, 괴멸된 수군과 다르게 육지에서는 딱히 공격적으로 나올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17만(수군 제외한 숫자다!) 정도나 모였으나, 1593년~1594년에 걸쳐 기근이 발생한 상황에서 병농 일치제의 조선군이 그 규모를 계속 유지할 순 없었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군 9만~11만이 파병되어 육전의 주력이 되었고 권율 휘하에 있는 군사들은 2만~3만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명량 해전 이후로는 일본군이 다시 방어전 위주로 들어갔는데 얼마 되지도 않는 조선군만으로 요새에 틀어박힌 왜군을 공격할 순 없었다. 울산성 전투에서 낙동강 하구로 들어오는 일본 지원군을 연파한 것만 보더라도, 권율이 무능하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이순신의 전투처럼 다이나믹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상대적으로 한 게 없어 보일 뿐.
그러나 권율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명군이 참전하지 않은 전투에서는 일본군을 계속 격파하여 전공을 올리기도 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일본의 북상을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 장군 마귀와 함께 울산에 주둔, 울산성 전투에서도 활약하여 낙동강 하구로 들어오는 일본군을 계속 격파했다. 그러나 장군 양호의 갑작스런 퇴각 명령 때문에 퇴각하고 말았고, 순천 왜교성 전투에도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수륙 협공으로 고니시 유키나가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왜란이 끝나자 권율은 전란 중에 기력을 소진한 탓인지 곧 사퇴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고 이듬해인 1599년 7월 6일 자택에서 향년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선무 1등 공신이 된 뒤에는 도원수 때 전과가 크게 돋보이지 않아 이에 따른 여러 비판이 있었지만, 결국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남았고, 조선 시대 내내 '명장'의 대명사가 되었다.
권율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름은 '권율장군묘'라고 해 놓았지만 사실은 권율 집안의 가족 묘역인데, 권율의 묘를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전부인 창녕 조씨와 후부인 죽산 박씨가 함께 안장되어 있고 권율 내외의 묘 뒤편으로는 형 권순과 아버지 권철 내외의 묘가 있다.

8. 충무공 이순신과의 관계


서애 류성룡에 의해 선조에게 이순신과 함께 천거되었다. 비록 권율은 육군, 이순신은 수군으로 배치되어 같이 군 복무를 할 수는 없었으나 류성룡 덕분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후에도 서로 서신을 주고 받았다.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 등으로 한참 물이 오르고 있을 때 권율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가 갖고 있는 함포 중 몇 개를 떼어다 권율에게 한 번 써보라고 주었고, 권율은 이렇게 이순신에게 함포 등 여러 가지 무기들을 제공받아 갖고 있었고 이걸 갖고 다니다가 행주산성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리고 벽제관에서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츠나리, 깃카와 히로이에가 이끄는 왜군이 쳐들어오자 이순신이 준 그 함포를 이용해 털어버렸는데 그것이 바로 행주 대첩이다.
이순신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계략으로 조선 조정에 파견된 간첩 요시라가 주장한 것에다가 원균이 정치적 욕망으로 사기 치는 주장을 밀어붙이는 김응서와 윤근수, 윤두수 형제에 의해 삼도 수군통제사 관직을 빼앗기고 참수당할 위기에 몰렸을 때도 도원수 권율은 우의정 정탁, 이원익 등과 힘을 합쳐 참수형을 백의종군으로 감형시키는 데에 성공했으며 그런 이순신이 자기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무밭을 가꾸게 하는 등 이순신의 편의를 봐주었다.[14] 이순신은 보직은 없었지만 자신을 짓누르던 무거운 삼도 수군통제사의 책무에서 벗어나 무밭을 가꾸며 권율의 군사 참모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전라도 일대에서 수군 병력의 유지를 위해 육군에 병력이 차출되는 것을 반대해 권율과의 관계가 썩 온화한 관계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2008년 새롭게 발견된 난중일기의 내용에 따르면 생각보다는 이순신 장군이 권율을 그렇게 좋게 평가하지 않았던 듯하다. 2008년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가운데 알려지지 않았던 을미년 32일 치의 일기가 새로 확인되었는데, 권율에 대해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이 많았다. (중략) 그런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등의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원균처럼 지속적인 비판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순신이 권율과의 공무 및 수군과 육군과의 인원 차출 등의 여러 정황에 대한 충돌에서 기인된 것이지 사적으로는 굳이 나쁘다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권율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해도 불가피한 점에 가까운 게, 이순신은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도 지나쳐 보일 정도로 사람에 대한 평가에 엄격했다.''' 내로남불이라고 비판하기도 참 어려운 것이 이순신은 남들을 평가하는 잣대보다 더욱 엄격하게 자신을 바라보았고, 이러한 성격 때문에 오늘날 이순신에 대한 자료중 이순신에 대해 제일 비판적인 자료가 다름아닌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이다. 오늘날 보면 거의 자학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9. 원균과의 관계


한마디로 앙숙중의 앙숙. '''원균이야말로 권율의 속을 가장 크게 썩인 인간'''이다. 권율에게 원균은 말 그대로 눈엣가시. 훗날 부산진으로의 출정 명령에도 응하지 않고 버티던 원균을 불러다 곤장을 치기까지 하는데, 이는 지금으로 치면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에게 손수 매를 친 것과 같다'''.[15] 그래서 간혹 원균옹호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권율이 책임 회피용으로 원균에게 뒤집어씌웠다"는 등의 헛소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애초에 원균이 맞을 짓을 했다. 간첩 요시라와 내응한 김응서, 그와 한패인 윤두수, 윤근수 형제는 이순신이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를 뒤집어 씌우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정작 이순신은 출진을 했었으며, 김응서와 협의 후 회군하던 중 아군 병력이 납치되자 가덕도로 진군해 구출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윤근수, 윤두수 형제는 이런 점은 무시한 채 무조건 이순신이 왜군을 무찌르지 않으려고 나서지 않았다고 우겼고, 선조는 이를 이순신을 내칠 좋은 기회라 여기고 받아들였다. 여기서 원균은 삼도 수군 통제사 자리가 탐이 나서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결국 이순신은 삭탈 관직당하고 원균이 후임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됐는데, 막상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수군만으로 진군하는 것은 무리라는 이순신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이에 그는 이순신을 모함했을 때 했던 말은 잊어버리기로 하고, 출진을 거부했다.
요컨대 원균은 조정을 능멸해서 이순신을 모함한 후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차지한 주제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율로서는 처벌을 할 근거가 충분했다. 실제로 그가 원균에게 곤장을 쳤던 이유도, 명령 불복종이 아니라 조정을 기망한 죄였다.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은 부산포 공격을 위해서는 육군이 안골포와 가덕도를 점령해 주어야 한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며[16] 부산으로 갈 수 없다고 우겼는데, 이에 조정은 도원수 권율에게 진주성 인근의 제석산성에 주둔하던 육군 정병 5천 명을 수군에 배속시키라고 명했다. 전쟁 기간 내내 수군 병력이 육군으로 보직이 변경되는 등 병력 부족에 시달렸음에도 이순신에게는 아무 지원도 안 해 주었던 것과 크게 다른 부분으로, 권율의 입장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관직을 도적질한 자가 이제는 자신의 휘하 장병 5천을 빼앗아가는 셈. 더군다나 이 5천을 주면 부산을 점령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어림없는 소리였으니, 원균에게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 병력은 칠천량 해전에서 날려먹었다.
원균을 비판하는 측 중 일부에선 '이 때 권율이 차라리 원균을 사형시켜야 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지나친 주장이다. 물론 원균의 이후 행적을 보면 죽어도 싼 건 맞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선 권율도 함부로 원균을 죽일 순 없었다. 조정을 기망한 죄 역시 큰 죄인 건 사실이나, 원균은 엄연히 임금인 선조가 직접 통제사 자리에 임명한 인물이다. 권율이 아무리 상급자인 도원수라곤 해도, 일개 병졸도 아니고 삼도수군통제사를 사형시킨다는 중벌을 내리려면 당연히 사안을 보고해서 조정과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 권율이 마음대로 원균을 죽였다간 오히려 권율 본인도 왕명을 거역한 죄로 사형을 당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상황을 보면 선조가 원균의 처형을 순순히 허락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이는 이순신이 처음 과거에 급제해 녹둔도에 배치되었을 때, 이경록과 둘이서 여진족을 무찔렀음에도 되려 이 원균 못지 않은 똥별이일이 이순신과 이경록을 즉결처분하지 못하고 선조 임금에게 이순신을 모함하는 선에서 끝난 것과 같은 이치다. 일개 초임 관리도 함부로 즉결처분을 할 수 없어서 임금에게 처벌 요구를 할 정도인데 이 당시 원균은 무려 삼도수군통제사다. 참고로 선조는 이건 누가 임금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신립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신립과 이일은 서로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일이 시키는 대로 이순신을 처벌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명나라의 원숭환모문룡을 처형했다가 이런 죄목으로 본인 역시 능지형을 당했다. 이 부분은 복잡하므로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10. 인물됨과 일화


상당히 대범한 성품으로 위에서도 언급했던 일화도 있지만 전투 중에 '''"이런 지휘봉이 떨어졌군."''' 하며 떨어뜨린 지휘봉을 찾으려고 '''일본군 진영에 태연히 돌입'''해서 그걸 도로 주워왔다는 일화도 야사에 남아 있다. 그래서 병사들도 이런 대담한 면모를 보고 "어떻게 유자가 저럴 수가 있냐"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권율은 엄연한 문과 급제자 출신이자 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낸 데다가 권근의 후예라는 명문가의 사람인데도 이런 대담한 행동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고 휘하 부관들이나 병사들이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모양. 또한 행보를 보면 화차나 화포 등 신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치 전투나 행주 대첩 때를 보면 화차나 화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전과를 올렸다. 문관이었으나 무관으로서의 능력도 매우 뛰어났다.
신흠(1566년~1628년)[17]이 지은 권율의 비명에 따르면 권율은 키가 8척에 풍만한 용모와 엄중한 안색의 소유자였으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해서 집안에 남는 물건이 없었고, 일을 처리할 때 신중해서 항상 만전을 기하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신흠은 임진왜란 중 권율의 막하에서 종군한 적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권율의 인물됨을 제법 상세히 파악해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이런 야사도 있다. 행주 대첩 이후에 죽은 왜군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이놈들이 쳐들어와 조국이 엉망이 된 걸 생각하니 열뻗쳐서인지 한 왜군 배를 가르더니 간을 끄집어내 씹으면서 "왜놈들의 간을 씹어도 속이 풀리지 않는구나."라며 뱉어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다.[18] 어디까지나 야사이며 전쟁 시에는 별별 일이 터지는 걸 생각하면 식인이니 뭐니 비웃을 이야기도 아니다.[19] 다만 권율이 행주 대첩이 끝난 후 죽은 왜병들의 시체를 찢어서 나뭇가지에 걸어놓도록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게 야사로 전해지면서 과장된 것으로 보면 될 듯하다.[20]
행주 대첩 당시에는 투구를 쓰고 있다가 지친 병사들에게 그 투구를 벗고 투구에 식수를 따라서 물을 마시게 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권율 하면 행주대첩이 유명하지만, 정작 권율 본인은 행주대첩을 자신의 최고 전공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항복의 <백사집>에 의하면 권율은 이항복에게 "원래 웅치와 이치의 싸움이 더 어려운 여건이었는데 내가 여기서 싸워 이겨 호남이 보존될 수 있었네. 그러나 행주 전투는 이미 적의 기세가 쇠한 상태였고 내가 공이 있던 상태에서 이뤄진 전투니 이것이 내가 쉽게 이길 수 있었던 이유이지. 하지만 나는 행주 싸움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 사람 일은 참 모를 일이구만."라는 식으로 심경을 토로했다고 한다. 의례적인 겸양의 말로도 보이지만 그렇다고 쳐도 권율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 자신의 싸움은 웅치 - 이치 전투였다는 소리다.[21]
물론 그렇다고 행주 전투의 공적을 폄하할 수는 없다. 권율은 3천의 조선군으로 3만이 넘는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그것도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산성에서 농성전을 벌인 것이 아니라 산이라고 말하기도 뭣할 100미터 높이의 구릉 위에 놓인 축성물에 목책을 쌓아두고 벌인 전투였다. 그 상태에서 10배에 달하는 적 병력을 상대로 거의 전멸 일보 직전까지 때려잡는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권율의 발언은 어떻게 보면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압승한 전투보다 전쟁에 큰 영향을 준 전투를 더 중요히 여겼단 점에서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이치 전투에서 상대의 총지휘관도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 중에서 가장 뛰어난 명장이었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이후 행주대첩에서 다시 만난다. 물론 그때는 그가 총지휘관은 아니었다지만 여튼 왜군의 명장을 '''두 번이나 털어버린 셈'''.
전략적으로 굉장히 대범한 기동이나 수를 잘 활용했던 장수다. 웅치-이치 전투도 명확한 요새 없이 사소한 지리적 이점에 의지해 대군을 막아냈고, 독성산성 전투는 아예 적 점령지 한복판에 알박기를 하는 정신나간 작전이었다. 개전후 패전만 거듭하던 세력의 군대가 이런걸 시도했다간 병사들부터 반발해서 망하거나 흐지부지 될텐데, 병사들이 군말없이 따른 걸 보면 소속된 병사들도 어지간히 강심장이었거나 권율이 그정도로 신망이 있었던 모양.
야사를 보면 좀 괴짜 같은 면모도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위에도 언급된 젊은 시절 벼슬살이를 하지 않으려 한 일화도 있고, 30대 후반에는 갑자기 지리에 빠져서 지리 서적을 잔뜩 구해서 거기에 빠져 있었던 적도 있었으며 40이 넘어서는 뜬금없이 금강산에 들어가서는 얼마 동안 틀어박혀 있다가 돌아왔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위의 대범한 성품과 연계해 보면 이런 야인 생활에서 얻은 경험으로 인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
공과 사의 구분이 매우 엄격한 인물로 공적으로는 매우 엄격했으나 사적으로는 사위 이항복과 둘이서 나란히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장난꾸러기였다.
사실 권율은 그 유명세에 비해서 알려진 일화나 기록이 꽤 적은 편이다. 이렇게 된 것은 자식들이 아버지에 대한 기록인 행장을 작성하는 풍습이 있었던 조선 사회에서 '''아들이 없었다'''는 점이 매우 결정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권율의 자식은 첫째 부인인 창녕 조씨가 낳아서 이항복과 결혼한 딸 1명 뿐이다). 그래서 권율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겨준 사람은 다름 아닌 사위 이항복이며 권율의 묘지명도 이항복이 썼다.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을 보면 장인 권율에 대한 기록도 자주 볼 수 있다. 다만 둘째 형 권순의 아들인 권익경을 양자로 들여서 후사를 이었고, 조선 말엽인 1885년에 9세손 권창섭에 의해 만취당유적(晩翠堂遺蹟)이라는 권율의 시문집이 간행되었다.

10.1. 권율과 이항복


그는 이항복의 장인이 된다.[22]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평가가 높았던 이항복에 비해서 권율은 그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권율에 대해서 '사위 덕 본다'라는 평도 존재했다. 조선 역사상 코믹한 에피소드를 많이 남긴 인물 중 하나인 이항복의 장인이다 보니 야사에도 그 일화가 많이 남았는데, 이들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하나로 묶으면 '''한 편의 훌륭한 조선 시대판 시트콤이 나온다.''' 권율은 나이를 초월해서 이항복에게만은 엄청난 개구쟁이였으며 이항복 역시 권율에게는 엄청난 개구쟁이였다.
참고로 아래에 나오는 이야기는 정사와 야사, 민간 설화들이 많이 섞여 있으므로 모두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단지 이러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올 정도로 권율과 이항복의 관계가 재미있었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역사에 기록이 되었든 안되었든, '''권율은 오늘날의 합참의장인 도원수인데 사위는 국방부장관인 병조판서'''라서 웃지 못할 촌극이 생길 여지는 많다. 권율이 개국공신 집안의 명문가이고, 전란중에 여러 전공을 세운 야전장수에 대한 대접이 평시보다 좋은 것은 맞으나, '''정식적인 군율 체계는 엄연히 사위인 이항복이 우선이다.'''
  • 더운 여름날 이항복의 장난에 넘어가서 장인 권율이 선조 앞에서 혼자 웃통 다 벗고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어떻게 된 이야기인고 하니, 본래 한복을 정석대로 입으려면 이런저런 속옷도 많이 갖춰 입어야 하고 이것은 당시의 조정 신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더운 여름날 입궁하려고 속옷을 갖춰 입는 권율에게 이항복이 "장인어른, 날도 더운데 그걸 어떻게 다 입고 가십니까. 속옷 안 입고 그 위에 관복만 걸쳐도 아무도 모를 텐데 그냥 가시죠"라고 말했고, 듣자하니 귀가 솔깃해진 권율은 이를 따라했다. 그런데 어전 회의 도중 이항복이 선조에게 "전하, 날씨가 이렇게 더우니 나이 많은 대감들은 힘드실 텐데 관복 좀 벗고 회의하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말했고 선조가 선뜻 그러자고 해, 다른 대신들은 관복을 벗은 차림으로 있었는데 권율은 혼자 웃통 벗은 꼴이 된 것. 왜 혼자 그 옷을 안 입었냐는 왕의 질문에 당황하던 권율에게 끼어든 이항복은 백성들이 헐벗고 있는데 그런 두꺼운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며 그렇게 입고 온 것이라 말했다. 한마디로 이항복은 장인을 제물로 각종 옷으로 사치를 부리는 권신들을 비꼬려 했던 것. 물론 권율 입장에서는 사위가 임금 앞에서 장인을 엿먹여 놓고 천연덕스럽게 입바른 소리까지 하는 상황이다(...). 전승에 따라서는 이게 권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즉 이항복에겐 장조 어르신인 권철에게 친 장난이었다는 버전도 있고, 이항복의 입바른 소리에 감동한 왕이 권율에게 상을 내리자 권율도 사위를 크게 야단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는 결말인 버전도 있다.
  • 권율이 오줌을 눌 때마다 이항복이 장난삼아 장인이 소변을 보는 것을 훔쳐봤다고 한다. 권율은 자신의 그곳을 가리키며 "이보게 사위. 이건 자네 장인일세. 그런데 어찌 업신여기시는가?"라고 묻자 이항복은 잠자코 있었다. 며칠 후 권율이 소변을 다 보자 대뜸 이항복이 권율의 뺨을 후려쳤다! 어안이 벙벙해진 권율에게 이항복은 "어르신께서 오줌을 눈 후에 감히 제 장인 어른의 목을 잡고 흔드시니[23] 사위인 제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권율은 "니놈은 X의 사위라고 해도 성내지 않을 놈이구나!"라며 크게 웃었다고. 이 이야기의 출처는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야기책(利野耆冊)이라는 패설집이다.
  • 이항복이 아직 어린 시절, 권율이 사위감을 찾으면서 이항복의 품행이 어떠한지 알아보기 위해 이항복이 공부하던 서당을 방문했다. 그러자 이항복은 옷차림을 가다듬기는 커녕 편한 차림으로 글을 건성으로 읽고 있었다. 권율이 이항복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평생의 소원이 뭐냐고 묻자 이항복은 "다른 소원은 없고, 쇠짚신이나 하나 있었으면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유를 묻자 "그걸 대감 입에 집어넣어서 입 좀 다물게 하려구요." 남의 소원을 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안다고 한들 소원을 채워줄 리도 없으니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라는 뜻. 출처는 이희승의 수필 '별을 그리던 시절'이다. 여담으로 조선 정조 대의 관리이자 이항복 못지 않은 장난꾸러기였던 이문원[24]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선 더 막 나가서(?) 친척 어른인 이천보가 양자를 삼기 위해 이문원 형제에게 저 질문을 하자 이문원은 변소에서 뒷처리할 때 쓰는 밑씻개를 달라고 했다.
  • 어느 날 권율의 가족들이 모두 외출을 가고 혼자 남게 된 권율은 집안의 여종 중 예쁜 여종 하나와 관계를 가졌다. 그런데 한창 일을 치르던 중 마침 돌아온 권율의 아내가 남편이 하는 짓을 알아내고 권율을 집안 창고 안으로 불러낸 후 그대로 창고에 가둬 놓고 문을 잠가 버렸다.[25] 이 이야기를 들은 이항복은 권율이 갇힌 창고 문 밖에서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무엇보다 색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라고 외쳤다. 문 밖에 사위가 있다는 것을 안 권율은 이항복에게 제발 좀 꺼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이항복은 듣지 않았다. 권율이 "여기는 제아무리 제갈량이라도 못 빠져 나갈 곳일세. 제발 꺼내 주게"라고 사정을 하자 이항복은 "제갈량이라면 거기 들어가지도 않았을 겁니다."라고 면박을 줬다.[26] 그러나 권율도 당하지만은 않았다. 한 번은 이항복이 권율에게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공부방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권율은 이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항복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권율 집에서 일하는 여종과 정을 통했다. 이 낌새를 눈치챈 권율은 손님들을 잔뜩 초대해서 사위 자랑 한답시고 이항복의 방을 급습했다. 이항복은 당황해서 그 여종을 이불로 싸고 숨겨두었는데 권율은 이불을 보더니 "방이 좁으니까 이 이불을 좀 치워야겠네"라고 말하며 이불을 들어올리자 이불 속에 있던 여종이 떨어졌다. 이항복은 멋적게 웃으면서 "벌거벗은 여종을 숨기기란 어렵도다!"(赤身他婢 果難匿也 : 적신타비 과난닉야)라고 너스레를 떨었고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덧붙이자면 이 여종이 이전에 권율과 정을 통한 그 여종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정사가 아니라 패설집에 전해지는 이야기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권율과 이항복 사이에 이런 일화가 유난히 많이 남은 것을 보면 두 사람이 장인과 사위 관계를 떠나서 뭔가 남다르게 지내긴 했었던 모양이다. 특히 권율은 아들이 없었고, 이항복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유달리 친밀하게 지냈던 것은 이런 요인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권율과 이항복은 서로에게 아버지와 아들 노릇도 해 준 셈이다.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권율은 평소에 "내가 죽으면 이 의정(이항복)이 내 묘지명을 써 줄 것이니 이것으로 족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1. 미디어 매체에서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홍계일이 담당했다. 문관 출신임을 반영해서인지 굉장히 느긋한 성격으로 나오며 심지어 절대적인 병력 열세로 시작한 행주 대첩 직전에도 여유있는 모습으로 전투에 임한다. 이항복과의 장인 - 사위 관계는 극중에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덕형과 더 많이 마주쳐 정유재란시에는 완전 콤비를 이뤘다.
[image]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등장. 배우는 김영기. 제법 성깔 있지만 역사대로 노련한 장수로 나타난다. 동인들과 함께 개념파에 속해 있지만, 정유재란 이후에는 사위인 이항복이 임진왜란 때 그랬던 것처럼 공황장애 직전인 모습을 보인다.[27] 칠천량 해전 직전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불러다가 대책을 묻다가 이순신이 아무 말도 없자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마시오" 하고 부르짖는 게 백미. 이는 권율이 정말로 이순신에게 분노했던 것이 아니라 권율 스스로 심각한 자괴감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비롯하였다. 권율 본인 또한 부산 공격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미 이순신이 파직된 마당에 자기까지 이순신처럼 관직을 버리고 죄인이 되면 왜군을 육지에서 막는 장수를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정의 명에 따라야 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를 나타냈던 것이다.
칼의 노래에도 초반에 나오는데, 이순신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심정으로 권율을 보는 장면이 묘사된다.
임진록 시리즈에서는 검을 들고 공격하고 주변 유닛들의 공격력을 조금 올려준다. 하지만 어째 적진으로 성급히 돌입하다가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으니 안습. 더구나 조선의 반격에서는 시나리오 상 존재감도 없어져 버렸다. 그야말로 대굴욕. 역시 거상에서도 영웅 유닛으로 등장하는데, 선무공신으로 전직 가능하다. 실제로도 권율이 받은 시호 또한 선무 공신.
성능을 얘기하자면 조선 2차 장수 최강. 사명대사와 1위 ~ 2위를 다투지만 선무 공신의 경우에는 사냥 뿐만 아니라 몸빵을 할 수 있으므로 초반에 조선을 시작하면 무조건 뽑게 된다. 또 1차 때는 폭뢰격 덕분에 빠른 렙업을 해 2차도 빨리 찍을 수 있다. 선무 공신이 되면 철벽과 침묵을 쓰게 되는데 철벽은 일정 시간 동안 무적(레벨에 따라 시간 증가) + 데미지를 받을 때 반격 폭뢰(범위는 더 작다.)이라는 사기스러운 스펙을 자랑한다. 침묵은 적의 기술을 못쓰게 만드는 역시 좋은 기술. 문제라면 데미지를 입을시 폭뢰격이 발동되는 형식이라 잡몹들한테는 맞아도 반폭뢰가 발동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
소설 임진왜란(김경진)에선 1권, 2권에 주로 등장하는데, 무능한 상부와 무능한 부하 때문에 쌍으로 열받은 간부 기믹이다. 주로 나오는건 원균에게 화풀이하는 장면.
[image]
2015년 방영되는 드라마 징비록에서도 등장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권율을 맡은 김영기 씨가 그대로 캐스팅됐고, 불멸의 이순신에서 다루지 않은 행주대첩도 다루었다.
명량에서는 뮤지컬 배우계의 대부라 불리는 남경읍이 맡았다. 짧은 등장이지만 굉장히 위엄 있는 열연으로 대중들로 하여금 '권율이 환생했다'라는 평을 들었다.
좀비딸의 브랜드 웹툰인 경기딸에서는 우키타 히데이에와 주먹을 맞대고 미안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끌었다의 장면을 패러디한다.
참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2. 기타


일본어 위키가 임진왜란과 관련된 항목은 죄다 편향적이긴 하지만, 권율에 대한 설명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일본어 위키에선 행주 대첩은 조선군의 승리라기 보단 일본군의 승리로 집필되어 있는데, 이치 전투와 독왕 산성 항목이 빠져있고, 행주 대첩은 권율의 패배로 그려져 있다보니 도원수의 자리에 있음에도 정유재란 때의 행보와 겹쳐 '한 게 없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내려진 총평이 '전쟁에서 이기는 능력은 없었으나 버티는건 잘했다'라고 기술되어있다. 일본어 위키는 다른 언어 위키에 비해 반달이 심한 편이다.
세종대왕급 이지스 구축함의 함명으로도 고려된 적이 있는데, 수군 폐지와 관련된 권율에 대한 해군의 부정적 시선으로 권율은 탈락하고 대신 이순신 장군을 천거하고 전란 조정을 이끈 류성룡이 채택되어 서애 류성룡함으로 명명되었다.

12.1. 대한민국 육군 제60보병사단 권율부대



[1] "사나이는 의기만을 생각할 뿐이지, 어찌 부귀와 명예를 따지겠는가"라는 뜻이다. 1593년 2월, 행주산성에서 병사들을 격려하며 한 말.[2] 행주대첩무관의 이미지로 익숙하지만 엄연히 무과가 아닌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 김종서, 강감찬, 윤관 등도 원래는 문관 출신인 것도 같은 맥락.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장수 중 권율만 문관 출신이었던게 아니라 송상현도 문관 출신으로 송상현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도 있다.[3] 권철도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항복의 그 유명한 감나무와 "이 손은 누구 손입니까?" 일화에 나오는 이웃집 대감님이 바로 권철이다. 또한 다른 야사에 따르면 이항복이 19세 되던 해 권철이 중매쟁이를 데리고 이항복의 집을 찾았는데 이항복은 대뜸 권철에게 "어르신은 사람의 겉과 속을 보십니까? 아니면 겉만을 보십니까?"라고 묻자 권철은 "속까지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찌 볼 수 있느냐?"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이항복은 바지를 내리고 성기를 권철에게 보여주면서 "속이 이 정도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고 권철은 크게 웃으며 이항복을 손주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린이용 이야기책 등에서는 웃통을 벗어서 몸을 보여줬다는 정도로 순화해서 나오기도 한다.[4] 과거에서 하위 성적이며 장원 급제와는 최대 3품 반(종6품~종9품)의 차이가 났다. 관직 임명에서도 당연히 격차가 컸으며 때문에 병과 성적을 받을 경우 상위 성적을 위해 과거를 다시 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물론 권율은 다시 보지는 않았다. 사실 과거 급제자가 총 33명 중 23명이 병과인데 과거를 보는 인원과 당시 권율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 정도도 대단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인사 적체가 심각해 과거에 급제하고도 자리가 안 나서 늙어죽는 일이 흔했다. 그런데 갑과 합격자 3명과 조상 4대조 중 관리가 있는 사람은 우선적으로 임용되었다. 명문가 태생이 아니었다면 임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5] 1580년 문과에 급제한 사위 이항복보다 2년이나 늦었다.[6] 1년만에 정5품에서 정3품으로 뛴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이전 선조가 임명한 것 중에서 충무공 이순신에 비견되는 발탁이다. 선조가 종4품 발포만호 조산만호를 하다가 종6품 정읍 현감(군사 요충지는 무관으로 목민관을 임명하기도 함)을 하던 충무공 이순신을 특별히 거론하며 종3품 고사리첨사와 정3품 만포첨사를 제수했으나 대간의 논핵으로 무산된 후 종4품 진도군수, 종3품 가리포첨사, 정3품 전라좌수사로 연달아 임명했고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시켰다.[7] 사실 전투의 단순 규모는 조선군이 불리했다. 이 때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대가 일본군의 기지 금산을 공격했기 때문에 기지가 털릴 것을 염려한 고바야카와군이 후퇴한 것. 그러나 여기서 물러나 버리는 바람에 일본 육군은 결국 전라도 점령에 실패했다. 일본 쪽 연구자들은 일본군이 전쟁에서 밀리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이치 전투를 들고는 한다.[8] 지금의 시흥이 아니다. 지금의 경기도 시흥은 이름만 계승한 것으로 원래의 시흥은 서울 금천구, 영등포구, 관악구 일대였다.[9] 좁은 지형에 무리하게 많은 병력을 투입했는데 이 때문에 왜군은 전진도 후퇴도 힘든 수준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10] 행주 대첩에서의 일본군 총지휘관은 이시다 미츠나리였지만 이는 이름뿐인 직책으로 일본군은 사실상 여러 영주들의 군대를 연합한 조직이었다보니 지휘 체계가 통일되지 못했다.[11] 조선 8도가 전부 전쟁터가 된 상황에서 전라도만 무사했으니 조선 조정에서 전략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군단급 병력은 전라도의 것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각지의 유격전까지 통제하게 되었으니 사실상 군령권 전체를 맡긴 셈이다.[12] 냉정하게 평가할 때, 단연 원탑인 이순신을 제외하고 임진 정유 양란에서 가장 공이 높은 장수를 꼽으라면 단연 권율이다. 이치 전투로 전라도를 지켜냈고, 행주 대첩으로 한양 탈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3] 원균 옹호론에서도 많이 나오는 주장이다. 선조나 원균의 실책을 권율에게 뒤집어씌우는 식.[14] 권율은 한산도에 있던 군관 몇 명을 빼서 이순신의 수발을 들게 해주려고 했으나 수군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깎을 수 있다고 하여 이순신은 거절한다.[15] 물론 이러한 비교는 진지하게 받아드리면 심히 골룸하다. 당시의 도원수의 위치는 '''왕을 대리'''하여 군권을 총지휘하는 자이다. 왕의 대리인인 그가 당연히 원균을 때릴 권한도 있으며, 그 권한에 대해서 그 누구도 태클을 걸 수 없었다. 다만 현재 문민통제가 이루어지는 민주국가에서 도원수와 1:1로 대응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 굳이 따지자면 6.25 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 있는데, 휴전협정 이후 사실상 권한이 삭제된 직책이라... 평시인 한국에서 비교할만한 직책이 없기에 저러한 비교가 있는 것이다.[16] 무려 육군 30만이 해안 따라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병력 피해가 거의 없던 임란 초기 조선의 군 동원력은 상기했듯 17만이었다. 그러니까 원균은 조선의 총 병력의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했거나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한 것.[17] 임란 이후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한문 4대가로 꼽히는 명문장가였다. 탄금대 전투의 생존자이기도 하다.[18] 다른 버젼도 있는데, 왜군을 사로잡아 산채로 배를 갈라 간을 씹어 먹었다고도 한다.[19] 대지로 유명한 펄 벅이 지은 대지 2부 아들들에서도 군벌이 된 왕싼(왕룽의 막내 아들)이 다른 군벌 장군을 베어버리자 그 부하가 죽은 장군의 간을 끄집어내 바치면서 이걸 먹으면 그 용맹을 얻게됩니다. 라고 하지만 왕싼이 쓴웃음지으며 거절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걸 두고 중국인을 폄하했네...이럴 수도 없는 게 수호지를 비롯하여 중국 문학과 역사에서도 이런 게 종종 나온다.[20] 사실 임진왜란 시기 여러 명장들이 왜군의 간을 씹어먹었다는 이야기는 흔한 레퍼토리다.[21] 임진왜란 항목에도 나와 있듯 일본 학계에서는 웅치 - 이치 전투를 더 높게 평가한다.[22] 신립도 권율의 사위라는 소리가 있지만 이는 야사의 오류이다.[23] 이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남자가 소변을 본 후에 그 곳을 터는 행위를 의미한다. 권율이 자신의 그 곳를 가리켜 '이건 자네 장인이다'라고 했던 것을 상기할 것.[24] 이 사람도 정말 어지간한 말썽꾸러기가 아니었던지라, 이문원의 말썽 이야기가 이항복의 이야기로 알려지거나 거꾸로 이항복 이야기가 이문원 이야기로 알려진 사례도 적지 않다.[25] 당시 시대에는 안주인이라고 해서 부인이 집안 살림을 책임지다 보니 각종 창고 열쇠도 아내에게 있었다.[26] 실제로 제갈량은 첩은 존재하긴 했는지도 의문이고 아이도 본처에게서 늦게 본 하나뿐이다(...)[27] 수군 폐지론을 먼저 주장한 사람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