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익

 

1. 이용구 암살 미수자 김정익
2. 3.1 운동 시위 주동자 김정익


1. 이용구 암살 미수자 김정익



성명
김정익(金貞益)
생몰
1898년 ~ ?
출생지
평안북도 평양시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김정익(金貞益)은 평양 사람이며 재판 기록에 21세로 기재된 것으로 보건대 1898년생으로 추정된다. 1909년 평양의 경흥야학교에 재학하던 중 나라를 망국으로 이끄는 매국노들을 처단하기로 결심해 이재명, 박태은 등과 함께 박태은의 집에서 매국노 처단을 결의했다. 이때 이재명은 지금의 망국 사태는 이완용 때문이라며 그를 먼저 처단할 것을 주장했지만, 김정익은 일진회를 설립한 뒤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이용구 처단이 급선무라고 반박했다. 이에 이재명, 이동수, 김병록이 이완용 처단을 맡고, 김정익과 조창호는 이용구를 처단하기로 결정했다.[1]
1909년 12월 23일, 이재명이 이완용을 습격해 거의 죽일 뻔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이후 일본 경찰은 이재명의 동지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는데 김정익 역시 이용구 암살을 실행하기 전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의 공판에서, 김정익은 이재명과 살해를 모의한 사실이 있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렇다. 이재명이가 이용구를 살해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하기 때문에 내가 그 말에 응하여 옳다고 말했다. 이용구가 왕년에는 5조약을 선언해서 국가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더니, 이번에 또 합방을 성명하니 이놈은 실로 죽어야 마땅할 놈이다. 그러므로 이에 함께 힘을 합하여 그놈을 죽이기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노라.

또, 그는 이용구 살해를 주장한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도서관에서 출발하여 박태은의 집에 갔을 그때에 박태은, 이응삼 등이 마주 앉아서 대한매일신보에 개재된 일진회합방성명문제의 보도를 읽고 있다가 분격을 이기지 못하여 이용구를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즉 이재명은 말하기를 현재 정부 당국자의 한 사람으로 있는 이완용을 죽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말하기를, 이용구란 놈이 불과 기천 명의 회원을 가진 일진회로서 자칭 백만이라고 하고 합방을 성명하니 이놈을 마땅히 죽여야할 것이고 또 사부의 이완용을 죽이는 것 보다도 사전에 이용구를 죽여서 미래에 있을 일을 재고하는 것이 국가에 유익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 후 이재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김정익은 징역 15년 형에 처해졌다. 이후 김정익의 생애는 알려진 바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정익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3.1 운동 시위 주동자 김정익



성명
김정익(金正翼)
생몰
1891년 ~ 1938년?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 오대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김정익(金正翼)은 경상북도 안동 사람이며, 1891년 생이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그는 손영학·김정연(金正演)·장두희(張斗熙) 등과 협의해 3월 21일 길안면 천지 장날을 거사일자로 정하고 준비했다. 이윽고 3월 21일 아침 미리 제작해둔 태극기를 가지고 장터에 나가 광목을 사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만들고 시위 군중이 모여들기를 기다렸다가 오후 5시경 4백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이자 천지 장터의 중앙 부근에 독립기와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 만세를 선창했다.
이후 오후 6시경 4백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길안면 면사무소로 달려가서 면장, 면서기들에게도 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때 주재소 경찰이 들어가는 걸 저지하자,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창문 등을 파괴한 뒤 장터로 돌아가 시위를 계속했다. 그는 주재소 습격을 계획하고 오후 9시경 5백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행진하여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 경찰이 발포하자, 결국 시위 군중은 해산했다. 이후 김정익은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손영학, 김정연과 함께 피신했지만 1920년 2월 11일 의성읍의 박재하(朴在夏) 자택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와 합류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려다가 일본 경찰이 급습하는 바람에 체포되었다. 그 후 1920년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후엔 조용히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1938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정익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그러나 재판 기록에서는 김정익이 이완용과 이용구를 동시에 처단하는 데 동의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