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중국)

 



삼국시대 | 三國時代
220년~280년

[image]
삼국정립도
<colbgcolor=#980000> 국가

촉한

건국군주
문제[1]
소열제
대제
멸망군주
원제
회제
말제
성립
220년
221년
222년
멸망
265년
263년
280년
수도
허도
낙양
성도
무창[2]
건업
이후 국가
서진
1. 개요
2. 시기에 대한 견해
3. 주요사건
4. 삼국
5. 사회
6. 경제
7. 문화
8. 군사
9. 역사학에서의 비중
10. 삼국시대와 삼국지연의
11. 삼국시대가 인기 있는 이유
12. 로마 제국과의 비교
13. 주요 인물
14. 여담
1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중국 후한에서 서진 사이에 있던 시대를 말한다. 중국의 통일 왕조인 후한이 멸망하면서 군벌들의 세력 싸움 끝에 (魏), 촉한(蜀漢), (吳)라는 세 나라로 갈라졌으나[3], 결국 위나라를 계승한 서진이 삼국을 통일시켜 삼국시대는 종식되었다. 중국사 중에서도 나관중삼국지연의 덕분에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시대다.

2. 시기에 대한 견해


중국의 삼국시대 시기에 대한 견해는 세 개가 있다.
  • 1: 후한이 헌제의 선양으로 공식적으로 멸망한 헌제 선양 ~ 서진의 삼국 통일까지의 시기.
약 400년간 중국을 통치했던 통일제국 한나라(漢)가 무너지고 위나라의 조비가 황제로 즉위한 시점부터 진나라(晉)가 일시적으로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 60년 동안의 분열시대. 단 이는 한나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220년부터를 난세의 시작으로 잡았을 때의 구분이다[4].
연의 등으로 인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시기. 정사 삼국지도 이 시기를 다루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삼국시대라고 하면 이 시기를 다룬다. 실제로 각종 매체에서는 황건적의 난(184년)부터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이 때가 후한이 본격적으로 쇠락하고 각지의 군벌이 권력 다툼을 시작한 시기이다. 다만 이전 문서에 적혀있는 국가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주장. 지방에 인사권을 행사하고 수만명의 군대를 편성할 수 있는 상태를 국가 기능 상실이라고 하진 않는다. 국가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것은 동탁 집권 이후.[5]
삼국시대가 위진남북조시대의 일부로 포함되긴 하지만 삼국시대 자체는 역사적으로 봐도 진의 통일로 끝난게 맞고, 이 시기를 다룬 소설인 삼국지연의도 진의 통일로 끝나기에 대중적인 인식도 서진의 막장화는 삼국지의 연장으로 보지않는다. 허나 팔왕의 난-영가의 난까지 벌어진 서진의 멸망까지의 흐름은 기존 삼국시대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6] 사마씨 정권이 집권하는 과정에서의 수많은 무리수와 사대부, 즉 호족들의 대한 견제를 할 수 없게 된 것도 삼국시대에 일어난 진의 건국과정이고 팔왕의 난은 이를 직접적인 원인으로 해서 일어난 혼란기이기 때문. 삼국 통일을 완성한 사마염 사후에 바로 팔왕의 난이 일어났으며 이 기간은 통일 후 10년을 겨우 채운 수준이고 서진은 팔왕의 난으로 부터 10년 후에 영가의 난으로 멸망한다. 즉, 서진이 멸망하기까지의 과정과 서진이 멸망한 결과가 삼국시대에 벌어진 수많은 일의 실질적인 종결점이라는 것이다.
  • 그 외로 유비의 입촉, 한중왕 즉위 또는 조조의 위왕 즉위에서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삼국시대를 다룬 매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삼국지, 즉 역사서 정사 삼국지와 소설인 삼국지연의, 특히 삼국지연의이지만 이 작품이 다루는 시대는 <후한 말 난세가 시작되어 군웅들이 할거하고, 그 가운데 두각을 드러낸 셋이 할거하였다가 다시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시대라는 점이다. 즉, 삼국지연의는 후한 말~삼국시대를 다루는 작품이며 <삼국의 정립>과 <삼국시대의 시작>은 그 도중에 벌어진 사건이다. 당연히 시대구별로써의 삼국시대와 삼국지연의의 배경 시대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를 전제로 빡빡하게 보자면 후한의 완전한 멸망으로 이전까지 명목상으로나마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상위 권력이 사라진 헌제 선양을 삼국시대의 시작으로 본다거나, 더 빡빡하게 따지자면 '동등한 삼국의 탄생'을 기준으로 손권의 칭제(229년)을 삼국시대의 완전한 시작으로 본다거나, 이보다는 좀 유연한 기준으로 명목상 후한이 아직 존속하고 있기는 하나 이전까지 불안정했던(따라서 한나라의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쉽지 않던) 군벌들이 정리되고 영역을 통제할 수 있는 기반과 조직을 갖춘 세 세력이 중국 전역을 장악하게 되는 시기를[7][8] 기준으로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관점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
이 문서는 1번의 시기만을 다루고 2번의 확장된 시기에 관한 내용은 삼국지 문서 참조.

3. 주요사건


주요사건을 일일이 기재하면 끝도 없기에 천하 판세에 영향을 준 굵직한 사건만 추려 기재하면 다음과 같다.

4. 삼국


삼국시대의 삼국은 다음의 세 왕조를 가리킨다.
  • (魏)(220~265) : 중원을 장악.
  • 촉한(蜀漢)(221~263) : 파촉(사천) 일대에 할거. 정식 국호는 한(漢). 통칭 촉(蜀).
  • (吳)(229~280) : 강남 일대에 할거.
유비가 세운 나라의 정식 국호는 흔히 부르는 촉이 아니라 한이다. 유비가 한나라의 후계자를 표방했기 때문. 당장 조선시대의 적벽가만 해도 첫머리가 "한나라 말엽 위한오 삼국시절"로 시작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의 중국사 연구나 대중매체에서는 촉한(蜀漢)이라고 언급한다.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은 보통 하나의 한나라의 역사로 다루는 편이 많으나 촉한의 경우엔 삼국시대 자체가 혼란의 시대였으며, 그 정통성에 있어도 논란이 있기에 사학적으로 따로 분류하여 연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중국 삼국시대 역사의 정사인 정사 삼국지와 삼국시대를 가장 널리 알린 소설 삼국지연의의 판본 및 번역물들 역시, 촉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 스스로 사용한 이름도 아닌 '촉'이라고 하면 한나라를 이은 정통왕조가 아닌 촉 지방의 일개 지방정권이라는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 촉한정통론자들의 경우, 당연히 "촉"보다는 "촉한"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촉"이라고만 하면 다른 촉나라들과 헷갈릴 여지도 있다.[9] 해당문서 및 역사에서는 통일제국 한왕조와의 혼란을 막기 위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촉한"이란 명칭으로 표현한다.
이 시대가 이토록 혼란스러워진 것은 아래와 같은 여러가지 내/외부적인 모순들이 수백년간 (상당수는 한무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동시다발적으로 발발한 결과였다.
- 호족 소유 토지의 증가에 따른 자작농 계급의 붕괴와 빈부격차의 확대
- 일부 명문 호족들의 관직 나눠먹기로 인한 국가기능의 저하
- 왕망 이후 가속화된 유교의 형식화 및 윤리 수준의 저하
- 소빙기 도래로 인한 토지 생산력의 감소
- 국가역량을 넘어선 영토확대로 인한 국방비 지출의 증가 및 국경 병력의 이민족화/사병화
- 유능한 군주의 부재 및 환관세력의 득세
이릉대전과 같은 대참사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상대적으로 국력이 열세였던 촉한과 오가 힘을 합해 강대국 위를 견제하는 1강 2약의 구도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위나라는 후한말 득세한 군벌의 대부분을 제거하고 중원을 장악한 나라였다. 이 당시 중원이란 중국 문명이 탄생한 황하 유역을 일컫는 표현이었으며,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실질적인 면적으로는 약 1/3 수준에 불과했으나 당시 중국인구와 총 생산력에서 약 7 ~ 8할을 차지했다.
반면에 오의 경우에는 이러한 난세를 피해 변방으로 이주한 세력들이 당시만 해도 아직 개발이 덜 된 남중국 지방의 토착세력들과 타협하면서 세운 나라였다. 때문에 영토 면적은 중원에 크게 뒤지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주요 거점 부근을 제외하고는 개발이 되지 않아 사람이 살기 어려웠고 영토의 상당 부분이 이민족들의 영향 아래 있었던 까닭에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 애초에 오나라에서도 남반부 지역은 한무제 이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동월, 민월, 남월같은 이민족 국가들이 지배했고 전통적인 중국의 영역이 아니었다. 남월은 국왕이 한족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위만조선과 비슷하게 중국계 유이민과 현지세력간의 연합으로 정권이 구성되었고, 민월과 동월은 한나라의 책봉을 받았기는 했지만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중원과 크게 달랐다.
촉한의 경우, 사천 자체는 진나라 시절부터 집중적으로 관리되며 개발된 땅이었고, 토착 호족들도 유비 이전 통치하던 유언이 대부분 밞아놓았던 상태라 비교적 중앙 집권이 강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운남 지역은 남만과 같은 이민족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사천의 힘만으로 중원에 대항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간 힘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1) 중원이 전란에 빠지면서 인구와 생산력이 일시적으로 크게 저하되었고,
(2) 촉, 오 두 나라의 주도 하에 변방의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3) 이 두 나라가 기본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4) 위가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두 나라를 동시에 제압하기에는 전선이 넓을 뿐더러, 강족과 저족, 선비, 흉노, 동이 등 여타 이민족 세력도 동시에 상대해야 했고,
(5) 위나라 자체도 건국 과정에서의 한계로 인해 지방 호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는 등의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한 말의 난세를 거치면서 사람도 많이 죽고, 유랑민도 대폭 증가하면서 엄청난 인구 감소가 이루어졌다. 삼국지연의만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떼로 죽어나간 막장 시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도 거의 5천만에 육박하던 후한 시절의 인구가 고작 수십 년 만에 767만으로 쪼그라들었는데 실제로 저렇게 죽었다기보다는 호적 유실 등의 원인이 크고, 실제로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만한 인구 손실은 없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으로 서기 2세기의 중국 인구는 본토만 5~6천만명을 육박했고 3세기 삼국시대에도 4~5천만명으로 추정된다.

인구
4,432,000명

인구
940,000명

인구
2,300,000명
일단 등록된 인구는 이렇지만 이걸 그대로 믿으면 안되는 것이 혼란기였기에 유랑민이나 지방호족에게 위탁한 소작농 인구가 엄청나게 많았고,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조세를 확실하게 거두고 개인 경제력 유지가 가능한 인구, 그 중에서도 노동력이 되는 성인 남자와 돈으로 납세가 가능한 호구 위주로만 등록을 했기 때문에 저런 숫자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삼국을 통일하자마자 767만이 갑자기 1,600만으로 불어나는 것. 심지어는 이 숫자도 실제 인구보다는 크게 적었을 것이다.[10]
고대에는 폭정, 기아, 전염병, 전쟁이 거의 일상적으로 일어나 계속 증가하려는 인구가 그나마 계속 죽어줘서 수백년간 인구가 큰 증가없이 정체가 지속되곤 했다. 다른 시대에도 널린 것을 삼국시대에만 갑자기 일어났다고 보기 힘든 게 전한 말과 5호16국시대에도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이야기는 상투적으로 등장하며 그만큼 시대가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강조한 기록일 뿐이다. 국가 자체는 그나마 온전한 듯이 보여도 폭정이나 심지어 자연 조건에 따라서도 인구 변동은 있어왔다. 뭐 진정한 중국사의 헬게이트인 송원교체기에 비하면 그저 그렇지만. 1200년 중국 인구 1억 1500만명에서 1300~1400년 7500만명~8500만명으로 급락하고 1550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따라잡는다. 이 시대에는 인구가 감소할 조건은 모두 갖추어 중국의 경쟁력을 폭락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금나라 5천만, 송나라 6천만의 중국 인구가, 몽골의 침입을 거치고 원나라가 들어선 뒤에는 강북, 만주, 몽골, 티벳까지 다 합쳐도 7~8천만이 되어버린다.
물론 후한 말의 난세를 거치면서 전쟁, 기아,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엄청난 인구 감소가 이루어졌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실제 인구는 최소 배 이상은 되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후한말 6000만에 육박했던 인구가 불과 수십 년 만에 등록상이라고는 해도 767만으로 급감한 것. 삼국지연의 덕분에 이 시대에 대하여 낭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전란기가 다 그랬듯 엄청나게 살기 어려웠던 시대다. 실상은 군웅이든 무장이든 모사든 호족이든 백성이든 모두 살아남기 바빴던 시대.
이처럼 삶이 어려워지면서 사회의 윤리도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되는데, 하극상이야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렸고 심지어는 인육이나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식을 팔거나 부모를 내다 버렸다는 기록이 대단히 많이 남아 있다.
단, 난세라면 언제나 그렇듯이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인 업적도 많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후한 시대라면 절대 출세하지 못했을 인물들이 다수 등장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일단 삼국의 창업주들만 보더라도 난세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명성을 남기기 어려운 출신들이다. 더불어 후한말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개혁의 노력이 있었다. 특히 이 시대의 둔전제는 후대 왕조들에게 여러모로 좋은 참고사례가 되어 남았다. 유학 일색이었던 중국사상에 법가 및 도가에 대한 재고찰이 이루어진 것도 중세 중국문화가 풍부해지는 계기가 됐다.

5. 사회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던 지방 자작농이 전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몰락했다. 이로서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비대해진 관료제와 유교의 사상독재 하에서 세력을 키워온 호족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이 시대에 호족을 무시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 군벌은 '아무도' 없었다고 봐도 좋다. 과장 좀 보태면 '호족의 시대'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 시기였다. 이 당시 호족들은 중국의 유일한 지식인 계층으로 극히 일부의 예외가 있긴 했지만 중국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여론을 좌우했으며, 중국의 대부분을 사유하고 있는 지주였다. 그들은 오랜 세월 사실상 주거니 받거니 하며 관직을 대대로 독점하였다. 개중에는 이런 호족을 무시하고 뭔가를 해보려는 군벌들도 있었지만[11] 대부분 처참하게 실패로 끝났다. 삼국지연의나 연의를 기반으로 한 현대의 각종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숱한 무장이나 참모들은 작품 속에서 조조, 유비, 손씨 집안이나 기타 군벌들의 가신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은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지역 호족이었다.
삼국의 군주 중 가장 호족들에게 엄격했던 조조조차 기본적으로는 연주 지역의 호족들과의 연대를 기반으로 세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예를 들면 조조의 일급참모로 알려진 순욱이나 순유를 배출한 순씨 가문 자체가 영천의 호족 가문이었으며, 뒷날 위나라의 전권을 장악하고 서진 건국의 기반을 다진 사마의의 사마씨 역시 하내의 호족이었다. 실제로는 긴장관계 속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삼국의 군주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을 구축해 호족연합체를 넘어서는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각기 달랐지만 셋 다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고, 위나라에서는 호족들 가운데 문벌이 높은 몇몇 가문이 중앙 관직을 장악하여 호족을 뛰어넘는 귀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귀족 사회가 형성된다. 이것이 중국사에서의 문벌귀족의 시작이다. 오나라에서는 호족들이 강한 독립성을 가지면서, '호족연합체' 적인 정권이 형성되었으며, 오의 군주인 손씨 가문도 사실상 강동 지역 호족 연합체의 맹주와 같은 위치였다. 오나라 계통 호족은 오나라의 붕괴 이후에도 서진에 등용되면서 귀족적인 지위를 유지한다. 촉나라에서는 영토가 작았던 덕분에 상대적으로 중앙 정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호족 사회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중국을 통일했던 것은 호족에 의해 세워진 친 호족국가, 진나라였다. 삼국이 진나라에게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삼국이 모두 호족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이 호족세력들이 자기 나라를 내 팽개치고 진나라의 패권을 인정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크다.[12]
이는 다시 말하자면 후한을 멸망시킨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며 결국 호족들이 모여서 '우리끼리 다 해먹으며 천년만년 누려보자'며 세운 진나라는 역대 중국 통일왕조 중 가장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강남으로 쫓겨나게 되고 중원은 이민족들의 차지가 되어 중국은 장장 4백여년간에 걸쳐 남북으로 갈린 기나긴 분열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밀려나서도 호족들끼리 잔치 벌이는 수준을 못 벗어나고 헛지거리만 하다가 망한다
결국 황건적의 난으로 난세의 시대가 된 이후, 짧게 보면 남북조시대, 길게 보면 당나라까지 이어졌고, 이후에도 난세는 끝났지만 문벌귀족이 계속해서 오대십국시대까지 지배했다.

6. 경제


후한의 멸망으로 농업이 붕괴 상태에 놓였으며 화폐경제가 몰락했다. 동한조정이 붕괴한 탓에 대량의 사사로이 만든 돈이 출현했다. 위, 촉, 오 세 나라가 정립된 뒤에 새로 발행된 동전은 광범위하게 유통되지 못하여 포, 비단, 곡식, 등 주요화폐로 실물을 부득이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세 나라 모두 동전을 발행하고 가치를 부여하여 경제적으로 사용되기를 바랐으나, 황건난-동탁의 난정 이후부터 국가가 아닌 호족들이 사사로이 만든 돈 때문에 국가가 만든 화폐 역시 이에 맞물려 가치와 신용이 떨어졌다. 때문에 민중들은 물물교환을 통한 경제활동이 더 가치있고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각국의 화폐제도는 화폐로 값을 치루는데 미치지 못하여서 물물교환이 다수로 있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이게 제 일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오늘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삼국이 발행한 돈은 모두 다 실패했다고 평가된다. 그나마 나았다는 촉한의 경우도 촉의 화폐가 본국외 강남 일부 지역, 농서 일부 지역에서 통용되는 정도의 한계점을 가진다.
다만 촉한의 경내(境內)에서 이루어진 무역은 화폐가 통용되는 무역으로, 이 시대에는 특수한 한 종류의 정도에 이르렀다. 촉한 화폐의 유통은 교환 경제가 활성화되어 장기화된 중원보다 우수했다. 촉한의 수도 성도는 상업적으로 또한 번영하였고 서진의 좌사는 성도의 (번영한) 상업을 묘사하였다. 좌사의 '촉도부(蜀都赋)'는 성도 상업의 발달로 점포가 즐비하고, 각종 진기한 상품들이 모두 시시각각으로 늘어져 있고, 시장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13]
또한 촉한의 비단은 오나라와 위나라에 팔리며 유명세를 떨쳤고 중국전사(全史) 제32권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中國魏晉南北朝經濟史)에서도 촉한의 멸망 당시 창고에 있던 금, 기, 채, 견 80만필 중 금(錦), 기(綺)를 유명하고 진귀하며 기술요구도가 극히 높은 견직물로서 이것을 능히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음이 촉한 수공업의 창성과 발달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강북 지방 쇠퇴의 조짐이 처음으로 보인 시대였다. 삼국시대 이후엔 인구 급감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전란으로 인한 민호의 도주와 관개시설 및 농경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 등의 이유로 버려진 농경지가 대량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황하 중상류 지역의 황폐화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발생하였고 삼국시대의 뒤를 이은 남북조 시대로 인해 이 흐름이 더욱 가속화된다.
중원의 경우 역대 유례가 없을 정도의 전란을 거치며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조조가 패권을 구축하면서부터 회복의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조는 둔전제를 통해 토지개혁과 전후재건에서 다른 군벌들을 크게 앞서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도 자체는 기존에도 있었던 제도였지만, 조조가 대단했던 점은 이를 전 중국규모로 장기간에 걸쳐 추진한 조직력과 추진력이었다. 실제 기존의 둔전제는 일부 국경지대에 한해 한시적으로 실행된 제도였음으로 조조와는 규모/기간에서 비교가 안된다.
촉한과 오나라는 세력확대를 위해 각각 운남과 강남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특히 오나라의 강남개발의 경우 한족이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에 착수한 시작으로서 중국 경제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비록 당대에는 아직 미약한 수준이었으나 오나라가 이때 잡아놓은 기틀에 영가의 난 이후 북쪽에서 몰려든 우수한 농업기술을 가진 유민들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남조시대 경제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었다. 강남 지방의 농경화가 성과를 내기 시작한 건 빨라도 위진남북조 시대부터였고, 당송 무렵에야 절정에 이른다. 이후 송나라 시대 즈음에 이르면 강남 지방의 농경화가 절정에 이름으로써 강남의 경제력이 중원을 압도하게 된다. 더불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각지에 명맥을 유지하던 소수민족들 무릉만과 산월족이 완전히 중국에 복속하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고대 중국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영토를 한족이 사실상 독점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대인 것이다.

7. 문화


이 무렵의 중국은 좌식(座式) 생활을 했다. 즉, 마룻바닥이나 평상에 돗자리나 깔개를 깔아놓고 그 위에 앉아서 지냈다.[14] 물론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그냥 흙바닥에 돗자리 하나 덜렁 깔고 지내는거고.
삼국시대에는 비록 주류는 아니긴 했지만 한대에 이미 흔했던 유제품 관련 식문화가 아직 건재해있었다. 조조의 일합수(一合酥) 일화로 유명한 간식도 유제품. 유제품 관련 식문화는 이후 유목 민족의 발호가 계속된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고 개간으로 인한 목초지의 상대적 감소 등의 이유로 북송 무렵 중국 내에서 자취를 감춘다.
참고로 이 시대에는 이름은 대부분 외자 이름이었다. 이름이 모두 한글자고 두글자 이름이 없다는 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고 곳곳에 보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신을 세운 왕망 이래로 두글자의 이름을 쓰게 하는 것은 죄인에게 모욕을 가하기 위한 조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돌아다니지만 이건 '혹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고 어림잡아 내놓은 가설일 뿐이다. 후한 시대의 이름이 실제 대부분 외자이기 때문에 두자 이름이 없다는 설은 상당히 예전부터 있었지만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盧弼)은 후한시대에 두글자 이름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후한 시대에 이름이 전부 외자라는 건 깊이 살피지 않은 잘못된 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일제, 곽유지, 장춘화, 왕원희 등 두 글자 이름이 제법 있다. 다만 남성보다는 여성 중에서 두 글자 이름이 더 흔하게 보인다.
상기한 것처럼 유교가 독점하던 지적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법가, 문화적으로는 도가를 재조명하는 시도가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특히 도교의 경우 이 시대에 사실상 제2의 탄생을 맞아했고 해도 좋을 정도. 남북조시대에 번성하게 되는 불교가 점차 뿌리를 내려가던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8. 군사


향촌 사회의 붕괴와 함께 후한의 모병제도 붕괴한다. 군사 제도는 둔전과 결합된 세병제로 변화한다. 본디 후한은 대대적인 군축을 시행했으므로 변경의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군사 인프라가 약해져있었다. 그러나 180년대 이후 전란으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군역과 군사조직이 생겨났다. 이 군사적 변화점들 중 가장 중요한 요소를 뽑자면, 일반 백성층과 확연히 구분되면서 대를 이어 군역을 세습하며 호족들에 의존하는 군사 계급의 형성, 비-한족계 오랑캐 기병에 대한 급격한 의존, 각 지방의 토착호족들과 군사령관들에게 엄청난 권한을 부여하는 군지휘체계의 확립이 있다.
전란이 장기화됨에 따라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전문병사 계층 양성에 호의적 여론이 일어났고, 이들은 자신의 주군(군벌)들이 임지를 이동해도 계속 따라다니면서 전쟁의 운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초창기 한나라 군역제도를 가동시켰던 안정적 행정시스템은 완전히 붕괴해버렸다. 혼란상이 가득해던 당시 시대상 덕에, 군대에 투신할 보충병의 수가 모자랄 일은 생기지 않았다. 매우 많은 숫자의 절박한 농민들, 유랑자들, 난민들이 군에 입대했다. 이 시대의 많은 대군은 약소군주와 그 추종자들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군주의 종류엔, 자신을 따르는 농민들을 병사로 전환한 토착 거물, 그리고 관군이라기 보단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개인사병집단을 양성한 군사령관들이 있었다. 이 두 형태의 군주를 따르던 사병집단은 부곡(部曲)이라 불렸다. 이런 배경하에서 세워진 삼국은 재통일을 위해 군사 인프라 확충에 힘썼다.
후한 시대에는 화폐의 보급과 상업화가 진전되면서, 기존의 비용이 많이 들던 국가적 보급 시스템을 폐기하고, 세금의 전납화 / 대대적인 민영화로 효율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결과, 반란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일시에 상업망이 무너지면서 기존의 보급 시스템이 아예 남아나지 않는 결과가 되었고, 평화시기에 전투용으로 준비해둔 저축이 존재하지 않으니, 딱히 털어먹을 것도 없고 결국 둔전이 일반화 되었던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축적량이 없어서 "잠깐 농사 좀 해서 군량 모으고 싸우자." 이걸 반복해야 하니 당연히 내전이 지지부진 장기화 될 수 밖에 없다.
미개척지 천국이라 중앙집권은커녕 각 지역 한족 토호들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통치가 불가능했던 동오는 세병제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각 지역 토호들의 사병에 의존하는 세습령병제로 나아갔다. 병호제[15] 아래서 일반 편호(남녀구)와 병사(兵)을 구분함은 물론 관리(吏)의 명부도 따로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촉한의 경우 유비가 입촉한 이후 군의 주력은 보병이었고 기병이 그 다음이었다. 남중은 예로부터 의 산지로 유명했기 때문에 남중을 평정하고 나선 기병전력도 어느정도 충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나라의 대규모 기병대와 맞설 전력까진 아닌 환경이라 팔진도 등 보병 병법의 발전으로 이를 파훼하려고 노력했다. 촉한은 소수민족 부대도 편성했는데 종병(賨兵), 수병(叟兵), 청강병(青羌兵) 등 촉한 경내의 종족, 수족, 강족 등을 편성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부대는 왕평이 운영했던 남중 출신 정예부대 무당비군(無當飛軍) 오부(五部)일 것이다.
촉한은 일반 편호(남녀구) 이외 兵(군사), 吏(관리)를 따로 기록하였는데, 중국 현대사학자 백수이(白寿彝, 1909~2000)의 <중국통사中国通史>[16]에서는 촉한의 사민부에 나오는 대갑장사(帶甲將士)를 세병제(병호제,사가제)를 전제로 한 병적상의 수치가 아니라 당시 상비병의 숫자로 간주하고, 촉한에서는 세병제(병호제,사가제)가 아닌 한나라 때 징병제가 그대로 실시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촉한은 진한시대에 비해 병사들에게 보급할 방호구, 병장기류와 운송수단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는데 제갈량과 촉한의 전설적인 대장장이 포원은 야금술을 발전시켜 튼튼한 갑옷투구, 신도(神刀)라 불리는 갑옷과 투구를 가를 정도의 날카로운 무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제갈량은 원융노라고 불리는 십시연노를 개발한다. 이는 쇠로 화살을 만들고 화살 길이는 8촌인, 한 번에 10발씩 쏘는, 현대 기준으로 말하면 기관총 같은 무기에 속한다. 또한 촉지 제갈량전에서는 제갈량이 병법을 미루어 넓히고 팔진도(八陳圖)를 만드니 모두 그 요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군사전문가들의 고증에 따르면 그 운용은 반드시 연노와 배합되었다고 한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부릉의 힘좋은 병사 3천명을 뽑아 연노사로 삼았다고 한다. 제갈량이 보급의 편리를 위해 운송용 수레 목우유마를 개발한 것도 유명하다.
제갈량이 이끄는 촉한군은 '대오가 질서정연하고 상벌이 엄숙하고 밝았다'라고 한다. 이런 엄격한 군기와 고양된 사기는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며, 장기간에 걸친 교육과 훈련의 결과다. 또한 촉한군은 '무기를 날카롭게 갈고, 무예를 강습하며 뒷날을 도모하니, 병사들은 간결하게 정련되었다'고 한다. 즉 제갈량은 촉군을 정예군으로 육성했다.
위는 기존 세병제의 틀에서 선비족 등 이민족 전력 영입에 반란군 유입분자나 유민들을 잡아다가 둔전을 시키고 부곡을 기반으로 한 사병집단의 영향을 굉장히 다대하게 받아들였다. 병사와 그 가족들은 "군호(軍戶)"라는 특수한 지위를 얻었다. 군호 집단은 다른 일반민이나 농민층과는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군호에 속한 사람의 명단은 특별한 군문서에 기록되었고, 지역 민간행정관보다는 군당국의 통제를 받았다. 일단 어느 사람이 병사가 된다면, 그는 평생에 걸쳐 군복무를 수행해야 했다. 해당 병사가 전사하거나 군무를 수행하기에 너무 노쇠/병약해질 경우, 그의 아들이나 혹은 가까운 친척이 그를 대신해야 했다. 위나라의 병사와 그 가족들은 오직 같은 군호 지위를 가진 사람과만 결혼할 수 있었다. 다른 집단과의 결혼은 군역에 종사할 인력층을 감소시킨다고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서진 왕조는 위나라 군주들이 시행한 이 가혹한 정책을 일정부분 완화시켰지만, 기본적인 제도는 그대로 유지시켰고 병력의 대부분을 여전히 이 제도를 통해 충당했다.
이렇듯 세 나라 각각 자기들의 특색이 두드러졌다. 전란의 시대니까 당연한 소리지만, 군벌의 난립 등의 이유로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졌다. 이는 훗날 서진의 중국 통일 이후 팔왕의 난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한족 세력이 북방 민족에게 알더스 고원의 통제권을 최종적으로 상실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삼국 통일 이후 서진이 영가의 난으로 그 대가를 치룬다. 물론 영가의 난이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일어난 건 결코 아니지만.

9. 역사학에서의 비중


중국 역사학에서 의외로 대중적인 인기에 비해서 역사학적으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시대이기도 하다.[17]
일단 이 분열 시기가 그리 길지 않고, 이 시기가 후대에 남긴 영향도 구품중정제 등 몇가지를 언급하고 넘어가고 끝낼 정도로 매우 제한적이다. 오호십육국 시대가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이후에는 화이잡거(華夷雜居)의 시작점으로서 다뤄지거나 후한말부터 축적되어 서진대에 터진 각종 사회모순들을 설명하면서 언급되는 정도다. 원래 일반적인 역사학에서는 인터넷에서 하듯이 이 시대와 인물 하나하나에 주목해서 다루진 않는다. 가령 초한쟁패기만 해도 역사학에서는 진한교체기 정도로 뭉뚱그려 설명하지, 인물 하나하나를 쪼개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교의 역사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주목을 받는 시대이기도 하다. 태평도오두미도가 나타나면서, 기존의 도가철학이 도교라는 종교 집단으로 변화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두미도의 경우에는 한중군에서 하나의 정치체제를 수립하기도 했다.[18]
고등학교 세계사에선 이 부분에서 위나라의 구품 중정제와 서진이 통일했다는 결과만 딱 한두 줄 정도 쓰여있고, 바로 오호십육국과 남북조시대로 넘어가기 때문에 고딩 삼덕들이 많은 좌절을 한다.
단, 한국사에서는 이시대의 책이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데, 부여, 고구려, 삼한, 동예, 옥저 등 당시 한민족 국가들에 대한 기록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외의 기록은 거의 전해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고구려의 왕계가 일부 누락(차대왕, 고국천왕)되거나 사건의 기년이 불명확하게 기재가 되어 있는 등 문제점도 있는 편.
신라 고구려 백제가 대립하던 한국의 삼국시대와 비교가 되는데 이는 다른점이 많은게 위 촉 오 모두 건국한지 50년이 안돼 망했고 세나라 모두 사마씨라는 제3자에 의해 멸망했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는 최소 삼국이 정립되었을 때에는 세나라 모두 건국한지 500년이 넘어가던 시점이고 1강2약이던 중국의 삼국시대와 달리 1강 2중으로 세나라의 힘이 엇비슷해 100년동안 삼국이 대립하다가 일본이나 당나라까지 개입한 끝에 신라에 의해 통일된점도 다르다.[19]

10. 삼국시대와 삼국지연의


워낙 삼국지연의가 유명한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실제 역사와 삼국지연의를 혼동해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는 기본적으로 역사를 재미있게 풀어서 쓴 소설이다. 역사 삼국지는 따로 있다. 기본적인 이야기의 틀은 실제 역사와 일치하지만 세세한 내용에서는 영웅쟁패를 다루어 극의 재미를 위해 내용을 변개하거나, 촉한을 정통성을 가진 왕조로 간주한 촉한정통론 적인 시각이 많다. 따라서 실제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정사 삼국지 등 관련 역사서를 읽어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연의는 군담소설이고 삼국시대의 각종야사와 민담이 종합된 소설인 만큼 당시의 시대적 배경 및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사실, 삼국지연의에 쓰인 자료들은 출처 등이 기반을 아무래도 역사를 잘 알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두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도 꽤 많이 다르다. 대충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이비 군사학(?)[20]과 진짜 군사학이 아주 많은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한 한계점 때문에 문관의 경우 정치적 리더십과 비전, 행정적 업적은 거의 묻어 버리다시피 하고 오로지 현란한 권모술수 위주로 다룬다. 조조가 패권을 잡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둔전제에 대해서도 '유랑민을 모아서 농사를 시켰다 - 끝 - ' 수준의 설명에 그친다. 또한 행정가로서 큰 공을 세운 유복, 양습, 한호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도 지나가는 엑스트라 1 수준의 대접만 해줄 뿐이다. 지못미.
무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극적 재미'를 위해 장수들의 개인적 무용을 설명하는데 집중하며 통솔력이나 전술적 재능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빈약하다. 사실 나관중이 복잡다기한 전쟁에 대해서 얼마나 작중 묘사를 하기 어렵겠는가? 덕분에 삼국지연의는 조금 심하게 말하면 혼자서 수천명을 상대하는 초능력자들의 능력자 배틀물이 되어 버렸다. 팔문금쇄진 같은 진법 묘사가 깔짝 나오긴 하지만 그나마도 털리는 역할이다. 그리고 그런 기록을 맹신해 '중국 군대는 우루루 모였다 우루루 흩어지는 오합지졸'이라는 나름의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당연한 일이지만 수천, 수만명의 병사들이 엄청난 물자를 소모하며 벌이는 전쟁이 그렇게 대장전 한판에 승부가 결정났을리 만무하다.
다만 전쟁론 등을 참고하면 적의 핵심 지휘관들을 괴멸시키는데 성공하면 사기 등이 바닥나 패주할 수도 있었다. 과거에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적의 힘과 전투력이 얼마나 되는지 등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휘관들이 괴멸되거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중요 도시나 지역이 따이거나 하면 그 충격이 엄청났다. 단적으로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음에도 이미 졌다고 생각해서 다 도망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도 심지어 나폴레옹 역시 사기빨이 있긴 했다. 프로이센군처럼 질적으로 우수한 군인들을 보유한 나라와의 전쟁에서는 프랑스군보다 적들이 우세하거나 막상막하로 싸우고 있다가도 민족주의로 무장한 프랑스군과 달리 적들의 사기가 먼저 떨어져서 도망가다 프랑스군에 개발린 전투들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중국은 전국시대에 이미 총력전 개념이 생겨났을 정도로 고대에 이미 고도로 작전술의 개념이 발달한 나라였다. 물론 냉병기 시대였던 만큼 무장들의 개인적 무용은 전쟁의 중요한 요소였고 실제로도 용맹을 떨친 맹장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돌격대를 이끌고 선봉을 선다든지 성벽에 앞장서 먼저 오른다든지 하는 형태로 승리에 기여한 것이지 혼자 나가서 수만명을 싹 베어버리다든지 적장과 1vs1 해서 진 쪽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조리 후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 정예병들이나 전력이 강한 병종들이 전략적 혹은 전술적으로 불리해도 오히려 무용으로 죄다 썰어버리는 경우가 역사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냉병기가 상당히 유용했던 시대에는 개인적 능력이 뛰어나면 전략적, 전술적, 장비에 의한 차이를 극복하기가 실제로 화기 시대보다 쉬웠다. 화기는 워낙 사기적인 무기들이 많아 개인적 능력이 별 의미없지만 실제로도 간단한 훈련만 받은 일반인들이 냉병기로 실력자들과 싸운다면 어지간한 전략적, 전술적, 장비적 차이가 아닌 이상 질 확률이 더 높다.

11. 삼국시대가 인기 있는 이유


개중에는 삼국시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시대가 아닌데 삼국지연의가 워낙 널리 읽힌 덕분에 과대평가가 됐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시대가 오로지 삼국지연의 때문에 유명해진 시대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왜냐면 삼국시대는 삼국지연의가 집필되기 전부터 이미 중국인들에게 영국의 아서 왕 전설처럼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나관중이 연의에 끼워맞춘 가상의 이야기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민간에서 돌고 있던 이야기들이고 나관중을 그걸 집대성해 소설로 쓴거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삼국시대가 워낙 유명해서 삼국지연의가 대박을 쳤다고도 볼 수 있는 것.
삼국지연의가 이처럼 사랑받은 것에 대해서는 한나라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실질적으로 통일을 완성한 최초의 왕조이고 중국 농경 문화의 기초적인 뼈대를 한나라 때 다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1] 한나라는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다스리는데 제도가 상당히 유용하게 잘 만들어졌다, 세계사에서도 특이할 정도로 단기간만에 후세대 농경 왕조들조차 시대적 한계로 인하여 넘기 힘든 엄청난 영토와 인구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아무래도 너무 단시일만에 영토와 인구를 얻었다는 점에서 그 영토와 인구를 제대로 다 활용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영토와 인구라면 아예 다른 정체성을 가진 집단들이 출현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던 걸로 봐서는 한나라[22]가 최소한의 의의가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니 한나라가 몰락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군웅들[23]이 형태는 다를지언정 다시 한나라의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가자는 모토 하에 싸운 역사가 사랑받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런 것이다.
여기에 더해 삼국시대 만큼 수많은 문사와 무장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사서 안에서 한껏 발산하고 있는 시대도 드물다. 고작 100여년 남짓한[24] 기간을 역사서로 서술하자니 정치사보다는 인물들의 열전 중심으로 엮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유명한 장군 너댓 정도나 알려지면 많은 수준인 다른 시대의 전쟁사에 비해 정말 엄청나게 많은 인물들의 행적을 인간관계 하나하나 대조해가며 추적하는 것이 가능한 몇 안되는 시대다. 배신과 무력의 화신 여포, 난세의 간웅이라는 말에 껄껄대는 조조, 어설프게 칭제했다가 알거지가 되어 죽어간 원술이나 사세삼공의 가문와 얼자라는 약점을 동시에 지닌 원소 등등 지도자급 군웅들만 해도 각양각색의 개성이 정사 안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그 중에서도 죽어도 백성을 버릴 수 없다 부르짖으며 끝내 돗자리장수에서부터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유비라는 캐릭터는 수많은 민중들에게 광범위한 공감과 지지를 얻었고 심지어는 '승리자'인 조위-사마씨가 아닌 명백한 실패자 유비를 주인공으로 바라보는 문학적 해석이 자생적으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삼국지연의의 저술은 물론 나관중의 광범위한 자료 수집능력과 근성, 문학적 재능이 큰 기여를 했지만, 그 이전에 그 수많은 인물상을 입체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가 이미 생성되어 있음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삼국지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에 있어 일종의 대체신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당장 관우나 제갈량이 중국 민간신앙에서 신으로 받들여지는 모습만 봐도 쉬이 이해할 수 있다. 한나라, 한실로 대표되는 하나의 천하라는 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군웅들이 천하통일을 목표로 치열하게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더더욱 강화되었고, 이 관념이 삼국지(연의)를 통해 대중들에게 전파됨으로서 동아시아 범중화문화권의 사상적 토대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한 측면이 있다. 어찌 보면 작가 스스로가 대체신화를 만들고자 목표했던 레젠다리움, 미국의 대체건국신화라고까지 불리는 스타워즈의 진정한 대선배라고도 할 수 있다.[25] 이는 중국의 그 어느 시대보다도 삼국시대만큼 인물 중심으로 소비되는 시대가 없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26]
단 삼국시대를 다룬 소설인 삼국지연의가 한족민족주의적 서사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왕조의 정통성 개념에 영향을 받았는가 하면 맞지만 근데 그게 현대 민족적 개념이냐 하면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지와는 더더욱 관련이 없고. 중화랑 가장 흡사한게 로마 제국 계승 관념인데, 두 관념의 특징은 그 계승이 문화적 이념적 개념이지 역사적 혈통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족과 달리 외부 혈통집단에 열려 있다는게 핵심이다. 삼국연의는 청대 금서였지만(판본에 상관없이), 워낙 재미있다보니 널리 유통되었고, 단연 모종강 평본이 인기였다. 느슨한 금서였던 셈인데, 만약 한흥반청 의도가 있었거나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읽혀졌다면 청이 가만히 있었을까, 적어도 청 중기까지 책이 유통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12. 로마 제국과의 비교


여담으로 비슷한 시기(260~274 중국 삼국시대의 최후반과 같은 시기) 유럽의 로마 제국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힌 후 군벌들이 난립하여 칭제를 하는 자칭 황제들만 20명이나 등장하는 등 혼란에 빠지고 이 틈을 타 제국의 서쪽과 동쪽 양쪽에서 반란이 일어나 서부의 갈리아 제국, 중부의 로마 제국, 동부의 팔미라 제국 세 조각으로 쪼개져 버려서 중국의 후한과 마찬가지로 멸망하기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게다가 중국보다 더 상황이 안좋은 것이 위나라가 국력에서 확실하게 우위에 있었던 중국과 달리 로마,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은 세나라의 국력이 거의 비슷한 상황이라 재통일하는게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변 이민족들에 비해 대체적으로 분명한 군사적 우세에 있었던 위촉오와는 달리 로마판 삼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게르만족들에게 심하게 압박받고 있던 상태라서 서로 싸움질하면 방어선이 붕괴되어 셋 다 죽는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싸우지 않고 사산조 페르시아와 게르만족들하고만 싸웠고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다시 재통일에 나서자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은 금세 항복해버려 로마판 삼국지는 20년도 안되어 막을 내리게 된다. [27]

13. 주요 인물


연의의 영향으로 이름이 대중에게 각인된 인물만 추려도 수백명은 되겠지만, 일단은 이하의 인물들이 대체적인 세계적으로 언급되는 인물들만 넣도록 하겠다.
  • 정치
    • 사마염 - 삼국 통일, 삼국시대 종결.
    • 손권 - 삼국 중 오나라 건국. 강남 유역 개발.[28]
    • 유비 - 삼국 중 촉나라 건국.
    • 장각 - 중국 최초의 종교집단 주도 하의 민중 반란인 황건적의 난의 주동자.
    • 제갈량 - 촉나라의 명재상.
    • 조비 - 삼국 중 위나라 건국.
    • 조조 - 삼국 중 위나라 건국 기틀 마련.
    • 진군 - 구품중정제[29] 제안.
  • 문화, 학문
  • 중국 외 주변국 역사

14. 여담


  • 워낙 혼란스러웠던 시기라서 별의별 희한한 기록들이 다 있는데, 삼국시대의 막바지인 오나라 영안(永安) 2년(서기 259년) 3월, 오나라의 수도인 건업에 무려 화성에서 왔다고 스스로를 밝힌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지 시대에 나타난 화성인
  • 이름이 같은 한국의 삼국시대와 비교하면 한국 삼국시대 안에 중국 삼국시대가 완전히 포함된다.

15. 관련 문서



[1] 조비의 아버지 조조는 어디까지나 승상으로써 지냈을 뿐이고 황제가 되진 않았지만 이미 그 권세가 황제에 가까웠기에 사실상의 창업군주로도 볼 여지는 있다.[2] 무창은 우창이며 한커우 지방을 합쳐 현재는 우한시라고 불린다.[3] 여기에 더해 공손연이 238년까지 존재했다.[4] 정확히 말하면 184년 황건적의 난~220년 후한의 공식적 멸망 사이의 기간이 난세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가 난세인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유명무실해졌을지언정 통일제국 (후)한이라는 국가가 남아있고 군웅할거 시대의 군벌들에서 삼국 정립 이후까지도 각지의 군벌 세력들이 명분상으로나마 한의 신하를 자처하고 있는 이상 이는 어디까지나 후한 시대의 일부인 후한 말기이지 후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 시작된 시대인 삼국시대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비롯하여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하도 난세, 난세하니 난세=삼국시대라고 착각하고 '한나라의 공식적 멸망이 삼국시대의 시작점' 이라는 견해를 '한나라가 멸망한 220년부터 난세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라고 엉뚱하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 말하자면 '후한 말기부터 난세가 시작되어, 그 난세의 와중에 후한이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는 의미이다.[5] 굳이 말하자면 황건적의 난 이후 한나라의 국가 기능이 '쇠퇴하여' 정국 장악력이 크게 낮아졌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국가 기능의 약화'와 '국가 기능 상실'은 명백히 다르다는 것.[6]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1 -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 사계절 출판사[7] 이전까지 한의 승상이던 조조의 위왕 즉위가 이 시점(유비가 입촉하였으나 아직 조조가 한중을 장악하고 있던 시점)에 일어났다. 즉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적벽대전의 패배로 조조가 강남 장악에 실패하고, 유비가 익주를 장악하여 강남의 세력이 촉-오의 양대 구도로 재편성되자 조조 역시 이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세력권을 명확히하기 위해 위왕에 즉위한 것으로 볼 수 도 있는 것.[8] 또는 유비의 한중왕 즉위를 기준으로 본다면, 익주를 장악한 유비가 익주의 목구멍인 한중에서 조조의 세력을 구축(驅逐)하여 조조의 세력과 맞설 수 있는 영역을 구축(構築)함으로써 이전까지 단시간에 격심한 세력변화를 겪을 수 있던 군웅할거시대가 완전히 끝나고, 삼국간의 장기적 대립 구도가 시작된 것을 삼국시대 시작의 기준으로 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9] 이건 다른 2개의 나라도 마찬가지.[10] 실제로 중국인 역사학자 왕육민이 삼국시대의 호적을 상세히 분석한 결과 삼국시대 인구는 약 3800만으로 계산되었다.# 즉, 삼국시대에는 행정권에 들어온 인구는 약 3800만이었지만, 이중에서 돈으로 납세가 가능한 인구는 겨우 767만 정도였을 뿐이라는 소리.[11] 뭘 몰라서 무식했던 케이스호족들과 끊임없이 트러블을 일으켰던 케이스도 있었고, 계획적으로 호족을 찍어 누르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케이스도 있었다.[12] 등애의 촉한 침공 때 어이 없을 정도로 쉽게 성을 내준 마막과 같은 인물을 생각해보자.[13] 중국전사(全史) 제32권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中國魏晉南北朝經濟史), 1993년, 인민출판사.[14] 드라마나 영화 같은 삼국지 관련 영상물을 보면 연회나 회의 장면에서 주연급들이 어딘가에 올라가 앉아 있는 장면이 종종 나올것이다.[15] 병농일치의 징병제와 달리 대를 이어 군역을 전담하는 사가(士家,병호)에서 병력을 충당하는 제도.세병제나 사가제라고도 함.[16] 상해인민출판사(上海人民出版社) 1989~1999년 출판, 총 12권 22책, 1400만 자, 백수이가 주편집자가 되었고, 22명의 분권 편집장, 탁월한 성과에 조예가 깊은 500여명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썼다.[17] 단, <하버드 중국사-남북조 분열기의 중국>의 서문에서 '중국인은 중국이 통일되고 군사적으로 강성했던 시대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로 한제국이 종교 반란 집단과 지역 군벌의 손에 무너진 이후 400년 역사는 소홀하게 다루어진다.' 라고 설명하며 삼국시대부터 수, 당 이전 까지 시대가 주목받지 못한 이유를 해석했다. 간단히 말해서 중국이 통일돼서 주변국에 힘 좀 쓰던 시대가 중국인 역사학자들이 더 선호한다고 보면 된다.[18] 물론 그렇다고 태평도처럼 신왕조 수립같은 거창한건 아니고 그냥 한중군 내에서 군벌행세 했다고 보면 된다.[19] 사실 비교하려면 후삼국시대와 비교하는 것이 맞다.[20] 의외로 이런 종류의 사이비 학문도 아주 좁게 보면 진리에 가까운 것이 있거나 창시자가 나름 머리를 짜내서 이론을 갖추기 때문에 영리하지 않으면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거의 절대 다수는 결정적인 허점들이 있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알아봐야 현실에서 별로 유익하지도 않고 오히려 더 해로운 경우가 많다.[21] 당연히 한나라 때야 영토의 개척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북방이나 남방이나 한족을 칭한 왕조들의 영역은 대체로 한나라 때 확보한 영역과 비슷하거나 적었다.[22] 심지어 한나라 때 선택한 유교가 일부 유목민들을 제외한 중화 문명의 메이저 문화로 거의 끝까지 가게 된다.[23] 유비, 조조, 손권, 원소, 사마염[24] 황건적의 난-동오 멸망까지 정확히 만 96년. 그나마도 조위 건국-동오 멸망까지는 꼴랑 60년이다.[25] 다만 뒤의 두 사례가 완전한 창작물인데 반해 삼국지(연의)는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야 뭐 그리스 신화만 해도 테베 전쟁이나 트로이 전쟁처럼 실제 역사에서 모티브를 따 온 파트도 있긴 하다.[26] 토탈 워 삼국이 첫 유료 DLC로 무려 팔왕의 난을 내놨을 때 중국을 비롯한 삼국지의 전통적 소비지역(=동아시아)에서 못마땅한 반응을 내놨던 것은 단순히 진(晉)사에 대한 생소함이나 혐오감(특히 중국인들 입장에서)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물을 소비하는 삼국지의 전통적인 향유방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구성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본편만 해도 유니크 무장이 너무 적다며 입이 댓발은 튀어나온 판에....[27] 실제로 서구 사학계에서는 동진과 동진의 뒤를 이은 남조 국가들을 중국판 비잔티움 제국에 비견하기도 한다.[28] 남경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강남경제권의 시발점을 연 군주로 평가받는다.[29] 구품중정제는 이후 구품중정제가 과거제로 대체될 때까지 남아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장 조선시대에도 정1품, 정2품과 같은 구품은 남아있었고, 오늘날의 자격증도 3급, 2급, 1급 과 같이 숫자가 올라가면 높아진다는 것은 구품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