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무대
治無戴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때 강족의 수령.
정사 강유전에 따르면 촉한의 강유가 농서(隴西), 남안(南安), 금성(金城)의 경계로 출병해 위의 곽회, 하후패 등과 더불어 조수의 서쪽지역에서 싸웠다. 이후 호왕(胡王) 치무대(治無戴) 등이 부락을 들어 항복해오자 강유가 이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안처시켰다.[1]
247년에 백호문과 함께 무리를 이끌고 촉나라에 항복해 강유가 맞이하고 치무대는 번현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248년에 곽회와 싸울 때 아하, 소과, 아차새, 벌동 등에게 호응해 이들이 하과와 백토의 옛 성에서 싸우고 있을 대 무위를 포위했다.
그의 가족은 서해에 남아있었고 곽회가 서해로 나아가 물자, 귀중품을 습격했으며, 치무대는 무위에서 돌아오다가 곽회를 만나 용이의 북쪽에서 싸우다가 패해 달아났으며, 강유가 석영으로부터 나와 강천을 따라 서쪽으로 치무대를 맞이했다.
삼국전투기에서는 무위를 포위하면서 구하고 싶다면 올라오면서 대평원이라 숨을 곳도 없고 보이는 순간 밀어버린다고 했는데, 이는 급하게 이동해 곽회군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밀어버리려고 한다는 설명이 나온다.
병사에게 서해로 향한다는 보고를 받자 놀랬고 설명으로 놀란 것은 치무대의 가족들이 서해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급하게 곽회군을 쫓으려고 달려가지만 곽회에게 패해 달아나고 강유에게 구원 요청을 하러 가면서 강족 망했다고 한다.
위나라에서 진태가 이끄는 군사가 국성을 공략할 때 구안이 출동해 도로, 수원을 수복하라고 하자 왜 어려운 것은 다 우리만 시키냐면서 정예 위군에게 우리는 그냥 밥이라면서 이럴 때 니들이 나가서 활약해야 우리도 안심하고 활약하고 따른다고 따졌으며, 이에 구안은 당황하면서 자기들도 많은 병력이 온 게 아니라고 했다.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삼국시대때 강족의 수령.
정사 강유전에 따르면 촉한의 강유가 농서(隴西), 남안(南安), 금성(金城)의 경계로 출병해 위의 곽회, 하후패 등과 더불어 조수의 서쪽지역에서 싸웠다. 이후 호왕(胡王) 치무대(治無戴) 등이 부락을 들어 항복해오자 강유가 이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안처시켰다.[1]
247년에 백호문과 함께 무리를 이끌고 촉나라에 항복해 강유가 맞이하고 치무대는 번현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248년에 곽회와 싸울 때 아하, 소과, 아차새, 벌동 등에게 호응해 이들이 하과와 백토의 옛 성에서 싸우고 있을 대 무위를 포위했다.
그의 가족은 서해에 남아있었고 곽회가 서해로 나아가 물자, 귀중품을 습격했으며, 치무대는 무위에서 돌아오다가 곽회를 만나 용이의 북쪽에서 싸우다가 패해 달아났으며, 강유가 석영으로부터 나와 강천을 따라 서쪽으로 치무대를 맞이했다.
2. 미디어 믹스
삼국전투기에서는 무위를 포위하면서 구하고 싶다면 올라오면서 대평원이라 숨을 곳도 없고 보이는 순간 밀어버린다고 했는데, 이는 급하게 이동해 곽회군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밀어버리려고 한다는 설명이 나온다.
병사에게 서해로 향한다는 보고를 받자 놀랬고 설명으로 놀란 것은 치무대의 가족들이 서해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급하게 곽회군을 쫓으려고 달려가지만 곽회에게 패해 달아나고 강유에게 구원 요청을 하러 가면서 강족 망했다고 한다.
위나라에서 진태가 이끄는 군사가 국성을 공략할 때 구안이 출동해 도로, 수원을 수복하라고 하자 왜 어려운 것은 다 우리만 시키냐면서 정예 위군에게 우리는 그냥 밥이라면서 이럴 때 니들이 나가서 활약해야 우리도 안심하고 활약하고 따른다고 따졌으며, 이에 구안은 당황하면서 자기들도 많은 병력이 온 게 아니라고 했다.
[1] 정황상 화양국지의 곽회-하후패를 이긴 기록과 정사 강유전의 곽회-하후패를 상대로 싸우고 치무대를 항복시킨것은 같은 기록으로 보이므로 이를 종합하면 강유가 곽회와 하후패를 이겼기에 치무대 등이 귀순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246년에 곽회-하후패를 이기고 247년에 또 싸워 치무대를 귀순시킨것 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