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틀룩 빌게 카간

 


Qutlugh bilge qaghan(골록비가가한, 咄錄毗伽可汗)
재위기간 (790 ~ 795)
위구르 제국의 제7대 가한[1]. 구당서에는 봉성가한(奉誠可汗)으로 부른다. 이름은 아 초르(아철, 阿啜).
789 ~ 790년은 그야말로 격동기였다. 토번의 명장 줘치수가 백복돌궐, 카를룩과 연합하여 당의 북정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에 힐우가사(頡干迦斯)가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연합해 반격을 가했으나 실패한다.
그 무렵 위구르 내부에서는 카간의 계승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다. 봉성가한의 동생과 엽공주가 결탁하여 봉성가한을 살해하고 스스로 가한으로 자립한 것이 발단. 즉각적으로 차상과 경세가들이 찬탈자 일파를 처단하였고, 봉성가한의 아들인 아철을 즉위시켰다. 아철은 16 ~ 17세의 어린 나이로 아직 부족한게 많았다. 힐우가사가 전쟁에서 돌아오자 차상과 경세가들은 전권을 힐우가사에 위임하였고 위구르에 계승 분쟁이 있었음을 당에 알렸다. 790년, 힐우가사는 병사 5만을 편성해 재차 북정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북정은 토번의 형세가 위용하여 포기하고 서주로 들어가 위구르군을 배반한 당의 장수 양습고를 죽이게 된다. 이때 카를룩이 부도천까지 진출하자 힐우가사는 퇴각하였다.
791년, 힐우가사는 북정을 다시 공격해 함락시켜 위구르 제국의 위엄은 하늘을 찔렀다. [2] 힐우가사는 양습고를 죽인 것에 대해 사과를 청하면서 토번의 사자 상결심을 장안에 보내는 등 당과 친선외교를 꾀하였다.
795년, 돌록비가가한이 사망하였다. 그런데 아들이 없어 경세가들이 대상 힐우가사를 가한으로 추대했다.
[1] 충정가한을 시해하고 가한에 자리에 오른 충정가한의 동생을 비정통 가한으로 취급하고, 위구르 제국의 6대 가한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2] 위구르의 북정 점령사건은 기록마다 오차가 있어서 마땅히 이렇다하기 어렵다. 학계마다 가설이 있지만, 그 가설들은 대부분 중국 관점에서만 초점을 두었을뿐 정작 위구르의 내부 사정은 옅보지 않았다. 명백한 점은 토번과 위구르가 북정을 두고 다투었을 시기(789 ~ 790)에 위구르에선 카간의 계승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본래 위구르의 씨족은 약라갈씨인데 이 시기에 협질(硤跌)씨족으로 바뀌었다. 또한 위구르가 서부로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도 이 시기이다. 따라서 위구르의 내부사정과 함께 북정 점거시기를 추측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