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두희(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두희는 1883년 12월 16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 신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에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손영학, 김정연(金正演), 김정익(金正翼) 등과 협의한 끝에 3월 21일의 천지 장날을 거사일자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진행했다. 이후 3월 21일 아침 일찍 미리 제작해 둔 태극기를 장터에 가지고 갔고 광목을 사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만들어 놓고 군중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후 5시경 4백 명의 군중이 모이자, 그는 천지 장터의 중앙에 독립기와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군중이 이에 호응하자, 그는 오후 6시경 4백 명의 군중과 함께 길안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 면서기들에게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주재소 경찰이 제지하자, 그는 격분한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문을 파괴한 후 다시 장터로 돌아와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손영학, 김정연, 김정익이 주재소를 습격할 것을 제의하자 찬성했고, 오후 9시에 5백 명의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행진해 그곳을 포위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이를 제지하자 군중은 돌을 던져 주재소의 유리창과 문을 파괴했다. 자정 경에 주재소 내에 있던 경찰이 무차별 발포를 감행하자, 군중은 부득이 해산했다. 이후 경찰은 대대적인 검속을 벌였고, 장두희는 이때 체포되어 1919년 5월 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안동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30년 2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두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