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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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조무왕(潮武王)
''''''
정(鄭)
''''''
성공(成功)[1]
''''''
원해(元海)
'''부친'''
정지룡(鄭芝龍)
'''생몰 기간'''
1624년 8월 27일 ~ 1662년 6월 23일
'''재위 기간'''
1655년 ~ 1662년
1. 개요
2. 생애
2.1. 출생
2.2. 성장
2.3. 반청복명 운동
2.4. 대만 섬 정복
2.5. 그 이후
3. 현대에서의 평가
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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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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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아들, 대만의 아버지'''

- 조너선 클레멘츠(Jonathan Clements)[2]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군인, 정치가, 해적 또는 정씨 왕국(동녕왕국, 정씨왕조, 연평왕국)의 초대 국왕. 자는 명엄(明儼). 아명은 복송(福松).[3]
평생을 반청복명(反清復明)에 바쳤으며 국성야(國姓爺)라고도 불리고 있다. 서양에서는 민남어로 국성야의 발음인 "Kok-sèng-iâ"가 변한 콕싱아(Koxinga/Coxinga)로 알려졌다. 어머니는 일본인이며 고향도 일본이다. 이렇게 일본과 관련이 깊은 탓인지 일본에서도 제법 인기가 많은 편이다. 그가 태어난 나가사키히라도(平戶)에서는 그의 탄생 축제를 열기도 할 정도. 어찌 보면 한국인들이 고선지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기묘하게도 현대의 대만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중국인의 혈통이면서 대륙에서 밀려난 나라의 정통성을 이어 대륙을 차지한 거대 정권에 대항하고, 어쩐지 일본과도 관련이 깊다는 점 등.

2. 생애



2.1. 출생


아버지는 명 말기의 관리이자 해적이며 거상이었던 정지룡(鄭芝龍)이며, 어머니는 히라도번(平戶藩)의 번사 다가와 시치자에몬의 딸인 다가와 마쓰(田川松). 일본의 히라도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명나라(복건성)로 왔다. 이 때문에 대만일치시기에는 '대만 섬을 처음으로 정복한 일본인'으로서 선전되기도 하였다.
그의 어머니인 다가와 마쓰에 대해서 정성공까들은 그녀가 창녀라고 주장했고 정성공빠들은 그녀가 천황의 일족이라고 주장했는데 둘 다 사실일 가능성이 낮고 실제로는 중견 사무라이 가문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4] 하지만 시치자에몬이 정지룡을 포섭하기 위해 준비해둔 첩의 딸, 즉 기생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정지룡이 연회때 다가와 마쓰에게 접대를 받은 것이다. 다가와 가문이라고 보기엔 제대로 가문에 이름이 올라와 있지 않으며 다가와 마쓰란 다가와 가문의 マツ라는 여자로 알려져 있다. 한편 중국에선 정성공의 일본인 혈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가와 가문이 사실 중국계 일본인 가문이거나 중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지룡은 히라도 번 3대 번주인 마쓰우라 다카노부(松浦隆信)가[5] 주최한 연회에서 우연히 다가와와 만나 사랑에 빠졌고 동침하여 정성공을 낳게 되는데 이는 장래가 창창한 정지룡과 인맥을 쌓고 싶었던 다가와가 계획한 만남이었다. 당시 다가와는 20대 초반이었는데 당시 일본인의 평균 연령을 생각해 볼때 미망인이었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으며, 실제로 17세기에 정성공의 탄생 비화를 그려낸 책자들에서는 정지룡이 일본인 과부와 결혼하여 정성공을 낳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정지룡이 다가와와 동침하여 정성공을 낳을 때, 정지룡은 거상인 이단의 상단에 속해 있었다. 이단은 정지룡에게 자신의 부하인 안사제의 딸인 안씨와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정지룡은 정성공을 임신한 다가와를 두고 중국으로 건너가 안씨와 결혼하게 되었고 다가와는 홀몸으로 아들을 키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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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의 정성공 모자(母子)상
대만 타이난의 정성공 모자(母子)상.
모친 다가와의 모습에 대한 묘사부터 확연히 차이가 드러남을 보여준다
1624년 8월 정성공이 출생하게 되는데[6] 행운의 소나무란 뜻의 복송(福松), 일본어로 후쿠마쓰라는 아명을 얻었다. 이 아명에 대해서 해석이 분분한데 이를 중국 측에서는 복건성의 복자와 히라도 가문의 영주인 마쓰우라 가문의 마쓰(송)을 따온 것으로 보았다. 사실 이 마쓰는 복건과 마카오의 중국인들이 신봉하는 바다의 여신 마조(媽祖)[7]와도 발음이 같다. 일부는 여기에 주목하기도 한다. 또한 마쓰가 일본어로는 '기다리다'라는 뜻도 있는데 홀몸이 된 다가와가 기다린다는 의미로 붙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후 정성공은 어머니와 히라도에 살았는데 다가와는 정지룡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1629년 다른 남자와 결혼해 정성공의 이부 동생인 시치자에몬을 낳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순간에 이단의 사망 이후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복건성 앞 안해의 사실상 지배자가 되어 왕으로까지 불리던 정지룡이 그제서야 자신의 동생 정지연을 히라도에 파견하여 정성공과 다가와를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다가와는 새 남편과 두 번째 아이 때문에 중국행을 거절하였다. 이에 정지룡은 다른 동생인 정지아를 보내 다가와를 설득하는 한편, 정 안되겠으면 정성공이라도 보내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다가와는 7살 된 정성공을 아버지에게 보내게 된다.

2.2. 성장


히라도의 거리에서 성장하던 정성공은 난데없이 정지룡의 궁궐과도 같은 집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살게 되었다. 7살이던 정성공은 당연히 향수병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시달렸다고[8], 대만외지를 비롯한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정지룡은 자신의 장남에게 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9] 큰 인물이 되라는 뜻으로 대목이라는 자도 내려주었다.
정성공은 15세가 될 때까지 안해의 정씨 가문 저택에서 성장하였는데 이 시기에 정지룡이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은 상태라서 아버지를 자주 보진 못했고 중국인 유모와 계모, 그리고 정지룡의 삼촌들의 손에서 자랐다. 정지룡은 당시 명나라의 관리이긴 했지만 그는 밀수와 해적질로 쌓은 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명나라에게서 관직을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정성공은 그저 아버지를 명나라의 충신이자 수군제독으로만 알고 자랐다. 아마 아버지를 높여주려는 주변 인물들의 아부였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정성공의 훗날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정지룡은 아들 정성공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돈과 군사력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 즉 가문의 명예를 정성공에게서 얻고자 했다. 정지룡은 정성공에게 어렸을 때부터 유교 경전들을 가르쳤고 무술도 가르쳤는데 결과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정지룡의 교육으로 정성공이 충의를 다해 반청복명에 투신하여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정지룡이 죽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2.3. 반청복명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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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공의 세력 범위
빨강색: 정성공의 직할령, 주황색: 정성공의 영향권.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하고 청의 공격이 거세지자 아버지와 함께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을 남명의 2대 황제인 융무제(隆武帝)로 옹립하여 청에 대항하였고, 1647년에 아버지 정지룡이 청나라에 항복한[10] 후에는 아버지의 세력을 이어받아 하문 인근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후에 무역을 통하여 군비를 충당하는 한편 해징공과 절강, 복건, 광동 3성의 도독을 하사하겠다는 청나라의 회유를 거부하고 맹공을 퍼부어 1659년에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진강을 비롯한 강남 여러 거점을 점령한 다음에 명나라의 고도 남경(南京)까지 진격하여 포위하는 기염을 토한다.
하지만 명나라 출신 항장들의 계략에 넘어갔고 병사들의 군기를 어설프게 잡는 통에[11] 불만을 사서 반란 사태가 나는 통에 곧 청군에 패하게 되고 진강을 비롯한 주요 점령지를 모두 버리고 복건성 해안가의 근거지 금문도로 밀려나게 되었다.

2.4. 대만 섬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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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네덜란드 요새를 공격하는 정성공 군대
정성공은 청나라의 해안 봉쇄로 인해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1661년 4월 29일에 대만 섬(정확하게는 지금의 타이난)을 공격, 네덜란드 제국 세력들을 몰아내고 그 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때 포로로 잡은 수백명의 네덜란드 남성을 고문, 학살하고 여성들은 노예로 삼았다.[12] 강희제는 이에 맞서 해안의 5개 성 백성들을 해안에서 20km 떨어진 '''내륙으로 옮기고 그 이상 넘어서 바닷가 가까이로 가는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한다'''는 천계령(遷界令)을 내려 대응하였다.[13] 그래도 대만 섬에는 네덜란드인들이 남겨놓고 간 사탕수수 농장도 있었고 유능한 막료들도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망하지 않고 잘 버텨낼 수 있었다.
남명의 황제 융무제는 그를 듬직하게 여겨 자신의 부마로 삼고 싶다고 했지만 딸이 없어서 대신 국성(國姓)인 주(朱)씨를 하사했다. 그리하여 국성야(國姓爺)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서양에서는 국성야라는 별명의 남중국 방언 발음인 콕싱아(Koxinga)로 알려졌다.[14] 난터우 현에 궈싱이란 지명이 있는데 여기서 따온 것.

2.5. 그 이후


스페인필리핀 총독 돈 사비냐노 만리케 데 라라(Don Sabiniano Manrique de Lara)에게 너네 '소왕국'을 정복할 수 있지만 불쌍해서 봐준다면서 순순히 조공을 바치라는 오만한 국서를 보냈다.[15] 이에 스페인 총독은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필리핀의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대만 섬의 경우처럼 중국인들이 필리핀에 있을 경우 병력이 분산되어 방어에 애로사항이 꽃핀다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중국인들을 추방했는데 그래도 재산을 가지고 갈 수 있게 허락하였다. 하지만 '''스페인인들이 중국인들을 보복으로 몰살할 것'''이란 헛소문이 퍼져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에는 선교사들의 중재 하에 꽤 점잖게 끝났고 중국인들은 대만 섬으로 떠났다. 이들이 되돌아 온 건 스페인의 필리핀 영유권이 확정된 나중 일이고 중국인들은 그때 쯤 스페인화되어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스페인어를 쓰게 된다. 필리핀의 국부 호세 리잘이 바로 스페인화된 중국계 혈통이다.[16]
만리케 데 라라는 정성공을 "중국 해안의 지배자이자 통치자인 정성공 귀하"라고 부르며 예의바르지만 극도의 조롱을 담고 있는 국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쳐들어 올 수 있으면 와보세요 저희가 소왕국이건 대왕국이건 당신들이 여기 쳐들어올 힘이 있기나 하신가요? 듣자니 당신들 만주족은 물론 네덜란드랑도 죄다 원수졌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귀하의 무례 때문에 앞으로 귀하와 무역을 봉쇄하겠습니다. 무역을 다시 하고 싶으시면 사과를 해주세요."

그러나 이 편지는 정성공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한편 정성공은 정지룡의 빈소를 지키다가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필리핀에 중국인 학살이 일어나고 있다는 헛소문까지 듣자 분기탱천하여 '''만주족과 연합하여'''(!) 필리핀을 치겠다는 맛간 소리까지 늘어놓았다. 병상에서 고열에 시달리며 온갖 헛소리를 늘어놓는 정성공에게 부하들은 "온 세계가 당신께 숨죽이고 있습니다. 스페인도 그렇습니다."라며 진정시켰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병 때문에 골골대는 상황[17]에서도 필리핀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이듬해인 1662년에 남명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18] 병사했다. 죽기 직전에 정성공은 "내 소임을 다 하지 못했으니, 무슨 낯으로 하늘에서 황제 폐하를 볼 수 있겠느냐! 어찌 뵐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끝내 정성공이 사망함과 동시에 반청복명의 기치는 장식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영력제 이후의 새 명 황제도 옹립되지 않게 된다.[19] 오히려 정성공 사후엔 정씨 왕국은 청나라에 조공국으로 받아달라고 징징거리는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정성공의 아들이며 2대 왕인 정경삼번의 난 때는 청나라에 반기를 든 오삼계 세력에 호응했고 본토수복을 위해 군대를 보내 일시적으로나마 복건성을 다시 차지하기도 했으며, 천자로 모시는 명나라가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정씨 스스로 황제라고 하지는 않고 제후를 계속 자처했으니 반청복명의 기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경이 확보한 복건성 영토는 경정충과 청나라에게 잃었고, 실의에 빠진 정경이 1681년에 죽자 정씨 왕국은 정경이 지명한 후계자인 정극장과 정극장의 동생 정극상의 내분으로 인해 조금씩 몰락하게 된다. 손자인 정극상 대에 가서 세력이 완전히 분열된 뒤 1683년 청이 정성공 휘하의 장수였던 시랑의 지휘 아래 해군을 편성해 대규모 원정을 오자 중과부적으로 항복함으로써 정씨 왕국은 멸망했다. 청나라는 정씨 가문의 명나라에 대한 충정을 높게 평가했기에 정씨 가문은 정씨 왕국 멸망 후에도 죽지 않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무역전담항인 인공섬 데지마가 만들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설탕 등의 무역품목들을 독점하고 폭리를 취해 동중국해의 무역을 주름잡아 포르투갈네덜란드의 상인들이 반발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고, 이게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쳐 포르투갈은 아예 일본에서 철수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3. 현대에서의 평가


'''"천년이 지나도, 세상은 이 일을 이야기 하리라" '''

- 장황언(張煌言. 1620∼1664)

실상 역사에 이름을 떨친 최초의 대만인이다. 대만 각 지방의 지방사를 이야기할 때 맨 처음에 언급되는 인물은 대부분 이 사람이다.[20]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대만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만한 일도 없다시피 했고. 타국의 사례에 비교하자면 싱가포르의 개척자인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와 비슷.
그래서 대만에서는 높게 평가받고 있으며 타이난에는 그의 이름을 딴 대학도 세워졌다. 학교명은 국립성공대학.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대 중 하나이다. 중국 본토에서도 그를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대만은 우리땅 → 우리 땅을 먹은 나쁜 네덜란드 놈들 → 나쁜 놈들을 조진 정성공은 영웅'이라는 논리. 정성공이 네덜란드를 물리치는 내용을 다룬 영화가 나왔을 정도. 위에 서술했듯이 어머니가 일본인이기에 일본에서도 추앙받았다. 반청복명을 외치던 조선에서도 정성공을 굉장히 좋아했으며, 인조에게 실망한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는 "청나라에 항복하여 명나라를 배신한 인조를 정성공이 징벌하러 올 것이다."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것이 후일 정감록에 나오는 정도령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대만 섬이 중국이나 중국 대륙의 한족과 본격적인 관련을 맺게 된 계기가 이 사람이기에[21] 대만 독립 세력들은 그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대만에서는 정성공이 처음 상륙한 4월 29일에, 매년 타이난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서 기념 행사를 거행하고 있는데, 독립 성향 인사들의 비판적인 시각 때문에 이 행사의 위상도 다소 미묘해지고 있다. 차이잉원 정부의 집권 2년째인 2017년 행사에는 그동안 중앙정부의 내정부장(한국의 행정자치부 장관격)이 참석, 주관했던 것이 타이난 시장 주관으로 격하되었다.[22]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나뉘는 편이다. 위의 대만 독립 세력과 비슷하게 한족 제국주의와 대만 원주민 탄압의 시작으로 보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23], 정성공이 대만을 정복하면서 명나라 유민 세력인 중국인들과 대만 원주민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며 적당한 주변 관계를 맺고 이들의 협조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꾸렸기 꽤 호의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원주민들이 산골짜기로 쫓겨나게 된 건 정씨 왕국 멸망 이후 청나라가 대만 섬을 다스리면서 한족 불법 이민이 본격화한 이후이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2016년에는 차이잉원이 정성공의 원주민 학살에 사과하기도 했다. 또한 근래에는 동상이 먹물테러를 당하고 '정성공의 영혼이 꿈에서 원주민 학살에 대하여 사과하였다'는 황당한 내용의 뉴스까지 뜰 정도다. 다만 대만 원주민은 한족에 완전히 동화된 평지 원주민을 제외하면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대만에서 위인 대접받는 정성공에 대한 평가 자체가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성공 본인의 행적을 보면 절망적인 정세 하에서 3번왕들처럼 청나라로 변절하였더라면 보장된 부귀영화를 준엄히 거부하고 이민족인 청과 계속해서 투쟁을 벌이고 명나라의 영토를 회복하고 황제를 다시 옹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점 때문에 마지막까지 명나라와 황제를 위해 충성을 바친 충신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송나라 시대의 비운의 명장 악비와 더불어 '명나라의 악비'로 평가되고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평가도 상당한데 끝까지 청나라에 항전하려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의외로 충신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면이 많다. 명나라 황실에 대하여 존대하긴 했지만 실제 권력은 정씨가 잡은, 이른바 조조와 비슷한 포지션이였고, 다른 반청 저항군 통솔자인 이정국에게도 제대로 협력하지 않는 등[24], 자기 잇속을 채우기에 우선인 모습을 보여준 적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변인들과의 관계도 썩 좋지 않았기도 하였으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시랑. 유능한 장수와 반목하여 청나라에 귀순하게 하여 스스로 패배 플래그를 세웠다.
사실 이런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정성공 본인은 중국에서나 대만에서나 모두 동기나 인성, 그리고 행적은 무시한 채 어쨌든 네덜란드 손에서 대만 섬을 빼앗았다는 사실 하나만 보고 영웅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따지고보면 대만 정복도 반청복명이라는 민족적 대의보다는 근거지 확보 같은 현실적인 원인 때문이었다.
중화민국 해군의 호위함(frigate) 중에 '청궁급(成功級)'(미 해군의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의 라이선스 생산)이 존재한다. 중국 해군은 이에 대항한다는 의미를 포함하여 앞으로 취역할 항공모함시랑을 함명으로 붙이기로 했으나 결국 취소되고 실제 항공모함 이름은 랴오닝급이 되었다. 하지만 중국 해군에도 해사생도 훈련함으로 정성공함이 존재한다. 즉 양측 해군에서 모두 함명으로 붙여 기릴 만큼 존경받는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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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臺南)에 있는 정성공을 모시는 사원
중국에서도 정성공 탄생 380주년인 2004년에, 정성공의 동상을 세웠다. 38미터 크기로, 세계에서 가장 큰 '기마 동상'이었으나 2010년 40미터짜리 칭기스 칸 동상몽골에 세워지면서 기록이 깨졌다. 사실 38m라는 높이는 자유의 여신상만 해도 48m, 세계 최대 동상인 중국 허난성의 황금 부처상 128m에 비교하면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억울하게 사형당한 원숭환처럼 절망적인 정세에서도 끝까지 명나라 황제에게 충성한 점 때문인지 청나라에서도 정씨 가문의 충심을 높이 사 보복을 하지 않았고 현재 중국에서도 관우, 악비, 원숭환과 같이 꽤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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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시리즈에서는 10편의 스폐셜 시디부터 11편까지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육손의 하위호환이다. 물론 육손의 하위호환이니 능력치도 좋지만, 역사에서 본인의 인간관계가 썩 좋지 않았단 걸 생각하면 저 매력치는 과연.... 사실 대만과 중국에서도 정성공이 위인이긴 하지만, 특히 코에이가 일본 회사임을 감안하면 일본인 하프라는 혈통 버프가 능력치 고평가에 작용했을 가능성도 크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91/무력 68/지력 82/정치력 84/매력 94에 특기 16개 특히 일부를 제외한 고대무장 중에서 명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1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특기는 수신#s-4. 병종 적성은 수군 S,/창병, 극병, 기병은 A. 능력치는 통솔력 90/무력 72/지력 80/정치력 85/매력 93으로 그럭저럭 쓸 만하다.
게임인 크루세이더 퀘스트에서 이 정성공을 모티브로 한 정성공(크루세이더 퀘스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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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어병음 표기는 Zhèng Chénggōng.[2] 영국의 작가로, 2004년에 쓴 정성공의 전기 <해적왕: 국성야(國姓爺)와 명(明) 왕조의 몰락(The Pirate King: Coxinga and the Fall of the Ming Dynasty)>의 한국어판(2008년에 삼우반 출판사에서 <해적왕 정성공>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했다. 역자는 허강) 부제이다. 이 사람은 아니메 연구로 석사 논문을 쓴 적도 있고 도고 헤이하치로에 대한 전기인 <도고 제독: 동방의 넬슨(Admiral Togo: Nelson of the East)>을 쓰기도 했다. 영국의 일본 만화 매체인 『망가맥스』의 편집장을 지내기도.[3] 일본 이름이다. 일본식으로 읽으면 후쿠마쓰(ふくまつ).[4] 다가와 가문은 현재도 일본에 잘 살고 있다.[5] 재미있게도 히라도 번주 가문인 마쓰우라(松浦)는 헤이안 시대부터 일본에서 수군(해적)으로 활약했던 해상 세력인 마쓰우라토(松浦党)의 당주, 즉 해적 출신이었다. 고려 말 왜구의 거점으로 지목된 삼도(三島) 가운데 한 곳이 마쓰우라토의 마쓰우라(나머지 두 곳은 쓰시마이키 섬)였을 정도. 히라도에는 에도 막부 이전까지 네덜란드 상인들이 교역하는 상관(商館)이 있었고 마쓰우라 가문은 이곳에서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부를 쌓았지만 에도 막부쇄국정책을 선포하고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을 나가사키데지마로 옮겨버리면서 쇠락, 지금은 일본의 한적한 어촌 정도로 남았다.[6] 정성공이 태어나기 전날에 대만에서는 거대한 태풍이 몰아쳤고 그 태풍 속에서 한 마리의 고래가 춤을 추었다고 하며, 다음날 정성공의 어머니 마쓰가 바닷가에 나오자 폭풍우가 잠잠해졌는데, 마쓰는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다 산통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길에서 정성공을 낳았다고 한다. 마쓰가 정성공을 잉태할 때 태몽이 바다에서 나타난 거대한 고래가 그녀의 품으로 뛰어드는 꿈이었기도 해서 정성공은 평생 고래를 자신의 수호 동물로 생각했고, 정성공이 죽기 전에는 대만 바닷가에 죽은 고래 시체가 떠내려왔다고 한다.(출처: 조너선 클레멘스 <해적왕 정성공>)[7] 마조(마쓰)는 다른 이름으로는 천비(天妃)라고도 하며, 원래 송나라 때 어느 관리의 딸로 16살 때 마을 사람들의 병을 치유해 주는 등의 이적을 보이며 주민들로부터 통현영녀(通賢靈女)라 불리며 숭상받았지만, 28세 때 아버지가 바닷가에 나갔다가 행방불명되자 충격을 받고 자신의 능력에 대해 회의하다 아미산(峨嵋山)으로 들어가 도교 수행을 했다. 이후 아버지를 찾아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났다가 그녀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맞고 마는데(...) 시신은 푸젠 성 앞바다의 섬에 떠내려왔다고 한다. 이후 절강성 등 중국 바닷가 지역에서는 마조를 바다의 여신으로 받들게 되었다고. 천리안(千里眼)과 순풍이(順風耳)라는 두 악신을 감화시켜 수행원으로 데리고 다닌다고 한다. '''바다에서 조난당해 죽은 사람을 바다의 여신으로 모신다'''는 점에서 보면 원령 숭배 신앙의 연장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뱃길로 중국에 온 고려, 조선의 사신들도 사문도(沙門島)의 마쓰 사당에 와서 바닷길의 안전을 기도했다고 한다. 심지어 중국을 오가던 상인들을 통해서 베트남, 류큐, 일본에까지 마쓰 여신을 모시는 사당(신사)이 세워지기도 했다. 마카오의 이름이 마쓰 여신을 모신 사당(媽祖閣)에서 유래했다는 설은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동남해 및 제주 바닷가에 주로 퍼져 있는 영등신(영등할매) 신앙과 관련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가능성을 지적하는 설도 있다.[8] 또한 자신의 씨다른 동생과도 어려서 친했던 사이였기에 편지로 계속 교류했다고 한다.[9] 엄밀히 말하자면 다가와가 정성공을 임신했을때 정지룡 자신이 지어주었던 이름이지만 정지룡이 중국에 건너가면서 쓰인 적이 없는 이름이라 하겠다.[10] 정지룡은 이후에 아들인 정성공의 회유에 실패하여 참수당한다. 안습[11] '''농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닥치고 사형''' 급으로 엄하게 군기를 잡았는데, 잘 나갈 때야 이렇게 군기를 잡아도 별 문제 없었지만, 점점 전황이 악화되면서 이런 군기잡기로 인한 불만이 폭발하게 된다. 정성공은 반청복명을 위해서 본토의 민심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기에 계속 군기를 엄하게 잡으려 했지만, 그 부하들 몇몇이 당면한 병사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약탈을 허용하기에 이르고, 결국 상황이 개판으로 흘러간다.[12] 정성공 자신도 전직 네덜란드 관료였던 선교사 Antonius Hambroek를 참수하고 그의 딸인 백인 소녀를 첩으로 삼기도 했다.[13] 이 천계령을 제의한 것이 정성공의 부하로 청에 투항한 황오(黃梧)라는 사람이었다.[14] 영문판을 비롯해 서양권 위키백과 일부는 아예 '정성공'이라는 본명 대신 '콕싱아'로 항목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15]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대만처럼 필리핀은 스페인에게 정복된지 얼마 안된 땅이었고 본국은 너무 멀었다.[16] 리잘은 참고로 스스로를 철저히 스페인 사람이라고 정체성을 두었다. 그럼에도 필리핀을 고향으로 여겼기에 독립운동을 한 것.[17] 정성공이 하루는 바닷가에 나갔다가 겁에 질린 눈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리키며 "저 쌓여 있는 참수된 시신들을 어서 치워라! 오, 저 시신들이 자신들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를 나에게 묻기 위해 왔다!"며 벌벌 떨었다고 한다.(출처: 조너선 클레멘스 <해적왕 정성공>)[18] 영력제를 죽인 것은 정성공과 같은 한족 출신으로 청에 투항한 오삼계였다. 오삼계는 나중에 청나라에 맞서 삼번의 난을 일으키면서 영력제의 무덤을 찾아가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만, 그게 진심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삼계에게 호응하는 옛 명나라의 유신이나 사대부는 한 명도 없었다.[19] 정성공의 후계자인 정경이 새 명나라 황제 후보자를 왕으로 봉해 대접하긴 했다.[20] 대만 원주민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허나 정성공은 대만을 복명반청의 기지로 생각하였을 뿐 자기 자신은 철저히 중화인으로 생각한 중국인이었다. 이런 점은 나중에 대만을 통치하지만 평생 자신을 중국인이라 보았던 장제스와 비슷하다.[21] 대만 내 독립파 중에는 비슷한 이유로, 중화민국의 국부 쑨원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22] 타이난은 대만에서 민주진보당을 비롯한 대만 독립 세력이 초강세를 보이는 지역이다.[23] 정성공은 해적으로서 대만 원주민이나 중국인 그리고 네덜란드인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기도 했다.[24] 이때 이정국은 십여만 군사를 동원하여 광동을 공격했고, 맹렬한 공세에 순치제도 버티지 못해서 장강 이남은 포기하자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때 이정국은 정성공에게 협공 좀 해달라고 편지를 9통이나 보냈지만, 정성공은 이걸 씹었다. 청나라라는 외적을 물리치면 본인이 할거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지원을 받지 못한 이정국의 작전은 실패했고, 반청복명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 다만 정성공은 주율건을 받들었고 이정국은 주유랑을 받들었었으며, 더우기 이정국도 정성공에게 도움을 요청한 게 정성공의 힘을 소진시켜 자신의 위치를 강화시키려던 것도 있었다. 어차피 장헌충 따라다니던 도적 이정국이나, 해적 정성공이나, 다 도긴개긴이니 누굴 잘했다 잘못했다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