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클라우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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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에서 호르스트 슈만과 함께 맨 왼쪽의 인물이다.
'''카를 클라우베르크(Carl Clauberg)'''
(1898년 9월 28일 - 1957년 8월 9일)
카를 클라우베르크는 1890년에 명문 장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의 육군 보병으로 참전하였고 킬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하였고, 산부인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1933년 나치당에 입당하였고,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수를 역임했다. 그러던 중 그는 힘러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실험(?)을 이루게 해달라고 부탁하였고 힘러는 아우슈비츠 형무소에다 카를의 연구소를 마련해주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호르스트 슈만과 같이 불임실험을 하는 의사들이 사람들이 많았고, 클라우베르크 박사 역시 여자들에게 주사할 불임약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그는 방부제로 쓰는 포르말린이나 마취제로 사용하는 노보카인을 '''여성의 나팔관에 주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 실험에 참가한 여자들은 자궁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겪었지만 가스실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실험에 적극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담으로 힘러는 이 방법을 매우 칭찬했다고 한다. 그는 '''마취제 없이 여성의 자궁 안에 산을 투입시키거나, 난소를 떼어내고 엑스레이를 연속으로 찍는 이른바 X선 실험'''을 해서 수용소 여성 포로들의 난소는 실험에 무자비하게 활용되었다. 게다가 여성의 난소의 화학적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압력실에 여성 포로들을 집어넣고서 남자들에게 성관계를 강요했고 이 때를 포착해 카를 클라우베르크는 이들의 성관계 장면을 엑스레이 촬영하기도 했다.
한편 클라우베르크는 여성이나 남성의 성기에 무척 관심이 많았고, 포로들을 가스실에서 죽이기 전에 '''그들의 성기를 반드시 잘라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또 다른 생체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클라우베르크의 생체실험 희생자 수가 현재 확인된 숫자만 약 700명이나 된다고 추산된다. 그러나 소련군의 침공으로 그는 라펜스뷔크 수용소로 연구소를 옮겼고 종전 후 소련군에게 잡혀 23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7년 후에 서독과의 포로 교환 합의로 풀려났다. 그렇게 인생의 승리자가 되나 싶었지만 클라우베르크는 서독에서 어이없게도 자신이 했던 생체실험을 자랑하는(!) 행동을 하고 다녔다. 이에 분노한 생존자들이 그를 고소하여 클라우베르크는 1955년 체포되었으나 재판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그가 재판을 받기 전에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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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에서 호르스트 슈만과 함께 맨 왼쪽의 인물이다.
1. 개요
'''카를 클라우베르크(Carl Clauberg)'''
(1898년 9월 28일 - 1957년 8월 9일)
2. 만행 이전의 생애
카를 클라우베르크는 1890년에 명문 장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의 육군 보병으로 참전하였고 킬 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하였고, 산부인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1933년 나치당에 입당하였고,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수를 역임했다. 그러던 중 그는 힘러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실험(?)을 이루게 해달라고 부탁하였고 힘러는 아우슈비츠 형무소에다 카를의 연구소를 마련해주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호르스트 슈만과 같이 불임실험을 하는 의사들이 사람들이 많았고, 클라우베르크 박사 역시 여자들에게 주사할 불임약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3. 만행
그는 방부제로 쓰는 포르말린이나 마취제로 사용하는 노보카인을 '''여성의 나팔관에 주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 실험에 참가한 여자들은 자궁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겪었지만 가스실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실험에 적극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담으로 힘러는 이 방법을 매우 칭찬했다고 한다. 그는 '''마취제 없이 여성의 자궁 안에 산을 투입시키거나, 난소를 떼어내고 엑스레이를 연속으로 찍는 이른바 X선 실험'''을 해서 수용소 여성 포로들의 난소는 실험에 무자비하게 활용되었다. 게다가 여성의 난소의 화학적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압력실에 여성 포로들을 집어넣고서 남자들에게 성관계를 강요했고 이 때를 포착해 카를 클라우베르크는 이들의 성관계 장면을 엑스레이 촬영하기도 했다.
한편 클라우베르크는 여성이나 남성의 성기에 무척 관심이 많았고, 포로들을 가스실에서 죽이기 전에 '''그들의 성기를 반드시 잘라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또 다른 생체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클라우베르크의 생체실험 희생자 수가 현재 확인된 숫자만 약 700명이나 된다고 추산된다. 그러나 소련군의 침공으로 그는 라펜스뷔크 수용소로 연구소를 옮겼고 종전 후 소련군에게 잡혀 23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7년 후에 서독과의 포로 교환 합의로 풀려났다. 그렇게 인생의 승리자가 되나 싶었지만 클라우베르크는 서독에서 어이없게도 자신이 했던 생체실험을 자랑하는(!) 행동을 하고 다녔다. 이에 분노한 생존자들이 그를 고소하여 클라우베르크는 1955년 체포되었으나 재판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그가 재판을 받기 전에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