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을

 

鄭乙
(? - 1807)
19세기 중국 광동지방에서 활동했던 해적.
정일(鄭一)이라고도 하며, 정성공 집단의 후손이라고도 한다.[1] 그의 사후 광동의 해적집단은 그의 첩이었던 정일수(鄭一嫂)와 부하이자 동성애인이었던 장보자(張保仔) 등에게 넘어가며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적단으로 성장하게 된다.
18세기 중국과 베트남의 접경지대였던 장평은 양국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행정적 공백지대였다. 이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베트남의 영토였던 장평은 중국인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이들은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해적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해적활동은 1771년 베트남에서 일어난 떠이 썬의 난으로 급격히 대규모화 되었다.
떠이 썬 반란군은 동맹군중 하나로 장평의 해적집단을 고용하였고 이들에게 무역과 약탈의 권리를 주며 그들의 약탈품을 대리처분을 해주면서 장평의 중국인 해적집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틈을 타 장평의 소규모 해적은 수만명을 아우르는 대규모의 해적단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떠이 썬군이 응우옌 푹 아인에게 밀리면서 해적단은 위기를 맞게 되고 정을의 친척이었던 정칠은 떠이 썬의 최후 전투인 탕롱 공방전에서 하구를 지키다 전사한다. 그리고 기존의 해적기지였던 장평이 응우옌 푹 아인의 베트남 정부군에게 '소탕' 당했다. 이 상황에서 급격히 대규모로 불어났던 광동의 해적집단은 더이상의 해적활동에 한계를 느낄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대규모로 불어났지만 근거지를 잃어 생계의 위협을 느낀 광동의 해적집단을 해적연맹으로 발전시켜 통합한 사람이 정을로 1801년에 해적 선단의 사령관이었다가 광동성으로 향했다가 4년 안에 이들을 통합시켰다고 한다. 6개의 함대로 구성해 각 함대들마다 흑, 백, 적, 청, 황, 녹 등으로 구별했으며, 각 함대마다 활동 영역을 정하면서 싸우지 않기로 정하면서도 자율권을 부여했다.
1804년에는 포르투갈의 식민도시 마카오를 봉쇄했지만 몇 주 뒤에 쫓겨났으며, 1807년에는 해적 정크선 600척과 부하 3만명을 지휘해 15만명이 넘는 인원을 보유한 해적 연합을 구성했지만 이후 사망한다. 그 광동의 해적연합은 그의 첩 정일수와 부하 장보자에게 넘어가 악명을 떨치게 된다.

[1] 정성공의 부하가 대만의 함락 이후 광동으로 이주하였다고는 한다. 개인족보이니 신뢰성은 그리 높지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