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필달
崔必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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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최씨의 세 시조 중 한 명.[1]
나말 여초에 존재했던 경흥(강릉)의 호족이자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시무 28조로 유명한 최승로의 증손이라고 한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의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삼한벽상개국찬화공신(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에 책록되고, 영첨의좌정승(領僉議左政承)을 지냈으며,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무공(忠武).
그런데, 이 인물은 오로지 강릉 최씨 문중의 기록에만 등장하는 인물로, 이이(李珥)가 1564년에 지은 최응현(崔應賢)의 비명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모순점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1.최승로는 고려 개국 당시엔 태어나지도 않았고, 삼국 통일 당시엔 겨우 10세였는데, 그 증손이 고려의 개국공신이 될 수는 없다.
2.정승이라는 관직명이 처음 쓰인 것은 몽골 간섭기인 1308년이다.
3.신하를 군 또는 부원군에 봉하는 제도 역시 몽골 간섭기인 1298년에 가서야 처음으로 시행된 것이다.
결국, 최필달은 후대에 창작된 가공의 인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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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릉 최씨의 세 시조 중 한 명.[1]
나말 여초에 존재했던 경흥(강릉)의 호족이자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시무 28조로 유명한 최승로의 증손이라고 한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의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삼한벽상개국찬화공신(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에 책록되고, 영첨의좌정승(領僉議左政承)을 지냈으며,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무공(忠武).
2. 실존 인물인가?
그런데, 이 인물은 오로지 강릉 최씨 문중의 기록에만 등장하는 인물로, 이이(李珥)가 1564년에 지은 최응현(崔應賢)의 비명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모순점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1.최승로는 고려 개국 당시엔 태어나지도 않았고, 삼국 통일 당시엔 겨우 10세였는데, 그 증손이 고려의 개국공신이 될 수는 없다.
2.정승이라는 관직명이 처음 쓰인 것은 몽골 간섭기인 1308년이다.
3.신하를 군 또는 부원군에 봉하는 제도 역시 몽골 간섭기인 1298년에 가서야 처음으로 시행된 것이다.
결국, 최필달은 후대에 창작된 가공의 인물로 보인다.
[1] 그를 시조로 하는 파 이외에도 계보가 연결되지 않는 파가 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