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시아가 있던 곳

 

1. 개요
2. 1막
3. 2막
4. 3막
5. 4막
6. 5막
7. 6막
8. 에필로그


1. 개요


카이사의 스토리와 함께 공개된 공허와 관련된 단편소설. 쓰지 말아야 했던 도구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나라를 파멸로 이끈 이케시아 반란군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Graham Mcneill.[1]
원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2. 1막


내 이름은 악사무크 바르-초이 코하리 이카소르라고 한다.
“악사무크”는 내 조상의 이름이다. 전사에게 붙여주는 이름으로, 가녘의 수호자라는 뜻이며 상서로운 임무를 수행한다는 의미다. 내 조상 악사무크는 “마법사 왕” 중 마지막 왕이셨다. 슈리마의 태양 여제가 황금빛 인간과 신의 무리를 이끌고 이케시아 왕국을 침공했을 때 이케시아의 왕으로서 여제에게 항복했다.
“바르”는 내 어머니, “초이”는 내 아버지다. “이카소르”는 대대로 마법사 왕들에게 충성을 바친 혈맹 부족의 이름이다.
이 이름들은 내가 태어나자마자 붙여졌다.
내 이름은 악사무크 바르-초이 코하리 이카소르다.
이 중에 새롭게 붙여진 이름은 “코하리”뿐이다. 그렇지만 이미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 이름은 이제 나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이 이름을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자부심으로 간직하고 있다. “코하리”는 과거 마법사 왕의 친위대였다. 코하리 전사들은 용맹하고 막강했으며, 목숨을 바쳐 왕을 지켰다. 악사무크 왕이 태양 여제의 신성전사들에게 항복하고 이케시아가 슈리마의 속국이 되자, 코하리는 한 명도 남김 없이 자결했다.
하지만 코하리는 이제 다시 태어나, 새로운 마법사 왕에게 충성하고 영광을 되찾고 있다. 나는 검을 두루마리가 감싸고 있는 모양인 코하리의 인장을 팔에 새겼다.
내 이름은 악사무크 바르-초이 코하리 이카소르다. 나는 내 이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그 의미를 곱씹는다.
잊고 싶지 않으니까. 내게는 그것만이 남았으니까.

3. 2막


새로 결성된 코하리와 함께 이케시아 거리를 행진했던 것이 언제였지? 오늘 아침이었나? 마치 전생의 일처럼 느껴진다.
드넓은 대로를 가득 메운 남녀노소가 환성을 질러댔다.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제일 화려한 장신구를 걸치고, 우리의 행진을 보고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자신들의 왕국이 다시 탄생하는 모습을 목격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오늘 다시 태어난 것은 코하리뿐이 아니었다. 이케시아 왕국도 다시 태어났다. 우리 코하리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보조를 맞추어 행진했다. 자부심이 넘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우리는 고리버들로 엮고 가죽끈을 단 방패를 들고, 휘어진 날에 철끈을 둘러 자루를 만든 님차 검을 들었다. 슈리마의 법에 의하면 이케시아는 무장을 할 수가 없었지만, 우리는 오래 전부터 도시 곳곳에 대장간과 무기고를 몰래 만들고 봉기를 일으킬 날을 준비했다.
나는 그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케시아의 하늘은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주민들은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거리를 뛰어다녔고, 슈리마인이라면 모조리 찾아내어 처치했다. 이케시아의 문화를 아예 말살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어기면 잔혹한 처형을 당해야 했던 슈리마의 법 아래, 우리는 수백 년 동안이나 굴욕을 겪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였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었다. 이케시아에 있는 슈리마인 대부분은 하급 관리, 상인, 세금 수금원에 불과했지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 증오스러운 태양 황제의 종복이니 죽어 마땅했다.
하룻밤 사이에 이케시아는 다시 우리 것이 되었다!
주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건물 지붕에 올려놓은 태양 원판 모형을 끌어내어 산산히 부숴버렸다. 슈리마 문서를 불태우고 보물을 약탈했으며, 슈리마 황제들의 조각상을 훼손했다. 나조차도 충동을 못 이기고 슈리마의 웅장한 벽화를 외설적인 낙서로 더럽혔다. 어머니가 보셨다면 얼굴을 붉히셨으리라.
그날의 연기와 화염의 냄새가 기억난다. 그것은 자유의 냄새였다.
행진하는 내내 나는 그 느낌을 계속 떠올렸다.
주민들의 환한 웃음과 환호성은 기억나는데,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햇빛이 너무나 눈부셨고, 주변은 너무나 소란했다. 누가 머리를 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통증이 도무지 멈추지를 않았다.
전투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되어 지난밤에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나는 님차 검술은 그럭저럭이었지만 어깨에 멘 뱀활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잘 다루었다. 좋은 나무를 골라 습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꼼꼼하게 옻칠을 한 붉은색 활이었다. 화살은 진하늘색 맹금의 깃털로 깃을 달았고, 대지와 바위를 잘 아는 마법사가 찾아낸 흑요석을 내가 직접 다듬어 날카로운 화살촉을 만들었다. 이케시아 해안의 무성한 숲과 높은 산을 오랫동안 뛰어다니느라 내 팔다리는 튼튼했으며 하루 종일 싸울 수 있는 근력도 있었다.
은색 끈으로 머리를 땋고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깊은 초록색 눈을 지닌 젊은 여인이 내 머리에 화관을 씌워 주었다. 꽃 향기는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했지만, 여인이 내 입술에 키스를 하는 순간 향기 따위는 싹 잊혀졌다. 그녀는 소용돌이치는 듯한 문양의 황금 고리에 오팔을 박아 넣은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나는 그 목걸이가 내 아버지의 솜씨임을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행진이 계속되는 바람에 나는 여인과 멀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내 마음 속에 또렷이 새겼다.
그런데 이제는 그녀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떠오르는 것은 어릴 때 보았던, 숲속처럼 깊은 초록색이었던 그녀의 눈뿐이다…
조만간 그마저 잊혀질 것 같다.
“걱정 마, 악사.” 사이작스 칼리-린스 코하리 이카순이 삶은 알의 껍질을 벗겨 입으로 밀어넣으며 말했다. “이번 전투만 끝나면 그 여자가 널 기다리고 있을 걸.”
“맞아.” 콜그림 아벨-에사 코하리 이카순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경쟁해야 할 놈이 스무 명은 되는 게 문제겠지만.”
그 말에 내가 얼굴이 빨개지자 콜그림은 껄껄 웃었다.
“슈리마 황금으로 멋들어진 목걸이를 하나 만들어서 선물해. 그럼 그 여자는 영원히 네 차지야. 못해도 다음날 아침까지는 가겠지!”
그녀의 명예를 무시한 콜그림에게 한 마디 했어야 하지만, 나는 산전수전 다 겪은 두 고참병보다 나이가 어렸고 그들에게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사이작스는 코하리에서도 핵심 전사로, 머리를 박박 깎은 거한이었다. 어릴 적에 병을 앓은 탓에 얼굴은 잔뜩 얽었고, 두 갈래로 나눈 수염은 밀랍과 백악을 발라 뾰족하게 다듬었다. 콜그림은 사이작스의 오른팔 격으로 냉혹한 눈매에 거친 야수 같은 남자였다. 기혼임을 뜻하는 문신을 했지만 아내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은 어릴 때 같이 자랐고, 칼을 쥘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전사가 되는 비결을 함께 배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활이 난생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보석을 세공하고 장신구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셨다. 꼼꼼하고 세심한 분이었기에 아까 같은 천박한 어투는 절대 입에 담지 않으셨다. 그래서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물론 나는 그런 말투를 하루라도 빨리 배우고 이 거친 남자들을 닮고 싶었다.
“애한테 너무 심한 소린 하지 말라고, 콜그림.” 사이작스가 그 거대한 손바닥으로 내 등을 철썩 후려쳤다. 딴에는 나를 동생처럼 여긴다는 표현이었지만 어찌나 세게 쳤는지 이가 덜걱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도 좋았다. “해질녘이면 얘도 영웅이 될 테니까.”
사이작스는 어깨에 얹은 장창을 고쳐 멨다. 앞쪽에 도끼날이 달린 거대한 무기로, 새까만 손잡이에는 그의 조상들 이름을 새겼고 청동 날은 예리하게 갈아놓았다. 우리 부대를 통틀어 그 창을 휘두르는 건 고사하고 들어올리기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사이작스는 못 다루는 무기가 없었다.
나는 잠깐이라도 더 초록 눈의 여인을 보려고 몸을 돌렸지만, 촘촘한 간격으로 늘어선 병사들과 연신 손을 흔드는 군중의 틈바구니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딴 데 정신 팔지 마, 악사.” 사이작스가 말했다. “슈리마 군이 한나절 안에 이케시아로 들어올 거라고 점쟁이들이 그랬으니까.”
“그… 신성전사들도 같이 오는 걸까요?” 내가 물었다.
“그런다는 말이 있어.”
“그자들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건가요?”
사이작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놈들은 엄청나게 강력하니까. 하지만 이건 맞아. 넌 그놈들을 보자마자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생각할 걸.”
나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요?”
사이작스는 곁눈질로 나를 흘끔 보았다. “놈들은 괴물이니까.”
“놈들을 보셨나요?”
나는 풋내기다운 흥분이 끓어올라 그렇게 물었다. 그때 사이작스와 콜그림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던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래, 악사.” 사이작스가 대답했다. “바이제크에서 한 놈과 싸운 적이 있어.”
“그 거대한 놈을 쓰러뜨리려고 산을 거의 반쯤 무너뜨려야 했다니까.” 콜그림이 덧붙였다. “게다가 그때도 놈의 머리를 날릴 만큼 큰 무기를 가진 사람은 사이작스밖에 없었다고.”
그 무용담은 나도 들었었다.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당신이었군요?”
사이작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슈리마 신성전사의 시체는 해방을 맞은 이케시아 시가지에 전시되어 누구나 구경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 무시무시하다는 신성전사도 죽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아버지는 내가 그 시체를 보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 시체가 수백 년 동안 이케시아 주민들의 마음 속에 들끓고 있던 반란의 욕구를 폭발시킬까봐 우려하셨다.
신성전사의 시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인간의 몸집이 아니었다. 아주 끔찍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날 늦게 신성전사를 내 눈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때서야 사이작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된다…

4. 3막


우리는 무너져 버린 도시 성벽 앞 완만한 경사지에 정렬했다. 천 년도 전에 태양 여제가 성벽을 무너뜨린 이후, 슈리마는 우리가 그 잔해에 손도 대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했다. 우리가 그 옛날 철저히 패배했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상기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석공, 일꾼, 마법사 무리가 갓 잘라낸 화강암을 다듬고, 마법을 불어넣은 기계로 들어올리고, 차곡차곡 쌓아가며 성벽을 재건하고 있었다.
벽이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부심이 느껴졌다. 지금 바로 내 눈앞에서 영광의 이케시아가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보다 더욱 인상적인 장면은 이케시아로 이어지는 흙벽돌 도로를 가로질러 늘어선 군대였다. 삶은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도끼, 곡괭이, 창 같은 무기를 쥔, 만 명에 달하는 남자와 여자들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그날부터 대장장이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검과 방패, 화살촉을 만들었지만, 태양 황제가 우리의 봉기를 주시하고 그의 군대가 동쪽으로 행군해 도착하는 이날까지도 무장은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금지된 문서에서 고대 이케시아 군대를 묘사한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금빛과 은빛으로 반짝이는 용감한 전사들이 밀집 대형으로 늘어서 있었다. 지금의 우리 군대는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긍지만은 고대의 전사들 못지않았다. 군대 양쪽 옆구리에는 온몸이 비늘과 깃털로 덮인 탈론에 올라탄 2천 명의 병사가 배치되었다. 탈론들은 날카로운 발톱이 난 발로 연신 땅을 후벼파며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우리보다 약 15미터 앞에는 궁수 천 명이 길게 두 줄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들 앞 부드러운 흙에는 파란색 깃을 단 화살들이 꽂혀 있었다.
우리 군세 다수를 차지하는 보병은 3개 부대로 나뉘어 대열을 형성, 수백 년 동안이나 우리를 억압한 자들에 맞설 용기의 방벽이 되어주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대지에서 끌어낸 에너지가 공중에 서린 채 파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우리 군대를 감싸고 있었다. 슈리마도 분명 마법사들을 데려오겠지만, 우리의 마법으로도 저들의 힘에 맞설 수 있을 것이었다.
“전사들이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봐요.” 내가 말했다.
콜그림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평생 처음 보는 광경인데.”
“너무 감탄할 것 없어.” 사이작스가 말했다. “태양 황제는 다섯 군대를 거느리고 있지. 그중에 제일 수가 적은 군대가 오더라도 우리 머릿수의 세 배는 될 거야.”
나는 그렇게 병사가 많은 군대는 과연 어떤 위용일지 상상해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 정도 군대를 어떻게 격파하죠?” 나는 물었다.
사이작스는 내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네모반듯하게 다듬은 화강암을 쌓아 만든 계단형 피라미드 쪽으로 코하리를 인솔했다. 슈리마인의 시체들을 나무 말뚝에 찔러 그 앞에 버려두었기에, 썩은 고기를 먹는 새 무리가 주변 하늘에서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진홍빛과 쪽빛의 실크 천막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로브를 차려입은 사제들이 천막을 둘러싸고, 별 금속 지팡이로 허공에 복잡한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사제들이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끝없이 뭔가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마치 벌 한 무리가 내 두개골 속으로 들어오려고 기를 쓰는 것 같았다.
천막의 외곽선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잔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눈이 아파오며 눈물이 나는 바람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잇몸이 느슨해지며 치아가 한꺼번에 당장이라도 빠질 듯 흔들렸다. 입안에 시큼한 우유 맛이 감돌았다. 나는 한바탕 구역질을 하고 손등으로 입술을 쓱 닦았다. 손등에 피가 묻어난 것을 보고 놀랐고, 불안감이 왈칵 일었다.
“저건 대체 뭐죠?” 내가 물었다. “저 안에 뭐가 있는 건가요?”
사이작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새로운 무기라고 들었어. 전에 사아베라에서 지진이 났잖아? 그때 땅밑 깊은 곳에서 마법사들이 찾아냈다나 봐.”
“무슨 무기인데요?”
“그게 뭐 중요해?” 콜그림이 말했다. “저들 말로는 황금 갑옷을 입은 똥덩어리들을 이 세계에서 아예 없애버릴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우리보다 세 배나 많은 신성전사가 와도 쓸어버릴 수 있겠지.”
태양은 거의 중천에 다다랐지만, 냉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입이 갑자기 바짝 말랐다. 손끝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이게 공포심이란 건가? 그럴지도.
어쩌면, 그야말로 어쩌면이겠지만, 예감이란 건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슈리마 군대가 들이닥쳤다.

5. 4막


나는 그런 대군은 처음 보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일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먼지기둥이 사방에 피어오르며 자욱한 구름을 형성하더니 이 세상을 덮어버릴 듯 기세등등하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 구름 폭풍을 뚫고 청동 창을 치켜든 슈리마 전사들이 나타났다. 시야가 닿는 곳 전부가 그들이었다. 슈리마 군이 앞세운 황금빛 깃발과 태양 원판 토템이 정오의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경사지 위쪽에 있던 우리 코하리는 수만 명의 병사들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진군해 오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패배가 무엇인지 모르고, 이 세계 전체를 정복한 선조를 둔 군사였다. 황금빛 말을 탄 기병대가 양쪽 측면에 섰고, 맨 앞은 수백 대의 전차가 이끌었다. 거의 범선만큼이나 큰 묵직한 마차들에는 항해용 천문의 비슷한 전쟁용 기계가 실려 있었다. 쉴 새 없이 회전하는 구체 주위를 번개 비슷한 불꽃을 튀기며 치직거리는 불덩어리들이 공전하는, 기이한 모습이었다. 로브를 걸친 사제들이 그 옆을 따랐다. 하나같이 끝에 화염이 타오르는 지팡이를 들었고, 눈 먼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는 신성전사들이 있었다.
피, 공포, 두려움… 지금은 많은 것들이 내 마음에서 희미해져 버렸다. 하지만 신성전사들의 모습만은 이 순간이 지난 후에도 남아 있을 것이다…
신성전사는 모두 아홉 명인 듯했다. 자신들이 이끄는 병사들 위로 마치 탑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인간과 동물을 한데 섞은 듯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이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는 형상이자, 나타나서는 절대 안 되는 형상이었다. 청동과 옥으로 만든 방어구를 걸친 거인, 눈으로 보아도 믿을 수가 없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우리 쪽으로 머리를 돌린 신성전사의 우두머리는 상아처럼 매끄럽고 창백한 피부의 여자였다. 포효하는 사자를 본뜬 황금 투구를 써서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가린 것이 고맙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리 전열을 훑어보며 경멸을 드러내는 시선에서, 그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똑똑히 느껴졌다.
그 여자의 눈길이 지나간 자리에 손에 잡힐 듯 뚜렷한 공포심의 파도가 일었다.
우리 군대는 적의 어마어마한 군세에 움츠러들어 화살 한 대만 날아와도 혼비백산 흩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우리 측의 용감한 장교들이 진정하라는 고함을 질렀고, 궤멸 직전까지 갔던 분위기는 사라졌다. 하지만 나조차도 그들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갑자기 소변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안간힘을 다해 눌러 참았다. 나는 코하리다. 첫 출전한 전투에서 오줌을 지릴 수는 없다.
그래도 양손이 축축해지고 위장이 비비 꼬이며 구역질이 나는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달아나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달아나야 했다.
저런 군세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덩치 한 번 요란스럽군. 안 그래?” 콜그림이 말했다. 도열해 있던 병사들 사이에 신경질적인 웃음이 퍼져나갔다. 내 공포심도 누그러들었다.
“겉으로는 신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이작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저놈들은 불멸이 아니야. 피도 흘리고, 죽기도 한다.”
나는 그의 말에서 힘을 얻었다. 하지만 지금은 궁금해진다. 사이작스도 자신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우리는 이케시아인이다!” 사이작스가 사자후를 토했다. “우리는 이 땅에 처음 정착한 왕과 여왕들의 후손이다! 이 땅은 당연히,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머릿수로 불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적이 보낸 전사들은 노예에 불과하다. 아니면 돈으로 고용된 병사일 뿐이다.”
사이작스가 무기를 높이 치켜들자, 반들반들 닦인 도끼날에 햇빛이 반사되었다.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 순간 그가 요청하기만 했다면, 나는 그를 따라 이 세계의 끝까지라도 갔으리라.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싸울 것이다! 이 땅은 우리의 고향이며, 긍지 높은 사람들의 땅이며, 자유민들의 땅이다! 자유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코하리 부대에서 먼저 함성이 터져나왔고, 곧 다른 부대에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케-시-아! 이-케-시-아! 이-케-시-아!”
함성은 재건 중인 성벽에 반사되어 슈리마 군으로 날아갔다. 신성전사들이 옆의 수행원들에게 빠르게 뭔가 말했고, 수행원들은 측면 병사들에게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뛰어갔다. 거의 동시에 슈리마 군은 진군을 시작했다.
적군은 느릿느릿, 신중하게 다가왔다. 슈리마 전사들은 세 발짝 내딛을 때마다 창 자루로 방패를 두들겼다. 그 소리가 울릴 때마다 용기가 한 움큼씩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우리의 의지를 무너뜨리고, 곧 저들의 창이 우리를 찌를 것임을 알려주는 차분한 북소리 같았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가슴에서 튀어나올 듯 쿵쿵거렸다. 나는 힘을 얻기 위해, 그 꿋꿋한 모습에서 용기를 얻기 위해 사이작스를 보았다. 그의 턱은 꽉 다물려 있었고, 눈빛은 매서웠다. 두려움을 모르는 자, 의심을 거부하고 운명에 당당히 맞서는 영혼 그 자체였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사이작스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알 먹을래?”
내 쪽으로 내민 그의 손바닥에 껍질을 벗긴 삶은 알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뭘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지만.
“난 먹을게.” 콜그림이 알을 하나 집어들더니 덥석 반을 베어물었다. 사이작스는 나머지 하나를 입에 털어넣었다. 둘은 잠시 동안 말없이 알을 씹었다.
슈리마 군이 차츰차츰 다가왔다.
“알 맛있는데.” 콜그림이 평했다.
“난 알을 삶을 때 식초를 약간 넣거든.” 사이작스가 대답했다. “그럼 껍질이 잘 벗겨져.”
“똑똑한 걸.”
“고마워.”
나는 앞뒤로 고개를 돌려가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렇게 무지막지한 적이 진군해 오는데 그렇게 한가로운 대화를 주고받는 강심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두려움이 누그러지기는 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 웃음은 곧 빠르게 전파되었다.
코하리 부대 전체가 웃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엔가 우리 이케시아 군 전체가 영문도 모른 채 웃고 있었다. 우리를 짓누르던 두려움은 이제 날아가 버렸다. 새로운 결의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무기를 든 팔에 힘이 들어갔다.
슈리마 군은 우리 앞 약 2백 미터 거리에서 멈춰섰다. 공기가 기이한 질감으로 느껴졌다. 마치 주석 조각을 씹는 듯한 맛이 입 속을 감돌았다. 고개를 드는데 마침 적의 전쟁 기계에서 빙빙 돌아가던 불덩이가 눈부신 빛을 내는 것이 보였다. 순간 기계 주변의 사제들이 지팡이를 일제히 아래로 휙 내렸다.
불덩어리 하나가 기계에서 쏘아져나와 반원을 그리며 우리에게 날아왔다.
불덩어리는 우리 보병대 한가운데에 떨어졌고, 투명한 초록색 화염과 날카로운 소리를 내뿜으며 폭발했다. 곧 불덩어리가 하나 더 날아들었고, 또 하나가 날아왔다.
살이 타는 냄새가 번져나갔다. 구역질이 나고, 눈앞의 대학살에 겁이 덜컥 났다. 하지만 우리 전사들은 대열을 유지했다.
더 많은 불덩어리들이 이번에는 우리 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날아왔다. 하지만 땅에 떨어지기 전에 공중에서 불안하게 흔들거리더니, 날아오던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가 슈리마 창병대 한가운데에 떨어져 폭발했다.
나는 놀라움과 환희에 차서 우리 마법사들을 돌아보았다. 마법사들은 지팡이를 높이 쳐들고 있었고, 마법 에너지 불꽃이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팡이와 지팡이를 연결하고 있었다. 마법의 힘에 공기가 일렁거리면서 내 팔다리의 털도 일제히 일어섰다. 마치 우리 주변에 보이지 않는 베일이 내려앉았다가 들려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슈리마 전쟁 기계에서 불덩어리들이 잇달아 더 발사되었으나, 우리 군 주변을 감싼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막혀 공중에서 폭발해 버렸다.
우리 군에서 부상병들의 비명 소리보다 환호가 더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전쟁 기계의 목표물이 아니었던 것에 감사하며 길게 숨을 토해냈다. 동료 병사들이 가엾게도 불덩어리에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후방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들은 그대로 후방에 남고 싶은 유혹이 굴뚝 같았겠지만, 우리 이케시아인은 탐험가 왕들의 후손이 아니던가. 부상병을 옮긴 전사들은 한 명도 남김 없이 돌아와 대열에 다시 합류했다.
우리 마법사들은 부담감이 커 보였지만, 그래도 슈리마의 불덩어리 세례를 잘 막아내고 있었다. 나는 계단형 피라미드 꼭대기에 설치된 천막 쪽을 어깨 너머로 올려다보았다. 거기에서도 사제들이 안간힘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힘을 어디에 쓰고 있는 걸까? 나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저 천막 안에는 대체 어떤 무기가 들었으며, 우리는 언제 그걸 써볼 수 있을까?
“전투 대기!” 사이작스가 말했다. 나는 얼른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들이 이제 우리에게 덤벼들 거다. 우리 힘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지.”
과연 슈리마 군이 우리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우리 앞에 늘어선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고, 적 전사 수십 명이 죽었다. 청동 갑옷과 방패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이도 몇 있었지만, 거리가 가까운지라 우리의 화살이 저들의 흉갑을 가뿐히 뚫을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화살 세례가 슈리마 군을 강타했고, 곧장 세 번째 화살 공격이 퍼부어졌다.
슈리마 병사 수백 명이 픽픽 쓰러졌다. 대열이 삐뚤삐뚤해지더니 흐트러졌다.
“지금이다!” 사이작스가 포효했다. “돌격!”
보병대가 창을 낮춰 잡은 채 쐐기 모양의 대형을 이루며 달려나갔다. 나는 뒤쪽에서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떠밀리다시피 나아갔고, 간신히 칼집에서 칼을 뽑을 수 있었다. 나는 두려움을 몰아내려고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내 칼집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이제 슈리마 병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땋은 머리 갈래, 황금으로 만든 문장, 옷깃에 묻은 피도 볼 수 있었다. 내가 속삭이듯 말해도 저들에게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우리 군대는 벼락 같은 기세로 슈리마의 흐트러진 대열을 공격했다. 적의 몸에 꽂힌 창이 부르르 떨렸고, 충격을 받은 창자루가 쪼개졌다. 강력한 의지와 오랜 세월 억눌렀던 분노를 동력 삼아, 우리는 파죽지세로 슈리마의 전열 깊숙이까지 돌진했다. 슈리마 군은 대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분노 때문에 온몸에 힘이 솟구쳤다. 나는 검을 마구 휘둘렀다. 내가 처치한 적의 피가 내 몸에 튀었다.
내 귀에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내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
나는 되도록 사이작스와 콜그림 옆에 있으려 했다. 그 둘이 있는 곳이라면 슈리마인이 무수히 죽어갈 테니까. 사이작스가 거대한 창으로 적병을 십여 명 넘게 해치우는 모습은 보였지만, 더 이상 콜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사이작스도 밀려드는 적병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사이작스의 이름을 불렀지만, 내 목소리는 전장의 굉음에 묻혀 버렸다.
여러 명의 몸뚱이가 연신 내게 달려들고, 나를 잡아당기고, 내 얼굴을 할퀴었다. 그게 이케시아인인지 슈리마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창 하나가 내 가슴팍을 찔렀지만, 창끝이 흉갑을 뚫지 못하고 미끄러지면서 내 팔의 살갗을 찢고 지나갔다. 그 통증은 기억나지만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검을 들어 앞에서 고함을 지르는 남자의 얼굴을 노렸다. 남자는 쓰러졌고, 나는 그 시체를 넘어 나아갔다. 무자비한 폭력이 주는 기쁨에 두려움은 날아가 버렸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검술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나는 고기를 난도질하는 푸주한이었다.
나보다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 훨씬 뛰어난 사람들도 잇달아 죽어갔다. 나는 계속 전진했다. 휘몰아치는 살육의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맨살이 드러난 목이나 등이 보이기만 하면 무조건 공격했다. 은근하고 음침한 희열마저 느껴졌다. 오늘 전투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나는 동료 전사들 사이에서 고개를 당당히 들 수 있는 전과를 세우고 있었다. 우리 궁수들이 쏜 화살이 머리 위로 날아갔다. 우리 병사들이 지르는 함성은 자유의 노래였다.
바로 그때 슈리마 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처음에는 노예 전사 딱 한 명이 등을 보이고 도망가더니, 그것을 계기로 극심한 공포가 슈리마 군 전체에 들불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곧 슈리마 군의 전체 대형이 썰물처럼 언덕 아래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전에 사이작스가 이런 말을 했었다. 어떤 전사든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부대 전체가 무너질 때라고. 그때야말로 진짜 학살이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갈팡질팡하는 슈리마인들 틈으로 뚫고 들어갔다. 맨살의 등과 머리에 창과 도끼 세례를 퍼부었다. 슈리마인들은 더 이상 맞서 싸우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마구 짓밟으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유혈 사태였지만, 나는 수백 명을 베어넘기는 재미에 흠뻑 빠져버렸다.
내 눈에 다시 사이작스의 모습이 보였다. 탑처럼 우뚝 서서 창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중지!” 그가 외쳤다. “공격 중지!”
공격을 중지하라니? 나는 사이작스의 소심함에 욕을 퍼붓고 싶었다. 우리 병사들은 한껏 피가 끓어오른 상태고, 슈리마 군은 겁에 질려 도망치기에 바쁜데?
그때 나는 몰랐지만, 사이작스는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지점까지 왔는지 꿰뚫어보고 있었다.
“후퇴!” 사이작스가 소리쳤다. 그러자 사이작스가 간파한 것을 알아본 다른 전사들이 똑같은 말을 외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리 병사 중 아무도 사이작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모두들 승리감에 취해 전투를 계속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우리는 적을 한 명도 남김 없이 처치하고 싶었다. 수백 년이나 우리의 땅을 점거한 자들에게 인정사정 없는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나도 우리가 위험한 처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군의 최전선에서부터 비명과 피냄새가 밀려왔다. 토막난 무기들이 누가 장난삼아 던진 돌멩이처럼 뱅글뱅글 돌며 하늘로 날아올랐고, 뒤이어 그 무기의 주인이었던 시체들이 인형처럼 무력하게 날아올랐다.
공포에 질린 울부짖음이 터져나왔고, 자유의 노래는 뚝 끊겼다.
신성전사들이 전장에 뛰어든 것이었다.
그 중 셋이 우리 부대로 돌진했다. 인간처럼 움직이는 놈도 있었고, 굶주린 야수 그 자체인 놈도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들어올리기도 불가능한 정도로 큼직한 무기는 그 누구도 막거나 꺾을 수 없어 보였다. 신성전사들이 무기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십여 명이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우리 이케시아의 전사들이 놈들의 날에 찢기거나, 그 발에 짓밟히거나, 피투성이 누더기처럼 공중에 흩날렸다.
“물러나!” 사이작스가 외쳤다. “성벽까지 후퇴한다!”
그 어떤 무기로도 신성전사의 갑옷을 뚫을 수 없었다. 그들의 흉포함은 너무나 원시적이고 잔혹해서 온몸의 피가 얼어붙었다. 피부는 강철처럼 단단해서 창이 튕겨져 나왔고, 고막을 파고드는 포효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게 만들었다. 그중 하나는 맹금의 부리를 지녔고, 결이 거친 깃털이 난 날개로 공중에 날아올라 날카로운 발톱에서 뜨겁디뜨거운 파란 불꽃을 쏘았다. 나는 동료 병사가 그 불꽃을 맞자마자 한 줌 재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고 비명을 질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승리와 영광이 우리 것이라는 생각에 한껏 득의양양했던 기분은 유리잔 깨지듯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 대신 온몸에 느껴지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고통, 자비라고는 모르는 잔혹한 괴물이 벌일 상상도 할 수 없는 복수극을 절감하는 메스꺼운 공포감이었다.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를 잡더니 피로 물든 내 검을 들어올렸다.
“가자, 악사.” 사이작스가 나를 뒤로 떠밀며 말했다. “아직 싸울 일은 많아!”
나는 사이작스의 힘에 밀려 질질 끌려갔다.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리 군이 처음 정렬했던 곳까지 후퇴하는 동안 나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전열은 무너졌고, 패배는 확실했다.
그런데 신성전사들은 시체 더미 한가운데 우뚝 선 채 우리를 쫓아오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우리한테 무기가 있다고 했잖아요.” 내가 울부짖었다. “왜 그걸 안 쓰는 거죠?”
사이작스가 말했다. “쓰고 있어. 저길 봐!”

6. 5막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났다. 아니, 필멸의 존재 중에 그런 광경을 목격한 이는 없을 것이었다.
천막이 직선과 곡선의 갖가지 빛줄기를 뿜으면서 폭발했다. 둥근 형체의 보라색 에너지가 하늘로 치솟더니 거센 파도처럼 떨어져내렸다. 그 무지막지한 기세에 주변 사람들이 낙엽처럼 밀려나 땅에 뒹굴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날카로운 곡성이 허공을 찢었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곡성이 내 두개골 깊숙이 파고드는 바람에 나는 아직 전투의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마치 이 세상 전체가 두려움 때문에 괴성을 질러대는 것만 같았다. 칼로 쑤시는 듯한 메스꺼움이 뱃속을 헤집었다. 나는 옆으로 누워 헛구역질을 했다. 맑고 푸르렀던 하늘은 이제 며칠 전에 생긴 멍 같은 색이 되어 있었다. 황혼이 지고 있었지만 전에 본 적이 없는 기이한 색이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는 갖가지 잔상들이 깜박거리더니 선명하게 불타올랐다.
닥치는 대로 찢어발기는 발톱… 입을 떡 벌린 목구멍… 만물을 꿰뚫어 보는 눈…
나는 공포에 질려 훌쩍훌쩍 울었다.
그 중의 하나라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슈리마에 항복하고 싶었다.
탁하고 보기 싫은 청색과 보라색의, 악몽에나 나올 법한 빛줄기가 온 세상을 덮어버렸고, 머리 위쪽에서 내리꽂혔다가는 땅밑 깊숙한 어딘가에서부터 다시 올라왔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 사방을 돌아보았다. 내 주변의 세상이 종말을 맞고 있었다.
슈리마 군은 이케시아 밖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우리 사제들이 끌어낸 힘에—그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겁을 먹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적은 타격을 입고 물러나고 있었으니, 승리를 축하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건… 이건 승리라고 할 수 없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이런 결과를 두고 승리라며 기뻐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이건 소멸이라고 불러야 했다.
슈리마 군 한가운데에 보라색 빛을 피처럼 흘리는 심연이 입을 떡 벌렸다. 상아처럼 흰 피부의 여자 우두머리가 채찍 가닥처럼 생긴 물질에 온몸이 휩싸이고 있었다. 그녀는 검을 마구 휘두르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우리가 불러낸 힘은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깜박거리며 고동치는 빛이 흉물스러운 고치처럼 그녀의 몸을 덮으며 퍼져나갔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그 미끈미끈한 줄 같은 것이 땅바닥에서 피어오르거나 아예 아무 것도 없는 공중에서 생겨나서 슈리마 전사들을 움켜잡았고, 온몸을 휘감아 덮어버렸다. 어느 슈리마인은 손톱을 땅에 박고 버텼지만, 악취를 풍기는 촉수가 몸을 휘감자 점점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 기괴한 결말이 미리 예정된 것이기를, 그래서 중단시킬 수도 있는 것이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렸다.
깜박거리는 빛 속에 기묘한 형체들이 드러났지만, 너무 빨리 움직이고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뻗어나가며 부풀어오르는 형상으로, 타르 비슷한 기괴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형체들은 사람을 붙잡아 게걸스럽게 집어삼켜 버렸다. 그 꿀럭거리는 소리와 기묘한 괴성은 이 대지를 걷는 어떤 생명체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늘의 전투가 이런 끔찍한 현상으로 마무리되다니. 나는 우리 이케시아 사제들이 가동시킨 무기를 사용한 대가가 이런 것인지 궁금해졌다. 나는 슈리마 전사들이 겪는 고통에 냉담해지기로 마음먹고, 저들이 우리에게 수백 년 동안 가했던 온갖 괴로움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또다시 사이작스와 콜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고 두 사람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내가 조상의 이름에 걸맞은 능력이 있음을 입증했다. 내 팔에 새긴 인장에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했다.
나는 당당한 코하리다!
하늘이 그으으으… 하는 소리를 내면서 찌그러지고 휘어졌다. 폭풍 속에서 거대한 범선의 돛이 찢기는 듯한 소리였다. 나는 몸을 돌려 이케시아 쪽으로 뛰어가 다른 병사들과 합류했다. 한결같이 절박하고 겁먹은 표정이었다. 내 얼굴에도 똑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겠지.
우리가 이긴 건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슈리마인들은 사라졌다. 우리가 이 세상에 풀어 놓은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힘이 그들을 모두 삼켜버렸다. 미안하거나 안타깝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회한도 없었다. 명분을 찾는 마음 앞에서 두려움은 사라져 버렸다.
내 님차 검은 어디에선가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어깨에서 활을 벗어 하늘로 힘차게 들어올렸다. “이케시아!” 나는 고함을 쳤다. “이케시아!”
주변의 병사들이 호응하여 같이 “이케시아!”를 외쳤다. 그리고 우리는 입을 다물고 적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슈리마 군을 집어삼켰던 그 괴상한 물질은 이제 그들의 몸뚱이를 덮은 수의처럼 보였다. 표면은 파동치듯 떨리고 있었고, 번들거리는 물집 같은 것이 연신 부풀어올랐다가 터지면서 살아 있는 주머니 같은 것을 뱉어냈다. 주머니는 갓 태어난 새끼동물처럼 꿈틀거리다가 활짝 펴졌다.
갑자기 귀청이 떨어질 듯 크게 바위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지가 점점 크게 쩍쩍 갈라지며 나는 소리였고, 곧이어 사방팔방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땅이 흔들리는 바람에 나는 무릎을 꿇었다. 이케시아의 성벽, 먼 옛날 무너졌으나 지금 다시 쌓고 있던 성벽이 지축을 울리는 우르르릉 소리가 나자 맥없이 부서져 내렸다.
도시 안의 땅이 마구 갈라지며 먼지와 연기가 간헐천처럼 치솟았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건물이 무너져내리고 지면이 벌어진 자리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제1대 마법사 왕이 별 금속 지팡이를 두었던 탑과 궁전은 아예 통째로 균열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돌무더기와 파편뿐이었다. 내 사랑하는 도시가 한순간에 시커멓게 탄 뼈대만 남았다.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도시 여기저기에 깊은 협곡이 생겼고, 그 아래 입을 벌리고 있는 끔찍한 운명으로 떨어져내린 주민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이케시아!” 나는 마지막으로 크게 외쳤다.
그때 뭔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그 기척이 머리 위를 지나가는 바람에, 나는 움찔 했다. 아까 전투에서 보았던 맹금 머리의 신성전사였다. 놈은 제대로 날지 못해 비틀거렸고, 사지는 이미 반쯤 망가졌으며 땅에서 솟아나는 기괴한 물질에 먹혀 녹아내리고 있었다.
놈은 성치 않은 날개를 필사적으로 움직여 천막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막아야 했다. 나는 흑요석 촉이 달린 화살을 활시위에 먹이며 놈을 쫓아갔다.
놈은 휘청거리며 땅에 내려앉았다. 양 다리는 뒤틀렸고, 등에는 촉수가 무수히 뻗어나와 놈의 몸을 열심히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깃털과 머리 쪽의 살갗에는 흉터가 생기기 시작했다. 놈이 절뚝거리며 천막을 향해 걸어갔고 주변 사제들은 이미 목숨을 잃은 채였다. 그들의 피부는 기괴한 물질 때문인지 이미 울퉁불퉁해져 있었다.
신성전사의 양손에 화염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천막을 불태워 버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사이작스는 태양 황제가 더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놈들을 이기려면 우리가 보유한 무기가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활시위를 당기고 흑요석 화살촉으로 신성전사를 겨냥했다.
시위를 놓자, 화살은 정확히 날아가 녹아내리고 있는 놈의 머리에 명중했다.
신성전사는 쓰러졌고, 양손의 불길은 사그라들었다. 놈이 옆으로 몸을 돌리자 살점이 힘없이 늘어졌다. 그 아래에서 창백하고 동물의 힘줄처럼 길다란 물질이 생겨나는 모습이 보였다.
신성전사는 내 기척을 느꼈는지 맹금처럼 생긴 머리를 내 쪽으로 돌렸다. 한쪽 눈은 빛을 잃어 기이한 물질이 점점 그 위세를 떨치고 있었고, 다른 쪽 눈은 이미 심한 상처로 제 기능을 잃은 채였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멍청한 이케시아인이여?” 눈이 멀어버린 신성전사가 성대 안에서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내며 말했다.
나는 내 손으로 신성전사를 처치한 이 순간을 기념할 수 있는, 강렬하고 멋들어진 대답을 생각해 내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내게 떠오른 건 사실 뿐이었다. “우린 독립을 쟁취한 거다.”
“너희는… 절대 열어서는 안 되는… 문을… 열어버린 거다…” 신성전사는 공기가 새어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가… 우리 모두를… 파멸시킨 거…”
“빨리 죽어버려.” 내가 말했다.
신성전사는 웃음을 터뜨리려 했으나 목에서 나온 것은 단말마의 꾸르륵거리는 소리 뿐이었다. “죽어…? 아니… 이제… 더 끔찍한 일이… 그건… 마치 우리 모두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7. 6막


나는 신성전사의 머리에 박힌 화살을 뽑지 않기로 했다. 전사들이 절뚝거리며 전장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피투성이에 기진맥진한 모습이었고 눈에는 방금 본 공포스러운 광경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어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슈리마인들이 죽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혼란에 빠져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아무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케시아 앞쪽 풍경은 부자연스럽게 뒤틀리고 있었다. 슈리마인의 시체들은 옅은 빛깔의 흉측스러운 물질이 비비 꼬여 만들어진 밧줄에 감겨 흐릿해지더니, 표면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러고는 곤충의 겉껍질처럼 딱딱해지며 이리저리 금이 갔고, 금이 찢어지면 끈적끈적한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그런 광경을 보면 볼수록,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보다 훨씬 나쁜 일이 벌어질 것임을 알리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이 쩍쩍 갈라진 틈에서는 여전히 빛줄기가 새어나왔고,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 기묘한 소리가 지하 깊은 곳에서 울려나왔다. 귀청을 찢는 비명, 공기가 새는 쉬익 쉬익 소리, 미쳐 날뛰는 아우성이 한데 섞인 듯한 소리였다. 발 아래 아득한 깊이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이 일어나기 앞서 지반이 서서히 갈리는 것 같았다.
“저 아래 뭐가 있는 거야?” 모르는 남자가 물었다. 남자의 한 팔은 반투명한 막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막이 슬금슬금 목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남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무슨 둥지 같은 거겠지. 아니면 소굴이거나… 뭐 그런 거.”
그 아래 얼마나 끔찍스러운 괴물이 살고 있을지 생각해 보기도 싫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사이작스가 절뚝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은 가면이라도 쓴 듯 피칠갑이었고, 오른쪽 눈 위에서 턱까지 삐죽삐죽 이어진 상처에서 계속 피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사이작스가 피를 흘릴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이작스, 다쳤잖아요?” 내가 말했다.
“보기보다 더 안 좋아.”
“이게 끝인 건가요?” 내가 물었다.
“이케시아 쪽에서 보자면 그렇겠지.” 사이작스는 그렇게 대꾸하며 기병이 타던 말에게 다가가 고삐를 잡았다. 말은 겁을 먹고 안절부절 못했지만, 사이작스는 고삐를 꽉 잡아 제지하고는 안장에 훌쩍 올라탔다.
“난 슈리마를 물리칠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도 치렀을 거예요.” 나는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우리가 대가를 치르고도 남았어.” 사이작스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이겼잖아요.”
“슈리마인들이 죽긴 했지. 하지만 그들이 죽었다고 우리가 이긴 건 아냐.” 사이작스가 말했다. “자, 너도 말을 찾아봐. 어서 가자.”
“간다뇨? 무슨 말이세요?”
“이케시아는 끝났어. 보면 모르겠냐? 이케시아라는 도시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던 이 땅 전체가 죽은 거야. 주변을 둘러봐. 서두르지 않으면 우리도 이런 신세가 될 거야.”
사이작스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 버린다고…? 내가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케시아는 내 고향이에요.” 나는 말했다.
“이케시아에는 아무것도 안 남았어. 지금은 아니라 해도 조만간 그렇게 될 거야.”
그는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 손을 홱 뿌리쳤다.
“악사...” 사이작스는 서서히 다가오는 공포 쪽을 흘긋 돌아보며 말했다. “여긴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여기서 태어났으니 여기서 죽을 거예요.”
“그럼 네가 누구인지 계속 생각하도록 해. 그럴 수 있다면 말이야.” 그의 말에서 뻐근한 슬픔과 죄책감이 느껴졌다. “너한테 남은 건 그것뿐이니까.”
사이작스는 말머리를 돌려 어디론가 가 버렸다. 나는 그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8. 에필로그


내 이름은 악사무크 바르-초이 코하리 이카소르다.
악사무크는 내… 조상의 이름일 거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데, 무엇인지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한때 위대한 도시가 서 있던 폐허를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구덩이, 돌무더기, 세계라는 구조에 남은 찢겨진 균열뿐이다.
내 앞에 끔찍할 정도로 허무한 허공이 느껴진다.
악사무크는 왕이었던 것 같다. 어디의 왕인지는 모르겠다. 여기였던가? 무너지고 가라앉은 이 도시의 왕이었나?
바르나 초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카소르도 내게 뭔가 의미가 있는데, 그 기억도 사라져 버렸다. 내 정신과 기억이 있던 곳은 이제 아득한 공허가 차지하고 있다.
내 이름은 악사무크 바르-초이 코하리다.
코하리? 그게 뭐지?
내 팔에 표식이 있다. 두루마리로 감싼 검이다. 이건 노예의 표식인가? 내가 어떤 정복자의 소유물이었던가? 초록색 눈을 지녔고 오팔 목걸이를 건 여인이 기억난다. 누구였지? 내 아내인가? 여동생? 딸?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준 꽃의 향기는 기억난다.
내 이름은 악사무크 바르-초이다.
나는 그 이름을 되뇌고 또 되뇐다. 그 이름에 매달리면 서서히 진행되는 기억의 소거를 떨칠 수 있기라도 하듯이.
나는 그 이름을 잊고 싶지 않다. 내게 남은 건 그것뿐이니까.
내 이름은 악사무크다.
나는 소멸되고 있다. 그것은 알지만, 왜 그런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모른다.
내 안에서 무언가 지독한 것이 몸부림치고 있다.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모든 것이 풀려나간다.
나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어간다.
내 이름은
내 이름


[1] 스타크래프트 공식 소설 멩스크(I' Mengsk)의 저자인 그 그레이엄 맥닐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