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세노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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Ξενοφάνης
생몰년: 기원전 560년 또는 570년으로 추정 ~ 기원전 470년 또는 480년으로 추정
1. 개요
2. 상세
3. 기타


1. 개요


고대 그리스의 방랑시인이자 철학자, 종교 사상가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에 영향을 끼쳤다. 파르메니데스의 스승이라고도 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에 그렇게 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주장한다.

2. 상세


소아시아 서쪽 해안의 이오니아 지방 콜로폰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방랑시인, 철학 사상가로 거리를 떠돌다 이탈리아 남부에 엘레아에 정착하였다. 그가 이렇게 고향을 떠난 것은 혓바닥 놀림이 신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콜로폰이 페르시아에게 점령되자, 혹은 점령되려는 찰나에도 콜로폰 지배계급이 사치하고 으스대는 꼬락서니를 혓바닥으로 극딜하고 고향을 떠났다. 그 후 전해지는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리스 전역을 유랑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증언에 따르면 현재 터키 서부 해안인 이오니아 지역은 물론 그리스 본토, 이탈리아 곳곳을 유랑해 봤을 듯하다. 아프리카와 불가리아 지방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을 보면 이 지역도 여행했던 듯하다. 또, 시라쿠사, 몰타 섬, 키클라데스 제도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등 에게 해와 시칠리아 인근에도 여행했던 듯하다. 아마 풍물에 밝았을 것이다.
크세노파네스는 올림픽의 승자보다 사람들이 지키는 법을 만드는 지혜를 강하게 설파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올림픽에서 강펀치를 날리건 말을 잘 타건 다리가 빠른 걸 보여주건 국가의 법질서를 지키는 데 하등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법질서가 잘 지켜져야 국가의 창고가 부유해진다. 이를 통해 국가의 법질서와 재정에 관한 의식을 엿볼 수 있다.[1] 부유한 상류층을 욕했던 것을 보면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폴리스라는 공동체와 법을 통한 운영의 중요성, 혹은 집단적인 윤리의식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듯하다.
그리스 신들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대표격으로 욕했는데, 신이라는 것들이 그 따위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다. 역시 고대 본토인들이 보기에도 그리스 신들의 짓거리가 병신같긴 했었던 거 같다. 이와 더불어 지역과 부족이 달라지면, 신의 개념도 달라지는 것을 근거로 인간형 신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주장했다. 만약 소나 말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그들이 가진 신의 모습은 소나 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신은 인간과는 다른 어떤 것이며, 또한 움직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것이며, 어디에서 있다가 이동해서 다시 어딘가로 나타나는 것도 말도 안 되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물리력이 아니라 정신을 사용하는, 단 하나의 존재라고 주장했다. '''즉 크세노파네스에게는 일신교적 견해를 시사하는 듯한 약간의 단편들이 있었던 것같이 인정된다.'''
그러나 이 단편들은 다른 단편들과 서로 어긋나는 점이 있으며 애매하기 그지없다. 이 애매한 단편들이 진정으로 크세노파네스의 것이라면, 그리고 정당하게 신이라고 불리워질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주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추측은 역사적으로 아주 불확실한 것이므로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크세노파네스가 통속적인 종교적 신념을 부도덕하고 터무니없는 것이라 하여 공격한 것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외에도 인식의 상대성이나, 진리와 의견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한 것이 전해지고 있다. 태양이 신이 아니라 불덩어리라는 등[2] 이런 저런 지역들을 돌아봤는데 해초 찌꺼기나 조개꼭대기가 있을 수가 없는 장소에서 발견되는 걸로 볼 때 육지나 바다는 서로 변화하는 것이라는 등 자연철학적인 얘기도 좀 했던 듯하다.

3. 기타


옛날에는 별 취급을 못 받았으나 현대에 들어와서 후배 철학자들이나 엘레아 학파에 끼친 영향이 좀 더 널리 인정받고 있다. 허나 현대에도 그가 과연 철학자로 분류해야 하는지 음유시인으로 분류해야 하는지는 논쟁거리이다.
생몰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고대인에 유랑시인 치고는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오래 살았던 데다가 25살부터 고향을 떠나 전 그리스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3] 인격신을 매미가 탈피하고 남은 껍데기 취급하거나 신의 개념이 각지에 따라 다르다는 증언 등은 후대 소피스트들이 본질과 관습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개념을 상대적으로 취급하는 일면과 더불어 폴리스의 재정과 법질서를 강조하는 크세노파네스의 일면은, 후대 소피스트들이 입법활동을 함에 있어서 법이 신으로부터 받은 신령하고 존엄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연결지어 생각해 보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1] 후대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성이나 지혜야말로 인간의 가장 고유한 특성이자 가장 위대한 특성이기 때문에 가장 위대하다는 말을 하는 것에 비해 상당히 담백하고 현실정치에 기울어져 있다. 프로 입털기꾼인 제논을 제외하면 장군, 입법가들이 있었던 이탈리아 엘레아 학파의 특성인 것 같다.[2] 후대의 자연철학자는 이 소리 했다가 사형선고당했다.[3] 젊은 엠페도클레스가 키배를 걸어오자 털어버렸다고 한다.