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르 제국

 


'''토쿠즈 위구르[1][2] 카간국'''
'''𐰺𐰍𐰖𐰆 : 𐰔𐰆𐰴𐰆𐱅'''
'''Toquz Uyğur Kağanlığı'''

[image]
국기
[image]
[3]
영토
위치
시베리아
몽골 고원
중앙아시아 일대
수도
오르두 발륵[4]
정치체제
유목정
국가원수
대카간
국성
야글라카르[5] -> 에디즈[6]
언어
고대 위구르어, 소그드어
종족
위구르족[7]
종교
마니교
존속기간
742년 ~ 840년
성립 이전
돌궐 제2제국
멸망 이후
천산 위구르, 하서 위구르
예니세이 키르기스
카라한 칸국
(이후 요나라에 흡수)
1. 개요
2. 역사
3. 문화
4. 역대 카간
5. 제국의 멸망 이후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대 위구르어: 𐰺𐰍𐰖𐰆 (Uyɣur)[8]
위구르어: ئورخۇن ئۇيغۇر خانلىقى
몽골어: Уйгур улс
한자: 回鶻[9], 回紇
위구르 칸국(Uyghur Khaganate). 741년, 튀르크 계열 종족인 위구르족이 봉기하여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던 돌궐 제2제국을 멸망시키고, 약 100년 동안 당나라와 반목과 친목을 반복하며 그곳 실크로드에서 얻어지는 부를 바탕으로 820년대 후반 위 지도에 나온 영토 수준으로 크게 팽창해 최대 전성기를 맞이했다.
839년 창신 가한이 내부 권력 다툼 끝에 살해당하고, 역병[10]이 퍼지면서 혼란에 빠졌다. 840년 위구르 제국의 셍귄 퀼뤽 바가의 구원 요청을 빌미로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키르기스족에게 수도 카라 발가순이 파괴당하며 멸망하고 만다.
현대에 시베리아의 어느 호수에서 이 위구르 제국의 궁궐 터로 추정되는 당나라 양식의 포르 바진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 요새 터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의 호수 위에서 발견되어서 용도에 대해서는 아직도 추정 중이라고.

2. 역사


700년대 중반, 위구르족은 바스밀, 카를룩 부족과 연합해서 몽골 초원의 패자였던 돌궐 제2제국을 멸망시키고, 바스밀과 카를룩도 물리쳤다. 그리고 후일의 카라발가순(Kara Balgasun)[11] 근교의 오르두 발리크(Ordu Balik)[12]에 수도를 정하고, 당으로부터도 인정받아 위구르 제국을 세우게 된다. 초원지대의 최대세력으로 떠오른 위구르족이었으나, 초창기엔 제국을 칭할 만한 기반도 세력도 권위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13] 그 때문에 사방에서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세력들을 격파해 나가야만 했던 위구르족에게 이런 역학관계를 일거에 뒤바꿀 수 있는 대사건이 발생하게되니 그것이 바로 안록산사사명이 일으킨 안사의 난이었다. 건국 이후 1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사실 안사의 난 자체가 위구르 제국이 돌궐을 무너트릴 때 많은 돌궐인의 잔당+소그드인들이 중국으로 내려갔고, 안록산 휘하에 편입된 것이니 발발 계기부터가 위구르와 관련이 없진 않았다. 그리고 이 잔당들이 남아있는 한 까딱하다간 돌궐을 격파하고, 어렵게 이룩한 초원지방의 패권을 다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시달려, 위구르는 안사의 난 초창기부터 안록산측에 붙은 기타 초원세력들을 싸그리 박살내기 위해 반복해서 당나라에게 구원군 파병 요청 의사를 전했다. 위구르는 756년에 카라치가 지휘하는 3,000명의 기병대를, 757년에는 카를룩 카간의 아들 야브구가 이끄는 4,000명의 기병을 보냈다. 이들은 유주태원을 공략하고, 당의 장군 곽자의와 연합해 낙양장안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를 통해 당나라에게서 매년 비단 20,000필을 포함한 막대한 물자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얻은 물자들을 이용해 주변 세력을 포섭하거나 격파하며 세력을 더욱 충실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위구르족은 진정한 제국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게다가 초기 '안록산의 난'이던 시절에는 아직 당나라의 위세가 살아있던 시절이라 애초에 낙양 등의 거대 도시를 공략한 후 약탈할 계획을 세우고도 당의 만류와 그들이 내어주는 물자를 받고 삼가는 모습을 보였으나, 안록산의 난을 겪으며 당의 여력이 완전히 소진된 것을 확인한 '사사명의 난' 시기에 들어서는(이때도 4,000 기병을 지원군으로 보냈는데 이들은 일단 반란군을 소탕해주기는 했지만) 당의 만류조차 무시하고, 함락한 도시들을 대대적으로 약탈해 물자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특히 낙양을 함락한 다음에는 3일간 대대적인 약탈과 살육을 거행했는데, 신당서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위구르군을 두려워한 백성들이 목숨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낙양 인근의 백당사로 몰려들었으나 이곳을 위구르가 불태워 백당사에서 죽은 자만 1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로 이후 당과 위구르가 상호협력 관계에 가까워져 토번이나 기타 유목민족 세력과 맞서기 위해 수차례 손발을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당은 자국 내에서의 군사활동에서 만큼은 위구르의 힘을 빌리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되었다.
그 후로도 안사의 난을 겪으며 '''여력이 소진된 당나라를 위협하여 북방을 자주 침범, 당나라로부터 막대한 공물을 뜯어내고, 국경에 정기시장을 열어 품질이 떨어지는 말들을 자신들이 정한 고가의 가격에 가져갈 것을 강요하며 막대한 이익을 취한다. 특히 당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당의 황제와 위구르 제국의 가한이 형제가 됐다고 주장했다.
당나라의 황제은 아들 옹왕을 당군의 지휘관으로 삼아 영접단을 구성해 뵈귀 카간의 입성을 환영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위구르 측은 당 영접단 측이 위구르 전통 춤을 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자에게 직접 춤추라고 명령하였는데 이에 당의 관리가 황태자가 아직 나이가 어려 전통춤을 잘 모른다고 대답하자, 이에 격분한 위구르 측 신하가 직접 매질을 해 영접단을 죽여버릴 정도로 당나라를 업신여기고 무시했다.[14]
이때의 위구르 제국을 가리켜 당나라 사서에서는 "그들은 검소하고 상하가 사치를 모르며 서로 굳게 단결하여 의심이 없으니, 그 힘이 가히 무적이다."라고 탄식할 정도였다. 이렇게 당나라가 호구인 걸 보면 왜 위구르제국이 당을 직접 정복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위구르는 중국을 공격해 영토적으로 지배하는 것보다는 화친이나 교역을 통해 뜯어먹는 데 만족했다. 사실 비슷한 강역과 구도였던 옛 흉노 등도 비슷하게 전한에 우세를 점하고도 막대한 공물을 걷고 약탈하는 데 만족했던 전력이 있고, 유목민들이 남중국까지 완전히 삼키는 건 위진남북조시대 동안 한 번도 사례가 없었던 걸 본다면[15]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image]
장안(長安, 현재의 시안)을 점령했을 당시,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마니교와 접촉하여 마니교 사제와 신도들을 몽골 초원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마니교를 상당히 우대하여, 781년 아예 국교로 반포하고, 위구르 귀족들은 육식을 금하는 마니교의 법에 따라, 초원에 밭을 만들고 채소를 길러 먹기도 했으며 후기에는 아예 카라발가순이라는 도시를 신축하고 살기도 했다.[16]
하지만 지나친 억압은 곧 당나라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한 당나라가 국경 수비를 강화하며 시장 폐지, 국경 봉쇄 등의 강경책으로 대응하자 곧 심각한 물자 부족과 내부 반란에 시달리게 된다.
이것이 위구르 제국에게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은, 안사의 난 이전까지 조금 강력한 유목 민족 수준에 불과했던 그들이 안사의 난을 통해 당으로 부터 얻은 막대한 물자(주로 비단)을 마니교도나 소그드 상인을 통해 서역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실크로드 교역 이익을 바탕으로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위구르 제국 입장에서 당나라에서 유입되는 물자는 그들이 초원의 패권을 잡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재원이며, 단순히 당나라를 공격해 봐야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 없으면 말짱 꽝이라는 것.[17]
결국 당나라로부터 물자 유입이 끊긴 위구르 제국은 초원에서의 패권을 유지할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주변 세력들을 족치기 시작했는데, 자잘한 세력들을 족쳐봐야 당나라만큼 막대한 물자를 제공할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고, 위구르 제국의 막대한 요구에 견디다 못한 온갖 세력의 반발을 경험해야만 했다.[18] 특히나 강하게 반발했던 세력이 훗날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키는 키르기스족. 이와 같은 사태를 통해 백날 위협만 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독으로 돌아옴을 깨달은 위구르 제국은 그간의 강압적 자세를 버리고 당시 군사력이 필요했던 당나라에게 군사력을 제공하며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당의 비단을 얻는 상부상조 전략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이후 당과 위구르 제국은 종종 반목하면서도 기본적으로 협력 관계에 접어들게 된다.
이후 과거 위구르 제국을 마구 비난하던 당나라가 위구르 제국에 대해 "위구르는 나라에 어려움을 구해준 공이 있고, 일찍이 조금의 땅도 침탈하지 않았는데, 어찌 후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할 정도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개선됐으며, 위구르 제국 역시 제국이 부를 획득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서역 경영의 라이벌인 토번이 당을 공격할 기미를 보이자 당에게 군사지원을 약속하고 실제로 움직였을 정도였다.
이런 당과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토번과 충돌하던 당이 최종적으로 서역 경영을 포기하던 8세기 말 ~ 9세기 초엽 무렵[19] 위구르 제국은 이전까지 당이 운용하고 있던 서역 영토를 인수하며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토번을 견제한 당이 토번이 장악한 영토를 피해 협력관계에 있는 위구르 제국이 장악한 영토만을 이용해 서역 교역에 나서려는 시도를 하자 최대의 번영기를 누리게 된다. 당나라와의 친선관계를 통해 얻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주변 세력들을 포섭한 위구르 제국은 결국 짧으나마 지긋지긋할 정도로 충돌하던 키르기스족마저 완전히 제압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토번에게 군사적으로 패하기도 하나, 당과의 협력관계를 통해 확보한 교역루트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을 바탕으로 더한 번영을 누린다. 결국 당과의 협력정책은 라이벌 토번을 고립시키고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된 신의 한 수였던 것.
단, 이렇게 보면 위구르와 당나라가 굉장히 화기애애한 분위로 보일 수도 있어 조금 첨부하자면, 이 중간중간 두 나라 사이의 마찰은 결코 적지 않았다. 당에서 유입되는 물자의 중요도가 워낙 높았기에 대놓고 위협을 가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가한의 성향에 따라 위구르 제국은 토번과 싸우는 짬짬이 진격로를 당나라에게 위협이 되는 방향으로 잡는다든가 토번과 당나라가 뭐빠지게 격돌하는 동안 비어있는 당나라령 서역 영토 일부를 집어삼킨다든가 하는 일을 벌였다. 그럼 당나라는 곧장 엿이나 먹으라는 식으로 위구르 제국으로 들어가는 물자공급을 끊어버리거나 도움 요청을 무시하는 일들이 상당히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상대의 무력과 경제력을 반드시 필요로 하던 양 국가 모두 나라가 기우뚱 거리는 아찔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듯 820년대 말 ~ 830년대 초엽 소례 가한 시기 위구르 제국의 세력은 절정에 달하나, 그 뒤를 이은 창신 가한이 839년 내부 권력 투쟁 끝에 사망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상층부의 내분으로 크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역병(탄저병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이 번져 가축들이 몰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위구르 제국의 역량은 크게 저하됐고, 이런 국면 속에서 840년 내부 권력 다툼에서 밀린 셍귄 퀼뤽 바가가 남시베리아 예니세이 강에 자리를 잡고 있는 키르기스족에게 도움을 요청한다.[20] 셍귄 퀼뤽 바가의 구원 요청을 받은 키르기스족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짓누르기 위해 노력하던 위구르 제국을 결정적으로 붕괴시킬 기회가 왔음을 깨닫고 무려 10만의 대병력을 동원해 위구르 제국의 수도 카라 발가순을 철저히 파괴했다. 어떻게든 후퇴한 하서 위구르, 천산 위구르, 카라한 칸국 등의 군소세력들이 이후에도 계속 존재하긴 했으나 제국으로서의 위구르는 이 일을 기점으로 멸망. 군소세력들 또한 이런저런 세력에 치이며 흡수당하거나 신장으로 향했던 세력처럼 아예 현지화해버려 별다른 두각을 보이진 못한다.
위구르제국을 무너트린 키르기스족도 유목 제국의 계보를 잇는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고, 이후 공백시기에 많은 유민들이 중국, 중앙아시아 등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본래 중앙아시아 일대는 이란소그드인 등 여러 민족이 살던 땅이었으나 현대에는 타지키스탄을 제외하면 거의 튀르크계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때 유민들의 대대적인 중앙아시아 이주와 정착이 장기적 관점에서 중앙아시아 전체의 튀르크화의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3. 문화


이전에 몽골 고원 일대에서 비슷한 강역을 차지했던 유목제국 흉노돌궐과 달리 위구르 제국은 거대한 성곽도시를 건설했다. 이는 중국이나 중앙아시아와 오랫동안 접촉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의 몽골 볼간 아이막에는 2대 카를륵 카간 시대에 건설한 성곽도시의 유적이 남아있다. 한 변 240미터의 정사각형에 높이 7미터 규모. 3대 뵈귀 카간은 수도 카라발가순을 건설했는데 높이 8.5미터에 둘레 1,600미터의 장대한 성벽이 남아있다.[21]
위구르 제국은 돌궐 제국과 같은 돌궐 문자(동양의 룬 문자라고도 한다)를 사용했으며, 이는 현재 몽골 초원에 남아 있는 비문들과 명문들에서 확인된다. 대표적인 비문으로는 <시네 우수 비문>[22], <타리아트 비문>, <카라발가순 비문>[23] 등이 있는데, 대부분 마모가 심해 해독이 어려운 편이고 그 수도 적어 위구르 제국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24]

4. 역대 카간


대수
카간의 호칭
이름
재위기간
1대
쿠틀룩 빌게 퀼 카간
회인가한(懷仁可汗)
쿠틀룩 보일라(Qutlugh boyla)
골력배라(骨力裵羅)
742
~ 747
2대
카를륵 카간
갈륵가한(葛勒可汗)
바얀 초르(Bayan chor)
마연철(摩延啜)
747
~ 759
3대
뵈귀 카간
모우가한(牟羽可汗)
이르킨 뵈귀(Irkin bögü)
사근모우(俟斤牟羽)
759
~ 780
4대
알프 쿠틀룩 빌게 카간
무의성공가한(武義成功可汗)
장수천친가한(長壽天親可汗)
톤바가 타르칸(Ton bagha tarqan)
돈막하달간(頓莫賀達干)
780
~ 789
5대
텡그리데 볼미쉬 퀼뤽 빌게 카간
충정가한(忠貞可汗)
탈라스(Talas)
다라사(多邏斯)
789
~ 790
6대
□□카간
(□□可汗)
?
790. 3 ~ 4
7대
쿠틀룩 빌게 카간
봉성가한(奉誠可汗)
아 초르(A chor)
아철(阿啜)
790
~ 795
8대
텡그리데 울룩 볼미쉬 알프 퀼뤽 빌게 카간
회신가한(懷信可汗)
쿠틀룩(Qutlugh)
골돌록(骨咄祿)
795
~ 805
9대
텡그리데 알프 퀼뤽 빌게 카간
퀼뤽 빌게(Külüg bilge)
805
~ 808
10대
텡그리데 쿠트 볼미쉬 알프 빌게 카간
?
808
~ 821
11대
텡그리데 울룩 볼미쉬 알프 퀴췰뤽 빌게 카간
?
821
~ 824
12대
아이 텡그리데 쿠트 볼미쉬 알프 빌게 카간
소례가한(昭禮可汗)
카사르 테긴(Qasar tegin)
824
~ 833
13대
아이 텡그리데 쿠트 볼미쉬 알프 퀴췰뤽 빌게 카간
퀼테긴(Kül tegin]
833
~ 839
14대
?
카사르 테긴 (Qasar tegin)
합삽특근(廅馺特勤)
839
~ 840

5. 제국의 멸망 이후


여담으로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고, 키르기스족이 이들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데 실패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로 돌아가버리면서 북방의 초원지대는 권력의 공백지대로 남게되고,[25] 이 공백상태를 틈타 초원지대에 자리를 잡아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유목민족 세력이 바로 거란의 요나라이다.[26]
13세기 칭기즈 칸몽골 제국이 흥기하자 유능한 상인세력으로 변해있던 위구르족들은 자진 투항하여 몽골 제국을 이끄는 브레인 역할을 한다.
원래 위구르족들은 불교마니교를 믿었으나, 13세기 이후 서서히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지금 신강성에 사는 위구르족들은 거의 모두가 무슬림이다.
유목민족이긴 하지만,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고 이후에도 세력을 크게 넓히지 못해서 국내에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하다못해 위구르족에 관한 개설서도 채 4권도 안 될 정도로 안습. [27] 그나마 국내에서는 세계적인 고대투르크사 권위자인 정재훈 교수가 '위구르 유목제국사(744~ 840)' 이라는 이름으로 단행본을 내긴 했다.
여말선초 시기 문신으로 활동했던 설장수가 위구르족 출신 귀화인의 후손이라고 한다.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구성회흘(九姓回紇). 후에 구성회골(九姓回鶻)로 국호를 바꾼다.[2] 원 발음은 '토쿠즈 '''우이구르''''에 가까우나 보통 관용적으로 쓰이는 ''''위구르''''로 쓴다.[3] 전성기의 영토이다.[4] Ordu Balɨq. 카간의 아장(牙帳) 또는 금장(金帳)이 있는 성채라는 뜻이다. 카라발가순(Qara Balgasun)이라는 이칭으로 더 유명하다.[5] Yağlakar. 약라갈(藥羅葛)로 음사.[6] Ediz. 협질(硤跌)로 음사.[7] 코초 위구르하서 위구르로 나뉘기 이전의 위구르족.[8] 위구르 자신들은 Toquz Uyğur로 불렀던 모양. 국호가 한문사서에 '구성회흘'로 나온다.[9] 송골매와 같이 빠른 사람들[10] 정재훈 박사는 그의 저서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에서 이 역병을 탄저병으로 추측, 위구르 제국 멸망 이후 키르기스가 북방 고원으로 회귀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구르 유민들이 몽골 초원으로 귀환하지 않았으며, 몽골족의 남하 이전까지 몽골 초원이 공동화된 이유가 이것이었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11] 몽골어로 검은 성.[12] 의미는 궁전의 성.[13] 이 때문에 위구르는 자신들의 전통(퇴뤼, törü)의 유구함을 특히나 강조해야 했는데, 이는 <시네 우수 비문>의 '''1,000개의 '일'(il 또는 el, '국가'를 의미)과 300년 된 '일'을 잡았다'''는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돌궐 제국 200년을 능가하는 연대를 내세움으로써 '''위구르 제국의 성립은 국가의 건국이라기보다 재건의 성격을 띤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사실 이전 튀르크계 고차 왕국의 인물 중 위구르의 시초일 것으로 추정되는 원흘씨(袁紇氏) 출신의 인물이 확인되긴 한다). 또한 위구르는 하필이면 '''몽골 제국 성립 이전까지 사상 최대의 판도를 이룬 돌궐 제국을 이은 국가'''였기 때문에 그 영광을 극복할 필요도 있었다. 위 비문의 서두에서는 욜룩 카간(Yolluğ Qağan)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카간 및 부민 카간을 자신들의 시조로 꼽고 있는데, 부민 카간은 돌궐 제국의 비문에서 그들의 시조로 비정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돌궐 카간과 더불어 자신들 고유의 전설상의 카간을 함께 시조로 내세워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14] 이 일을 직접 목격한 옹왕은 나중에 황제가 되어서, 위구르를 극렬히 증오하여 그들과의 동맹 맺기를 거부하다가 재상의 간절한 조언으로 겨우 위구르와 동맹을 맺었다.[15] 남중국까지 완전히 합병한 유목 제국은 훗날의 몽골 제국이 최초다.[16] 다만 위구르 제국 내부의 도시들은 마니교의 영향이라기보단, 동서 교역의 거점인 카라반사라이의 성격이 더 강했다.[17] 실제로 당시 위구르족은 계속 공격 vs 공격해 봐야 지금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로 나뉘었다.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 이긴 쪽은 후자였고, 이후 전개 자체도 후자가 옳았음이 증명된다.[18] 아예 위구르 제국의 적인 당이나 토번으로 귀순하는 세력들마저 나왔다.[19] 790년 제8대 카간인 '''텡그리데 볼미쉬 퀼뤽 빌게 카간'''(Tengride bolmïsh külüg bilge qaghan, 한문 사서에서는 회신가한(懷信可汗)이라 한다)이 즉위함에 따라 '''지배 씨족이 야글라카르(藥羅葛, Yağlakar)에서 에디즈(硤跌, Ediz)로 바뀌게 된다.''' 과거 유목제국은 카간 1인의 역량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었는데, 따라서 왕위 분쟁이나 지배 씨족이 바뀌는 경우 국가가 아예 와해되거나 재기불능의 치명타를 맞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위구르가 멸망하지 않고 오히려 이후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 것은 회신 카간이 '''야글라카르 씨족의 자제들을 전부 당으로 보내 버리는 등''' 뒤처리를 적절하게 잘 했고, 당의 이이제이적인 견제 및 여타 부락의 이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신 가한은 계속 야글라카르 씨족을 모칭했고, 이후의 비문 기록에 와서야 그의 즉위로 인한 씨족 교체가 중요하게 다뤄진다.[20] 사실 위 지도에 표시된 위구르 제국의 영역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위 지도는 어디까지나 '최대 강역'이고, 키르기스족은 아주 짧은 기간 복속당한 것을 제외하곤 계속해서 위구르 제국과 충돌하는 관계였다. 따라서 위구르 제국의 지도자들은 키르기스족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한 원정을 반복했다.[21] 바로 인근에 돌궐 제2제국 시기의 빌게 카간 및 퀼 테긴의 비문이 남아 있고, 카라코룸으로부터도 그리 멀지 않은 오르콘 강가에 위치한다. 카라발가순 성채는 키르기스의 침공으로 완전히 무너졌는데, 이는 인근에서 발견된 당 시대의 와당에 심하게 불탄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후대에 이 성채가 재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2] 이 비문은 특히 다른 비문들에 비해 온전하게 해독할 수 있는 내용이 많다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된다.[23] <구성회골가한비문>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 면은 전체가 투르크 문자로, 반대 면은 반을 나누어 한문과 소그드 문자가 나란히 적혀 있는데, 투르크 문자 면은 심하게 파손되어 해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세 문화권의 문자가 동시에 새겨져 있는 비문은 이 비문이 유일하다.[24] 물론 <신당서>나 <자치통감>과 같은 한문 사료도 있지만, 중국식 서술 특유의 모호함과 과장법 및 상투적인 표현, 음차 표기의 부정확성 등으로 완전한 역사를 복원해내기는 어렵다.[25] 당시 기승을 부렸던 역병이 주 원인으로 꼽힌다.[26] 요나라를 건국한 야율아보기가 동쪽으로는 요동을 장악한 뒤 그곳을 넘어 발해까지 멸망시켰고 서쪽으로는 현재의 내몽골 지역을 넘어 위구르와 탕구트의 영역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위구르족의 일부는 이들에게 조공을 바치기도.[27] 하기야 4권 정도면 많은 셈이다. 다른 유목민족이나 동북아 삼국을 제외한 개설서가 그리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