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학수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학수'''
'''鄭學壽'''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1년
경상도 영해도호부 서면 신리동
(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color=#fff> '''사망'''
1930년 6월 7일
경상북도 영덕군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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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학수는 1871년 경상도 영해도호부 서면 신리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이수각(李壽珏) 등으로부터 독립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고받자 찬동한 뒤 3월 19일 창수동 소재 창수경찰관주재소 앞에 집결하여 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이수각 등 지도부의 지휘에 따라 앞장서서 주재소로 들어가 사무실 객방 및 주임순사 숙소를 부수는 한편, 주재소 공문서와 물품 등을 파괴하였다. 이어 창수동의 오용이(吳龍伊), 이강복(李康福), 박석문(朴石文)의 집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이후 집집마다 감추어 두었던 주임순사 타카기 이사부로(高木伊三郞) 소유의 흑칠자 겹하오리 3매와 잡품 약 215종, 순사보 송상구의 소유의 서적 156책과 잡품 5종, 순사 권찬규 소유의 서적 85책과 잡품 2종, 순사 김경수 소유의 서적 49책과 잡품 약 3종을 파기한 다음 철수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정학수는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방해,상해,건조물손괴,기물손괴,공문서훼기,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후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0년 6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2010년 정학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