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민족해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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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어 : ကရင်အမျိုးသား လွတ်မြောက်ရေး တပ်မတော်
미얀마의 소수민족 카렌족이 결성한 카렌 민족 연맹군대. 미얀마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1949년에 결성하였다. 2006년을 기준으로 약 5천명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특수 부대까지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한동안 카렌족 저항군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여기도 분열되고 말았는데 인구 다수가 불교도임에도 기독교인이 주도한 카렌 민족 해방군에 대하여 반발이 심해져 갈등을 빚은 끝에 민주카렌불교도군(DKBA)으로 따로 나누어져 서로 싸웠다.
이 모든 원인이 바로 식민지로 서로 분열시킨 영국이 저지른 짓이었다. 전통 불교사회였던 카렌족은 ‘민족분리정책’을 통해 버마를 지배해 온 영국식민정부에 협조하면서 많은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했고, 그 과정에서 버마족과 사이에 뿌리 깊은 불신감이 싹텄다. 그리고 카렌족은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버마연방에 흡수당하면서부터 지난한 민족해방투쟁을 벌여왔다.
그러나 6백만 주민 가운데 70~ 80%가 불교도인 카렌족 사회를 이끌고 해방투쟁을 벌여왔던 카렌민족연합(KNU)과 그 무장조직인 카렌민족해방군 지도부가 거의 모두 소수 기독교도였던 탓에 처음부터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다수인 불교도들 불만이 쌓이면서 ‘불교도군 반란’ 소문은 이미 1988년 이전부터 줄기차게 나돌았다. 그러다가 1993년 말, 먀잉지우에서 이름난 우 투 짜나라는 승려가 카렌민족해방군 본부인 마너플라우 인근 산상에 사리탑을 세우겠다고 나서면서부터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에 카렌민족해방군 지도부는 ‘산상 사리탑이 정부군에게 타격점을 제공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독교중심주의’에 젖어 있던 카렌 지휘관들이 불교도들에게 행패를 부려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고 만 것.
결국 1994년 12월 3일, 전략요충지이자 보급선이 걸린 트무웨타에서 카렌민족해방군 1여단, 6여단, 7여단 그리고 19대대, 21대대, 24대대 소속 불교도 전사 180여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 12월5일, 1천여명으로 불어난 불교도 반란군과 200여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우 투 짜나를 지도자로 내세운 뒤, 기어이 민주카렌불교도군이라는 이름 아래 성명서를 날리고 말았다. 이들이 카렌민족해방군에서 떨어져 나온 뒤, 버마정부군과 손잡으면서 이야긴 달라졌다. 압도적인 화력을 지원받은 DKBA와 버마군이 1995년 1월 마너플라우를 함락했던 것.
그리하여 카렌민족 해방군은 예전과 달리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지금도 둘은 깊어질대로 깊어진 증오로 서로 전투를 벌이며 대치 중이다. 게다가 민족해방군은 이전의 30% 정도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기독교인들도 기나긴 내전과 미얀마 측의 대대적 공격 및 분열에 치를 떨며 해방군을 떠나서 이젠 미얀마에서도 극히 일부 지역에서 깽판치는 폭동 세력 정도로 무시 중. 사실 카렌불교도군에게 장비면이나 숫적으로 밀리고 있다,
단, 카렌 독립군이 분리되어 불교도 쪽이 정부군에 합류한 것은 독립군 수뇌부가 종교별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해도 언젠가 구조상으로 벌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단 현재 미얀마의 지역별 인구 구성부터가 카렌 민족주의가 처음 발흥했던 19세기 말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카렌 독립군이 영유권을 주장한 미얀마 남동부의 총 인구가 500만 가량인데[1] 이들 중 50.0% 정도인 250만 가량이 카렌족이다. 그런데 미얀마 내에서 카렌족으로 분류되는 인구는 아무리 적어도 '''400만 이상'''으로 추산된다.
카렌족이 독자 영토를 가지고 독립하기에는 이미 카렌족들 사이에서도 미얀마의 타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비율이 극단적으로 높은 상황인 것이다. 결국 카렌족 자체가 더 이상 벽지의 소수민족이 아니라 미얀마 사회 전반의 일부가 된 상황이기 때문에 종교 분열이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카렌 민족해방군이 지금과 같은 수순을 밟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1] 이 중 꺼잉 주가 158만명, 몬 주가 205만명, 뜨닌다이 구가 141만명. 꺼잉 주는 말하자면 카렌족의 본적지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