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데프레
1. 개요
'''Jedeprae / 제데프레'''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 쿠푸왕의 뒤를 이어서 파라오가 된 인물이며, 20세기초의 고고학 발굴로 실체가 알려진 인물이지만 초기 고고학 발굴 과정의 억측과 실수로 큰 오해를 받은 인물이다.
2.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패륜아?
재위기간에 대해서 일반적인 이집트 왕가의 연대표로 알려진 튜린왕가 역대표에 의하면 8년 동안 통치했다는 기록이 있어 여태까지 8년이 정설로 알려졌지만, 튜린왕가 역대표는 제4왕조와 비교해서 300년이나 뒤에 만들어진 것이라서 정확한지에 대해 학자들은 신빙성을 의심하는 기류가 있다. 오히려 "태양의 배"가 발견된 대피라미드 근처의 구덩이에서 발견된 문자기록에는 23년까지 통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대 이집트는 보통 2년마다 한 번씩 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문자기록에 "제데프레가 11번째 인구조사를 한 해"라는 문구가 나와있기 때문. 2년마다하는 인구조사를 11번했다면 22년에서 23년의 통치기간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제기된다.
그의 존재는 기록상에서만 있었으나, 그의 실체가 드러난 건 1907년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샤시나를 주축으로한 팀이 아브 로와슈 발굴로 부터였다. 샤시나는 아브 로와슈를 발굴하여 제데프레의 조각상들을 다수 발굴했다. 그런데 이 조각상들이 파괴된 채로 묻혀있었고, 제데프레의 피라미드로 추정되는 거대 건축물이 파괴된 채로 발견되기도 했다.
그동안 기자의 3대 피라미드의 주인공이 쿠푸,카프레,멘카우레로 알려져있었기 때문에 제데프레의 존재는 새롭게 떠오른 상황이었고 샤시나는 아부 로와슈 발굴성과를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와 연결해서 제데프레를 정당한 계승자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로 추정했다.
샤시나는 아부 로와슈에서 발견된 제데프레의 조각상들이 파괴된것, 그리고 제데프레의 피라미드로 추정되는 거대한 건축물이 파괴된것, 제데프레의 피라미드로 추정되는 건물이 쿠푸,카프레,멘카우레의 피라미드가 있던 기자가 아닌 기자에서 떨어진 아부 로와슈에서 발견된것을 들어서 제데프레가 쿠푸왕의 후계자이자 자신의 형인 카와브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정통성이 부족했던 제데프레는 자신의 피라미드를 기자가 아닌 아부 로와슈에 세웠다고 본 것이다. 제데프레의 통치기간이 8년(혹은 11년)으로 짧은건 이런 찬탈을 한 제데프레를 동생인 카프레가 제데프레에게 들고 일어나 그를 제거했으며, 아부 로와슈에 있던 제데프레의 피라미드를 파괴하고 조각상도 파괴해서 묻어버렸다고 보았다. 사실 이집트 역사에서 이런 식의 기록말살형과 같은 조치들은 왕왕 있던터라 샤시나는 제데프레도 이런 기록말살형을 당한 것이라 주장했다.
3. 최근의 연구
그러나 이후 아부 로와슈에 대한 발굴작업 등이 이어지고, 새로운 발견과 연구가 거듭되면서 제데프레가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패륜아라는 주장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우선 제데프레가 과연 왕위를 찬탈했는가에 대해선 뚜렷한 근거가 없다는 게 학자들의 결론이다. 학자들은 제데프레의 형 카와브가 계승자였던 건 맞으나 그가 승계를 하지 못한건 제데프레가 살해했다기보다는 젊어서 병사했을 거라고 보고있다. 만약 카와브가 병사했다면 제데프레는 동생의 자격으로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카와브의 딸인 메레산크의 무덤에서 제데프레의 이름이 적힌 카르투슈가 발견된 걸로 볼 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만약 이전의 연구대로 제데프레가 카와브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거라면 메레산크에게는 제데프레가 원수가 되는데 자신의 무덤에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의 이름을 새겨넣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학자들은 제데프레가 쿠푸의 대피라미드 완공을 마무리짓고, 쿠푸왕의 장례를 치루면서 치세를 시작했을 것으로 보고있다. 특히 대피라미드 인근에서 발견된 소위 "태양의 배"도 제데프레가 고안하고 만들게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근거는 제데프레의 이름에서 나오는데 아버지 쿠푸의 경우에는 태양을 의미하는 "레"라는 이름과 무관했으나, 제데프레의 경우는 "레"라는 이름을 쓰고있기 때문에 제데프레의 통치기간에 이집트의 "레" 즉 태양신 신앙이 확립되었을것이라고 보고있다. 이런 추론의 근거는 대피라미드 근처에서 발견된 태양의배가 있던 구덩이에 적혀진 이름으로 드러났다. 이 구덩이의 벽면에 제데프레의 카르투슈가 발견되었기 때문.
또한 피라미드와 더불어 유명한 스핑크스도 제데프레가 건축했을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일반적으로 스핑크스는 카프레의 얼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게 일반적인 정설이었으나 최근 학자들의 연구는 스핑크스의 얼굴은 카프레 보다는 오히려 쿠푸를 닮았다고 보고있다. 또한 제데프레와 무관하지 않은 곳은 아브 로와슈에서 스핑크스의 머리와 사자몸통의 조각상이 발견되어 제데프레가 아버지 쿠푸의 부활을 바라면서 한편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널리 알리는 차원에서 스핑크스를 세웠을것이라는 추론이 나오고있는것. 이 추론의 근거로 그간 스핑크스를 건설한걸로 알려진 카프레가 정작 자신의 피라미드와 장제전(신전)을 연결하는 둑길을 스핑크스를 우회해서 건설한것을 들고있다. 만약 카프레가 자신을 위해서 스핑크스를 건설했다면 오히려 장제전과 스핑크스, 피라미드를 일직선으로 연결했을 것이다. 이는 스핑크스가 카프레가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전부터 이미 있었을 것이고 최근 스핑크스에 대한 연구로 스핑크스의 건설시기가 카프레의 시기보다 더 오래되었을 것이라는 추론과도 일맥상통하다.
또한 에밀 샤시나가 제데프레를 왕위를 찬탈한 패륜아로 추론한 근거로 제시된 제데프레의 조각상 파괴와 그의 피라미드 파괴등도 기록말살형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에 따르면 제데프레의 통치기간이 8년으로 짧았기 때문에 그의 피라미드가 채 완성되지 못하고 끝났다는 것이다. 아부 로와슈의 거대 건축물은 파괴된 게 아니라 공사가 중단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상술한 대로 태양의 배가 발견된 곳의 문자기록을 통해서 제데프레의 통치기간이 최소 22년으로 드러났고,1995년부터 2005년까지 아부 로와슈를 재발굴한 팀들은 아부 로와슈의 제데프레의 피라미드는 완공되었지만 로마가 이집트를 통치한 이후로 제데프레의 피라미드를 채석장같이 사용해서 파괴되었다는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워낙 건물이 커서 로마인들도 제데프레의 피라미드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했고 이후에는 지역의 상인들이 파괴해서 돌을 실어날라 팔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19세기 말까지도 수백 마리의 낙타에 이곳의 돌을 실어다가 시장에 팔았다는 증거까지 나왔다고.
샤시나가 기록말살형을 주장했던것과는 달리 아부 로와슈를 재발굴한 팀들은 제데프레의 피라미드로 추정되는곳 인근에서 장제전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발굴했다. 그런데 이 건물은 제4왕조를 지나 제5왕조 시기에도 존재했고 제데프레를 신으로 모셨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또한 제데프레의 동생으로 그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걸로 알려졌던 카프레도 실은 제데프레의 아들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 근거는 카프레도 이름에 "레"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제데프레가 찬탈자였다면 카프레가 제데프레와 같은 형식의 이름을 쓸리가 없다는것. 일각에서는 카프레가 제데프레의 동생인것은 맞지만 왕위를 오르면서 제데프레를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이름을 바꿨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제데프레의 통치기간이 22년에서 23년이 맞는다면 카프레는 제데프레의 아들일 걸로 추정된다.
결국 에밀 샤시나의 어처구니 없는 발굴 결과에 대한 독단적인 해석이 그대로 비판없이 수용되면서 엉뚱한 사람을 찬탈자이자 패륜아로 매도당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에밀 샤시나가 발굴을 하던 시점에서 불과 몇년 전까지 이곳에서 돌을 실어날라다 팔았었기 때문에 마을주민이나 현지 상인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었다면 자신의 소위 패륜아 제데프레설이 모순되는 사항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테지만. 어쩌면 마을주민이나 현지 상인들의 이야기를 들었어도 자신의 이론이 무너지는 게 싫어서 의도적으로 무시했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