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원래 국어사전에 없었다. 흔히 '진정으로'라는 표현을 할 때 쓰이는 '진정'에서 파생된 단어로, 진정이라는 어근에 -성이라는 접사가 붙은 파생어이다.
● 그가 하는 말은 진정성이 없다.
● 북한은 진정성을 가지고 대화에 임하라.
위의 용례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진실성' 혹은 '진정으로' 등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다. 또 하나의 의미는 '진심'. 진심이라는 말은 실생활에서도 자주 발화되는 단어이니 만큼 이 뜻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단어 '진정성'은 정치권에서 주로 사용된다. 정치권은 하던 말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어서 나중에는 그 말이 완전히 식상해지고 설득력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누군가 더 강한 표현을 들고 나온다. [1] '진실되게', '진정으로'등의 표현은 너무 흔히 사용되어 이제 진실되다는 인상마저 옅어져버렸다.
그렇기에 '진정성을 가지고'라는 표현이 등장하게 된다. 일상 언어로서 '진실성'과 구분되기 힘든 단어였지만 어쩐지 수사적인 성공을 거두어서 이제는 정치권에서 '진실성'의 자리를 밀어내고 흔히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다.
다만 정치적인 용어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문학비평용어로서의 진정성 역시 꽤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왔기 때문. 이 경우 진정성은 영단어 authenticity의 번역어로, 그리고 스노비즘의 반의어로 사용된다.
문학용어로서의 진정성은 기성의 정체성과 분유될 수 없는, 개인의 고유한 욕망과 의식에 의거해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다. 이러한 진정성에 대한 탐색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크라테스는 진정성 있는 삶을 '데이몬의 목소리', 즉 사회적인 규율이나 질서로부터 비롯하지 않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사는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진정성에 대한 탐색을 계승하고, 교양소설이라는 하나의 문학적 전형으로 완성시킨 것이 루소의 '에밀'이다. 미성숙한 자아가 스노브들과 평범성의 악으로 가득한 기성 사회를 겪으며 진정성을 구한다는 교양소설의 서사는 근대 이후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 잡는다. '데미안'의 유명한 첫 구절, '내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는 바로 이러한 문학적 전통을 계승하는 구절이다.
기본적으로 진정에 -성이 붙은 파생어이고, 정치 용어나 번역 용어기 때문에 표준어로 등재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물론 표준어라는 규율에 굳이 얽매일 이유는 없으며, 일상적인 화언에서 진정성이라는 말이 꽤나 자주 발화되고 있는 지금, 이 단어를 사전에 등재된 표준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 예를 들어 옛날에 친북이라는 단어가 있었지만, 지금은 종북이라는 단어에 먹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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