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호
1. 諡號
유교 문화권에서 죽은 군주나 신료를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
1.1. 개요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임금으로부터 받은 이름. 혹은 전대 군주가 죽은 다음에 후대 군주가 선대에 올리는 호칭.
죽은 이의 삶이나 업적을 평가하고 기리기 위한 호칭이다.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므로 시호에 사용되는 글자들에는 모두 엄격한 의미가 정해져 있다. 시호를 받는 사람이 이미 죽었으므로, 고인드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터부시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지간히 생전에 막장 암군, 폭군이 아니었으면 좋은 의미 글자로 만드는 편이다. 이러한 시호 글자의 의미에 대해서는 시법을 참조. 폭군이거나 신하들에 의해 재위 중에 폐위된 군주에게는 시법을 적용하지 않고 '폐(廢)' 자를 넣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삼국시대 위의 폐제 조방과 조모, 남북조시대 송(육조)의 전폐제, 후폐제 발해의 폐왕 대원의 등. 한편으로는 신하가 받는 시호 중에서 좋은 건 충, 무, 문 등이 있었다. 반대로 왕개 같은 경우 하도 막장이다 보니 추라는 시호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두글자로 구성되기에 동양 군주의 시호는 보통 ××왕 또는 ××제(××황제)가 되며, 신료는 그 봉작에 맞춰 ××공, ××후가 된다. 다만 ××왕이라고 해서 모두 시호는 아니다. 시호가 사용되기 이전의 왕이나 멸망한 국가의 마지막 군주는 대부분 시호를 붙여줄 사람이 없어서 시호가 없이 이름 + 왕의 형태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보장왕이나 백제 의자왕의 경우가 대표적.
군주나 군주의 정실부인의 경우, 처음부터 글자를 많이 넣어서 시호가 길거나 후대에 시호가 추가되어서 최종적인 시호가 엄청 길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럴 경우엔 무슨 행사할 때 아니고서야 그 시호를 줄인 약칭을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시호는 고대에는 짧다가, 이후 시대로 갈수록 온갖 글자를 덧붙여 장황하게 길어지는 현상을 보인다. 길어지는 기준은 중국은 당나라, 한국은 당나라의 사례에 따른 고려시대부터다.
중국사의 군주들 역시 시호가 3~4글자였다가 당나라 이후부터 길어진다. 이 지경이 된 것은 당대, 측천무후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존호[1] 를 거창하게 지었고, 이게 전통으로 남아서 당현종 대에서도 그러했는데, 생각해보니 이러면 시호를 간단하게 지은 자신의 조상들이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이전 황제들의 시호에도 온갖 미사여구를 덕지덕지 붙여버렸다.
우리 왕조에선 신라 왕들의 시호는 중대 이후 'xx대왕'의 형태로 정립되지만 고려 태조의 시호는 '응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2] '이며, 조선 태조는 더 길어져서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3] '라고 했다. 다른 예로 조선 고종은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4] '이다. 한국사에서는 그 당나라와 동시대인 신라에서는 기존대로 가다가 새로 세운 나라인 고려부터는 2성 6부제 등 당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이런 점도 받아들인 것이다.
중국과 한국, 베트남에서는 양(煬)자를 피하는 게 대부분인데, 황제라는 호칭이 생긴 이후부터는 이 양자가 최악의 폭군에게 붙이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좋지 않은 시호로는 영(靈)과 여(厲)가 있다. 영 같은 경우는 최악의 암군이란 뜻이고, 여 같은 경우는 국민을 도탄에 빠뜨렸단 뜻. 양자가 들어간 최악의 암군의 대표격으로는 수나라의 양제가 있으며, 영자가 들어간 군주로는 초나라의 영왕, 진나라의 영공, 후한의 영제 등이 있다. 여자가 들어간 군주 중에는 주나라의 여왕이 있다.
1.2. 한국의 경우
한국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시호를 사용했다. 시호를 가장 먼저 사용한 국가는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경우 일찍부터 시호 제도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주로 '장지명+왕호'(동천왕, 미천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등), 혹은 '업적이나 특징+왕호'(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명왕 등) 조합으로 시호를 지었다.[5]
백제의 경우, 삼근왕까지는 이름+왕호 조합을 사용하다가 동성왕부터 시호가 붙는 임금이 나왔다.
신라의 경우엔 법흥왕이 아버지에게 지증(智證)이란 시호를 올린 것이 최초의 시호 기록이다. 원래는 별도의 시호를 올리지 않고, '이름+왕호' 조합을 썼으나, 이 지증왕의 대부터 국왕의 칭호를 왕(王)으로 고정하고 2글자의 시호를 올리는 것이 법제화되었다. 신라가 935년 고려에 귀순하면서 멸망한 뒤 시호 제도는 그대로 고려로 이어졌으며, 고려에서 신하들에게도 시호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시호는 왕, 왕족, 공신, 명신에게 내려지는 명예 칭호로 자리매김한다.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 세력이 주축이 되어 건국된 조선시대에 이르러 시호는 더욱 세밀해지고 체계화되었다. 조선시대의 시호에는 종래의 시호 제도와는 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폭정을 일삼다가 폐위된 왕에게 폐(廢)라는 글자를 내리는 대신 왕위에 오르기 전의 신분인 군(君)의 작호로 호칭하는 것이었다. 이 작호로 격하된 조선의 왕은 6대 노산군, 10대 연산군, 15대 광해군의 3명이다. 그나마 노산군은 19대 숙종 24년(1698년)에 다시 왕으로 복위되고 단종(端宗)으로 추시되면서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으므로 이후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작호로 불린 왕은 연산군과 광해군 두 사람만 남게 된다.
물론 시호상으로 폐(廢)라는 글자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이후 임금들의 세대에서 폐주(廢主)라고 불리었다. 말 그대로 폐위된 군주라는 의미이다. 고려·조선시대에 와서는 간신이나 권신에게는 악시(惡諡)를 내려서 일족에게 경계의 의미로 삼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아깝다 하여 시호를 내리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고려시대에는 한국 역사상 가장 안 좋은 의미의 시호를 받아본 사람이 있긴 했다. 바로 황무공(荒繆公)[6] 이인임. 황무(荒繆)는 "국사를 농단하고 백성을 핍박했다"는 의미로 그의 권력 남용을 비난하는 시호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인임이 죽고 조민수가 이인임의 시호를 결정해 내려주자고 조정에 건의를 했지만 시호 제정을 담당하는 전의부 관리들이 모두 발뺌을 하는지라, 전의부령 공부(孔俯)가 독단적으로 시호를 황무로 결정해서 올려버렸다. 이인임의 처조카 하륜과 같은 집안이었던 이숭인이 시호를 정해 올린 공부를 욕했는데, 공부는 농담이었다고 받아쳐서 시호를 내리는 문제는 유야무야 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이인임에게는 아무런 시호도 내려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륜은 이인임 사후 친명파인 이성계의 편으로 들어가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되었고, 이후 이방원의 참모 역할을 맡아 공을 세워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 뒤에는 영의정부사까지 올라 권세를 누리다가 죽었다. 제대로 된 시호인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까지 받는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국왕들의 시호에는 '효孝'가 많이 들어갔다. 이는 한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중원왕조 황제들과 같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자주적으로 올린 시호와 달리, 몽골(원), 명나라, 여진(청)에서 내린 시호에는 '충忠', '공恭'이 많이 들어갔다.
대한민국 정부에선 시호 제도를 부활시키지 않아서 대한민국엔 공식적인 시호를 받은 사람이 없다. 경술국치 3일 전인 융희 4년(1910) 8월 26일에 순종이 이간(李揀) 등 57명에게 시호를 수여한 것이 조선 왕조의 마지막 공식 시호 부여이다. 대한제국 멸망 후,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왕직 장관 민영기가 순종의 시호 망단자로 문온(文溫), 무녕(武寧), 돈인(敦仁), 성경(誠敬)을 올리자 사왕(嗣王)인 영친왕이 아뢴대로 하라고 정한 시호 문온무녕돈인성경(文溫武寧敦仁誠敬)이 한국사에 기록된 최후의 공식 시호 부여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 세상을 떠난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이구의 시호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주관하여 정한 사시(私諡)에 해당한다. 다만 순정효황후의 시호는 사시이기는 하지만 신위가 종묘에 부묘될 때 조선의 전통에 따라 옥책을 제작해 봉안한 마지막 사례였다.
1.3. 일본의 경우
일본의 경우에는 시호를 내리는 방법이 체계화되지 않았다. 최초의 관찬사서라고 불리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등장하는 천황의 시·존호는 일본 고유의 방식인 와시(和諡)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칸시(漢諡)가 혼재되어 있다. 와시는 화풍시호의 줄임말로 국풍시호(国風諡号)라고도 하는데 신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헤이안 시대 전기까지 사용되다 54대 닌묘 덴노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칸시, 즉 한풍시호는 말 그대로 한나라(중국)의 시호라는 뜻인데 유교적 시법을 적용하여 올리는 시호로 나라 시대에 이르러 정착했다. 나라 시대 이전 선대 천황들의 시호는 문신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7] 가 지어올린 것이라 전한다. 일본의 시법에선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악시(惡諡)는 적용하지 않았으며, 방계로 제위를 계승한 천황은 시호에 빛 광(光)자를 사용했는데 이는 방계로써 한 황실을 부흥시킨 광무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헤이안 시대를 전후해서부터는 능이 위치한 지명이나[8] 해당 천황의 치세 중 대표적인 연호[9] 를 따서 천황을 지칭하기도 했다. 가령 58대 고코 덴노의 경우 장지명에서 유래한 고마쓰노미카도(小松帝), 고타무라노미카도(後田邑帝)나 치세 중 연호[10] 인 닌나(仁和)에서 따와 닌나노미카도(仁和帝)로도 불렸다.
이런 방법은 본래 일종의 ‘별칭’개념이었으나 헤이안 시대 중반기에 이르러 율령제가 형해화되고 인세이가 관례화되면서, 58대 고코 덴노를 마지막으로 추시가 중단된 칸시를 대체하게 되는데 이를 추호(追号) 또는 원호(院号)라고 한다. 시호가 망자에 대한 평가의 의미가 담긴 것에 비해 추호는 단순히 망자를 특정하는 기능만 지니는데 구체적인 명명 유형은 하단과 같다.
- 재위 시나 양위 후의 거소의 이름에서 유래한 경우: 인세이가 고착화되면서 상황이 머물던 어소(보통 OO인(院)으로 지칭), 사원, 암자나 어소 주변의 가로명에서 유래한 경우이다. 상황 생전엔 일종의 존호로 사용됐으며 대부분 이를 사후 그대로 추호로 올렸다. 일부 인세이를 행하지 못한 천황은 생전 거주하던 어소의 이름이나 장례를 치른 어소의 명칭에서 따오기도 했다. 몇몇 천황은 유배지에서 유래한 추호를 받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75대 스토쿠 덴노는 사누키인(讚岐院), 82대 고토바 덴노는 오키인(隠岐院)으로 지칭됐다. 이들의 추호는 각각 후대에 이르러 현행으로 변경됐다.
- 장지명에서 유래한 경우 : 별칭이 아닌 추호로 사용된 경우로 60대 다이고 덴노(醍醐天皇)와 62대 무라카미 덴노(村上天皇)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각각 치세 중 대표적인 연호에서 따와 엔키노미카도(延喜帝)와 텐랴쿠노미카도(天暦帝)로도 일컬어진다.
- 가후호(加後号): 선대 천황의 추호 앞에 後(뒤 후: 일본어 음독으로 고)자를 붙인 경우로 선대 천황과 동일한 어소에 살았던 경우이거나 선대 천황의 이상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사용됐다.[11] 서양으로 따지면 아무개 2세의 의미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한 예로 96대 고다이고 덴노는 율령제가 비교적 건재하고 사회가 안정됐던 다이고 덴노(醍醐天皇)의 치세(엔키의 치延喜の治)를 동경하여 본인의 추호를 고다이고(後醍醐)로 유조했는데, 이런 형태로 추시되는 것을 유시라고 한다. 가후호는 51대 헤이제이 덴노(平城天皇)의 별칭인 나라노미카도(奈良帝)[12] 에서 따온 105대 고나라 덴노(後奈良天皇)처럼 선대 천황의 별칭에서 따온 경우도 있다.
- 칸시 2개에서 각 1자씩 따와 조합한 경우: 나라 시대 이전 선대 천황들의 시호에서 따오는 경우로 칸시 2개에서 각 1자씩을 따와 조합한 경우이다. 이러한 사례가 최초로 적용된 101대 쇼코 덴노(称光天皇)는 나라 시대의 여성 천황이었던 48대 쇼토쿠 덴노(称德天皇)와, 49대 코닌 덴노(光仁天皇)의 칸시에서 각각 1자씩 따와 조합한 경우이다. 이외에 에도 시대때 천황인 109대 메이쇼 덴노(明正天皇)[13] 와 112대 레이겐 덴노(靈元天皇)[14] 가 이러한 형식으로 추시되었다.
추호는 보통 OO인(院)의 형식으로 올려졌는데, 천황 외의 사람도 사후에 이러한 형식으로 추시될 수 있었기에[18] 국학과 존황양이 사상이 대두한 에도 시대에 이르러선 나카이 다케야마와 도쿠가와 나리야키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
이러한 부활론에 힘입어 시호(칸시)는 에도 시대 후기인 119대 고카쿠 덴노대에 이르러 부활한다. 기존의 OO인으로 올려지던 형식도 OO덴노의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후 메이지 덴노가 즉위한 후 메이지 유신을 선포하면서 한 천황의 치세 당 하나의 연호만을 쓰는 일세일원제를 확립했다.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자 연호인 메이지(明治)가 시호 대신 추시되었으며, 이후의 천황에게도 같은 방식을 적용했다. 다이쇼 덴노대에는 고카쿠 덴노 이전의 OO인과 이후의 OO덴노의 형태로 혼재되어있던 시호도 OO덴노의 형태로 통일됐다. 가장 최근에 추시를 받은 천황은 1989년 1월 7일에 사망한 124대 덴노 히로히토(裕仁)로, 추시된 시호는 역시 생전에 사용한 연호 쇼와였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현직 덴노는 125대 아키히토(明仁)인데, 관례상 아키히토 사망 시에 추시될 시호는 헤이세이가 될 가능성이 크다.
도쿠가와 고산케의 하나인 미토 도쿠가와 가문은 유교를 숭상하는 기풍이 강해 역대 당주들에게 중국 춘추시대 제후들처럼 X공(公) 시호를 붙였다. 초대 당주인 도쿠가와 요리후사의 시호는 위공(威公)이고 2대 당주인 도쿠가와 미츠쿠니의 시호는 의공(義公)이다. 일어위키를 보면 화족제도가 폐지된 이후 사망한 당주에게도 시호를 붙인 걸로 보아, 가문 차원에서 셀프로 붙인 사시(私諡)로 보인다.
1.4. 기타
묘호와는 다르다. 둘다 죽은 뒤에 붙는다는 것은 같으나, 원칙적으로 그 사람에게 붙는 명칭은 시호고 묘호는 제사를 지낼때 쓰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측천무후 이후 시호가 점차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시호를 호칭으로 쓰기 부적절해지자 대신 묘호가 군주의 호칭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 헌데 둘 모두 생전에 붙는 이름이 아니다보니 생전에 적당한 호칭을 만들 필요가 생겨났고, '일세일원제'를 도입하여 군주의 집권기와 연호의 시기를 맞춰 해당 연호로 군주를 호칭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물론 존호는 생전에 직접 지어다 바치는 것이지만 이것도 시호 못지 않게 긴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문제.
역사상 가장 긴 시호는 대월(베트남)의 찐끼엠에게 붙은 '''226자'''.
명강인지무정웅략현덕풍공계업굉모제세택민건모광벽조상유국광운홍모유후연복정난좌벽수휴독필개국강의보국찬치의위요무정경영서경문수록경광비헌양부조흥수총홍휴금서독유연사연모홍업활달관용립극흥수복지덕광혜부운자치홍은적후영덕공성업제치복원경진기강명웅단장요위진국안강광명예지공의과결창법개기경태영광함장재물무공굉헌법천흥운곽굉회강제성총무영과피원장의평잔성신예강건중정영웅호걸건의조모개선창후태시부선숭기조경신무문웅재위략립업배천공고덕후조모계운창업립본태왕
(明康仁智武貞雄略顯德豐功啟業宏謨濟世澤民建謀匡辟肇祥裕國廣運洪謨裕後衍福靖難佐辟垂休篤弼開國剛毅輔國贊治毅威耀武延慶永緒經文綏祿耿光丕憲揚武扶祚興業垂統鴻休綿緒篤裕衍嗣燕謀鴻業豁達寬容立極永興綏福至德廣惠扶運資治洪恩積厚永德大功盛業制治服遠立經陳紀剛明雄斷彰善耀威鎮國安疆光明睿智恭懿果決創法開基景泰永光含章載物茂功宏憲法天興運廓宏恢疆齊聖聰武英果避遠仗義平殘聖神睿智剛健中正英雄豪傑建義造謀開先昌後太始孚先崇基肇慶神武聖文雄才偉略立業配天功高德厚兆謀啟運創業立本太王)
총 226자이다.
중국사까지 범위를 넓혀봐도 이 정도로 긴 시호는 없다. 중국에서 가장 긴 시호는 누르하치가 받은 29자이다. 가장 긴 왕후의 시호는 조선의 문조의 아내 신정왕후가 받았는데, 이쪽은 '''56자'''에 달한다.
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령희강현정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신정왕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神貞王后).
방계 혈통으로 즉위한 고종이 칭제할 때 정통성 확보를 위해, 양부모의 시호를 엄청나게 올려준 것임을 감안하고 봐야 한다.
위의 설명에서 보듯이, 생존해 있는 임금은 시호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지칭하여 시호로 부르거나 신하들이 시호로 부를 수가 없었다. 즉, 삼국지를 다룬 작품에서 헌제가 스스로를 '헌제'라고 지칭한다면 명백한 고증 오류. 시호가 정해지기 전, 즉 죽거나 합법적으로 퇴위하기 전 재위하고 있는 임금을 제3자가 가리킬 땐 '지금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금상'''(今上)이라는 말을 썼다. 대비나 상왕처럼 족보상으로는 왕보다 높은 사람들은 주상(主上)을 사용했고, 왕이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땐 여(余)나 과인(寡人)을 주로 사용했다. 사기의 무제본기의 원제가 금상본기인데 무제 생전에 책을 썼기 때문에 무제가 아니라 금상이라고 한 것이다. 한국, 중국, 베트남은 현재 왕정이 폐지되었기에 역사적인 용어일 뿐이지만, 일본에서는 지금도 쓰고 있으며, 음독해서 '킨조', 혹은 훈독해서 '이마노카미'라고 한다. 예를 들면 현직 천황인 나루히토는 킨조덴노나 이마노카미로 불리고 있다.
2. 채소의 일종
柴胡.
경북 영천시이나 경북 의성군 전북 여수,고흥이 주 생산지역이며 수확시기는 10월부터 11월까지이다. 채소. 탕과 시호차로 끓여서 먹거나 볶아 먹는다. 소화를 돕는 기능이 있어 약초로도 사용된다.[19] 한의학에서 시호는 맛이 쓰고 조금 차가우며 위로 오르고 흩어지려는 성질이 강하다고 보고 있다. 시호는 전 세계적으로 150여 종이 있는데 산림청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시호 6종이 등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품종으로 육성된 시호는 삼개시호인데 일본에서 도입된 삼도시호를 육성한 것이다. 지금은 시호의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어 수입에 의존하지만, 80년대에는 약초로 많이 수출했었다. 89년에는 163톤에 481만 달러의 수출고를 달성했다고 한다. [20]
3. 인명
대한민국 및 일본에서 쓰이는 이름이다.
일본에서는 한자로는 志穗, 志保 등으로 표기.
현지화할 때는 주로 지수라는 이름으로 로컬라이징한다.
3.1. 실존 인물
- 카토 시호 - 일본 아이돌 케야키자카46 언더 그룹 히라가나 케야키 멤버
- 야마기시 시호 - 일본의 배우
- 니이야마 시호 - 일본의 성우
- 사사키 시호 - 일본의 성우
- 야노 시호 - 일본의 모델. 추성훈의 부인이자 추사랑의 어머니.
- 카시와기 시호 - 일본의 만화가
- 카와라기 시호 - 일본의 성우
- 코키도 시호 - 일본의 성우
- 키쿠치 시호 - 일본의 성우
- 시호(프로레슬러) - 한국의 프로레슬링단체 PWS의 프로레슬러
- 윤시호 - 한국의 축구선수
- 홍시호 - 한국의 남자 성우
- 장시호 - 한국 정치 역사상 최악의 사건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
3.2. 가상 인물
- 시호 - 발키리 프로파일
- 시호 - 테일즈런너
- 시호 -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시리즈
- 시호 - 호랑이형님
- 불여우 시호 - 엘소드
- 나가오카 시호 - 투하트
- 니시즈미 시호 - GIRLS und PANZER
- 마키하라 시호 -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 무나카타 시호 - 마이히메
- 미나즈키 시호 - 취작
- 미야노 시호 - 명탐정 코난의 하이바라 아이의 본명.
- 산노미야 시호 - 절대가련 칠드런
- 스즈이 시호 - 페르소나 5
- 시시도 시호 - 사실 나는
- 시호 유이트 - 마이오토메
- 시호 하넨프스 - 기동전사 건담 SEED
- 아리사와 시호 - 도키메키 메모리얼 Girl's Side 1st
- 안시호 - 명탐정 코난 미야노 시호의 한국명.
- 이시호 - 브레이커
- 이와사키 시호 - Wake Up, Girls!
- 카마쿠라 시호 - WORKING!!(웹코믹)
- 칸나즈키 시호 - 피아캐롯에 어서오세요! 1
- 키미즈키 시호 - 종말의 세라프
- 키타자와 시호 - 아이돌 마스터 밀리언 라이브
- 타카사키 시호 - 귀여우면 변태라도 좋아해 주실 수 있나요?
- 히노모리 시호 - 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하츠네 미쿠
- 홍시호 - 홍시는 날 좋아해!
[1] 재위 중인 군주의 호칭.[2] 應運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3] 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4]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5] 광개토왕의 경우 광개토왕릉비를 통해 장지명과 업적&특징을 섞어서 올렸음이 확인된다. 광개토왕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인데, 이는 수도 언덕 위(國岡上)에 장사지낸, 땅을 널리 개척한(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이라는 의미이다. 고구려왕의 시호 전체가 전해지는 경우가 광개토왕을 제외하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고구려 왕들이 대개 이러한 방식으로 시호를 받지 않았을까 추정된다.[6] 荒은 휑할 강(槺)의 통자, 繆는 그릇될 류(謬)의 통자라서 강유공으로 읽을 수도 있다.[7] 제38대 덴지 덴노의 고손자이며, 훗날 천황으로 즉위한 것으로 인정된 제39대 고분 덴노(오토모 황자)의 손자이다.[8] 흥미롭게도 이는 고구려의 존시법과 같은 형식이다.[9] 일본은 다이카 개신이래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10] 이 시기 일본은 일세일원제를 시행하지 않았다. 다만 고코 덴노는 재위 중 닌나 연호만 사용했다. 연호/일본 항목 참조.[11] 이러한 형식은 백제에서도 나타났는데 5대 초고왕과 13대 근초고왕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다만 백제는 수식어로 後가 아닌 近(가까울 근)을 사용했다.[12] 헤이제이 덴노의 추호 헤이제이(平城)은 헤이조쿄(平城京)를 의미하는데 이는 나라(奈良)의 이칭이다. 즉 추호와 별칭이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13] 여성 덴노로, 8세기 아스카 시대의 여성 덴노였던 43대 겐메이 덴노(元明天皇)와 그의 딸 44대 겐쇼 덴노(元正天皇)의 시호에서 따왔다.[14] 결사팔대인 7대 고레이 덴노(孝靈天皇)와 그의 아들 8대 고겐 덴노(孝元天皇)의 시호에서 따왔다.[15] 사누키인(讚岐院)에서 변경[16] 오키인(隱岐院)에서 변경. 이후 손자인 88대 고사가 덴노가 즉위하면서 고토바인으로 변경.[17] 사도인(佐渡院)에서 변경.[18] 가령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우 사후 안고쿠인(安国院)의 계명으로 일컬어졌다.[19] 시호는 본래 가슴이 답답한 증상과 열이 오락가락하는 증상을 기준으로 사용하는 약초다.[20] 농협약용작물협의회 『국산약용작물 50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